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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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땅에 기록되지 않은 역사, 역사 이전의 역사, 그 역사를 이 땅은 그렇게 기억한다.

    그 옛날 이 세계는 신들이 다스렸다.

    신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분리되기 이전, 신들은 그들이 가진 권능으로 인간을 지배했고, 인간은 신의 권능 아래 복종했다.

    신의 권능은 감히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그 무엇이었으며,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강대한 힘을 가진 신은 광폭하고, 자애로웠으며, 잔인하고, 어질었으며, 악하여 선하였다.

    신은 이 땅의 진정한 지배자였으며 만물이 그들 앞에 엎드렸다. 신은 불사이자 전능하였으니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존재치 아니하였다.

    신은 탐욕스럽고 어리석으나 그들과 가장 닮은 존재인 인간을 만물 중에서도 제일 사랑하였다.

    하여 인간을 사랑한 몇몇 신들은 인간에게 그들의 권능을 나누어 주었다. 인간이 부여받은 권능이란 신의 힘에 비하면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신조차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 있었으니, 신이 불사의 몸을 지녔다면 인간은 불멸의 영혼을 지녔다는 점이었다.

    신에게는 수명이 없었으나, 신의 존재를 멸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불멸의 영혼을 부여받은 인간이었다.

    소멸된 신은 사라지지만 인간의 육신은 죽어도 그 영혼은 사라지지 않았다. 인간의 영혼은 새로운 육신을 얻어 끝없는 삶을 이어 갔다.

    신들이 가진 어떠한 권능으로도 인간의 영혼을 멸할 수는 없었다. 인간이 가진 불멸의 영혼이야말로 가장 강대한 권능이었다.

    그리하여 강대한 힘과 절대적인 권능을 가지고도 인간에 의해 존재가 사라지는 신들이 생겨났고, 신을 죽인 인간은 더욱 큰 힘을 갖고 스스로 영웅이 되었다.

    더 이상 신들은 이 땅의 절대적인 지배자가 아니게 되었고, 결국 신들은 이 땅에서 떠나기로 하였다.

    하지만 이 땅을 떠나기를 원하지 않는 신들도 있었으며, 인간에게 잊히는 것을 원하지 않는 신들도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이 땅에 남았으며,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이 가진 힘의 일부를 이 땅에 남겨 두었다. 그것은 신의 힘을 부여받은 신의 권속이기도 했고, 신의 힘이 담긴 성물이기도 했다.

    마침내 차원을 가르고 신들이 떠난 이 땅의 유일한 지배자는 인간이 되었으며, 이 땅에 남은 신들의 흔적은 종교가 되었다.

    -발트 저, 프레모 신화 중에서.』

    하아, 깊은 한숨 소리와 함께 황금을 녹인 듯한 짙은 금발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지겨워. 맨날 같은 소리.”

    금발의 소녀가 입을 삐죽이며 하는 소리에 곁에 선 여자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베아트리스 님께서는 성 상티모니아 유일의 성녀이십니다. 성 상티모니아의 수호자께서 우리의 역사를 아는 것은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성녀면 뭘 해.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머리색과 꼭 같은 황금빛 눈동자에는 불만스러움이 가득했다.

    성녀 베아트리스. 그녀는 성 상티모니아의 정점에 위치한 교황의 친딸이자, 유례없이 강한 성력을 지닌 성 상티모니아 유일의 성녀였다.

    “레지나, 그거 알아? 난 태어나서 살리바 대신전 밖을 나가 본 적이 세 번― 아니, 네 번인가? 그게 전부야.”

    “성녀님께선 귀한 분이시니까요.”

    성 상티모니아의 수석 사제 레지나의 대답에 베아트리스는 무릎 위에 턱을 괸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도 지겨워.”

    “성녀님의 강한 성력은 신의 재림이 머지않았음을 알리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레지나는 베아트리스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 어떤 성물보다 더욱 존귀한 존재가 바로 성녀님이십니다.”

    성 상티모니아는 성물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운 종교였다.

    과거 프레모 대륙에는 이 땅에 존재했던 신들만큼이나 셀 수도 없이 다양한 종교들이 존재했다. 신이 남긴 성물이나, 신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는 이가 워낙 많아 그들을 중심으로 종교가 형성되었다.

    성 상티모니아는 난립한 종교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 자신들이 가진 성물을 일반에 공개했다.

    사람들은 신의 힘이 깃든 성물을 숭배하고, 경애하였으며, 세력이 약한 종교는 스스로가 가진 성물을 성 상티모니아에 바치며 성 상티모니아의 세력으로 흡수되었다.

    그렇게 성 상티모니아는 단일 신과 체계적인 교리보다는 다양한 신을 포용하고, 복합적이고 확장성을 가진 교리로 세력을 키워 나갔다.

    이렇듯 성 상티모니아의 가장 큰 기반은 바로 신의 힘이 깃든 성물, 그 자체였다.

    그리하여 성 상티모니아에서는 성물에 남다른 친화력을 가진 자들을 사제로 뽑아 길렀고, 사제들의 성물 친화력을 성력(聖力)이라고 칭했다.

    하지만 신이 이 땅을 떠난 시간이 오래될수록 성물에 깃든 신의 힘은 점점 약해졌고, 성력을 타고나는 이들 또한 점점 줄어들었다.

    성 상티모니아의 영향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레 미미해졌다.

    “그 모두가 강력한 성력을 타고난 성녀님을 지키고자 함이니 부족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유례없이 강한 성력을 타고난 성녀 베아트리스는 그 존재만으로도 성 상티모니아의 보물이었다. 하지만 베아트리스는 신전에 안치된 성물 같은 자신의 처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가 부족한지를 어떻게 알아. 애초에 난 아무것도 모르는데…….”

