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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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릇푸릇한 풀들이 바람결에 누웠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더운 바람에 실려 오는 향기마저도 달콤했다. 이쯤 되면 그도 이 땅의 풍요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진은 자신에게 주어진 별채에서 느긋하게 바람을 쐬고 있었다.

    “정신 사납게 굴지 말고 말해.”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안달복달하는 얼굴로 유진 주위를 서성이던 안테로가 그를 바라보았다. 유진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꿀꺽, 침을 크게 한 번 삼킨 안테로가 단단히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곳엔 언제까지 머무실 예정입니까?”

    “글쎄.”

    슬쩍 눈을 뜬 유진이 안테로를 바라보았다. 안테로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성도에서 방문자님을 기다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원래 예정보다도 외유가 길어지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이만 귀환 준비를 하심이 어떨지…….”

    차기 추기경을 노리는 안테로로서는 성도 밖을 떠돌아다니는 것이 달가울 리 없었다. 그는 성 상티모니아의 성도 살리바가 그리워 미칠 지경이었다.

    “예정? 애초에 나는 예정이라는 게 없었는데.”

    “저같이 신실한 사제들은 성도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성력이 충만하게 차오르니 이런 저를 가엾게 여기신다면…….”

    가엾은 사제 안테로의 눈이 욕망으로 이글거렸다.

    “…….”

    하지만 그의 욕망은 유진의 차디찬 눈빛과 마주하는 순간, 푸시시 꺼져 버렸다.

    “신실한 종 안테로, 방문자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욕망을 끝까지 고수하기엔 안테로는 패기가 좀 부족했다. 그가 자신의 부족한 패기를 원망하고 있을 때였다.

    “안테로 주교님, 지내기는 불편하지 않으신가요?”

    메르디에스의 후계자, 아리아드네가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성 상티모니아의 축복 속에 평안하시길. 배려해 주신 덕에 편안히 지내고 있습니다.”

    안테로가 성 상티모니아식 인사를 건넸다.

    마주한 메르디에스 공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평소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데 어쩐지 그는 등골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그러신가요? 지난번 저와의 약속은…….”

    아리아드네가 미소 띤 얼굴로 슬쩍 말을 흐렸다. 얼마 전 메르디에스 공녀가 그에게 ‘성채’와 관련된 것을 물은 적이 있었다.

    적지 않은 금액을 쥐여 주는 통에 시키지도 않은 ‘비밀 엄수’를 약속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는 반나절도 되지 않아 유진에게 나불나불 불어 버렸다.

    “그, 그것은…….”

    약속을 어겨 놓고도 편히 지냈냐고 책망하는 듯한 말에 안테로는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제 정성이 모자랐던 걸까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쩔쩔매고 있으니 메르디에스 공녀가 한쪽 손을 슬쩍 들었다.

    “그래서 정성을 좀 보태고자 준비한 게 있답니다.”

    그게 무슨……. 어리둥절한 안테로 앞에 나무 궤짝이 줄줄이 놓였다. 그것을 들고 온 하인들이 궤짝의 덮개를 동시에 열었다.

    궤짝 안을 가득 채운 것은 순도 높은 황금이었다. 금괴로 가득 찬 궤짝이 무려 스무 개였다.

    “이만하면 제 성의를 알아주실까요?”

    천사의 얼굴을 한 메르디에스 공녀가 싱긋 웃으며 궤짝에 든 금괴를 꺼내 안테로의 손에 직접 쥐여 주었다.

    “아니, 지난, 지난번에 주신 것도 아직…….”

    자꾸만 벌어지는 입꼬리를 간신히 부여잡은 안테로가 두 손으로 금괴를 꼭 쥐고는 더듬거렸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어이없다는 얼굴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유진이 물었다.

    “뇌물. 잘 봐 달라고.”

    아리아드네가 싱긋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검은 봉투를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

    “당신 것도 있어.”

    유진이 피식 웃으며 봉투를 받아 들려 하자 그녀가 봉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하나에 하나씩. 기억하지?”

    “물론.”

    그의 대답에 아리아드네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유진이 받은 검은 봉투에는 삼지창 두 개가 교차된 문장이 찍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뭘 해 주면 되지?”

    검은 봉투에 담긴 서신을 탁자 위에 올려 둔 유진이 아리아드네에게 물었다.

    “나 엘바에 데려가 줘. 당신과 함께라면 갈 수 있잖아.”

    교차된 삼지창은 페렌트의 다섯 가문 중 하나인 리카서스의 문장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이계의 방문자 유진이 리카서스의 성물 ‘무렉스의 호른’을 보고 싶어 한다는 서신을 보냈다.

    그 답이 오늘에야 도착했다. 리카서스의 답은 승낙이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엘바?”

    유진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물었다. 반짝이는 금괴를 쥐고는 황홀경에 빠져 있던 안테로가 냉큼 대답했다.

    “엘바는 성 상티모니아의 자치령인 랭스턴 공국의 영지입니다. 대양 레니아에 위치한 섬이기도 하고요.”

    이 많은 황금을 안겨 준 ‘귀인’에게 최대한 도움이 되고 싶었던 안테로는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랭스턴 공작이 다스리는 땅인데 워낙에 폐쇄적인 곳이라 출입이 쉽지 않습니다. 제한된 구역을 그것도 상인들에게만 개방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말을 마친 안테로가 아리아드네를 보며 손에 든 금괴를 살짝 들어 보였다.

    “나와 함께라면 가능하고?”

    안테로의 설명을 들은 유진이 물었다.

