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148)

* * *

유진을 부축해 선실로 들어온 아리아드네가 그를 침대에 뉘었다.

“쉬어. 필요한 게 있으면 탁자의 종을 치고. 그러면 옆방에 있는 사람이 올 거야.”

그는 알았다는 말도, 고갯짓도 없었다.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그저 가만히 누워 있길래 아리아드네는 조용히 선실을 빠져나왔다.

아픈 사람을 혼자 두고 나오는 마음이 불편했다. 하얗게 질린 채로 앓는 소리조차 내지 않는 남자가 마음에 걸려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갑판으로 나가려던 아리아드네는 선실로 다가오는 사람을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안테로 주교님.”

“아, 방문자님께서는 좀 어떠신가요?”

“아까 보신 대로죠. 많이 힘들어하네요. 그럼 들어가 보세요.”

아리아드네가 선실에서 비켜섰다. 고민하는 듯 문을 잠시 바라보던 안테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 그럼 나중에 와야겠네요. 이럴 때 누가 곁에 있는 걸 싫어하셔서…….”

“그런가요?”

아플 때일수록 누가 있어 줘야 하는 거 아닐까. 아리아드네는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더 참견하기도 애매했다.

“네. 그럼 전 이만.”

“저, 안테로 주교님.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멀어지는 안테로를 바라보던 아리아드네가 저도 모르게 그를 붙잡았다.

“성 상티모니아의 성물 가운데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들도 있나요?”

“네?”

“시간을 다스리는 성물 같은 거 말이에요.”

그 물음에 안테로의 입이 조개처럼 딱 닫혔다. 듣지 않아도 이미 들은 것이나 다름없는 반응이었다.

안테로와 나눈 말이 신경 쓰여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날이 밝는 대로 유진의 선실을 찾았더니 남자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채 앓고 있었다.

마치 숨이라도 막힌 것처럼 헐떡였다. 남자의 이마를 짚어 보니 차게 식은 몸이 심상치 않았다. 땀이라도 닦아 줄까 해서 물수건을 들었더니 갑자기 눈을 뜬 남자가 아리아드네를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남자의 아래에 깔린 아리아드네는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앓았다는 게 거짓말인 것처럼 남자는 자신을 단단하게 옭아매고 있었다.

조금의 틈도 없이 아리아드네를 끌어안은 남자가 막혔던 숨이 터진 듯 숨을 몰아쉬었다. 뜨거운 공기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제 것이 아닌 타인의 숨은 지나치게 뜨거웠고, 어쩐지 부끄러웠다.

그가 아리아드네의 눈가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마치 물거품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진짜 같잖아.”

“뭐가 진짜 같은데?”

유진은 그녀의 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한껏 얼굴을 찡그린 유진이 아리아드네의 얼굴을 엄지손가락으로 덧그렸다.

“……아리아드네 메르디에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가 자신을 불렀다. 아리아드네는 아무 대답 없이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를 쳐다보았다. 잠결에 사람을 착각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대체 누구랑 착각했길래…….’

아픈 사람에게 일일이 따지고 싶진 않았지만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아리아드네는 한숨과 함께 유진의 손을 잡고는 제 얼굴에서 떼어 냈다.

유진은 제 손을 멍청히 내려다보더니 아리아드네에게서 멀어졌다. 이윽고 불장난하다 들킨 아이처럼 허둥지둥하다가 사레라도 들렸는지 연거푸 기침했다.

얼굴은 물론 목까지― 아니, 옷 위로 드러난 피부는 모조리 새빨개진 남자는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아리아드네는 남자의 발작 같은 기침에 놀라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그 틈에 오른손에 든 흰 물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대체 뭐야, 왜 멋대로 들어와서는―”

아직도 사레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는지 남자는 평소보다 높고,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붙잡은 사람이 누군데…….”

유진의 역정에 아리아드네는 남자가 붙잡았던 제 어깨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픈 와중에 무심코 한 행동이라 생각해서 문제 삼지 않은 건데……. 다른 사람이랑 착각이나 하고.

