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148)

* * *

―캐롤린, 오늘부터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낼 알버트란다. 네가 알버트를 잘 보살펴 주렴.

또래보다 비쩍 마른 몸,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 캐롤린에게 알버트는 어쩌다 아버지가 거둬들인 고아 남자애에 불과했다.

끝까지 그렇게 남았다면 차라리 나았을까. 하지만 수백 번 생각하고, 다시 생각해도 그게 나았을 거라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를 사랑하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어도, 캐롤린에게 앞으로의 생이란 지옥에서 서서히 죽어 가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 해도, 그를 사랑하지 말걸, 그런 후회는 차마 하지 못했다.

“어휴, 어미는 애 낳다가 죽고 애비는 칼 맞아 죽었다잖아요. 백작님은 불길하지도 않나?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섬뜩하다니까.”

하녀들 몇몇이 어린아이의 불행을 두고 자기들끼리 온갖 소리를 하며 숙덕였다.

“에, 에구머니나!”

별별 소리를 쏟아 내던 하녀들은 그 자리를 지나던 캐롤린을 발견하고는 허둥지둥 일감을 챙겨 부리나케 자리를 피했다.

‘아버지께 말씀드려야 하나? 집사나 시녀장한테라도…….’

잠시 고민을 하던 캐롤린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나선다고 달라질 것 같지도 않고, 자신이 끼어들 만한 일도 아니었다.

후계 수업을 시작하면서 끊임없이 주지 받은 것은 위치와 책임이었다.

위치에 알맞은 행동을 해라. 책임을 도외시하지 마라. 그렇다고 네 책임이 아닌 일에까지 나서서 남의 권한을 빼앗지 마라.

캐롤린이 판단하기에 이 일은 고용인들 사이의 일이었다.

‘이 일을 해결할 권한과 책임은 일차적으로 집사에게 있고, 우연히 듣게 된 몇 마디 말로 참견을 하는 건 월권이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캐롤린은 그대로 가던 길을 종종거리며 걸었다.

내일은 리아와 말을 타기로 했으니, 마사에 가서 미리 말을 봐 둘 참이었다. 마사로 걸음을 옮기던 캐롤린은 큰 나무 뒤에 비쩍 마른 몸을 숨기고 있던 알버트를 발견했다.

‘아, 들었나?’

캐롤린은 자신이 한 말도 아닌데 고개를 숙인 알버트를 보는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자리를 피하려다 발끝으로 흙바닥을 헤집던 알버트와 눈이 마주쳤다.

마주친 눈가가 붉어지더니 이윽고 갈색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우는 얼굴이 부끄러운지 알버트는 얼굴을 가린 채로 그대로 달아나 버렸다.

‘저 눈이 섬뜩하다고?’

캐롤린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알버트의 눈동자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갈대숲 같았다. 어쩐지 한쪽 가슴을 일렁이게 하는 풍요로운 갈색 눈동자. 캐롤린은 이후로도 가끔 그 눈동자를 떠올리곤 했다.

“리스벨 영애,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엘리, 사랑하는 내 딸아. 네게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단다.”

보랏빛 눈동자는 캐롤린의 것과 똑 닮았지만, 마치 타인을 대하는 듯한 생모 마거릿의 태도에 제멋대로 날뛰던 가슴이 조용해졌다.

젖먹이 딸을 두고 이혼한 것도, 반년이 되지 않아 재혼한 것도, 자라는 동안 한 번도 자신을 찾지 않은 것도. 그래, 그럴 수 있었다. 그 모두가 마거릿의 잘못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을 이런 눈으로 볼 줄은 몰랐다.

보고 싶었다고 말하면 어쩌지? 미안하다고 하면 괜찮다고 해야 하나? 싫은 기색을 보이면 나도 그렇게 해야 할까?

그 많은 고민 중에 당혹조차 보이지 않는 무심함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긴장했던 것이 억울했다.

그리움은커녕 미움조차 남지 않은 눈동자는 캐롤린을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게 했다.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자리 엉망으로 만들어 줄까?”

자그마한 손이 캐롤린의 손을 꽉 쥐었다. 맑은 하늘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캐롤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괜찮아졌다.

“아니, 리아. 그러지 마. 나 때문에 네 평판에 해가 가는 건 싫어.”

“무슨 말이야, 캐롤린. 내 평판이 겨우 이런 일로 흠 잡힐 것 같아?”

여덟 살 공주님은 언제나처럼 자신만만했다.

레몬처럼 색이 옅은 금발, 호수처럼 새파란 눈동자, 사랑스러운 미소와 자신만만한 태도, 그리고 어디에서든 빛이 나는 압도적인 존재감.

아리아드네 곁에서라면 주인공이 되지 않아도 좋았다. 아리아드네의 첫 번째 친구는 언제나 자신일 테니까.

아리아드네의 모든 것을 알고, 제 모든 것을 알아주는 친구. 언제까지고 그럴 줄로만 알았다.

“네 것이냐?”

