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148)

* * *

성 상티모니아 살리바 대신전의 부속 건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교황의 거처도, 성물 카푸트가 보관된 황금의 방도 아닌,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인 종탑이었다.

살리바 대신전의 종탑은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목적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종탑의 명칭은 ‘놀라(nŏla)’.

‘작은 종’이라는 뜻을 가진 고어로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은 신께 올리는 겸손한 소리이기 때문이라 했다.

종탑은 일출과 일몰, 하루에 두 번 종을 치기 위해 오르는 종지기를 제외하면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된 곳이었다.

‘높긴 높네.’

아리아드네는 머리 위에 걸린 종을 힐끗 바라보았다가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지금 아리아드네와 그 일행이 자리한 곳은 종이 걸린 종탑 꼭대기 바로 아래에 있는 사방이 트인 널찍한 공간이었다.

“어떻게 풍경은 볼만한가요?”

성 상티모니아의 교황, 아그네스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 주겠다는 그녀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종탑에서는 성도 살리바가 한눈에 내려다보일 뿐만 아니라 저 멀리 푸른 바다와 한여름에도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디움 산맥까지 모두 볼 수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주위 풍경을 다시 한번 둘러보고는 감탄한 어조로 말했다.

“살리바에서 이만한 호사를 누릴 줄은 몰랐습니다.”

“현존하는 성 중 가장 오래되었다는 메르디에스의 본성만 할까요?”

“언제고 교황 성하께서 방문해 주신다면 한량없이 기쁠 텐데요.”

아리아드네와 아그네스는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주고받았다.

“날씨가 좋으면 이곳에서 랭스턴 공국령인 엘바가 선명하게 보이기도 하지요. 공녀께서도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요.”

아그네스가 저 멀리 보이는 바다를 응시하며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것참 아쉽군요. 다행히도 며칠 뒤면 엘바에 가니 그때 그곳을 둘러볼 수 있다면 이 아쉬움도 덜어지지 않을까 합니다만.”

소리를 내어 작게 웃은 아그네스가 그녀의 이복동생에게 물었다.

“메르디에스 공녀께서 엘바를 둘러보고 싶다 하니……. 공작, 마땅히 대접함이 옳지 않겠소?”

아그네스 뒤쪽에 앉아 있던 랭스턴 공작 시몬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복하며 말했다.

“그 뜻에 따르고 싶으나, 엘바의 대접이 소홀하여 교황 성하께 누가 되지는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과장된 몸짓과 달리 남자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가벼웠다.

선대 교황인 테오도로와 랭스턴 공작가의 적녀 루이제 사이에서 태어난 랭스턴 공작, 시몬 랭스턴은 곱슬거리는 금색 고수머리에 에메랄드빛의 녹안을 지닌 미남자였다.

테오도로가 어린 시몬을 작은 천사라 부르며 귀애한 것은 몹시 유명한 일화였다.

“엘바에 초청해 주는 것만으로도 큰 광영일진대 그 누가 랭스턴의 대접에 소홀함을 논하겠습니까?”

아리아드네가 대접 운운할 생각은 말라는 듯 시몬의 변명을 싹둑 잘라 냈다. 시몬은 난감한 표정으로 아그네스를 바라보았다.

폐쇄적인 엘바는 대대로 랭스턴이 다스려 온 땅이었다. 교황조차도 랭스턴 공작의 협조 없이는 엘바에 무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한시라도 빨리 엘바를 수색하고 싶었지만 조급하게 굴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랭스턴 공작, 공녀께서는 성녀의 뜻에 따라 귀한 성물을 자네 땅에 안치하려는 귀인이 아닌가. 성녀의 의지는 성 상티모니아의 의지, 나를 염려하는 공작의 마음을 알겠으나 이 또한 신의 뜻이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아그네스가 느릿하게 말을 끌었다. 내용은 퍽 자애로웠으나 말을 하는 어조와 표정은 조금도 그렇지 않았다.

제 앞에 부복한 시몬을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는 겨울바람처럼 차가웠고,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지루한 책이라도 읽는 것처럼 무심했다.

숙였던 몸을 세운 시몬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랭스턴이 성 상티모니아의 뜻을 따르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까.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시종의 도움을 받아 옷을 정리한 시몬이 자리를 떠나기 전 아리아드네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엘바의 환영이 마음에 들기를 바랍니다, 공녀.”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한쪽 눈을 찡긋한 시몬은 유쾌한 듯 웃음을 터트리며 종탑에서 사라졌다.

시몬이 사라진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아그네스가 시선을 돌려 아리아드네를 쳐다보며 말했다.

“공녀께서 엘바에서 원하는 것을 찾으시길 나 또한 바라고 있답니다.”

“성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이미 다 이룬 기분입니다.”

교황은 자신을 엘바에 보내고 싶은 듯했고, 랭스턴 공작은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둘 사이의 오래된 갈등이 ‘외지인의 엘바 방문’이라는 핑계를 심지 삼아 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권력을 손아귀에 쥐기 위해서 서로의 손을 잡았다지만 언제까지고 그 손을 붙들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엘바는 나도 두세 번 가 본 게 고작이야.”

