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148)
  • * * *

    “백작께선…….”

    아리아드네는 말을 채 마치지 못하고 뒷말을 삼켰다. 리스벨 백작이 알았을 리 없다.

    커티스가 알버트를 아무리 아낀다 한들 괜찮은 수하에 불과했다. 알버트와 캐롤린이 엮이는 순간 커티스가 누구를 선택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캐롤린이 제게 말하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자신이 알았다 한들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캐롤린 제 말대로 평생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마음이었다.

    “리아, 알지? 그 사람 잘못이 아니야. 다, 전부 다 내 잘못이야.”

    캐롤린은 몇 번이나 겁에 질린 목소리로 제 탓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신분 차 나는 스캔들이 발생했을 때, 가장 편리하고 확실한 해결책은 신분이 낮은 상대를 정리하는 것이다. 죽은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니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전이라면 더욱더.

    캐롤린이 이 마음을 누군가에게 들키는 순간, 알버트의 미래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커티스가 관용을 베풀어 어떻게 목숨을 부지한다 해도, 기사단에서 쫓겨나 날품팔이나 하는 용병으로 전락할 것이 뻔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지 모르는 이런 상황에서도 꼭꼭 감춰야 할 마음이라니. 캐롤린의 마음이 어떠할지 감히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과거의 자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어쩌면 알버트가 죽어서 다행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힘들겠지만 캐롤린의 마음만 정리하면 될 일이라고, 차라리 그게 모두에게 더 나은 선택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기억은 시간이 지난다고 흐려지는 것이 아니다.

    아리아드네는 캐롤린이 평생 그런 기억을 품고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았다.

    캐롤린의 앞날에 어떤 고난이 기다리더라도, 알버트는 살아야 했다. 이미 죽었다면 그의 시신이라도 찾아야 했다. 그래야 남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캐롤린, 알아.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어.”

    아리아드네의 말을 들은 캐롤린이 고개를 들었다.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던 듯 캐롤린이 멈칫하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가린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끝없이 흘러나왔다.

    알버트를 마음에 담은 그 시간 동안, 캐롤린은 아마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을 거다. 누군가에게 제 마음을 이해받을 거란 기대도 마찬가지였을 테고.

    모든 것이 그를 마음에 품은 제 잘못이라 생각했겠지. 하지만 사랑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나. 아리아드네는 오래도록 힘들었을 캐롤린이 안타까웠다.

    “그 사람 찾아서 네 앞에 데려올게. 그러니까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네 앞날이 너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리아드네는 캐롤린을 작게 도닥였다. 그 자리에 주저앉은 캐롤린이 엉엉 목 놓아 울었다.

    아리아드네는 알지 못했던 과거의 파편 한 조각이 떨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 속이 보이지 않았다.

    알버트의 죽음, 이 일이 캐롤린의 배신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알버트의 죽음도, 커티스의 죽음도 캐롤린이 아리아드네를 배신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대체 네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답해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 * *

    “아리아드네 님, 성주님께서는 지금 리스벨 백작과 엘바 문제로―”

    “알아, 그 건 때문에 온 거야.”

    아리아드네는 총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레너드의 집무실에 쳐들어갔다. 커티스와 이야기를 나누던 레너드가 의아한 얼굴로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너 얼굴이 왜 그래? 누구한테 돈이라도 떼였어?”

    레너드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을 들먹이는 걸 보면 제 얼굴이 심상치 않긴 한 모양이었다.

    “아버지. 저…….”

    “잠깐.”

    손을 들어 아리아드네의 말을 막은 레너드가 오른쪽 가슴에 손을 얹고는 심호흡을 했다.

    “난 요새 네가 날 그렇게 부르면 좀 무섭더라. 잠시만 있어 봐. 마음의 준비 좀 하고.”

    “아버지, 심장은 반대쪽이에요.”

    아리아드네의 지적에 레너드가 뭘 그런 걸 일일이 지적하느냐는 듯 흘겨보고는 재빨리 손을 바꿨다.