리아를 기다리다 지루해져 혼자 굴린 공을 따라가다 보니 모르는 공간이었다. 제집인 양 돌아다니던 성이 갑자기 무서워졌다.

공을 포기하고 돌아가려는데 낮고 메마른 목소리가 들렸다.

“네 것이 아니냐?”

불처럼 붉은 머리, 밤바다처럼 짙은 눈, 파리한 안색, 깡마른 몸. 병색이 완연한 여자가 캐롤린이 잃어버린 공을 들고 있었다.

“……제 것이 맞아요.”

“가져가거라.”

의자에 앉은 여자를 대신해 곁의 시녀가 캐롤린에게 공을 가져다주었다.

“이름이 뭐지?”

크지는 않지만 또렷한 음성, 단호한 말투와 위압적인 태도. 여자는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데가 있었다.

“리스벨의 캐롤린입니다, 공비 저하.”

캐롤린은 치마를 잡고 무릎을 굽혀 제대로 인사했다.

“날 본 적 있느냐?”

여자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뵌 적은 없지만 메르디에스 일가를 몰라볼 리스벨은 없습니다.”

메르디에스 본성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거처를 제 공간으로 삼은 이가 누구겠는가. 붉은 머리라는 외형적 특징이 아니라도 여자의 위압적인 태도는 그 신분을 짐작하게 했다.

오랜 투병으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메르디에스의 안주인, 성주님의 반려이자 아리아드네의 어머니, 디아즈 후작가의 적통 후계자.

그것이 파시파에와의 첫 만남이자 아리아드네에게 말하지 못한 캐롤린의 첫 번째 비밀이었다.

“아이는 딱 질색이야. 시끄럽고, 귀찮고, 떼쓰는 것밖에 모르는 존재지. 리스벨의 후계라면 네 나이가 열이겠구나.”

서늘한 목소리와 단호한 어조에 캐롤린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혹시나 실수한 것이 있을까 초조했다.

“그렇습니다, 저하.”

“그렇게 불릴 일이 없어 불편하니 저하라는 호칭은 그만두어라.”

“……네.”

파시파에가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꼭 아리아드네가 살아온 기간만큼이었다. 공비라는 존재가 있는지조차 희미한 시간들이었다. 캐롤린은 처음으로 마주한 공비가 무섭고 두려웠다.

“내가 누구인지는 알아도 내 이름까지는 모르느냐?”

“……아, 아닙니다. 파시파에 님.”

캐롤린은 공비의 이름을 말하고도 불안했다. 당황하여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손에 든 공을 꽉 쥐었다. 헝겊으로 만든 공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파시파에의 시선이 소리 난 곳으로 향했다.

“아직도 그런 것을 가지고 노는구나. 나도 너만 한 나이에는 곧잘 그런 것을 가지고 놀았지.”

파시파에가 제 곁에 시립한 시녀를 손짓으로 불렀다.

“사라, 내 물건 중에 저 아이에게 줄 만한 것이 있겠느냐?”

“네, 친정에서 가져오신 물건 중에 리스벨 영애가 좋아할 것이 제법 있습니다.”

‘사라’라 불린 시녀가 물음에 답하자 파시파에가 잠시 고민에 잠긴 듯 고개를 기울였다.

“성에는 자주 오느냐?”

“네, 주에 두세 번 정도…….”

캐롤린의 대답에 파시파에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희미한 웃음을 터트렸다.

“아주 절반은 사는구나. 리스벨과 메르디에스의 유대는 아무래도 모르겠단 말이지.”

파시파에의 얼굴에 미소가 머물렀던 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희미한 웃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보름 뒤에 이곳으로 오면 네가 좋아할 만한 것을 내어 주마.”

보름 내내 캐롤린은 아리아드네에게 그날의 만남에 대해서 말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연히 파시파에 님을 만났어.’

‘이름을 부르라 하셨어.’

‘놀잇감을 줄 테니 다시 보자 하셨어.’

그중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왜 마음에 차지 않아?”

“아니요, 너무 많아서…….”

오래된 오르골, 실물을 정교하게 본뜬 미니어처, 작은 보석을 꿰어 만든 화려한 장식품, 쓰임새를 짐작하기 어려운 이국의 물건들. 하나같이 귀한 것들이었다.

리스벨의 외동딸로 자란 캐롤린이었으니 무엇이 부족하다 느낀 적은 없었지만, 그런 캐롤린이 보기에도 탐이 나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이 물건의 주인은 자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다 가지거라.”

파시파에가 무심히 손짓하자 시녀들이 다가와 늘어놓은 물건들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라라 불린 여자가 캐롤린의 손에 작은 장식품 하나를 쥐여 주었다.

“……감사합니다, 파시파에 님.”

캐롤린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손에 든 장식품만 만지작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그런 캐롤린을 바라보던 파시파에가 관자놀이를 가볍게 짚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고통을 참는 기색이었다. 공기에 가시가 돋아난 것처럼 불편해졌다.

“내가 네 나이 땐, 이 나이의 내가 죽어 가리란 건 생각도 못 했지.”

