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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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일은 다시 한번 사과할게. 미안해.”

    유진을 바라보는 새파란 눈동자가 깜빡, 눈꺼풀 아래로 사라졌다 나타났다.

    “됐다고 했잖아.”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그날 일을 떠올리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정말 죽는 줄 알았다. 괴물이 여자를 향해 다가오는데 자신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뿔 달린 괴물’이 여자를 집어삼키려는 순간, 눈이 마주친 여자가…….

    ―안 돼.

    캐롤린이 아리아드네를 감싼 채로 풀밭 위를 굴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유진은 풀멘을 꺼내고는 ‘메로우’를 향해 조준했다.

    타앙 하는 소리와 함께 총구에서 발사된 탄환이 메로우의 눈알에 박혔다. 왼쪽 눈에 탄환이 박힌 메로우가 끄으윽, 하고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타앙― 탕! 두 개의 탄환이 연달아 머리를 뚫고 지나간 뒤에야 메로우는 쿵 하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메로우’라는 괴물은 상체는 인간, 하체는 물고기의 모습을 한 인어 괴물이었다. 머리는 미끄덩한 생선의 대가리와 비슷했고, 뿔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뿔 달린 괴물’은 제 머리가 만들어 낸 환상에 불과했다.

    총을 든 손이 덜덜 떨렸다.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도 손의 떨림이 좀처럼 멎지 않았다. 피로 얼룩진 옅은 금발이, 푸른 하늘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유진의 마음을 부글부글 끓게 했다.

    여자를 붙잡고 정신이 나갔느냐고, 어떻게 목숨을 걸고 그따위 짓을 하느냐고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여자를 보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괴물에 먹히지 않아서, 저 여자의 생명이 끝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언제 봐도 신기한 색이야.’

    저토록 옅은 색이 어떻게 그런 강한 존재감을 지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유진은 저도 모르게 아리아드네의 머리카락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제 손을 거두었다.

    잠시 뒤 고개를 든 여자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웃었다.

    “그날 도와줘서 고마워. 당신이 없었으면 캐롤린과 나는 물론이고 인근의 사람들까지 적지 않은 인명 피해가 있었을 거야.”

    “됐어, 그런 건. 그래서 내게 알려 줄 성물에 관한 정보란 게 뭐지?”

    유진이 싸늘한 목소리로 대화를 싹둑 자르고 본론부터 꺼냈다. 하지만 새빨개져서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난 다음이라 그런지 이제 와서 저래 봤자 이전 같은 무게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싸늘한 얼굴로 거리를 두는 모습이 아리아드네에게는 억지로 태연한 척, 있는 힘껏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조금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아리아드네는 헛기침을 하는 척 슬쩍 입을 가려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남은 네 가문의 성물 중 당신이 가장 보기 쉬운 건 리카서스가 가진 무렉스의 호른일 거야.”

    현 국왕을 손아귀에 넣고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창명(滄溟)의 리카서스. 그 리카서스가 가진 성물이 바로 무렉스의 호른이었다.

    “무렉스의 호른은 바다를 다스리는 신 테티스의 성물이라고 해. 테티스의 흔적이라 무렉스의 호른은 바다를 다스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들 하지.”

    무언가 불쾌한 듯 비죽이 웃음을 지은 유진이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물었다.

    “신의 흔적이라니. 당신도 그 말을 믿어?”

    유진의 불쾌함은 아리아드네를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신의 흔적’이라는 말 때문인 듯했다.

    “글쎄……. 나도 신앙심이 깊은 편은 아니지만, 이 땅에는 분명 신의 흔적이라고 밖에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존재하니까.”

    이 땅의 사람들은 이 땅을 떠난 신들이 남긴 축복은 성물이 되고, 징벌은 마물이 되었다고 믿었다.

    “정말 그 시커먼 바윗덩어리가 이 땅에 부를 가져다주었다고 그렇게 생각해?”

    그렇게 말하는 유진의 손에는 어느새 성물 풀멘이 걸려 있었다. 매끈하고 길게 뻗은 검은 물체는 언제 봐도 신기했다.

    “당신들은 이것도 성물이라고 생각하잖아.”

    아리아드네 뒤에서 감싸듯이 팔을 뻗은 유진이 그녀의 손에 풀멘을 쥐여 주었다.

    “이건 신이 남긴 흔적도, 성력이 있어야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야.”

    귓가에서 속삭이는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좁은 공간에서 울려 퍼졌다. 유진이 아리아드네의 손을 감싸 말발굽처럼 생긴 걸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조작법만 알면.”

    남자가 풀멘의 뒤쪽에 달린 쇠고리를 젖혔다. 끼릭 하는 소리와 함께 풀멘에 달린 동근 원통이 돌아갔다.

    “당신도 메로우의 머리를 날려 버릴 수 있지.”

