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148)

* * *

“정말 괜찮을까?”

평소 입는 것과는 다른 무채색의 단출한 옷차림이 어색한지 치맛단을 만지작거리던 베아트리스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찬가지로 비슷한 옷차림을 한 아리아드네가 베아트리스에게 성큼 다가왔다.

“괜찮지 않으면 널 여기서 쫓아내겠어?”

“하긴…….”

들킨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자신을 굶길 것도 아니고.

“위험하진 않겠지?”

거세게 뛰는 심장을 꾹 누르며 베아트리스가 작게 속삭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 아리아드네는 베아트리스를 꼭 끌어안았다. 갓 태어난 노란 병아리를 손에 쥐었을 때처럼 가슴이 콩닥거렸다.

“저 사람 있잖아. 그런데 위험할 일이 뭐가 있어.”

아리아드네가 멀뚱히 서 있는 유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순식간에 ‘저 사람’으로 전락한 유진은 어쩐지 찜찜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걱정 마.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유진의 대답에 아리아드네가 그것 보라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럴 때 써먹어야지.”

그러면 베아트리스가 그새 배워서 그대로 따라 했다.

“맞아, 이럴 때 써먹어야지! 유진도 나 써먹었잖아.”

그런 베아트리스를 보며 아리아드네가 바로 그거라는 듯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황당하다는 듯이 중얼거린 유진이 아리아드네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그럼 저 여자를 써먹어야지. 재주는 누가 넘고 돈은 누가 받는다더니.”

엘바에 용건이 있는 것도, 베아트리스의 도움이 필요한 것도 유진이 아니라 아리아드네였다. 자신은 중간에서 말을 전한 것뿐, 베아트리스를 써먹은 건 어디까지나 아리아드네였다.

유진의 불평에 아리아드네는 샐쭉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당연한 거 아냐? 돈은 받을 만한 사람이 받아야지. 내 손에 들어오는 게 제일 많이 남을 텐데?”

“아리아드네는 유능하구나. 멋있어!”

그럼 그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베아트리스가 손뼉을 짝짝 치며 저런 헛소리를 보탰다. 베아트리스가 아리아드네를 잔뜩 경계했던 것이 불과 조금 전이었는데, 그새 둘은 영혼의 단짝이 되어 있었다.

―베아트리스 성녀님, 성녀님의 오늘을 저에게 주세요.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낭만 소설에나 나올 법한 대사로 베아트리스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 여자가 다음으로 꺼낸 카드는…….

―처음 봤을 때부터 지나치게 귀엽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던 듯, 베아트리스의 황금빛 속눈썹이 팔랑대더니 수줍은 듯 고개를 숙였다.

―나도, 나도 처음 봤을 때부터 아리아드네가 너무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꼭 어릴 때 동화책에서 본 요정 같아서.

그렇게 서로의 미모를 찬양하기에 이른다.

―그럼, 이곳에 있는 동안 성녀님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친, 친구? 친구라고? 그게…….

꼼지락거리는 열 개의 손가락이 쉴 새 없이 방황했다. 베아트리스는 손가락 끝을 잡아당기며 황금빛 눈동자를 굴려 아리아드네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싫으신가요?

―아, 아니! 싫지 않아요. 그런데 친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나 친구는 처음이라서…….

―그럼 우리 말부터 놓을까?

베아트리스가 잘 여문 복숭아처럼 발갛게 익은 제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난데없이 새로운 친구를 사귄 것으로 끝이 나나 했더니.

―아리아드네, 메르디에스는 어떤 곳이야?

작은 새처럼 재잘대는 베아트리스의 질문이 쉴 새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겨울에도 녹음이 찬란한 곳이지. 다음에 초청할게. 너도 분명 좋아할 거야.

―말은 고맙지만 난 못 갈 거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활기가 넘치던 베아트리스의 목소리가 푸스스 사그라졌다.

―난 살리바 대신전 밖을 나가 본 적이 손에 꼽는걸. 성도를 벗어난 적은 아예 없고.

―베아트리스, 나가고 싶어?

―……응, 하지만 다들 안 된다고 하니까.

―하고 싶은 건 해야지. 나가자.

축 늘어진 베아트리스를 가만히 바라보던 아리아드네가 당장이라도 나갈 것처럼 가느다란 손목을 쥐고 일어났다.