파시파에의 말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가슴 한구석을 베어 내는 것 같았다.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울지 않기 위해 캐롤린은 손에 든 장식품을 꽉 쥐었다.

“그런 눈으로 볼 것 없다. 내가 얼마 살지 못하는 건 너와는 무관한 일이니까.”

또, 파시파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과 말투로 공기를 차갑게 얼렸다.

캐롤린은 작은 벽장에 갇혀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가슴이 막혔다. 파시파에의 말이 꼭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처럼 들려 캐롤린은 당장이라도 이곳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넌 내 나이가 되면 무얼 하려느냐?”

그 질문에 캐롤린은 제 억울함을 드러내기로 결심했다.

“리스벨로 태어났으니 메르디에스를, 리아, 아니, 아리아드네 님을 위한 일을 하고 싶어요.”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던 캐롤린이 파시파에를 똑바로 바라보며 가슴을 쭉 내밀었다. 파시파에와 눈을 마주치자니 치마 아래 숨겨진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렇게 안간힘을 다해 모은 용기였건만 파시파에는 그것에 별 의미를 두는 것 같지 않았다.

“글쎄, 그다지 좋은 생각 같진 않구나. 네 인생을 타인에게 맡겨 버리면 너에게 무엇이 남지?”

“그래도 전 리아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어요. 언제든 가장 높은 자리에서 빛날 수 있게.”

파시파에는 제 딸을 지칭하는 말을 듣고도 여전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캐롤린은 자신의 용기가 두 번이나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하자 엉엉 울고 싶어졌다.

‘이래서야 어떻게 리아를 지킨단 말이야.’

하지만 이어진 파시파에의 말에는 캐롤린조차 넋을 놓고 말았다.

“네 아버지가, 네 가문이 너에게 무엇을 원하든 네가 원하지 않으면 넌 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대신 가문이 너에게 주는 모든 걸 포기할 용기가 있다면 말이지.”

“…….”

파시파에가 하는 말은 이상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캐롤린에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리스벨로 태어났으니 그에 알맞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귀족으로서의 명예와 의무. 캐롤린은 그것에 남다른 자부심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을 다 내던져도 된다는 말에 캐롤린은 덜컥 겁부터 났다. 가문이 지켜 온 명예와 의무를 잇지 못하는 자신에게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아버지마저 나를 버리고 말 거야.’

하얗게 질린 캐롤린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파시파에가 버석한 웃음을 지었다. 잎사귀가 떨어진 나뭇가지처럼 쓸쓸한 얼굴이었다.

“하긴 너에겐 이른 말이구나. 나조차 그것을 포기하지 못해 내 생명과 맞바꾼걸.”

여위긴 했지만 꼿꼿하고 기세가 남달라 캐롤린은 파시파에가 시한부라는 것을 종종 잊고는 했다. 평소의 기세가 사라진 얼굴은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을.”

파시파에는 죽음을 원망하거나 부정하진 않았다. 다만 스쳐 지나가는 짧은 말에서도 오래된 후회와 진득한 아쉬움이 찌꺼기처럼 묻어났다.

아리아드네가 파시파에를 만난 날이면 그토록 우울해했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어머닌 자신을 낳은 것을 후회하노라 말하던 아리아드네 얼굴이 떠올랐다.

“파시파에 님은…….”

리아를 낳은 걸 후회하시나요? 묻지 못한 말이 목에서 걸려 맴돌았다. 묻지 못한 것은 무례한 물음이라서가 아니었다. 대답이 두려워서였다.

하지만 파시파에는 캐롤린의 두려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묻지 않은 물음을 들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답했다.

“난 디아즈의 후계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메르디에스를 선택했다. 자식을 낳으면 첫째는 메르디에스를, 둘째는 디아즈를 잇기로 했지. 그렇게 디아즈를 얻은 대가로 메르디에스에 후계를 주었다. 그리고 남은 삶을 잃었다. 디아즈를 이을 둘째는 생각도 할 수 없었지. 원래도 건강한 몸뚱이는 아니었다만 최소한 오늘내일하진 않았는데.”

담담한 말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높낮이조차 없는 평온한 어조가 폐부에 와 박혔다.

“그 아이를 낳고는 내가 바라던 모든 게 무너졌다. 그토록 열망하던 내 가문과 내가 이루고자 했던 모든 것이.”

길지 않은 대화와 잠깐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파시파에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을지.

드높은 이상과 이상을 실현할 능력을 모두 갖춘 인재. 들끓는 욕망을 이루지 못하면 제 몸을 불태울 사람.

평생을 그려 온 미래가 송두리째 사라진 절망은 파시파에를 천천히 집어삼켰다.

“일주일에 닷새는 침대에서 꼼짝도 못 하지. 제정신으로 대화할 수 있는 날도 점점 줄어. 내가 나로 남을 수 없는 끔찍함을, 내가 정신을 잃은 동안 어떤 수치스러운 말과 행동을 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두려움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더구나.”

