소설리스트

31화 (3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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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흘 뒤, 아리아드네 일행은 엘바로 떠나기 위해 성 상티모니아의 서쪽 항구에 정박한 배로 향했다. 아리아드네 일행은 교황 아그네스가 직접 배웅하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랭스턴 공작이 엘바에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이 모두가 교황 성하의 덕입니다.”

    아리아드네는 의례적인 미소로 화답했다. 아리아드네의 덤덤한 대답에 아그네스가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나중에는 내 탓이라고 하게 될는지도 모르죠.”

    아그네스의 새빨간 눈동자는 잘 익은 석류 알 같았다.

    “엘바는 성 상티모니아의 자치령이되, 교황이 아닌 랭스턴 공작을 주인으로 여기는 땅입니다. 워낙에 폐쇄적인 땅이라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도 모르죠. 그건…….”

    가까이 다가온 아그네스가 속삭이듯 말했다.

    “공녀께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공녀를 도울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입니다.”

    아그네스의 말은 아리아드네를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일이 생기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절 보내시는 거 아닌가요? 그곳에 성하의 은총이 닿지 않는 것을 가엽게 여기시어.”

    성 상티모니아 권력의 정점은 교황이지만, 교황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지는 못했다.

    성 상티모니아 최고 의결 기구인 멘술라는 교황, 랭스턴 공작, 20인의 추기경, 이렇게 세 축으로 운영된다.

    랭스턴 공작은 멘술라의 세 축 중 하나인 동시에 성 상티모니아의 자치령인 랭스턴 공국을 다스리는 이였다.

    랭스턴 공작은 명실상부한 성 상티모니아의 이인자였다. 가끔은 허울뿐인 교황을 랭스턴에서 좌지우지하여 실질적인 일인자로 군림한 적도 적지 않았다.

    선대 교황과 랭스턴의 적녀 사이에서 태어난 랭스턴 공작. 선대 교황의 사생아이나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수습 사제에게서 태어난 역대 가장 강력한 교황.

    아리아드네가 직접 목격한 둘의 갈등은 제법 깊어 보였다.

    랭스턴에게는 천한 태에서 태어나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교황이, 아그네스에게는 성 상티모니아의 정점에 위치한 자신을 위협하는 오래된 분란이, 손톱 밑의 가시 같았을 거다.

    아그네스와 시몬은 서로가 서로의 가장 든든한 우군인 동시에 반드시 거꾸러트려야 할 적이었다.

    그렇다면 그 시작은 어디일까?

    대대로 랭스턴을 주인으로 받드는, 교황도 침범할 수 없는 랭스턴의 땅 엘바.

    아그네스가 아리아드네를 엘바에 보내려 한 이유는 간단했다. 엘바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그네스도 궁금했던 거다. 눈엣가시 같은 시몬을 실각시킬 결정적인 이유가 될지도 모를 엘바의 실종 사고가.

    “그대가 내 대리인도 아닐진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가면 같은 웃음을 지은 아그네스가 붉은 입술을 열어 속삭였다.

    “부디 바라는 바를 이루시길. 작은 충고를 하나 하자면…….”

    아그네스의 저 말은 진심이겠지. 아리아드네가 엘바에서 벌어진 실종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다면 가장 큰 수혜자는 아그네스가 될 테니까.

    성 상티모니아의 승리자가 아그네스가 되든, 시몬이 되든 아리아드네로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누구든 메르디에스의 사람들을, 알버트를 죽이려 한 사람의 반대편에 메르디에스가 서게 될 테니까.

    뱃고동 소리가 길게 한 번 울렸다. 출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였다. 배에 오르려는 아리아드네를 잡아끄는 손길이 있었다.

    “저, 아리아드네…….”

    줄곧 머뭇거리던 베아트리스였다.

    “이것 봐. 내가 서둘러야 한다고, 아니면 후회할 거라고 그랬잖아.”

    “그러니까 말이야.”

    아리아드네의 농담에 베아트리스가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있잖아.”

    마침내 결심을 마친 듯 크게 숨을 내쉰 베아트리스가 입을 열었다.

    “진짜 가족은 상대의 행복을 빌어 주는 거래.”

    ‘가족? 갑자기 가족은 왜?’

    아리아드네의 어리둥절한 반응은 안중에도 없이 베아트리스는 아련한 얼굴로 배에 오르는 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나 유진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렇다면 괜찮아.”

    ‘괜찮다니 다행인데…….’