    레너드의 장난에 맞장구칠 기분이 아니었다. 자리에 털썩 앉은 아리아드네가 초조한 듯 손톱을 깔짝대다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물었다.

    “마음의 준비는 다 하셨어요?”

    “넌 왜 그렇게 성질이 급하냐? 대체 누굴 닮아서…….”

    아리아드네는 그저 가만히 레너드를 바라보았다. 옆에 있던 커티스도 그걸 몰라서 묻느냐는 얼굴로 동참했다. 둘의 시선에 머쓱해진 레너드가 큼큼, 소리를 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신속과 정확’이 우리의 신념 아니냐.”

    언제부터 그런 게 우리의 신념이었담? 아리아드네는 레너드의 기분에 따라 생겨났다 사라지는 수많은 신념에 의미를 둬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 무슨 일이냐?”

    레너드가 아리아드네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저 엘바에 좀 가야겠어요.”

    아리아드네의 대답에 먼저 반응한 건 커티스였다.

    “공녀께서 거긴 왜―”

    “네가 거기를 왜 가!”

    잠시 멍하게 있던 레너드가 정신을 차리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머리가 푹푹 끓던 아리아드네는 자신보다 더 흥분한 레너드와 마주하자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캐롤린, 너와 알버트 관계 아무도 모르는 거 확실해? 혹시라도 이 일을 아는 사람이 있어?

    그렇게 물으면서도 제 망상이 지나치다 여겼다. 아리아드네조차 알지 못했던 일인데. 그런데, 혹시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당연하고, 그 사람조차 모르는걸. 어차피 내 짝사랑이니까. 알버트는 나한테 관심 없어.

    마지막 말은 좀 시무룩한 어조였다. 아리아드네는 기가 막혔다.

    캐롤린이 원하기만 하면 가지지 못할 남자는 흔치 않았다. 가문이나 지위는 차치하고, 상냥한 성품과 고혹적인 외모로 캐롤린은 사람들의 호감을 독차지하곤 했다.

    그런 캐롤린이 짝사랑이라니 다시 들어도 황당한 말이었다.

    ―뭐? 심지어 걘 널 안 좋아한다고?

    ―……응, 어차피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아리아드네의 눈치를 살피던 캐롤린이 무언가 떠올랐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아, 혹시…….

    ―조금이라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면 전부 말해.

    캐롤린은 확신이 없는 어조로 더듬더듬 말하기 시작했다.

    ―알버트가 엘바에서 실종된 사람을 찾는 수색대에 포함되었다길래 검에 다는 체인을 선물했는데…….

    ―그런데?

    ―선물을 사서 나오는 길에 카이엔 전하와 마주쳤어. 네 선물을 사러 오셨다고…….

    아리아드네는 순간 숨 쉬는 것도 잊을 정도로 화가 났다. 차라리 제 망상이길 바랐다. 제 걱정이 지나친 것이었으면 했다.

    캐롤린의 불행이 짜 맞춰진 각본처럼 느껴지는 건 자신의 기우일 거라고. 정말 캐롤린의 그 모든 불행이 카이엔이 계획한 거라면 아리아드네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네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라 그런가 보다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전하께서 네 선물을 고를 만한 곳이 아니었는데…….

    ―그곳이 어딘데?

    ―상업 2지구의 리벤티아.

    머리가 부글부글 끓어서 당장이라도 카이엔을 찾아가 멱살을 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대체 무슨 짓을 꾸민 거냐고.

    리벤티아에 보낸 사람이 돌아왔다. 예상대로 캐롤린이 나간 직후 들어온 남자 손님이 같은 물건을 사 갔다고 했다.

    구색을 갖추려 들여놓은 물건이 연달아 팔려 기억하고 있었노라는 그 말에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레너드에게 달려온 참이었다.

    “아버지, 엘바에서 사람이 실종된 건 이번 한 번만이 아니에요. 알고 계시죠?”