캐롤린의 눈에서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빈 들판에 홀로 남은 기분이었다. 외롭고, 춥고, 아팠다.

“너도 그렇게 말할 작정이냐? 짐승도 자신이 낳은 새끼는 알아본다고? 짐승이 아니니 이런 내가 견딜 수 없는 거란다. 나는 자식에게 나를 먹으라고 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닌 게지. 이런 부모를 가진 것도 그 아이 몫이니 네가 그런 얼굴을 할 필욘 없다.”

파시파에가 눈물로 범벅이 된 캐롤린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파시파에의 눈동자는 심해처럼 깊고 어두웠다. 캐롤린조차 알지 못했던 제 마음의 깊고 깊은 곳까지 샅샅이 파헤칠 것만 같았다.

“아니면 네 어미 생각을 하는 게냐?”

선득한 칼날이 캐롤린의 몸을 반으로 가르는 것 같았다.

파시파에와의 만남은 달에 한 번일 때도 있었고, 몇 달씩 못 만나기도 했다.

그렇게 2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파시파에와의 만남이 늘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오랜 투병으로 인해 신경질적이고 감정 기복이 심한 파시파에와의 만남은 살얼음 위를 걷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파시파에와의 만남이 기다려졌다.

본디 그러했는지 병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파시파에가 세상을 보는 눈은 몹시 부정적이고 염세적이었다.

하지만 그 시선은 대단히 날카롭고 예리했다. 깜짝 놀랄 만한 말을 하는 데도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파시파에가 하는 이야기의 절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온실 속의 화초처럼 곱게 자란 캐롤린은 파시파에의 파격적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남모를 해방감을 느끼곤 했다.

“네가 여자라는 약점보다야 네 신분이 더 강한 힘을 가졌으니, 타협할 필요가 없지. 남편의 위세에 눌려 자애로운 귀부인을 연기하느니 온순한 종마를 들이거라. 그게 나을 거다.”

파시파에의 파격적인 조언에 캐롤린은 뭐라 할 말을 잃었다. 멍한 캐롤린에게 파시파에는 “언제고 이 말이 필요한 날이 올 게다.”라며 한 번 더 강조하기까지 했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네 마음을 속이지는 말아라.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구나.”

파시파에의 진심 어린 충고에 캐롤린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파시파에가 어깨에 두른 숄을 습관적으로 여미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겨우 고개를 내민 새순을 흔들고 지나갔다.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파시파에가 여상한 어조로 말했다.

“이젠 슬슬 너와 만나는 것도 정리해야겠구나.”

화장이나 꼿꼿한 기세로는 더 이상 파시파에에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가릴 수 없었다.

그럼에도 파시파에는 처음 봤을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위압적인 태도도, 굳건한 기세도, 형형한 눈빛도 여전했다.

그런 파시파에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 견딜 수 없이 억울했다. 왜, 왜, 왜, 물음은 눈물이 되어 떨어졌다.

“내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지?”

캐롤린은 고개를 들어 파시파에를 마주 보았다. 깊고 어두운 눈, 파시파에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었다.

“……한 번도 리아를 사랑스럽다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눈을 감자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파시파에를 만날 때면 리아가 받아야 할 애정을 도둑질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 주제에 이 말을 내내 품고 있었던 자신이 더 싫었다.

파시파에는 모든 것을 짐작한 얼굴로 말했다.

“안쓰럽다 여긴 적은 있지. 그 아이는 나보단 글레나 같은 어미에게서 태어났으면 행복했을 앤데 어쩌다 나 같은 사람의 태를 빌려 태어났을까.”

겨울바람이 창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평생을 남부에서 보낸 파시파에는 추운 건 질색이었다.

파시파에가 아리아드네를 출산했던 해는 유난히도 추웠다. 아무리 방을 뜨겁게 데워도 뼛속까지 한기가 스며들었다. 결국, 그날의 한기는 평생 파시파에를 따라다녔다.

“내가 그 아이와 처음 얼굴을 마주한 게 그 아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였다. 출산 직후 정신을 놓아 버린 나와 아이를 격리한 것이 3년이었고, 2년은 내가 거부했다. 그 아이를 보고 다시 미쳐 버릴까 봐 두려웠어.”

출산 후,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석 달이나 지나 있었다. 온몸이 조각나는 것처럼 아팠다.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알았다.

‘나는 곧 죽겠구나.’

억울했지만 누구를 원망할 일은 아니었다. 죽음 앞에서도 의연함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괜찮은 줄 알았다.

파시파에가 정신을 차리자 유모가 아이를 데려와 품에 안겨 주었다. 뽀얗고 따뜻한, 누구나 사랑하지 않고는 못 견딜 어여쁜 아이였다.

‘너구나, 내가 낳은 애가.’

그런 생각을 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파시파에가 아이의 목을 졸랐다고 했다.

제 배 아파 낳은 아이를 죽이려 했다는 충격보다 자신의 이성이 무너졌다는 것이 더 두려웠다.