    아리아드네가 무엇을 묻기도 전에 베아트리스는 재빨리 자신이 할 말만 쏟아 냈다.

    “아리아드네라면 괜찮아. 유진이 아리아드네와 있어야 행복하다면 나 보내 줄 수 있어. 나는 유진이 행복하기를 바라니까.”

    양손으로 아리아드네의 손을 꼭 붙든 베아트리스가 간절한 얼굴로 말했다.

    “유진을 부탁해!”

    이해할 수 없는 당부를 마친 베아트리스가 부끄러운 듯 멀리 도망가 버렸다.

    “잘 다녀와. 기다릴게.”

    성큼 멀어진 베아트리스가 활짝 웃으며 양손을 흔들었다. 아리아드네는 베아트리스의 온기가 남은 제 손을 내려다보며 그녀가 남기고 간 말을 떠올렸다.

    ―유진이 아리아드네와 있어야 행복하다면 나 보내 줄 수 있어.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하지만 대답해 줄 사람은 이미 점처럼 멀어진 후였다.

    * * *

    끈적끈적한 점액질이 온몸에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남자는 죽은 마물의 사체에서 쏟아진 피와 오물을 자신의 몸에 발랐다.

    오물은 수백 년 동안 고인 물이 썩은 늪 바닥처럼 역한 냄새를 풍겼다. 하지만 역한 냄새 따위야 살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남자는 계속 몸에 오물을 치덕치덕 묻히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마물 사체를 뒤집어쓴 채로 숨을 죽였다.

    저벅저벅, 무언가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남자의 심장이 미친 듯이 두방망이질을 해 댔다.

    바로 근처까지 다가온 발소리가 멎었다. 남자는 두 눈을 꼭 감고는 그것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영원과도 같은 순간이 지나고, 다시 저벅저벅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웬만큼 멀어지자 남자는 감은 눈을 떴다.

    투명한 막에 싸인 눈동자가 바로 앞에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는 크게 한 번 희번덕거리며 움직이다 마치 웃는 것처럼 옆으로 가늘어졌다.

    저벅저벅, 괴물이 제자리에서 두 다리를 크게 움직이다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소리를 죽였다.

    공포에 질린 남자의 눈동자에 히죽대는 괴물의 얼굴이 비쳤다.

    * * *

    “그러니까 성 상티모니아 내부 알력 싸움 덕에 우리가 엘바를 볼 수 있게 됐다, 그거군요.”

    이번 조사단의 수장을 맡은 카터가 아리아드네의 이야기를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정화한 성물을 성소에 안치한다는 명목이 있어도 우리로선 엘바에 진입하는 것이 고작이었겠지. 교황이 도와준 덕에 엘바를 조사하는 게 가능해졌어.”

    아리아드네는 정화한 성물을 지킨다는 구실로 따라붙은 교황의 성기사단을 보며 말했다. 성기사단은 아마도 교황이 보낸 눈일 터, 랭스턴 공작은 메르디에스와 교황을 한꺼번에 상대해야 했다.

    “엘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으니…….”

    아리아드네가 점점 가까워지는 엘바를 바라보며 말했다.

    “메르디에스와의 교역은 엘바로서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수입원인데, 정말 저들이 꾸민 일일까요?”

    과거에도 비슷한 결론에 이르렀다. 실종 사건은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고, 증거가 없으니 엘바의 사고에 랭스턴의 책임을 물을 수도 없었다.

    랭스턴은 자신의 땅에서 일어난 불의의 사고에 책임을 통감한다며 위로금을 보내온 것이 고작이었다. 메르디에스는 1년 후 엘바와의 교역을 재개했다.

    ‘그럴 순 없지.’

    사라진 사람들의 행방도, 알버트의 실종에 얽힌 비밀도, 과거의 캐롤린이 아리아드네를 배신한 이유도,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다.

    여기서 막아 내지 못한다면 또다시 그 끔찍한 시간들이 되풀이될지도 모른다.

    “교황은 내가 엘바에서 무언가를 해 주기를 바라고 있어. 우리보다 정보가 많을 교황이 그렇게 나올 땐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아리아드네가 카터를 돌아보며 추가로 뭘 물으려던 찰나, 그가 그녀의 뒤쪽을 고갯짓하며 슬금슬금 멀어졌다.

    “저, 저는 이만…….”

    꽤 오래 기다린 듯 지겨운 얼굴을 하고 있던 유진이 저벅저벅 소리를 내며 가까워졌다. 한껏 찌푸린 얼굴이 아리아드네를 내려다보았다.