“그러니까, 애초에 왜, 왜 자꾸 내 눈앞에서 얼쩡거려. 대체 당신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남자가 금세 평소 같은 서늘한 얼굴을 하고는 물었다.

“용건이 뭐야.”

침상에서 발을 내린 아리아드네가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빗어 넘겼다. 새벽이 되어 막 고개를 내민 해처럼 밝은 금발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나 그거 보여 주면 안 돼? 성물 카푸트.”

아리아드네의 요구에 유진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성물 카푸트.

성 상티모니아의 대대적인 선전으로 최고의 성물이라 불리면서도 그 형상과 권능만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그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성녀 베아트리스의 예언과 유진의 등장으로 명실상부 최고의 성물이 된 지금도 베일에 싸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유진을 신에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만든, 신이 이 땅에 남긴 최고의 성물, 카푸트.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자신에게 이토록 절실한 무엇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왜 그게 보고 싶어?”

단박에 거절할 거라 예상한 것과는 달리 유진은 이유를 물었다.

“시간을 부릴 수 있지? 당신.”

레너드가 메르디에스로 귀환하는 아리아드네를 배웅 나왔던 그날, 유진에게 혼쭐이 난 기사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말을 했다.

―아, 그때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는데…….

기사들끼리도 그날의 이야기를 제법 나눈 모양인지 옆에 있던 기사가 냉큼 설명을 보탰다.

―마치 죽기 직전에 주마등이 휘리릭 지나가는 것처럼 공기의 흐름이 눈에 보일 정도로 모든 게 느렸는데……. 그런데 정말 이상했던 건 그게 아니라 투로(鬪路)를 이 두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조금도 막아 낼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노련한 기사가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운 듯이 말했다.

―마치 다른 시간 속에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그 말을 한 기사는 아리아드네 앞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며 못 들은 것으로 해 달라 했지만, 아리아드네는 그 감각을 알았다. 마치 그 사람 주위에만 다른 시간이 흐르는 것 같은.

―성 상티모니아의 성물 가운데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들도 있나요?

―네?

―시간을 다스리는 성물 같은 거 말이에요. 그 정도면 성 상티모니아 최고의 성물이라 할 만한가요?

안테로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아리아드네의 확신은 커졌다. 머리는 더없이 명료한데, 몸은 불이라도 붙은 듯이 뜨거웠다.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건 진짜 아무도, 아니, 진짜 몇 명만 아는 건데…….

안테로가 저도 모르게 스르르 벌어진 입으로 주절대다가 멈칫했다.

―……설마 방문자님께서 알려 주셨습니까?

그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아리아드네는 제 손을 어찌하지 못하고 머리를, 목을, 가슴을 쓸어내렸다. 온몸이 참을 수 없이 뜨거웠다.

―아니요. 조금 전까지는 순전히 짐작이었어요. 가끔 시간의 흐름이 이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돌이켜보니 전부 유진과 함께 있을 때였어요.

문 하나만 넘으면 그 남자가 있는데, 그것이 바다 건너편인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그게 유진의 능력이라면 그는 어떻게 그런 능력을 얻게 된 걸까. 타고난 것일까, 아니면 어느 순간 얻은 것일까 생각했죠.

그 순간, 아리아드네는 깨달았다. 성 상티모니아 최고의 성물 카푸트, 성녀 베아트리스가 예언한 카푸트의 참된 주인이 누구인지를.

―성물 카푸트의 권능이 시간이라면 전부 맞아떨어지죠. 유진이 시간을 다루는 것도, 성 상티모니아에서 카푸트를 두고 최고의 성물이라 칭한 것도, 그 권능을 쉽사리 밝히지 않은 것도 전부.

‘그러니까 당신일 수밖에 없는 거야. 내 시간을 되돌려준 사람은.’

아리아드네는 목구멍이 솜뭉치를 마구잡이로 쑤셔 넣은 것처럼 꽉 막혀 왔다. 가슴에 돌덩이를 얹어 놓은 것처럼 갑갑했다.