    “물론이다. 랭스턴 공국에서도 이 때문에 적잖게 골머리를 앓고 있잖느냐.”

    “그래서 그곳에서 실종된 사람들을 찾은 적은요?”

    최근 몇 년 사이 엘바에서 사람이 실종되는 일이 부쩍 늘었다. 그나마도 외부인이 실종되면서 겉으로 알려진 것일 뿐, 엘바에 사는 사람들까지 치면 실종 시기와 규모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었다.

    “없어요. 시신 다섯 구라도 찾은 우리가 운이 좋은 편이죠.”

    엘바를 다스리는 랭스턴 공국이 적극적이지 않은 탓이었다.

    “이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라졌어요. 제가 가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남은 가족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그 말은 할 수 있어야죠.”

    엘바에서 처음 구조 신호를 보낸 상단원은 분명 그렇게 알렸다. ‘마물’로부터 살려 달라고.

    왜 진작 마물에 주목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순간마다 마물과 관련된 사건이 있었다.

    먼저, 반 호수에 나타난 메로우. 이제까지 메로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모두 일곱 번. 일곱 번 모두 메로우는 물이 있는 곳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반 호수에 나타났던 것을 제외하면 메로우가 나타난 곳은 모두 바닷가였다. 그래서 메로우의 서식 환경이 염수일 것이라 예측했지만, 반 호수에 나타남으로 그 예측도 모두 백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면? 누군가 메로우를 인위적으로 조종한 것이었다면?

    메르디에스가 마물로 입은 피해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리스벨 백작께서는 성주님을 지키려다 그만…….]

    [공가의 사냥터에 마물이 나타났다는 말인가요?]

    레너드와 커티스가 사냥터에서 맞닥뜨린 마물. 이 모든 것이 과연 우연일까?

    마물의 출현은 본디부터 예측할 수 없는 자연재해로 여겨지기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 마물을 조종할 수 있다면? 과거 카이엔이 메르디에스와 리뮈르, 소르체를 압도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면?

    엘바의 실종 사건에 그 단서가 있을지도 몰랐다.

    알버트를 찾기 위해서, 카이엔의 음모를 밝혀내기 위해서, 카이엔이 가졌을지도 모를 그 힘을 막아 내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엘바에 가야 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엘바의 수색이 지지부진한 건 우리의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야. 우리는 이번 일에 랭스턴의 책임을 묻고 상호 협력을 위한 조약도 체결했다. 네 말대로 이만큼이라도 한 건 우리뿐이야.”

    레너드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미간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엘바가 얼마나 폐쇄적인지는 너도 잘 알지 않니? 지금 이만큼 협조하는 것도 드문 일이다. 널 그런 위험한 곳에 보낼 수는 없어.”

    폐쇄적인 탓에 외부인이 들어가기도 쉽지 않고,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알아내기 어렵다. 섬이라 물리력을 행사하는 데도 한계가 있고, 엘바에서 가장 가까운 내륙은 성 상티모니아의 성도 살리바와 타국인 아로스의 영토였다.

    그런 곳에 아리아드네를 보내지 못한다는 레너드의 주장은 옳았다.

    “엘바에 정식으로 초청받으면 보내 주실 건가요?”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엘바는 상인들의 교역 외엔 절대로 외부인을 받아들이지 않아. 추가로 수색대를 꾸린 것도 상인으로 위장해서 보냈다. 널 보내면서 그런 속임수는 통하지 않아.”

    레너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여기면서도 아리아드네의 자신만만한 태도가 불안했다.

    “안전만 보장되면 보내 주실 거죠?”

    “안전만 하다면야…….”

    레너드가 말끝을 흐리자 아리아드네가 생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하셨어요.”

    아리아드네가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엘바에 정식으로 초청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요즘처럼 예민한 시기라면 더더욱이나.

    ‘그런데 왜 속은 것 같은 기분이지.’

    레너드는 가슴께를 벅벅 긁었지만 불안한 기분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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