“가끔 그런 생각은 했지. 내 아이만 아니었다면 예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한 달에 한 번, 두어 시간을 보는 것도 힘들었다. 또다시 미쳐 버리면, 내가 내가 아니게 되면……. 안간힘을 써도 정신을 놓지 않는 것이 고작이었다.

파시파에는 아리아드네를 보고 나면 꼬박 일주일은 앓았다. 파시파에의 생명을 갉아먹고 태어난 아리아드네는 계속해서 파시파에를 죽여 가고 있었다.

아이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저 서로가 맞지 않았을 뿐.

“글레나는 아이가 없고, 그 아이는 곧 어미를 잃을 테니 서로에게 위안이 될 게다. 글레나를 거둬들이라는 내 말을 공작이 무시하지 않는다면, 그 아이는 내가 살아 있을 때보단 행복할 테지.”

진작 이렇게 됐어야 했다. 질긴 목숨이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최소한 그 아이의 남은 삶이 평온하기를 바랄 만큼의 정리(情理)는 있다는 말이다. 대답이 되었니?”

캐롤린은 서러운 얼굴로 눈물을 쏟아 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파시파에가 말했다.

“또 그런 얼굴을 하는구나. 널 버린 것은 내가 아닌데 말이다.”

파시파에의 날카로운 그 말에 캐롤린은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목 놓아 엉엉 울었다.

괜찮은 줄 알았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 여자, 자신을 버리고 간 여자, 다시 만나고도 아무런 동요조차 없는 그런 여자는 자신이 먼저 무시하리라. 그렇게 마음먹었으면서도 버림받은 얼굴로 제 것도 아닌 애정을 탐내고 있을 줄은 몰랐다.

“……레이놀즈 부인, 을…….”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캐롤린조차 몰랐다. 두서없는 말이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레이놀즈? 레이놀즈 백작? 사라, 레이놀즈 백작의 부인이 누구지?”

“마거릿 레이놀즈, 베스 자작가의 차녀로 리스벨 백작의 전처입니다.”

사라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파시파에가 캐롤린에게 물었다.

“네 생모를 그리 부르느냐?”

캐롤린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파시파에도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은 아닌듯했다.

“하긴 널 낳고 계절이 바뀌기도 전에 리스벨을 떠났으니, 뭐라 부르기도 어렵겠구나.”

무엇을 묻고 싶어 했는지, 왜 갑자기 마거릿을 언급했는지, 캐롤린조차 알지 못했던 속내를 먼저 알아차린 것은 파시파에였다.

“날 원망했느냐? 네 어미의 이혼을 중재한 것이 나라서?”

이것이 원망일까? 그저 파시파에라면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마거릿이 캐롤린을 낳고 이혼한 것은 파시파에가 결혼한 직후였으니까.

아무에게도 물을 수 없었지만, 알지 못하고는 조금도 나아갈 수 없었다. 캐롤린에게 마거릿은 벗어나려 발버둥 칠수록 점점 깊이 빠지는 진득한 늪이었다.

“네 어미가 왜 널 버렸는지 알고 싶다면 내가 아는 대로 말해 주마. 하지만 난 네가 들을 필요가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듣고 싶으냐?”

캐롤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파시파에의 마른 입술이 열렸다.

“네 어미는 내게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사랑하여 사는 것이 지옥이라 했다.”

역시, 마거릿은 레이놀즈 백작을 사랑했던 걸까. 그래서 레이놀즈 백작에게서 낳은 아이는 그토록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걸까.

“귀족가의 사람치곤 사랑이 지나친 게 독이었지. 네 어미는 열여섯의 나이에 첫사랑을 했다더구나. 열여덟에 네 아비와 결혼하여 스물한 살에 너를 낳았지. 그때까지도 첫사랑을 잊지 못했는데, 너를 낳고서야 그 사랑은 평생 이뤄지지 않을 것을 깨달았다 했다. 혼자만 사랑하는 남자와 사는 하루하루가 지옥이라고.”

사랑하는 남자와 사는 것이 지옥이었다고? 그렇다면 마거릿이 사랑한 사람은…….

“그래, 네 어미는 네 아비를 사랑해서 너를 버렸다.”

오래도록 의심해 온 모든 것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부정한 생모와 아내에게 배신당하고 홀로 남은 아버지. 그렇게 믿어 왔는데…….

“리스벨 백작은 이해하지 못했다.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은 것도, 그렇다고 네 어미에게 불성실한 것도 아니었으니. 그저 네 어미를 사랑하지 못했을 뿐인데 말이다. 후계를 낳은 부인으로, 가문을 이끌 안주인으로 성심을 다했는데 왜 이혼을 원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더구나.”

우직한 태산처럼 든든한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캐롤린에게는 더없이 믿음직했던 그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아무리 두드려도 대답 없는 벽처럼 느껴졌을까.

“넌 이해할 수 있겠니?”