막혔던 무언가가 뚫린 듯 시원하기도 하고, 길을 잃은 것처럼 무섭기도 했다. 펑펑 울고 싶으면서도 크게 웃고 싶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엉망일지 짐작이 갔다.

한숨을 크게 내쉰 남자가 성큼 다가왔다.

“보여 주지 못할 이유는 없는데……. 당신이 볼 만한 것이 못 돼.”

남자가 침상에 걸터앉은 아리아드네를 내려다보며 확인하듯이 물었다. 남자의 말은 거절이라기보다는 염려에 가까웠다. 아리아드네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내키지 않는 얼굴을 한 남자가 왼손을 꺼내 들었다. 유진의 손에서 황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눈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강렬한 기세였다.

아리아드네는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잠시 뒤 강렬한 빛이 잦아들었다.

어느새 유진의 손바닥 위에는 황금빛 물체가 둥실 떠 있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물체는 젊은 남자의 머리였다.

“카푸트가 사람이었어?”

“이게 사람으로 보여? 제 몸뚱이마저 잃은 시체지.”

“그래도 죽기 전에는 살았을 거 아냐.”

아리아드네는 유진의 손 위에 들린 카푸트를 향해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가 거두고 말았다.

“안됐다.”

머리의 주인은 아리아드네 또래로 보였다. 얼마나 오랜 세월 저렇게 있어야 했을까.

성 상티모니아가 카푸트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150년 전, 적어도 150년 전의 사람이라는 이야기였다.

“다 봤으면 그만―”

“나, 만져 봐도 돼?”

아리아드네가 카푸트를 걷으려는 유진의 손을 서둘러 붙잡았다. 툭 불거진 그의 손목뼈가 엄지에 닿았다.

아리아드네를 내려다본 유진이 아무 말 없이 왼손을 내밀었다. 아리아드네는 카푸트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감겼다. 살아 있는 사람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황금빛 광채로 빛나는 머리카락은 본디 색을 알기가 힘들었다.

아리아드네는 손에 잡힌 머리카락에 조심스럽게 입술을 묻었다. 경애와 사죄, 감사와 안도, 죄책감과 이기심으로 뒤섞인 이 마음을 무엇이라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나는 당신 덕분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거라고. 아리아드네는 그저 그 말만을 속으로 되뇌었다.

이른 아침의 햇살이 선실의 작은 창으로 비쳐 들었다. 유진은 황금빛으로 물든 여자를 보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진작 썩어 사라졌어야 할 시체였다. 미라가 되어 살리바 대신전에 처박혀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오물이라 불러야 마땅할 그것을 저토록 경애하는 여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유진이 파악한 여자는 ‘성물’이라고 저런 태도를 보일 사람이 아니기에 더 그랬다.

하지만 이른 아침의 햇살은 적당했고, 잠깐의 애도조차 기다려 주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삶도 죽음도 속박하지 않는 땅에서.”

짧은 제문을 마친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여자의 손에서 카푸트의 금실 같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유진이 왼손을 가볍게 말아 쥐자 카푸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리아드네는 카푸트가 사라진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무릎을 끌어안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유진은 웅크린 여자의 가마를 쳐다보다 지금 여자가 차지한 것이 자신의 침상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그녀가 새벽 댓바람부터 제가 자는 곳에 들이닥쳤다는 것도.

이곳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유진이라도 이것이 누구에게 보여 좋을 일이 아니라는 정도는 알았다.

“용건 끝났으면 이만―”

“안 끝났어. 내 용건은 카푸트가 아니라 당신이야.”

아리아드네는 자신을 일으키려는 유진의 팔을 슬그머니 피했다. 그는 갈 곳을 잃은 팔을 거두며 말했다.

“말했잖아. 시간을 되돌리는 방법 같은 건 없다고.”

안테로도 비슷한 말을 했다. 시간의 흐름을 왜곡하거나, 사물의 시간을 되돌리는 건 몰라도 생명을 가진 것의 시간을 되돌리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시간을 부릴 수 있는 건 사실이라는 말이네?”

유진이 ‘세계의 시간’을 되돌릴 방법을 알게 되는 건 조금 더 뒤의 일일까?

