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자박자박 발소리가 적막한 어둠 속에서 낮게 울려 퍼졌다. 살리바 대신전에 이르러서야 발걸음 소리는 멈췄다.
“여기서 기다려. 안쪽 좀 살펴보고 올게.”
그 말을 남긴 유진이 훌쩍 담을 넘어 사라졌다.
새까만 하늘을 빼곡하게 채운 채 두둥실 떠다니던 풍등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베아트리스는 하늘에 점점이 박힌 별들을 보며 저것 중 풍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 동전 크기만 한 색유리가 밤하늘을 가렸다. 베아트리스가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색유리를 손에 쥔 남자가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거.”
레이먼드의 감사에 베아트리스는 제 몫으로 산 노란 색유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아, 녹색은 딱 하나 남았던 건데…….”
담벼락에 몸을 기댄 남자가 색유리를 들여다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아리아드네 곁에 있다 보면 진짜 별일을 다 겪는다니까요.”
베아트리스는 남자를 따라 슬쩍 벽에 몸을 기댔다.
“축일에 성녀님께서 손수 고른 선물을 다 받질 않나, 그것도 모자라 방문자님 품에 안겨 이동하고.”
다시 생각해도 황당하다는 듯 레이먼드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아, 네.”
그렇게 베아트리스의 대답을 끝으로 대화가 끊기자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듯 레이먼드가 계속 말을 붙여 왔다.
“어렸을 때 성녀님의 예언을 처음 듣고는 성물의 주인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었거든요.”
“레이먼드도 유진을 기다렸어요?”
“기다린 것까진 아니고 어떤 분일까 궁금해한 정도?”
“…….”
베아트리스의 묵묵부답에 어쩐지 머쓱해진 레이먼드가 목덜미를 긁적거리며 설명을 덧붙였다.
“방문자님을 궁금해한 건 저뿐만이 아닐걸요.”
“왜요?”
“……그야 베아트리스 성녀님께서 예언한 성물 카푸트의 진정한 주인이시니까.”
그 말에 베아트리스가 희미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럼 다들 유진에게 관심 가진 건 아니란 말이잖아.”
“……그럼 베아트리스 님이 기다리신 건 성물의 주인이 아니라 유진 님인가요?”
“당연하잖아요.”
그때, 새까만 어둠 사이로 검은 머리카락을 날리며 유진이 떨어졌다.
유진은 곧 아리아드네를 품에 안아 들고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달빛에 비친 유진의 얼굴은 긴장한 사람처럼 조금 굳어 있었다.
“그러니까…….”
베아트리스의 눈동자에는 조금씩 눈물이 차올랐다. 종일 유진과 함께 있었지만 그는 내내 다른 사람만 보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를 보는 유진의 눈은 날카롭게 벼린 검 같기도 하고, 팽팽하게 잡아당긴 실 같기도 했다. 그 눈이 뜻하는 감정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지금 그의 마음을 온통 채운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난 괜찮아요. 유진만 떠나지 않으면 난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이 삭막하고 차가운 곳에서 자신에게 온기를 준 유일한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유진이 바로 옆에 있는 자신을 잠시 잊어버렸다 해도,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 * *
캐롤린은 제멋대로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몇 번이나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려 눈가를 만지작거렸다.
크게 숨을 내쉰 캐롤린이 적갈색의 마호가니 문을 똑똑 두드렸다. 안에서는 낮은 음성이 허락을 알렸다.
“캐리?”
모처럼 리스벨 백작저의 집무실에서 서류 작업을 하던 커티스는 난데없는 캐롤린의 등장에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어쩐 일이냐?”
낮고 진중한 목소리에는 따스한 애정이 묻어났다. 원리원칙주의자에 융통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커티스였지만, 외동딸인 캐롤린에게만은 무른 데가 있었다.
“모처럼 집에 계시는데, 저도 아버지도 바빠서 차 한 잔 나눌 시간도 없었던 것 같아서요. 아버지께 차 좀 얻어 마실 수 있을까 하고요.”
캐롤린이 보랏빛 눈동자를 곱게 접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마침 쉬려던 참인데 잘 됐구나.”
설렁줄을 당긴 커티스가 차와 다과를 준비시켰다. 캐롤린이 그림 같은 자태로 앉아 차를 마셨다.
상냥하고 온화한 캐롤린은 누구에게나 쉽게 호감을 사곤 했다. 겉으로 보면 사교적인 것 같지만 정작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았다.