    “베아트리스 님.”

    “됐어. 장미 정원에 갈 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베아트리스가 치마를 손으로 툭툭 털었다.

    “교황 성하께 가시겠습니까?”

    “저녁 먹기 전에 뵈려고.”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벌써 낙조로 물들어 울긋불긋했다.

    “유진은 어디쯤 왔을까?”

    저물어가는 노을을 보고 있으면 가장 보고 싶은 얼굴이 떠올랐다.

    늘 혼자였던 베아트리스에겐 성물 카푸트만이 유일한 가족이었다. 언제고 나타날 카푸트의 참된 주인만을 하염없이 기다린 날들이었다.

    그리고 유진이 살리바 대신전에 나타났던 날, 그 모든 기다림을 한순간에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가슴 가득 차오르는 충족감, 오래도록 기다려 온 대상에 대한 무한한 애정.

    유진이 없는 살리바에 혼자 남겨지는 건 그가 아예 없었던 과거보다도 더 끔찍했다.

    “늦어도 사나흘 뒤에는 도착하실 겁니다.”

    “그 여자도 같이 오겠지?”

    “…….”

    “메르디에스의 딸 말이야.”

    걷던 걸음을 멈춘 베아트리스가 제 속의 불안을 잠재우려는 듯 양손을 꼭 쥐었다.

    “레지나, 유진이 나에게 뭘 부탁한 거 처음이야. 그런데 그게 다른 사람을 도와 달라는 일일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어.”

    석양은 베아트리스의 황금빛 머리카락에도 새하얀 볼에도 내려앉아 그녀를 온통 붉게 물들였다.

    “그래도 괜찮아. 유진이 다시 떠난다고 하지만 않으면 난 다 괜찮아.”

    모두가 떠나고 석양만이 홀로 남은 방 안은 유난히도 쓸쓸하고 고요했다.

    * * *

    배에서 가장 크고 안락한 선실은 아리아드네가 아닌 유진의 차지였다. 적어도 배에서만큼은 그가 가장 약자였다.

    팔로 가린 그의 얼굴은 보름 새 몰라보게 핼쑥해졌고, 파리한 얼굴은 입김 한 번에 흩어져 사라질 연기처럼 위태로웠다.

    아리아드네가 자신을 부축해 선실로 데려온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것이 한 시간 전이었는지 하루 전이었는지도 가물가물했다.

    ―쉬어. 필요한 게 있으면 탁자의 종을 치고. 그러면 옆방에 있는 사람이 올 거야.

    여자가 그렇게 말을 하고 떠난 것이 언제였더라.

    물 위에서 흔들릴 때마다 내면의 온갖 것들이 같이 오르내리는 것만 같았다. 물에 잠겼다 떠오르는 것처럼 의식은 희미해지다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잠을 자도, 눈을 감아도 쉬는 것 같지가 않았다.

    일주일 정도는 속이야 어떻든 그럭저럭 버텨 냈으나 열흘이 고비였다. 열흘째부터는 지옥에 갇힌 기분이었다. 물 위에 둥둥 떠 있으려니 속은 속대로 뒤집히고, 머리는 누가 휘젓는 것처럼 아팠다.

    ‘나, 잘 살게. 그러니까…….’

    ‘……왜, 안 죽어?’

    ‘당신이 필요해.’

    ‘나, ……의 신부가…….’

    ‘사랑이 끝났으니까.’

    ‘내 손을 잡아. 선택은 당신 몫이야.’

    ‘살려 줘, 제발…….’

    ‘나를, 내 시간을 돌려준 게 당신이었어?’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목소리 위로 그 여자의 말이 덧입혀졌다.

    눈이 아리도록 푸른 이곳의 하늘처럼, 보는 것만으로도 뼛속까지 시린 바다처럼 새파란 눈동자.

    란데르의 메르디에스 별장에서 처음 여자를 보았을 때부터 제 머릿속은 온통 그 여자 차지였다. 무지개가 뜬 호수에서 여자를 본 건 십 분 남짓에 불과했다.

    그런데 대체 왜…….

    그때, 따뜻한 손길이 그의 얼굴에 닿았다. 오한으로 차게 식은 몸이 뜨거워졌다. 배가 또다시 출렁였다. 선실 가득 물이 들어찬 것처럼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아니, 어쩌면 이곳은 방주의 분수일지도 몰랐다. 온몸을 감싼 한기와 물속에 잠긴 것처럼 울렁이는 감각, 점점 흐려지는 의식. 모든 것이 그날 같았다. 성화(聖畫) 속의 그 여자가 환상처럼 나타난 것까지도.

    흰 꽃을 품에 안은 여자가 맑은 하늘 같은 눈동자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을 뻗자 여자가 제 손에 닿았다. 여자의 피부는 차게 식은 제 몸과는 달리 따뜻한 온기가 돌았다.

    하늘색 눈동자가 깜박 눈꺼풀 속으로 사라졌다 나타났다. 여자의 눈동자가 모습을 감춘 찰나가 영원처럼 느껴졌다.

    선실 가득 들어찬 물이 목구멍을 지나 폐까지 침범했다. 공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한 액체가 몸 내부를 잠식했다. 숨이 막혀 가슴이 뻐근해졌다.

    눈앞의 여자를 구명줄처럼 끌어당겼다. 마치 진짜인 양 질량을 가진 무엇이 남자의 몸 아래 깔렸다. 유진의 아래 자리한 푸른 눈동자가 놀란 듯 크게 깜박였다.

    “……진짜 같잖아.”

    유진은 푸른 눈동자를 감싼 눈꺼풀을 손가락 끝으로 쓸어내렸다.

    “뭐가 진짜 같은데?”

    환상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말이 여자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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