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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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분이 섞인 바닷바람이 돛대에 달린 흰 천을 흔들고 지나갔다. 바람에 아리아드네의 옅은 금발도 어지럽게 흩날렸다.

    포미스해(海)에서 출발한 배는 어느덧 성 상티모니아의 성도 살리바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성녀 베아트리스를 끌어들인 아리아드네의 수완에는 레너드조차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내가 언제 널 한 번이라도 이겨 본 적이 있었니? 가면 숭어 어란이나 잔뜩 사 와. 가서 위험한 일은 하지 말고.

    아리아드네는 아버지가 이십 년은 먹고도 남을 만큼의 어란을 사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저기가 바로 살리바 대신전입니다.”

    안테로가 손가락으로 한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교황청을 겸하는 살리바 대신전은 멀리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높고 화려했다. 황금빛 도료로 외벽을 칠한 살리바 대신전은 마치 건물 전체가 황금처럼 보였다.

    “이젠 거의 다 왔나요?”

    “반나절은 더 가야 합니다.”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안테로가 얌전히 대답했다. 아리아드네의 뇌물을 받은 뒤로 성 상티모니아의 주교는 몹시도 공손해졌다.

    “그래요? 그것참, 걱정이네.”

    아리아드네의 시선이 배의 난간을 부여잡고 비척대는 남자에게 닿았다. 물에 젖은 종이처럼 흔들리던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육로로 갈 걸 그랬나?”

    아리아드네는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유진의 얼굴을 보며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유진이 뱃멀미를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메르디에스는 이번 항해를 위해서 대형 선박 한 척과 중형 선박 세 척을 동원했다. 아리아드네가 탄 배는 세 개의 돛대를 단 대형 선박이었다.

    마차보다 더 편할 거라던 레너드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바다를 택한 것에 모두가 만족했다. 단 한 사람만 제외하면.

    “디움 산맥 사람도 아니고.”

    프레모의 북쪽 내륙을 가로지르는 하늘에 가장 가까운 땅, 디움 산맥을 끼고 사는 사람들은 유독 물에 약했다. 평생 바다를 볼 일도 없거니와 큰 호수나 강도 드문 지리적인 특성 때문이었다.

    “올 때는 육로로 온 터라 뱃멀미가 저렇게 심하실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내내 누워 있으니 멀미가 더 심해지는 것 같다며 갑판으로 나온 유진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그는 난간을 부여잡고는 겨우 몸을 지탱했다. 저걸 지탱했다고 볼 수 있다면 말이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은 마치 밀가루를 뒤집어쓴 것 같았다. 난간을 잡은 손은 어찌나 힘을 줬는지 핏줄이 선명하게 돋아 푸르게 비쳤다.

    남자가 더는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난간에 등을 기대고는 눈을 감아 버렸다.

    “방문―”

    안테로가 유진을 부르며 다가서려는데 그보다 빨리 움직인 사람이 있었다.

    “좀 괜찮아? 선실에 들어가서 쉬는 게 낫지 않겠어?”

    아리아드네는 바닥에 주저앉은 유진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찌푸린 얼굴이 서서히 펴지더니 이윽고 유진이 감은 눈을 떴다.

    눈꺼풀 아래 숨겨진 회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겨울 늑대의 털 같기도 하고, 언젠가 보았던 눈 뭉치 같기도 한 신비한 색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유진의 회색 눈동자와 마주할 때마다 겨울의 어느 날이 떠오르곤 했다. 처음으로 눈을 보았던 그날의 기억이.

    “됐어.”

    아리아드네의 제안에 유진은 힘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누구보다도 강하다고 생각한 남자의 무력한 얼굴은 신기하기도 했고, 안쓰럽기도 했다.

    어쩐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평소 남자를 둘러싼 거칠고 사나운 분위기가 사라지자 섬세한 이목구비가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바람 좀 쐬면 괜찮을 줄 알았지.”

    “미안해. 당신이 이럴 줄 알았으면 육로로 움직였을 텐데…….”

    “됐어. 나도 내가 이럴 줄은 몰랐으니까.”

    훨씬 빠른 육로를 두고 배는 더 걸리는 바닷길을 택한 건, 메르디에스에서 성도 살리바로 가기 위해서는 왕도 릭센과 케이루스의 땅을 지나야 하기 때문이었다.

    일레체로 오라는 카이엔의 요청을 무시한 여정이라 그를 만나 좋을 것이 없었다. 과거, 캐롤린에게 있었던 일을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지금 카이엔을 만나는 일은 없어야 했다.

    ―나는 여기 남으라고? 왜?

    캐롤린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캐롤린, 난 이번 실종 사건이 단순한 사고라고 생각하지 않아.

    ―……사고가 아니면?

    ―엘바에서 구조 신호를 보낸 상단원은 마물이 나타났다고 했어. 이 시기 바닷가에서만 나타났던 메로우가 메르디에스 영지의 호수에서 나타난 게 과연 우연일까?

    ―그럼 누군가 고의로 그랬을 거라는 말이야?

    ―그걸 지금부터 알아내야지. 엘바에서 일어난 일은 내가 알아볼게. 넌 여기에서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줘.

    ―…….

    ―내가 여전히 알버트를 향한 네 마음을 몰랐다면, 그래서 엘바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러면 넌 어떻게 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거야?

    캐롤린은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내가 아는 캐롤린 리스벨이라면 분명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알버트를 찾으려고 했을 거야.

    ―…….

    ―캐롤린, 넌 이곳에 남아서 네 방식대로 알버트를 찾아. 단서가 많을수록 알버트를 살릴 확률도 높아지는 거야.