베아트리스가 손가락을 하나둘 꼽아 보더니 기대된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 그래? 이번에 가면―”

“베아트리스, 장난은 이제 그만하면 되지 않았니?”

아그네스가 싸늘한 어조로 뒷말을 싹둑 잘라 냈다. 아무래도 베아트리스가 성 바론의 축일 날, 아리아드네와 함께 살리바 대신전을 빠져나갔던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저, 저도 갈래요. 어머니, 저도 가고 싶어요. 제가 간다면 시몬도 좋아할―”

“베아트리스, 정체불명의 마물에 의해 사람이 실종되는 그런 곳에 널 보내란 말이냐?”

“하지만 유진이 있는데…….”

베아트리스가 자신을 도와 달라는 듯 간절한 얼굴로 유진을 바라보았다.

“방문자시여, 베아트리스는 성 상티모니아 유일의 성녀입니다. 엘바에서 베아트리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성 상티모니아가 송두리째 흔들리게 됩니다.”

유진에게 하는 말의 형태를 빌리고 있었지만, 아그네스의 말은 베아트리스를 향한 압박이었다. 베아트리스가 입술을 잘게 씹으며 고개를 숙였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그럼 가지 마. 유진도 가지 마.”

유진이 달래듯 꺼낸 말에 고개를 든 베아트리스가 그의 소맷부리를 꽉 쥐었다.

“그럴 순 없어.”

“왜?”

“…….”

“아리아드네가 가니까?”

난데없는 언급에 놀란 아리아드네가 당황해 베아트리스를 바라보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유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리아드네가 가지 말라고 했으면 안 갔을 거면서…….”

잘근잘근 씹어 엉망이 된 입술에서는 피가 배어 나왔다.

“또 나만 혼자야. 이럴 거면 처음부터 오지 말지.”

베아트리스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메르디에스 공녀가 이해하세요. 베아트리스야 사람들과 어울릴 필요가 없는 아이니.”

가볍게 혀를 찬 아그네스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그네스는 심란한 표정인 유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무엇을 말할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종탑을 내려갔다.

“안 가 봐도 돼?”

겨우 정신을 차린 아리아드네가 입을 열었다. 그 물음에 유진은 아무것도 없는 목이 갑갑한 듯 목 언저리를 거세게 문질렀다.

“……됐어. 어차피 언제고 필요한 일이었어.”

한 줄기 바람이 유진을 훑고 지나갔다. 그가 날리는 머리가 성가신 듯 얼굴을 찌푸렸다.

“베아트리스는……. 그 녀석이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베아트리스가 바라는 대로 살 수는 없어. 나에게는 나를 찾는 일이 더 중요해.”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유진이 덤덤한 얼굴로 바람을 등지고 섰다.

“베아트리스를 생각해도 이게 맞아.”

그의 낮은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언제까지고 혼자만의 낙원에서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를 행복을 뒤집어쓰고 지낼 수는 없잖아.”

덤덤한 척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에서는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곧이어 유진마저 사라진 종탑에 남은 것은 아리아드네 혼자뿐이었다. 아리아드네는 가만히 제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매끈한 약지를 더듬어 보았지만 걸리는 것은 없었다.

* * *

“여기 있었어?”

베아트리스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사제들이 어쩔 줄 모르고 맴도는 풀숲 가운데 황금빛 머리카락이 삐죽 솟아 있었다.

“……아리아드네?”

발갛게 부은 눈가를 문지르며 베아트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나라서 실망했어?”

“……아니, 아무도 안 찾을 줄 알았어.”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떠올린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그네스는 물론이고 유진도 베아트리스의 도 넘은 투정을 받아 줄 것 같진 않았다.

“아리아드네도 이젠 날 싫어할 줄 알았어.”

“…….”

“다들 그래. 날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 내가 성녀가 아니었다면, 나 같은 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을 거야.”

고개를 푹 숙인 베아트리스가 흙바닥을 발로 짓이기며 웅얼거렸다.

“유진은, 아니었는데……. 성녀가 아니어도 상관없다고 한 건 유진뿐이었는데……. 이젠 유진도 내가 싫어졌나 봐. 유진이 자꾸 멀어져. 나도 이런 내가 싫어.”

바닥에 쪼그려 앉은 아리아드네가 베아트리스 발에 묻은 흙을 털어 주며 입을 열었다.

“열여섯에 처음 남자를 사귀었는데 가문이 자신을 억압하는 게 싫다는 자유분방한 사람이었어. 그런가 보다 했는데, 자기 아버지랑 크게 싸우고 가문과 절연했다면서 날 찾아와서는 같이 야반도주하자는 거 있지.”

“……뭐? 그래서 따라갔어?”

깜짝 놀란 베아트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당연히 거절했지. 그런데 내가 거절하니까 자신이 아니라 가문을 사랑한 거냐고 실망이라고 하더라.”