    유진이 메로우의 머리를 날려 버렸던 순간이 떠올랐다. 상급 마물의 머리가 통째로 터져 나갔던 그 가공할 만한 파괴력이.

    그게 성물의 힘이 아니었다면, 누구든 풀멘을 사용할 수 있다면, 상상만으로도 오싹했다. 그의 세계에선 풀멘이 검이나 창처럼 흔한 것이었을까?

    그런 시대가 온다면 더 이상 숙련된 기사를 양성할 필요가 없다. 더 강한 무기를 가진 자가 일방적으로 상대를 학살할 테니까. 아리아드네는 제 손에 들린 검은 물체의 무게를 실감했다.

    아리아드네에게서 풀멘을 회수한 유진이 그녀에게서 멀어지며 말했다.

    “이곳에서 성물이라 말하는 것들 가운데 정말 성물은 얼마나 될까? 당신은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어? 무량의 돌은 조금 특이한 바윗덩어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성물도 뭣도 아니라고.”

    메르디에스의 성물 ‘무량의 돌’. 유진의 말대로 그깟 바윗덩어리가 메르디에스의 기반이라면 우스울 만도 했다. 사람들의 기대처럼 온갖 금은보화를 토해 내는 신비한 돌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당신 말대로 무량의 돌은 메르디에스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한 그렇고 그런 속임수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오랜 가뭄으로 땅이 말라 도무지 농작물이 자랄 수 없을 때도, 메르디에스의 땅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죽지 않을 만큼의 먹을거리를 주거든. 휴지기 없이 농사를 짓는 땅에서도, 채굴량이 다했어야 정상인 광산에서도, 우리를 살게 하는 것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아리아드네가 불쑥 일어나 반만 열린 창을 활짝 밀었다. 열린 창으로 산들바람이 밀려왔다. 바람에 흙냄새, 흙에서 자란 나무와 풀 그리고 꽃 같은 것들의 냄새가 뒤섞여 날아왔다.

    아리아드네는 평생을 그 냄새를 맡으며 자랐다. 이 땅에 존재하는 풍요의 냄새를.

    “그 기이한 풍요는 이 땅에서만 존재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그 수혜를 경험하고 있으니까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거야. 그것이 신의 흔적이든, 악마의 과실이든.”

    메르디에스의 땅에 사는 이들의 믿음은 이 땅의 삶이 풍요로울수록 공고해졌다. 아리아드네 또한 이 땅의 풍요를 사랑했다.

    햇살 아래 아리아드네의 옅은 금발이 녹아들 듯 반짝였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 속의 남자는 이 땅에 가득한 풍요 속에서 조금 더 빈곤해졌다.

    이곳에서 신을 믿지 않는 자는 오직 남자뿐이었다.

    “무렉스의 호른이 바다의 풍랑을 잠재웠다거나, 반대로 바다를 성나게 했다는 기록이 내려오긴 하는데 기록의 진위는 쉽게 판단하기 어려워. 그 기록 자체가 거짓은 아니라 해도 좀 과장되고 부풀려진 면이 있을 거야.”

    아리아드네는 오래된 문서를 펼쳐 손가락으로 일일이 짚어 가며 설명을 이어 갔다.

    “리카서스의 혈통을 해한 부족의 터전을 순식간에 바닷속에 잠기게 했다는 것이나, 수백 척의 배가 수몰될 위기에 호른을 불어 바다를 잠재웠다는 기록은 같은 시기에 쓰인 다른 기록과 어긋나는 부분이 있거든.”

    잠자코 설명을 듣던 유진이 피식 바람이 새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아리아드네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기들이 가진 건 그렇게 포장하더니, 다른 가문이 가진 성물은 오래된 기록까지 보여 주며 흠집 내려는 것 같잖아.”

    유진의 지적에 아리아드네는 발끈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절대 그런 거 아니야. 난 최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주려고! 나도 무량의 돌을 요정왕이 줬니 하는 이야기를 다 믿는 건 아니…….”

    아리아드네는 발끈해서 항변하다 장난스레 자신을 바라보는 유진의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입을 꾹 다문 아리아드네가 탁자 가득 펼쳐 놓았던 문서를 다시 말았다.

    “이런 기록들은 리카서스의 의도적인 선전이거나 과장된 이야기가 유포되는 것을 방조한 정도로 파악하고 있어, 난.”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는데도 어쩐지 툴툴대는 것처럼 들렸다. 아리아드네는 못마땅한 얼굴로 서가에 놓인 낮은 사다리에 올랐다.

    메르디에스 직계만 들어올 수 있는 서가에 데려와 줬는데도 감동은커녕 이상한 트집이나 잡고.

    낮은 사다리에 몸을 의지한 채 아리아드네가 품에 안은 것들을 하나하나 제자리에 넣었다. 마지막 문서를 제자리에 두고 사다리에서 내려오려던 순간이었다.

    “호른이라면 뭘 말하는 거지?”