―언제?

―오늘.

―허락 안 해 주실 텐데?

―무슨 허락을 받아. 원래 이런 건 그냥 지르는 거야.

―하, 하지만…….

―싫어? 네가 싫다면 강요하지 않을게.

베아트리스의 망설임이 길어지자 아리아드네가 쥐고 있던 손목에서 슬그머니 힘을 뺐다. 그러자 베아트리스가 아리아드네의 손목을 답삭 쥐고는 벌떡 일어났다.

―아, 아니! 나 할래. 나 나가 보고 싶어. 그런데, 나랑 같이 가 줄 거야?

―물론이지. 나만 믿어. 오늘 네 하루는 내가 책임진다고 했잖아.

그렇게 시작된 아리아드네와 베아트리스의 외출 준비는 오후 내내 이어졌다. 키득거리며 서로에게 어울릴 장신구를 갖다 대었다가 가끔은 부러 우스꽝스러운 조합을 골라 놓고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화려한 장식을 모두 떼어 낸 베아트리스는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었다. 자신을 짓누르던 것들을 훌훌 벗어 버린 듯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황금빛 머리카락은 화려한 장식을 모두 빼고 하나로 땋아 내린 채였다. 레이스와 보석이 촘촘히 달린 옷은 무채색의 단출한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그 위에 눈까지 내려오는 연한 보랏빛이 감도는 베일을 쓰면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녹진한 황금빛 머리카락이 평범한 금발로 둔갑했다.

“유진, 나 이상하지 않아?”

베아트리스가 눈을 가린 베일을 슬쩍 들어 보이며 물었다.

“안 이상해.”

그가 그렇게 말하면 베아트리스는 베일을 잡았던 손가락을 슬쩍 떼어 내고는 고개를 숙였다.

“휴우, 다행이다.”

베아트리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유진은 평소보다 훨씬 무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담담하고 담백한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의 애정이 새어 나왔다.

아, 또다.

그 순간, 종일 아리아드네를 괴롭혔던 불쾌한 감각이 손끝에서부터 저릿저릿하게 올라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속해서 쿡쿡 찌르는 것처럼 거슬리고 불쾌한 그런 감각이.

“왜 그래?”

아리아드네의 표정이 이상했는지 레이먼드가 이유를 물어왔다.

“글쎄, 가시가 박혔나?”

아리아드네는 손가락을 유심히 들여다보다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아리아드네가 연한 하늘색 베일과 레이스로 장식된 흰 베일 두 개를 손에 든 채로 레이먼드를 돌아보며 물었다.

“레이, 둘 중에 뭐가 더 나아?”

아무래도 이상한데……. 레이먼드는 눈앞의 사촌 누이를 유심히 살피느라 대답할 때를 놓쳤다.

“뭐가 더 낫냐니깐?”

아리아드네가 대답 없는 레이먼드를 재촉했다.

“둘 다 어울려.”

“하여간 도움이 안 돼.”

사촌 누이의 핀잔에 레이먼드가 재빨리 변명을 늘어놓았다.

“다 어울리니까. 내가 좀처럼 선택하지 못하는 건 내 안목이 부족해서가 아니야. 네 미모가 워낙 출중한 탓이지.”

레이먼드의 장난스러운 눈빛에서는 한결같은 애정과 신뢰가 묻어났다. 언제고 마음을 느슨하게 풀어헤치는 안온한 애정.

“당연한 소릴.”

피식, 헛웃음을 터트린 아리아드네가 흰 베일을 쓰려다 알 수 없는 기시감에 멈칫했다. 레이먼드의 익숙한 얼굴에 무언가가 떠오를 듯했다가 이내 물거품처럼 흩어졌다.

‘조금 전 그건 뭐였지?’

하지만 짧은 고민은 곧 흰 베일 속으로 덮여 사라졌다.

* * *

사방에 어둠이 내린 살리바 대신전은 이를 데 없이 적막했다. 어둠 속에서 멀뚱히 서 있으려니 성 상티모니아의 경비병 한스의 입에서는 저절로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흐어어어!”

외부 손님이 머무르며 부쩍 늘어난 근무 시간 탓에 죽을 맛이었다.

“정신 차려. 교대 시간 얼마 안 남았으니까.”

곁에 선 동료가 그의 옆구리를 찔러 왔다.

“알았다고.”