“이상한 사람이네. 상황이 바뀌면 달라지는 게 당연…….”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쉰 베아트리스가 무언가를 깨닫고는 하던 말을 멈추었다.

“맞아. 내가 사귄 사람은 가문까지 포함한 그 남자였으니까. 베아트리스, 네가 가진 힘까지 모두 너야.”

아리아드네의 새파란 눈동자는 그저 오래된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단단했다. 베아트리스는 뭐라 항변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도, 그래도……. 베아트리스는 제 말이 어린아이의 투정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날 봐 주지 않는 건 싫어.”

“그건 그래. 나도 돈 보고 다가오는 남자는 싫거든.”

의외로 아리아드네는 선선히 긍정하며 콧잔등을 살짝 찡그렸다. 베아트리스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런 남자가 있었어? 아리아드네는 그런 일 없을 줄 알았어. 예쁘고, 매력적이니까.”

“셀 수도 없어. 심지어는 그런 남자한테 걸려서 집안 말아먹을 뻔한 적도 있는걸.”

사실은 이미 한 번 말아먹었지만. 아리아드네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말을 속으로 덧붙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자신을 놀란 얼굴로 쳐다보는 베아트리스가 귀여워 아리아드네는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 삼키며 말했다.

“그때는 나도 내가 너무 싫었어.”

마치 말과 감정을 하나하나 배워 나가는 어린애처럼 베아트리스는 모든 게 신기한 얼굴이었다.

“베아트리스, 사랑을 하게 되면 다들 그래. 내가, 내가 아니게 되니까. 내가 싫어져. 그런데도 멈출 수 없는 게 사랑이잖아.”

사랑이 의지대로 되는 것이라면, 사랑 따위에 자신을 저당 잡히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그러니까 스스로를 미워하지 마. 나까지 나를 미워하면 내가 너무 불쌍하잖아.”

그럼에도 다들 사랑을 하며 산다. 심장이 제 뜻과 상관없이 뛰는 것처럼 사랑은 제 의지와는 무관하게 찾아오는 법이다.

“사랑은 잘못이 아니야.”

싱긋 웃는 아리아드네와는 반대로 베아트리스는 풀이 잔뜩 죽은 얼굴이었다.

“아리아드네가 좀 더 나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마음껏 미워했을 텐데…….”

아리아드네의 치맛자락을 꼭 잡은 베아트리스의 손은 갓 태어난 아이처럼 새하얗고 보드라웠다.

“다행이네.”

“…….”

“베아트리스에게 미움받으면 정말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을 거야.”

조금 멍한 얼굴로 아리아드네를 바라보던 베아트리스가 깜짝 놀라며 다급히 말했다.

“……아리아드네는 좋은 사람이야.”

“고마워. 우리 차라도 같이 마실까?”

아리아드네가 베아트리스를 일으키며 물었지만 그녀는 제 발끝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그래. 그런데 나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할 거야. 그것만 알아 둬.”

아리아드네는 굳이 재촉하지 않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정원을 떠났다. 베아트리스는 풀숲 아래로 삐죽 튀어나온 날렵한 구두코를 보며 말했다.

“……그만 나와요.”

“아, 알고 계셨습니까?”

풀잎을 잔뜩 묻히고 나타난 레이먼드가 겸연쩍은 얼굴로 물었다.

종탑에 초대받지 못한 레이먼드는 아리아드네를 기다리며 정원을 서성이다 눈물 바람으로 뛰어든 베아트리스 때문에 풀숲에 숨은 참이었다. 아리아드네가 데리고 사라지나 했더니…….

“실례했습니다.”

정중히 사과한 레이먼드가 부리나케 도망가려던 순간이었다.

“저, 하나만 물어볼게요.”

“무엇을…….”

도망에 성공하지 못한 레이먼드가 고개만 간신히 돌린 어정쩡한 자세로 대답했다.

“아리아드네와는 친남매처럼 자랐다고 했죠?”

“네.”

“그럼 아리아드네가 결혼해서 메르디에스를 떠나기로 했을 때, 레이먼드도 서운했어요? 차라리 결혼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정도로.”

풀숲에 숨어 본의 아니게 대화를 엿들은 레이먼드는 침음을 삼켰다. 복잡한 일에 끼어드는 건 질색이었다.

“흐음…….”

베아트리스의 간절한 얼굴에 지고 만 레이먼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렇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죠. 메르디에스의 모두가 그랬듯이 저도 서운했습니다.”

당사자에게도 말하지 않은 제 심정을 꺼내 놓는 것은 제법 쑥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가 행복하기를 바라니까요. 아리아드네가 바라는 것이라면 마땅히 축복해 줘야죠. 진짜 가족은 그런 거니까요.”

레이먼드의 대답을 들은 베아트리스는 종탑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행복하기를 바라니까. 레이먼드는 제가 한 말을 주문처럼 되뇌는 베아트리스 때문에 해가 질 때까지도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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