남의 말은 잘 들어 주지만 제 말은 하지 않았다. 누구와도 잘 지내지만 누구도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다. 제 사람으로 받아들인 몇몇을 제외하면 쉽게 곁을 주는 아이가 아니었다.
속내를 감추는 것에 익숙하고, 자신의 의중을 알리는 것보다 남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한 귀족 사회에서 캐롤린의 성품은 흠이 아니었다.
커티스 또한 쉽게 제 속을 드러내는 편이 아니었으니 캐롤린의 성격은 아비를 닮은 것일지도 몰랐다.
“일이 너무 많으신 것 아니어요? 제가 아버지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쁠 텐데요.”
“그렇지 않아도 가내 일은 내가 손댈 것도 없이 네가 도맡아 하고 있잖느냐.”
“이틀째 잠도 주무시지 못했다고 들었어요. 간단한 건 제가 처리할 테니 좀 쉬세요.”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 몸에 따뜻한 차까지 들어가니 노곤하던 참이었다. 더구나 캐롤린까지 찾아와 저러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잠시만 눈을 붙이고 오마. 그럼 좀 부탁해도 되겠니? 아, 왼쪽 서랍에 있는 건 기사단 문건이니 네가 볼 필요 없다.”
“네, 아버지”
커티스는 다 자란 딸의 성화에 못 이겨 집무실 곁방에서 잠을 청했다.
캐롤린은 급한 서류 몇 장을 훑어보고 빠르게 처리한 다음 왼쪽 서랍을 열어 원하는 서류를 뒤지기 시작했다.
커티스는 입이 무거웠다. 업무 중에 알게 된 사실은 기밀이든 아니든 실수로라도 흘리는 법이 없었다. 캐롤린도 평소 그런 것을 궁금해하는 성격이 아니라 대화 중에 무언가를 알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엘바의 실종과 관련된 서류는 최초의 구명 요청, 구명을 위해 추가로 지원 나간 병력 관련, 추가 지원 병력의 실종 건, 실종자와 사망자의 신원, 랭스턴 공국과의 협력 사항을 명시한 것. 이렇게 모두 다섯 건이었다.
다른 서류가 더 있을 테지만 나머지는 본성 내 기사단에 있는 모양이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사망자는 일차적으로 발견된 다섯 명과 추가로 발견된 스물, 모두 스물다섯 명이었다. 신원이 확인된 시체 중에 알버트는 없었다.
빠르게 내용을 숙지한 캐롤린은 서류를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분명 이 서류가 앤드류 델런의 사망 사고 다음에…….’
서류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던 캐롤린은 그 자리에서 굳고 말았다.
앤드류 델런, 앤드류는 명문가인 델런 백작가의 삼남이었으나 아버지와의 불화를 참지 못해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가문을 떠난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캐롤린에게 앤드류는 다른 의미로 특별했다. 앤드류 델런은 바로 아리아드네의 첫 교제 상대였다.
‘앤드류가 죽었어? 대체 왜?’
서류를 든 손이 덜덜 떨렸다. 관련 서류가 더 없나 뒤적이던 그때, 집무실 곁방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캐롤린은 제가 보던 서류를 원래 자리에 돌려놓고 책상 위의 서류를 검토하는 척하다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좀 더 쉬시지 않고요.”
한결 개운한 얼굴을 한 커티스가 다가왔다.
“아예 너한테 다 떠넘기고 난 은퇴해도 아무 문제 없겠구나.”
“은퇴하기엔 너무 이르세요.”
“쉰이면 그리 이른 것도 아니지.”
“그럼 제가 아직 어린 것으로 할까요?”
캐롤린은 떨리는 손을 감추고는 깨끗한 얼굴로 웃었다.
“그럼 평생 은퇴는 못 하겠는걸. 내 눈에 넌 언제까지고 어린아이일 테니 말이다.”
이혼한 생모는 아버지의 무정함을 견디지 못했다고 하지만, 캐롤린에게 커티스는 한 번도 무정한 아비인 적이 없었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란 없다.
사람은 저마다 천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고, 상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캐롤린은 익히 알고 있었다. 저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캐롤린은 자신이 양심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을 하려 하는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맹목적인 구석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 캐롤린에게 그런 존재는 얼마 되지 않았다. 아버지, 아리아드네 그리고 알버트.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적당한 숫자였다.
요 며칠 온 신경이 알버트에게 쏠려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아리아드네 신변에 혹 자신이 모르는 위험이 생긴 건 아닐까. 불안으로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커티스의 집무실에서 나온 캐롤린은 그 길로 사람을 시켜 앤드류 델런의 사고와 관련된 정보를 깡그리 모아 오라고 시켰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앤드류의 사고는 목격자가 많아 그만큼 정보를 얻기도 쉬웠다.