사랑해서 헤어졌다는 그 말을 쉽게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내내 가슴에 막혀 있던 무언가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사실 나도 그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혼하지 못하면 차라리 죽겠다는 그 얼굴이 진심이라는 것은 알겠더구나. 누구 하나 죽는 것보다야 이혼이 낫다 싶어 내가 그리하라 했다. 그렇게 이혼하고는 저 좋다는 남자와 재혼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관심을 두지 않아 그 상대가 레이놀즈라는 것은 잊었구나.”

마거릿은 그래서 행복해졌을까?

“진실을 알아서 달라진 게 있느냐?”

“그래도……. 이제 더는 기대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최소한 불행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리스벨을 떠나며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 그녀에게 캐롤린은 처음부터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더는 마거릿을 보고 상처받을 이유가 없었다. 완전히 떨쳐 버리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들어서 나을 것이 없다 여겼다만 네 생각이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평소보다 길어진 만남 때문인지 파시파에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다음 약속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파시파에가 사라를 향해 손짓하자 사라가 파시파에를 부축했다. 파시파에가 점점 멀어졌다.

이대로 다시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조이는 것처럼 아팠다. 캐롤린은 돌아서는 파시파에를 향해 물었다.

“……리아 대신 절 보시는 거라 생각했어요. 리아에게 해 주고 싶은 것을 제게 해 주신다고 생각했어요. 정말, 리아를 사랑하지 않으셨나요?”

파시파에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과거를 되새기듯 파시파에의 눈길이 창밖으로 향했다. 세차게 불던 바람이 어느새 멎고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글쎄, 나도 모르겠구나. 널 처음 봤을 때 네 나이가 열이었지. 그때 널 보고 그런 생각을 한 것 같구나. 그 아이가 열 살이 되는 것을 내가 볼 수 있을까. 열 살이 된 그 아이는 어떤 모습일까 하고.”

아리아드네의 열 살 생일은 불과 보름 뒤였다.

“그렇다고 널 그 아이 대신으로 생각한 건 아니었다. 널 만나는 것이 제법 즐거웠어. 그동안 내 상대하느라 네가 고생이 많았다.”

깊고, 어두운 겨울밤 같은 눈동자. 무심하고 서늘한 눈동자는 어떤 일이 있건 변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위로받았다.

“메르디에스가 대대로 리스벨을 그토록 중히 여긴 이유를 알겠더구나. 캐롤린, 고마웠다.”

그 자신처럼 아무런 치장도 하지 않은 담담한 감사의 말. 캐롤린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졌다. 목이 메었지만 이 말만은 반드시 해야 했다.

“……제게 원하는 삶을 살라고 하셨죠? 저는 리스벨이고, 리스벨에서 태어난 책임을 다하고 싶어요. 제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메르디에스를, 아리아드네를 지킬 거예요. 이게 제 선택이에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부디…… 리아 곁에 좀 더 오래 계셔 주세요.”

캐롤린의 말에 놀란 듯 커진 눈동자가 이윽고 가늘게 접혔다.

“그래, 부탁하마.”

희미한 미소를 남기고 사라진 파시파에는 열흘 뒤, 세상을 떠났다. 아리아드네의 열 살 생일을 닷새 앞둔 날이었다.

부슬비로 시작된 겨울비는 이윽고 눈이 되어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다. 메르디에스에 눈이 내린 건 이십 년 만의 일이라 했다.

“더는 아프지 않으셨으면 좋겠어. 평생 힘들어하셨으니까.”

눈이 펑펑 내리는 묘지 앞에서 아리아드네가 비석 위에 쌓인 눈을 툭툭 털어 내며 말했다.

“……난 괜찮아, 캐롤린. 얼굴이 다 꽁꽁 얼겠어.”

작고 보드라운 손이 캐롤린의 뺨 위로 흐른 눈물을 닦아 주었다.

“리아, 이제는 내가 지켜 줄게. 파시파에 님 대신 내가 지켜 줄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너만은 부디 오래오래 살아 줘.’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이 있었으면 했다. 새하얀 눈은 소리도 없이 내렸다.

“캐리, 자세가 무너졌다.”

커티스가 목검으로 캐롤린의 내려간 어깨와 굽은 등을 지적했다. 겨울인데도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캐롤린은 미끄러지는 목검을 다시 고쳐 쥐고는 횡으로 휘둘렀다. 누구도 캐롤린이 이 훈련을 끝까지 마칠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었다.

‘여기서 포기할 거면 시작도 안 했어.’

캐롤린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내일 체력 훈련은 7시가 아니라 6시에 시작한다.”

커티스는 그 말만 남기고 휑하니 사라졌다.

란데르 해변에 메로우가 나타났던 그날, 캐롤린은 자신의 무력함을 실감했다.

―아버지, 저도 검을 배우고 싶어요.

하지만 커티스는 검을 배우고 싶다는 캐롤린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모두가 캐롤린이 괜한 고집을 부리는 거라 했다. 레이디는 기사의 보호를 받으면 되는 거라고.

메로우와 마주하고서야 알았다. 위험한 순간이 왔을 때 자신을 구해 줄 누군가가 반드시 있을 거라는 건 만용이었다.