“어차피 알고 온 거 아니야?”

침상 위에 털썩 주저앉은 유진이 아리아드네의 손끝을 잡아당겼다. 아리아드네는 유진에게 손바닥을 내민 자세가 되었다.

어느새 오른손에 풀멘을 든 유진이 둥근 원통을 옆으로 젖혔다. 여섯 개의 둥근 칸 중에 다섯 개는 비어 있었다.

원통을 젖힌 채로 풀멘을 거꾸로 들자 끝이 뾰족하게 생긴 쇳덩이 하나가 아리아드네의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유진이 손목을 가볍게 흔들자 원통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게 탄환이라는 거야. 그게 있어야 메로우의 머리를 날려 버릴 수 있지.”

유진이 다시 풀멘을 쥔 손을 흔들자 원통이 옆으로 밀려났다. 밀려난 원통에서 아리아드네 손바닥 위로 다시 툭, 하고 탄환이 떨어졌다.

분명 마지막 탄환이었는데……. 아리아드네가 제 손에 떨어진 두 개의 탄환과 풀멘을 번갈아 보았다.

“맞아. 지금 이건 탄환이 있는 상태로 고정된 거라면 이해가 갈까?”

유진이 풀멘을 거꾸로 든 채로 툭툭 치자 탄환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맹수를 잡으려는 목적으로 만든 거라 제법 쓸 만하지만, 이곳의 마물이라는 존재도 꽤나 성가시더군. 그럴 땐 시간을 왜곡하면 살상력이 올라가지. 파괴력은 속도에 비례하니까.”

유진은 아리아드네 손바닥에 수북하게 쌓인 탄환을 제 손으로 옮겼다. 그 많던 탄환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죽이는 재주로는 이만한 게 없지.”

씁쓸한 얼굴을 한 유진이 풀멘을 한 바퀴 돌리자 다시 빈손이 되었다.

“하지만 생명이 있는 것은 달라. 생명을 가진 존재 안에서 흐르는 시간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야. 살아 있는 무언가의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어. 그게 가능했다면 아무도 죽지 않았겠지.”

대답을 마친 유진은 그만 여자가 이곳에서 나가 줬으면 했다. 이르게 기상한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자는 여전히 미동도 않고 무릎에 얼굴을 괸 채로 유진을 보며 물었다.

“당신, 지금 어떤 얼굴인지 알아?”

“뭐가?”

“후회하는 얼굴이야. 당신에게도 살리고 싶은 사람이 있어?”

아리아드네는 남자의 눈에서 짙은 후회를 발견했다.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좋았을걸. 그래서 모른 척할 수 있었다면 편했을걸.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는 탑에 갇혀 후회와 후회와 후회를 곱씹었던 기억이 그러지 못하게 했다. 아리아드네는 도저히 그의 후회를 알아차리고도 모르는 척 지나칠 수 없었다.

“아니, 그런 사람 없…….”

유진은 말을 마치지 못했다.

여전히 속은 울렁이고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다. 알 수 없는 환청에 시달리고, 알지 못하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편해지고 싶다는 충동을 이기지 못했다. 모든 건 지독한 뱃멀미 탓이었다.

“……사실, 아무것도 모르겠어. 대체 내가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지, 뭘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겠어. 내가 누군지, 내가 뭘 찾고 있는지, 왜 죽지 않는지.”

평소의 경계가 사라진 남자는 약하고, 안쓰럽고, 그래서 조금 사랑스러웠다.

“우선은 다섯 가문의 성물을 모두 보는 거야. 내가 아는 당신은 늘 그러고 싶어 했으니까. 그다음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해.”

아리아드네는 손을 조금 옆으로 뻗어 남자의 손끝에 제 손가락을 겹쳤다.

“그때도 모르겠으면 내가 같이 고민해 줄게.”

‘당신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뭐든 가지게 해 줄게. 당신이 바라는 게 있다면 그게 뭐든 다 이루게 해 줄게. 당신이 내게 준 기회가 어떤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해도 나는 기억할게.’

맞닿은 남자의 손끝은 조금 전보다는 제법 온기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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