그들 중 살리바 대신전을 가로지르는 인영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야.”

어둠 속에서 하늘하늘한 베일이 흔들리며 그를 불렀다. 레이먼드는 유진의 품에 안긴 채로 자신을 부르는 일행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진짜 별일을 다 하는군.”

유진이 레이먼드를 땅에 내려놓으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와, 진짜 아무도 모르던데?”

“유용하지.”

레이먼드의 감탄에 아리아드네가 작게 웃으며 동의를 표했다.

“진작 써먹을걸.”

베아트리스가 베일을 빼꼼 올리며 거들었다. 제 처소로 돌아갔다가 유진과 함께 몰래 빠져나온 베아트리스가 상기된 얼굴로 조잘거렸다.

“그럼 갈까?”

“응!”

베아트리스가 아리아드네 팔에 답삭 매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박자박 걷는 발소리에서도 숨길 수 없는 기대가 묻어났다.

적막한 살리바 대신전과는 달리 성도의 밤은 제법 휘황찬란했다.

“날을 잘 잡았나 봐. 오늘이 성 바론의 축일이라며?”

바론은 성 상티모니아 최초의 교황이었다. 그의 선종을 기리는 축일이 바로 오늘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성도는 일 년 내내 축일이긴 하지만…….”

베아트리스의 말대로 일 년 내내 축일이라지만 그 규모는 축일 성인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었다. 성 바론의 축일은 제법 큰 축에 속했다.

“우와, 예쁘다.”

베아트리스가 밝게 빛나는 거리를 보고는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밤의 거리는 낮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등불이 빼곡히 걸려 어둠을 밝히는 거리는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홀린 듯이 거리 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베아트리스가 뒤를 돌아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빨리 와.”

“조심해. 정신 빼놓지 말고.”

베아트리스에게 성큼 다가선 유진이 타박하듯 말했다. 그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어둠 속에 녹아들 듯 멀어졌다.

따끔, 아리아드네의 손가락에 걸린 가시가 계속 제 존재를 알렸다.

“……아리아드네?”

아리아드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베일 너머 베아트리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나 불렀어?”

“고민되는 게 있어서.”

베아트리스가 색유리로 만든 조악한 장신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어떻게 해?”

“뭘? 왜 하나 하고 싶어? 골라 줄까?”

아리아드네는 바닥에 놓인 물건들을 쭉 훑어보았다. 평소라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것들이지만 보석함이 아니라 길거리에 늘어져 있으니 아기자기해 보이기도 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것들이 축성한 물건이라는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베아트리스가 아리아드네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무리 봐도 아니야. 어떻게 해? 어머니께 알려야 할까?”

어쩔 줄 몰라 하며 두리번거리는 황금색 눈동자에는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아리아드네는 그런 베아트리스가 귀여워 코끝을 슬쩍 잡아당기며 웃었다.

“아니, 안 그래도 돼. 이미 알고 계실 거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황청에게 조사받을 위기에서 벗어난 좌판의 상인이 아리아드네에게 부지런히 물건을 권했다.

“정말?”

“사는 사람들도 다 알고 사는 거야. 겨우 이 가격으로 축성한 물건을 가질 수 있을 리 없으니까.”

아리아드네는 상인이 권하는 물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바론 성인의 초상이 찍힌 색유리가 불빛에 비쳐 반짝였다.

“그럼 왜?”

“축일에 성도에 다녀간 걸 기념하려는 거지.”

“기념?”

“응,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흐려지니까. 뭐라도 남기는 거지.”

아리아드네의 설명에 베아트리스가 황금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했다.

“그럼 나도 살래. 오늘 나온 기념으로.”

베아트리스가 멀찍이 떨어져 있던 유진을 잡아당겼다.

“유진도 골라. 내가 사 줄게.”

“됐어. 너나 많이 사.”

그는 베아트리스가 붙든 제 팔을 잡아 빼며 뒤로 물러섰다. 심통이 난 듯 볼을 부풀린 베아트리스가 그의 팔에 매달리며 졸라 댔다.

“왜에! 유진도 사. 안 고르면 내 마음대로 고른다.”

홱 돌아선 베아트리스는 곧 물건을 고르는 일에 흠뻑 빠졌다. 유진은 그런 베아트리스를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로는 귀찮은 듯 밀어내도 그가 베아트리스를 보는 시선에서는 자연스러운 애정이 묻어났다. 그것은 아리아드네도 익히 아는 무언가였다.