계절이 바뀌도록 내내 의견을 굽히지 않자 마지못해 허락한 커티스는 조건을 걸었다.

―네가 취미나 호신으로 검을 배우는 것이 아니니 리스벨의 이름에 걸맞은 실력을 갖춰야 한다. 1년 안에 견습 기사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네게서 검을 빼앗겠다.

그렇게 시작된 훈련이었다.

겉으론 무뚝뚝해 보여도 캐롤린에게만은 다정한 아버지였던 커티스는 훈련에서는 누구보다도 엄격했다. 캐롤린에게 빈말로라도 칭찬을 해 주는 법이 없었다. 아니, 못한다는 지적조차 하지 않았다.

‘아직 넉 달밖에 안 지났어. 그보다 배는 더 남았어.’

마음을 다잡은 캐롤린은 혼자 머릿속으로 오늘 훈련을 복기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 아직 익숙하지 않아 발이 자꾸만 엉켰다. 위태롭게 휘청이다 결국 땅바닥으로 넘어졌다.

‘이래서 어떻게 리아를 지키겠단 거야…….’

울컥 터지려는 울음을 꾹 참으며 일어나는 순간, 발목에서 지끈하는 통증이 느껴졌다. 넘어지다 삐끗한 모양이었다.

“괜찮으세요?”

그때, 빠르게 다가온 누군가가 캐롤린을 부축했다. 부드러운 밀빛 머리에 개암 열매처럼 반질반질한 갈색 눈동자, 2년 전과는 몰라보게 달라진 알버트였다.

비쩍 말랐던 몸은 제법 건장해 보였고 경계심 가득했던 눈동자는 담담하고 태연했다. 난데없이 나타난 알버트가 돕겠다고 하자 캐롤린은 불쾌해졌다.

‘저기서 다 보고 있었던 거야? 기척도 내지 않고?’

“내 몸에 손대지 마.”

알버트의 손을 뿌리친 캐롤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벗어났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평소보다 고작 한 시간 당겨졌을 뿐인데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찜질을 한다고 했는데도 발목은 여전히 불편했다.

캐롤린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서둘러 훈련장으로 향했다. 훈련장에는 커티스만이 아니라 알버트도 함께였다.

“또래와 같이 훈련을 하면 도움이 될 게다. 알버트는 재능이 뛰어나니 알버트를 보고 배우도록 해라.”

알버트가 캐롤린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지만, 캐롤린의 눈에는 그것조차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평소 하던 대로 시작해라.”

캐롤린은 적당히 몸을 풀고 훈련장을 달리기 시작했다. 발목이 조금 시큰거렸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알버트는 날을 세우지 않은 철검을 들고 커티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캐롤린.”

알버트와 이야기를 나누던 커티스가 사납게 표정을 굳힌 채로 캐롤린에게로 다가왔다.

“……아, 버지.”

캐롤린 앞에 무릎을 꿇은 커티스가 다짜고짜 캐롤린의 바지를 걷었다. 엉성하게 두른 붕대를 풀어내자 발갛게 부은 발목이 드러났다.

“아버지, 저 할 수 있어요. 하게 해 주세요.”

“네 몸 하나 관리하는 것도 못 하면서 뭘 하겠단 거냐? 심지어 나를 속이려고 들어? 오늘부로 훈련장은 출입 금지다.”

“아버…….”

“알버트! 캐롤린을 지금 당장 방에 데려다주고 오너라.”

커티스는 캐롤린의 부름에도 그대로 훈련장을 떠났다. 알버트가 머뭇거리며 캐롤린에게로 다가왔다.

“네가 말했어?”

커티스가 불같이 화를 낸 건 알버트와 이야기를 나눈 직후였다. 캐롤린의 추궁에도 알버트는 묵묵부답이었다. 부축하려 뻗은 팔이 캐롤린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했어. 비켜.”

캐롤린은 절뚝이며 훈련장을 빠져나왔다. 스스로가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사과하고 싶다는 거야?”

맞은편에 앉은 아리아드네가 포크로 케이크를 자르다 고개를 들었다.

“……먼저 잘못한 건 내가 아니야. 좀 심했나 싶어서 신경 쓰인다는 거지.”

“잘못한 게 아니면 왜 신경을 써?”

“그, 그건…….”

정곡을 찔린 캐롤린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뭐라 변명을 하려다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캐롤린, 리스벨의 가치를 메르디에스의 누군가를 물리적으로 지키는 것에만 한정하지 마.”

아리아드네가 엉망이 된 캐롤린의 손을 붙잡았다.

“나는 네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 충분해. 하지만 네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내가 흔들릴 때 날 잡아 줘. 내가 잘못된 길을 갈 때 말려 줘. 네가 나를, 리스벨이 메르디에스를 지킬 수 있는 건 검뿐만이 아니야.”

검술 훈련을 시작한 뒤로 조급하고, 초조해서 별일 아닌 것에도 예민하게 굴곤 했다. 좋아하는 것들을 죄다 뒤로 미뤄 두고 훈련에만 매달렸다.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웠다.