    아리아드네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캐롤린의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캐롤린, 날 믿어 줘. 반드시 네 앞에 알버트를 데려올게. 그러니까 너도 내게 알버트를 데려와 줘.

    ―왜 내가 남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네 말대로 할게. 나는 나보다도 리아 널 더 믿으니까…….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할게.

    캐롤린이 과거처럼 움직여 줘야 카이엔이 꾸미는 음모에 다가갈 수 있었다. 과거의 캐롤린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밝혀내기 위해서라도.

    그런 이유로 바다를 택한 건데 곧 죽을 사람처럼 힘들어하는 유진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반나절만 있으면 도착할 거래.”

    아리아드네는 어렸을 때부터 상처 위에 돋아난 딱지를 유난히 참지 못하고 뜯어내곤 했다. 덜 아문 딱지를 억지로 뜯으면 발간 속살이 드러났다. 쓰라린 상처에 아파하면서도 다음에 딱지가 앉으면 참지 못하고 또 뜯었다.

    무엇이든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지르는 성격 탓이었다.

    “그 전에 내가 죽지 않는다면 말이지.”

    남자가 끔찍하다는 얼굴로 말을 씹듯이 뱉어 냈다.

    “안 죽어. 쉽게 죽을 사람은 아니잖아.”

    아리아드네는 등을 기댄 남자의 맞은편에 쪼그려 앉았다. 단단히 두른 가면이 벗겨진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마치 상처 딱지 위를 만질 때처럼 간질간질한 기분이었다.

    “세상천지에 안 죽는 사람이 어딨어.”

    남자의 새까만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더 검게 보였다. 아리아드네는 손을 뻗어 남자의 젖은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란데르의 여름 별장에서 남자를 처음 봤을 때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림자마저 유독 까맣게 느껴지는 사람이라고.

    ‘당신이 정말 나를 찾아왔던, 내 시간을 돌려준 그 사람일까?’

    아리아드네는 요즘 유진을 볼 때마다 그 생각뿐이었다. 아무리 다른 생각을 하려 해도 그림자로부터 도망치려는 시도가 불가능한 것처럼 번번이 지고 말았다.

    “그래서 말인데, 정말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거야?”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유진이 지겹다는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대체 무슨 헛소리를 그렇게 지치지도 않고 해. 그런 방법이 있으면 내 시간부터 돌리겠다.”

    유진이 선실로 들어가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왜? 당신에게도 되돌리고 싶은 순간이 있어?”

    아리아드네가 유진을 붙들고 물었다.

    어쩌면 유진은 자신이 어렵게 얻은 기회를 아리아드네에게 넘겨주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보답은 대체 무엇으로 치러야 하나. 아리아드네는 유진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무섬증이 들었다.

    “그런 순간이 없는 사람도 있어?”

    유진은 자신을 절박하게 붙드는 아리아드네를 황당하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그게 뭔데?”

    유진의 사연이 아리아드네보다 덜 절박할 거라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유진의 것이어야 마땅한 기회를 빼앗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그것을 알았다고 해도 그때의 자신이 그 기회를 포기할 수 있었을까.

    ‘아니, 결코 포기하지 않았겠지. 추악한 이기심이라 할지라도, 세상 모두가 날 비난한대도, 나는…….’

    유진이 세상의 고민이란 고민은 죄다 끌어안은 얼굴을 한 아리아드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불쑥 다가온 손이 아리아드네 어깨를 가볍게 쥐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 배에 타기 전으로 돌아가려고 그런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혼자 따로 가면 갔지, 무슨 좋은 꼴 보겠다고 이 배에 탔겠어?”

    아리아드네는 멀어지는 남자를 보며 아, 하는 멍청한 소리만 내뱉었다. 묵직하게 가슴을 누르던 무엇이 순식간에 무게를 잃었다.

    그때 배가 출렁이며 흔들렸다. 선실로 돌아가던 남자가 비틀거렸다.

    “어, 괜찮아?”

    서둘러 다가간 아리아드네가 유진을 부축하여 선실로 데려갔다.

    “저게 대체 뭡니까…….”

    둘을 지켜보던 안테로의 입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 탄성이 흘러나왔다.

    “뭐 이상한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때마침 지나가던 아리아드네의 사촌 레이먼드가 안테로에게 물었다.

    “방문자님이 공녀의 어깨에 손을 이렇게…….”

    안테로가 제 어깨를 툭툭 치며 중얼거렸다. 레이먼드는 그것이 왜 문제냐는 얼굴로 되물었다.

    “어깨 정도야……. 아, 혹시 살리바에서는 가벼운 신체 접촉도 문제가 됩니까?”

    레이먼드의 물음에 안테로가 횡설수설하며 말을 이었다.

    “아니, 방문자님은 원래 남이 제 몸에 닿는 거 끔찍하게 싫어하시는데……. 그러니까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 손을 대는 일도 거의 없고.”

    안테로가 제 얼굴을 더듬더듬 만지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더구나 요즘은 멀미 때문에 장난 아니셨거든요?”

    아리아드네가 제 얼굴을 만지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던 것도, 아리아드네의 어깨에 손을 올리던 모습도 모두 낯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낯설었던 건, 항해 내내 멀미로 고생하느라 말하는 것도 귀찮아하던 유진이 제법 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방문자님이 그럴 리가 없는데…….”

    안테로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가요?”

    레이먼드가 멍하게 서 있는 안테로를 가만히 쳐다보다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파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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