    “호른? 그게 어디 있을 텐데…….”

    바닥에 한쪽 발만 내린 아리아드네가 서가를 손으로 훑으며 말했다. 제목도 없는 책들이 익숙한 듯 아리아드네는 책들을 뽑아내 한쪽 팔에 가득 얹었다.

    “별의 그릇, 무량의 돌, 백자의 피, 심연의 눈, 다른 네 가문의 성물은 가문의 직계가 아닌 자들에겐 철저히 제한되는 데 반해 리카서스는 가끔 무렉스의 호른을 공개하거든.”

    아리아드네는 그중 가장 위에 있는 책에서 무언가를 찾듯이 휘리릭 넘겼다.

    “그런데 리카서스가 성물을 공개하는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야. 성물을 정말 가지고 있다고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기엔 무렉스의 호른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거든. 이건가?”

    말을 하면서도 무언가를 찾는 손길은 쉬지 않았다. 또다시 다른 책의 페이지를 넘기며 손가락으로 빠르게 훑어 내렸다. 파란 눈동자가 손가락을 따라 바쁘게 움직였다.

    “이것도 아니네.”

    한숨을 내쉰 아리아드네가 한쪽 팔에 책을 가득 얹은 채로 사다리에 올라가 선반에서 책을 더 뽑았다.

    “그도 그럴 것이 리카서스의 다음 주인을 선택하는 건 무렉스의 호른이니까. 어, 이거다!”

    마침내 찾던 것을 발견한 듯 아리아드네가 손에 들린 책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때, 한쪽 팔에 잔뜩 얹은 책들이 와르르 떨어지며 사다리 위의 아리아드네가 균형을 잃었다.

    몸이 공중으로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뒤 찾아올 고통에 아리아드네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진작 바닥에 떨어졌어야 할 것 같은데 아무런 충격이 없었다.

    이상했다. 마치 공중을 부유하는 듯한 감각과 주위에 흐르는 공기마저 숨을 멈춘 듯한 기이한 정적.

    가슴이 뛰었다. 이 기이한 감각이 낯설지 않았다.

    감은 눈을 뜨자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유진이 보였다. 회색빛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책과 사다리가 나동그라졌다. 행여나 바닥을 잘못 딛지 않도록 유진이 아리아드네의 몸을 잡아 주었다.

    “대체……. 이젠 조심하라는 충고를 하기도 지겨울 지경이야.”

    아리아드네의 몸에서 손을 뗀 유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책을 쑥 뽑아 든 유진이 책을 살펴보더니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뭐야, 작은 뿔피리 같은 거잖아. 이게 그 성물이야?”

    유진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리카서스에서 공개한 무렉스의 호른이 그려져 있었다. 무렉스의 호른은 원추형 모양으로 크기는 손바닥만 했다.

    “……어. 맞아.”

    아리아드네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아리아드네를 샅샅이 훑었다. 다친 것 같진 않은데 정신이라도 나간 것 같은 얼굴이었다.

    ‘많이 놀랐나? 이런 정도로 그렇게 놀랄 여자가 아닌데.’

    여자는 제 앞에서 괴물의 머리가 터져 나갈 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미칠 것처럼 머리가, 가슴이 들끓었던 건 오히려 유진이었다.

    그가 정신을 차리라는 듯 아리아드네를 가볍게 흔들었다.

    “왜 그래?”

    [살고 싶습니까.]

    새까만 어둠 사이로 나타나 그렇게 물었던 누군가가 있었다. 정말로 존재했던가 아리아드네조차 의심스러웠던 누군가가.

    [내 가족을 돌려줘. 내 삶을 돌려줘. 내 시간을 돌려줘.]

    아리아드네가 가졌던 단 하나의 소망.

    [나를, 나를 돌려줘.]

    그 소망을 이루어 준 것은 새까만 그림자 속에 나타났던 누군가.

    [당신이 원한다면.]

    그 존재는 왜 아리아드네의 소망을 이루어 주었던 걸까. 아니, 그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수백 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어떠한 존재였기에 어떻게, 나를, 왜 구원해 주었나.

    정체도 알 수 없는 존재에 영혼마저 속박당한 것처럼 내내 그것만 생각했다.

    어쩌면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사람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조금 전 느꼈던 기이한 적막, 공기마저 갇힌 듯한 그 기묘한 고요. 아리아드네는 그 기묘함을 이미 몇 번이나 경험했다.

    사다리에서 떨어질 뻔한 조금 전에, 유진이 메로우를 죽이기 직전에, 그리고 첨탑에서 카이엔의 결혼 행렬을 내려다보았던 그때.

    세상의 시간이 멈춘 듯했던 그 순간들에 분명 유진이 있었다.

    “당신이야?”

    아리아드네가 제 앞의 유진을 다급히 붙들었다.

    “대체 무슨…….”

    이 말을 해서는 안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나를, 내 시간을 돌려준 게 당신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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