    “아, 물론 원칙대로라면 신의 현신이신 방문자님께서 밟지 못할 성 상티모니아의 땅이란 없습니다.”

    모든 일이 원칙대로 돌아가진 않는 법이다. 애초에 저런 단어를 꺼냈다는 자체가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원칙대로라면?”

    유진의 물음에 안테로가 눈동자를 슬쩍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 방문자님과 같은 선례가 없었던지라 방문자님의 모든 권한이 교황 성하와 동급으로 명시된 것이 조금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교황과 동급이라는 게 문제란 말인가? 유진은 자신의 권한이 무엇인지 궁금해한 적은 없었지만 이쯤 되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왜?”

    “랭스턴 공작은 성 상티모니아 최고 의결 기구인 멘술라의 한 축이자 성 상티모니아 내 명실상부한 이인자입니다. 랭스턴 공작이 다스리는 엘바는 정당한 명분 없이는 교황 성하도 그곳을 침범할 수가 없습니다.”

    랭스턴 공작이라면 유진도 얼굴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교황의 이복동생으로 어딘가 불쾌한 구석이 있는 사내였다.

    “그래서?”

    금괴를 쥔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안테로가 아리아드네의 얼굴을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방문자님만이라면 모르나 메르디에스 공녀까지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안테로는 그것으로 자신이 할 말은 끝이라는 듯 입을 꾹 닫았다. 유진이 탁자 위에 놓인 검은 봉투를 집어 들어 보였다.

    “그렇다는데? 다른 요구를 하는 게 낫지 않겠어? 당신이 원하는 게 무력으로 밀고 들어가는 건 아닐 거 아냐.”

    아리아드네가 그것을 원한다면 마치 그렇게 해 주기라도 할 것 같은 말투였다.

    “제 성의가 부족했군요.”

    그녀는 제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린 안테로를 보며 다시 싱긋 웃었다.

    “아니, 이건 성의 문제가 아니라…….”

    화들짝 놀란 안테로가 아리아드네를 보며 펄쩍 뛰었다. 이만한 황금이 부족하다 하면 신벌을 받을지도 몰랐다.

    “제 마음이니 부담 갖지 마세요.”

    천사의 얼굴을 한 아리아드네가 손을 들자 작은 목함 하나가 나무 궤짝 위에 올려졌다. 안테로가 떨리는 손으로 목함을 열어 보았다.

    “아, 이것은…….”

    목함 속에는 주먹 두 개만 한 다이아몬드가 찬란한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다이아몬드를 본 안테로가 홀린 듯한 얼굴로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방,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정신을 차린 안테로가 헙 하는 소리와 함께 제 입을 막았다. 눈을 굴리며 눈치를 보는 것 보니 말하기 곤란한 모양이었다.

    짝! 아리아드네가 여전히 미소 가득한 얼굴로 가볍게 손뼉을 부딪치자 조금 전과 같은 모양의 목함이 줄지어 들어왔다.

    목함은 황금 궤짝과 마찬가지로 스무 개였다. 스무 개의 목함이 일제히 입을 벌렸다. 각기 다른 색의 다이아몬드가 목함 속에 나란히 누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아니, 정말 이러시면…….”

    소중하게 쥐고 있던 황금이 돌덩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안테로는 신을 마주한 성직자의 마음이 되어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그는 더는 망설이는 기색조차 없이 술술 입을 열었다.

    “새로운 신전을 세우는 것이나 정화한 성물을 성소에 안치한다는 명분 정도라면 가능합니다. 둘 중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신전을 세우려면 무엇이 필요하죠?”

    “신을 모실 땅인 성지와 신의 힘을 믿는 성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의 힘이 깃든 성물이 필요합니다.”

    “엘바에 새로운 신전을 세우는 것이 가능할까요?”

    엘바는 성 상티모니아의 이인자인 랭스턴 공작이 대대로 다스려 온 땅이었다. 그럴듯한 신전이 없을 리가 없었다.

    이미 확고한 세력을 지닌 신전이 있는 곳에 새로운 신전을 세우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으음, 그것보다는 정화한 성물을 성소에 안치하는 쪽이 쉬울 겁니다. 안치할 성물을 구하시어 그것을 꼭 엘바에 안치해야 한다고 우기시면 됩니다.”

    “성물을 정화하고 안치할 성소를 정하는 것은 안테로 주교님도 할 수 있나요?”

    그의 천사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하고 싶었지만.

    “축성이라면 몰라도 정화가 가능한 것은 성 상티모니아에서 오직 한 분뿐입니다.”

    안테로는 아쉬움을 억누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정화’는 가장 강한 성력을 지닌 오직 한 사람에게만 부여되는 특권이었다.

    “그게 누구죠?”

    현존하는 인물 중 가장 강한 성력을 지닌 사람은…….

    “성 상티모니아 유일의 성녀, 베아트리스 님만이 가능하십니다.”

    바로 유진이 이 땅에 나타나리란 예언을 한 성 상티모니아 유일의 성녀 베아트리스였다.

    “성녀님께서 제 부탁을 들어주실까요?”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안테로의 시선이 유진을 향했다.

    “성녀님께서는 방문자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실 겁니다.”

    성녀 베아트리스가 성물 카푸트의 주인을 오래도록 기다려 왔고, 카푸트의 주인인 유진에게 맹목적으로 군다는 것은 제법 유명한 이야기였다.

    ‘분명 잘된 일인데…….’

    흐음, 애매한 감탄사를 흘린 아리아드네가 유진을 슬쩍 흘겨보며 말했다.

    “결국 당신이네.”

    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하나에 하나씩.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의 손에는 검은색 봉투가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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