“아…….”

불현듯 알게 된 그 정체에 아리아드네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뱉었다. 소리를 낸 당사자조차 인지하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였다.

그때, 유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왜, 어디 아파? 오후 내내 표정이 안 좋잖아.”

성큼 다가온 그가 아리아드네의 미간을 가리키며 물었다. 어느새 바짝 가까워진 그의 회색 눈동자가 미동도 없이 아리아드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가시가 박힌 것 같아서.”

아리아드네가 약지 끝을 만지작거리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어넘겼다.

“어디 봐.”

눈살을 찌푸린 그가 아리아드네의 약지를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서늘한 그의 손이 여름밤의 바람처럼 시원했다.

“이쯤인 것 같은데…….”

유심히 살펴보던 그가 이윽고 그녀의 손끝에서 뽑아낸 티끌 같은 무언가를 바닥에 버렸다.

“이젠 괜찮아?”

그의 손가락이 약지 끝을 조심스레 쓸고 지나갔다. 신경에 거슬리던 가시가 뽑혀 나간 자리는 아릿한 고통이 남았다.

“정말 유용하다니까.”

아리아드네가 그렇게 말하면 그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나 다 골랐어.”

상기된 얼굴을 한 베아트리스가 다가와 유진의 손바닥 위에 바론 성인의 초상이 찍힌 색유리를 올려 두었다. 그의 몫으로 고른 유리는 검은 염료가 섞인 것이었다.

“필요 없다니까.”

그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고개를 돌린 베아트리스가 아리아드네의 손에는 푸른 색유리를 쥐여 주었다.

“이건 아리아드네 거.”

“내 것도 있었어?”

“응. 레이먼드 것도 샀는걸.”

레이먼드의 눈 색깔과 맞춘 녹색 색유리를 손에 든 베아트리스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런 베아트리스를 보는 유진의 눈에 담긴 애정은 더없이 안온하고 담담했다.

“레이.”

아리아드네의 부름에 베아트리스에게서 건네받은 색유리를 들여다보고 있던 레이먼드가 고개를 들었다.

“나 불렀어?”

그녀를 보는 레이먼드의 녹빛 눈동자는 여느 때처럼 담담하고 따뜻했다. 마치 유진이 베아트리스를 보는 것처럼.

“…….”

베아트리스를 보는 유진의 눈동자에 담긴 것은 혈육을 대하는 친애의 감정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내내 아리아드네를 괴롭히던 가시는 단박에 사라졌지만 가슴 속 수런거림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 정말 왜 그래? 이상하다.”

레이먼드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아리아드네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레이먼드의 얼굴에 붉은빛이 비쳤다.

그와 동시에 거리의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 이거 뭐야?”

어디선가 풍등을 날리는 행사가 있었던 모양이다. 짙은 남색의 하늘 위로 불을 붙인 수백 개의 풍등이 둥실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저마다의 소망과 염원을 실은 풍등에서 새어 나온 빛이 지상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 하나둘 날아오르는 풍등을 황홀한 듯이 바라보던 베아트리스가 아리아드네 손을 잡아 왔다.

“오늘 나 데리고 나와 줘서 고마워.”

“아니, 나도 즐거웠는걸.”

“나 평생을 성도에서 나고 자랐는데 이런 광경을 본 건 처음이야.”

가볍게 불어오는 바람에 베일 아래 황금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살리바는 네가 지켜야 할 땅이니까. 의무만으로는 너무 버겁잖아. 하지만 사랑에 빠지면 그때부터는 의무가 아니지.”

“나한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리아드네뿐인걸.”

풍등에서 새어 나온 빛으로 베아트리스의 얼굴도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까 그랬잖아. 내 오늘을 아리아드네에게 준 거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정말이야.”

마치 지상에 떨어진 별이 제 자리를 찾아가듯, 밝게 빛나는 풍등이 점점 멀어졌다.

“다음에도 또 오면 좋겠다. 그때도 다 같이.”

아리아드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베아트리스를 보는 유진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덜어 낼 수도, 그렇다고 마냥 지고 있기도 어려운 짐을 떠맡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유진의 감정이 혈육에게 느끼는 친애의 감정이라면, 베아트리스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품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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