    “아, 안녕?”

    아리아드네는 냉큼 인사만 하고 도망가려 했지만 떡하니 버티고 선 유진이 앞을 가로막았다.

    “아, 몹시도 오랜만인데 그래.”

    “그럴 리가. 우리가 배에 탄 지 고작 이틀째인걸. 곧 내릴 거고.”

    “그러니까 그 이틀 동안 이 좁은 배 안에서 머리카락 한 올도 볼 수 없었던 게 우연이란 말인가?”

    유진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물론 우연은 아니었다. 아리아드네가 피나는 노력을 한 결과였다.

    ―아리아드네가 가지 말라고 했으면 안 갔을 거면서…….

    ―유진이 아리아드네와 있어야 행복하다면 나 보내 줄 수 있어.

    ‘그러니까 베아트리스는 왜 그런 말을 해서는…….’

    아리아드네는 베아트리스가 한 말이 신경 쓰여서 유진을 똑바로 보기가 어려웠다. 생전 하지도 않던 멀미를 하는 것처럼 속이 불편했다.

    멀리서 유진의 머리카락만 보여도 피하기를 이틀째, 엘바에 도착하는 것을 불과 한 시간을 남겨 두고 잡히고 말았다.

    “왜 갑자기 사람을 역병 취급해?”

    아리아드네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불퉁한 불만이 쏟아졌다.

    “쓸모가 남았다고 할 땐 언제고. 갑자기 파혼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라도 생겼어?”

    역병 취급이니 쓸모가 다했니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유진을 대하는 제 태도가 엉망이었나 싶다가도, 고작 이틀 동안 뭐 그리 많은 불만이 쌓였나 싶어서 웃음이 터질 것처럼 코끝이 간질거렸다.

    ‘여기서 웃으면 정말 안 될 것 같은데…….’

    아리아드네는 말아 쥔 주먹으로 입가를 가린 채 헛기침을 해 간신히 웃음을 삼켰다.

    “아니, 당신은 역병이 아니고 나 파혼도 해야 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말에는 웃음기가 묻어났다. 대체 뭐가 웃기냐는 듯 유진의 한쪽 눈썹이 치켜들렸다.

    “당신은 계속해서 무사히 살아 줘야 해.”

    파혼의 중재자니, 쓸모니 하는 그런 것들 때문이 아니었다. 유진 덕에 얻은 삶이어서도 아니었다. 과거에는 몰랐던 그의 새로운 모습을 알아 가는 것이 좋았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것이 꿈이나 제 망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다시 얻은 삶 따위 가능할 리가 없다고.

    그런데 유진을 보면 정말 살아 있다는 실감이 났다. 이렇게 불평하는 그는 제 상상만으로는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모습이니까.

    유진은 그 자체로 아리아드네가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그런데 대접을 이렇게 해?”

    여전히 삐딱한 채로 유진이 불평했다.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아리아드네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얀 포말이 부서지는 새파란 바다 위로 웃음소리가 퍼져갔다. 바다 빛과 닮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그러니까 내가 그러면 안 되잖아. 내가 왜 그랬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황당해하는 유진의 얼굴에 아리아드네는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어이가 없다는 듯이 지켜보던 그도 헛웃음을 흘렸다.

    새파란 하늘에서는 햇볕이 쏟아져 내렸다. 가리는 것 없이 선상 위로 쏟아지는 햇볕이 귀찮은 듯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집요하네, 정말.”

    “당신만 할까.”

    맹렬하게 쏟아지는 햇볕이 마치 조금 전 끝없이 불만을 토로하던 유진 같았다.

    어렸을 때 그런 적이 있었다. 해에게서 도망쳐 보겠노라며 달렸지만, 아무리 달려도 해를 따돌릴 수는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문득 그때가 떠올랐다.

    이 좁은 배 안에서 유진을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가. 이만큼 자라고도 자신은 어렸을 때와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그래도 하는 데까진 해 봐야지.”

    “뭘 해?”

    “해에게서 좀 숨어 볼까 하고.”

    “……그러든가.”

    아리아드네가 자신만 피해 다니지 않으면 다른 것이야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였다. 어깨를 으쓱한 그가 선실로 되돌아가려는 듯 몸을 돌렸다가 넘어질 듯이 기우뚱했다.

    또다시 멀미가 도진 모양이었다. 그가 바다 위에 적응하기란 아직은 요원한 일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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