“네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으로 날 도와줘. 부탁해, 캐롤린. 응?”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 아리아드네와 있으면 아무리 복잡한 문제도 금방 답이 보였다. 눈가가 시큰거렸다. 캐롤린은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또 울어? 이 울보야.”

“네가 너무 안 우는 거야.”

“그건 그렇지. 네가 지나치게 자주 우는 거고.”

“너, 진짜!”

유치한 말싸움에 고민 따윈 모두 잊어버렸다.

‘그렇게 잊은 거 보면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니었네, 뭐.’

잠자리에 누운 캐롤린은 모처럼 단잠을 잤다.

겨울은 해가 늦게 뜬다. 어둠에 잠긴 주위는 아직도 어슴푸레했다.

‘대체 쟨 잠을 언제 자는 거야?’

캐롤린은 해가 뜨기도 전에 땀으로 흠뻑 젖은 소년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아, 여기 어쩐 일로…….”

캐롤린을 발견한 알버트가 뒤로 물러나며 어물거렸다.

‘내가 잡아먹기라도 한대?’

이제껏 자신이 한 행동은 생각도 못 하고 캐롤린은 입을 삐죽였다.

“네가 말한 거 아닌 거 알아. 아버지께서 보고도 모르실 리가 없잖아.”

제정신을 차리고 나니 어떻게 그런 오해를 했는지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커티스는 평생 몸을 단련한 무인이었다. 그런 커티스를 속이려 했다니…….

알버트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입 밖으로 꺼내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왜 아니라고 말 안 했어?”

기껏 튀어나온 말은 또 이런 식이었다. 아차 싶었지만, 캐롤린은 부러 심통 난 표정을 지었다. 사사건건 제 탓만 하는데도 알버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셔도 전 괜찮으니까…….”

“뭐가 괜찮아? 네 잘못도 아닌…….”

저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내려던 캐롤린은 몇 년 전 일을 떠올렸다. 하녀들이 알버트를 악담하는 걸 듣고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외면하고 돌아섰던 그날이.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알버트는 얼마나 많은 그런 말들을 들었을까. 캐롤린이 외면한 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캐롤린은 알버트가 커티스에게 고자질했다고 오해했던 것보다 그날 그를 외면하고 돌아섰던 것이 훨씬 더 부끄러웠다.

“미안해. 오해한 것도 미안하고, 괜히 네게 심술부린 것도 미안해. 네가 부러워서 그랬어.”

사과를 들은 알버트는 되레 당황한 얼굴이었다.

“저 같은 것한테 그런 말씀 마세요.”

“너 같은 게 뭔데?”

“고아에, 재수 옴 붙은…….”

“지금 날 재수 옴 붙은 고아한테 질투한 사람으로 만드는 거야?”

캐롤린의 새침한 대꾸에 알버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재능이 뛰어나다고 칭찬하시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넌 모르지? 나한테는 못한다는 말씀조차 안 해 주셨어.”

알버트의 재능을 질투했다. 불운한 고아 소년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기분 좋게 뺨에 닿았다. 캐롤린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청량한 공기가 폐에 함빡 담겼다.

캐롤린을 가만히 바라보던 알버트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재능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저는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으니까요.”

캐롤린은 아무도 깨지 않은 새벽, 홀로 검을 휘두르는 알버트를 알았다. 알버트의 재능은 바로 저 절박함일지도 모른다.

“다리는 이젠 괜찮으세요?”

“벌써 열흘이나 지났는데, 아직 아팠으면 해서?”

걱정해 주는 말에도 불퉁한 답이 나갔다. 왜 알버트에게만 유독 이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프지 마세요.”

알버트는 아무리 자신에게 날을 세워도 상대에게 상처를 되돌려줄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무안해진 캐롤린이 나무둥치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 구경해도 돼?”

나무둥치로 다가간 알버트가 그 위에 땀을 닦기 위해 준비해 둔 깨끗한 수건을 깔아 주며 쑥스러운 듯이 웃었다.

“……고마워.”

알버트에게만은 제 진심을 말하는 것이 유독 부끄러웠다.

캐롤린은 알버트가 천천히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호흡과 발놀림, 검의 궤적과 시선. 알버트는 무엇 하나 허투루 다루는 법이 없었다.

무도회의 왈츠보다도 알버트의 움직임이 더 아름다웠다. 새벽의 어슴푸레한 공간에서도 알버트만이 홀로 선명했다.

바람에 알버트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머리카락 아래 개암 열매 같은 눈동자가 진지하게 빛나고 있었다. 처음 볼 때부터 저 눈동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잘못한 게 아니면 왜 신경을 써?

리아의 물음에 대한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잘못해서만은 아니었다.

빛이 들기 전 새벽. 캐롤린은 제 사랑을 자각했다. 울컥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알버트를 좋아하게 된 제 마음이 벅차서, 그렇지만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을 자신을 알아서, 그래서 평생토록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마음이기에.

사랑은 시작하기도 전에 끝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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