술을 잔뜩 먹고, 다리에서 강으로 떨어져 익사한 사고였다. 델런 가에서 앤드류의 신원 확인을 거부했는지 캐롤린이 요구한 조사서에는 신원 미상의 시체라고 적혀 있었다.
캐롤린은 델런 가에서 신원 확인을 거부한 이유를 짐작했다.
‘부검 결과 술과 함께 다량의 수면제를 섭취한 것으로 확인됨.’
커티스의 집무실에서 본 서류에는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다량의 수면제와 함께 술을 마신 남자가 강이 흐르는 다리 위에서 떨어졌다.
자살. 자살로 의심할 여지가 있었다. 캐롤린은 섬뜩한 느낌에 두 팔을 쓸어내렸다.
아리아드네를 좋아했던 제레미, 아리아드네와 교제했던 앤드류. 아리아드네를 사랑했던 남자들이 연이어 자살했다.
그 순간, 흘려보냈던 과거의 기억 하나가 캐롤린의 머리를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넌 좋아하는 여자도 없니?
언젠가 캐롤린이 알버트에게 그렇게 물었을 때.
―어떻게 하루도 안 빼먹고 날마다 훈련이야. 아니면 좋아하는 여자한테 잘 보이려고 그래?
아무런 대답 없는 알버트의 얼굴이 평소와는 달리 붉었다.
―어, 진짜야?
그때는 같은 기사단에 있는 동료 기사 중 누군가의 누이를 짝사랑 하나 보다, 그렇게만 생각했다. 캐롤린은 알버트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지도 못하고 돌아섰다.
―아버지껜 내가 말씀드릴 거야. 거기가 어디라고 가. 못 가, 난 너 못 보내.
엘바로 떠나는 수색대에 알버트가 포함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를 찾아갔다. 커티스에게 달려가려는 캐롤린을 막아선 건 다름 아닌 알버트였다.
―아가씨, 전 갈 거예요. 그분께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러니까 저 보내 주세요.
―내가 가지 말라는 데도?
―…….
―내가 가지 말라잖아! 그런데, 그런데도 갈 거야? 고작 그따위 여자 때문에?
울음으로 엉망이 된 캐롤린의 얼굴을 보고도 알버트는 눈물을 닦아 주지도 손수건을 꺼내 주지도 않았다.
―저한테는 고작 그따위 여자가 아니니까요.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얼굴로 멀어진 알버트는 그날 처음으로 캐롤린에게서 등을 돌렸다.
아무리 울어도 돌아보지 않았다. 알버트의 안에 자신보다 더 큰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알버트와 자신은 애초부터 되지 않을 사이라고 생각했으면서도, 캐롤린은 자신이 내내 기대 비슷한 것을 품고 있었음을 그날 깨달았다.
―무사히 돌아와. 다치지 말고. 위험한 일에 나서지 좀 마.
엘바로 떠나는 날, 알버트는 자신의 검에 체인을 달아 주는 캐롤린을 보고도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꾸벅 숙인 것이 전부였다.
왜 진작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분’이라는 말을 듣고도.
캐롤린은 알버트가 숙소로 쓰던 마구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단출한 방에는 키가 작은 책상 하나, 훤칠하게 자란 알버트가 눕기에는 빠듯한 나무 침상 하나가 전부였다.
캐롤린은 작은 방을 샅샅이 뒤졌지만 알버트의 방에는 검술 교본 몇 권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잘못짚은 걸까?’
긴장이 풀린 캐롤린은 알버트의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른 짚단으로 속을 채운 침대에서 바스락 소리가 났다.
침대 위를 천천히 매만지던 캐롤린의 손끝에 각진 무언가가 걸렸다. 그녀는 헝겊 이음새를 찾아 짚단 속에 손을 넣고 마구잡이로 뒤졌다.
“아…….”
지푸라기 속에 숨겨진 무언가가 캐롤린의 손가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제 손가락을 베고 지나간 ‘그것’을 천천히 꺼냈다. 하얀 종이에는 조금 전 캐롤린이 흘린 피가 번져 있었다.
캐롤린은 반으로 접힌 종이를 펼쳐 보았다. 고급스러운 종이 위에 날듯이 흘려 쓴 필체는 캐롤린이 익히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리아…….”
캐롤린이 찾은 것은 바로 아리아드네가 알버트에게 보낸 편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