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148)
  • 2. Heart to Heart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마치 물감을 풀어놓은 듯 선명한 푸른색이었다. 햇빛을 받은 나무 잎사귀도 반짝반짝 제 색을 뽐내고 있었다.

    눈이 아찔할 정도로 모든 것이 약동하는 생명력을 자랑하는 세계였다. 어디를 가나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는 것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흐음, 여기서 봤다고 하지 않았어?”

    부서지는 햇살처럼 희미한 빛깔의 머리카락이 고갯짓에 따라 기울어졌다.

    “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 계셨는데…….”

    “그런데 아리아드네 님, 왜 그렇게 방문자님을 찾으세요?”

    “아, 뇌물 좀 바칠까 했지. 아무래도 밉보인 것 같아서.”

    “…….”

    “그거 아니야. 오해라니까. 왜 이블린 네가 얼굴을 붉히고 그래?”

    “……뭐가, 대체 뭐가 오해라는 말씀이세요?”

    “줄리, 넌 또 뭐가 그렇게 신났어?”

    “아니, 오해라고 하시니까 뭐가 오해인지 궁금했을 뿐인데…….”

    조잘대는 소리들이 점점 멀어졌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네.’

    유진은 별채의 지붕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이렇게 누워서 새파란 하늘을 보고 있으면 마치 물속에 잠긴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러면 흐릿해진 그곳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하긴 그 모든 건 불과 1년 전 일이었으니까.

    ―유진, 아무리 너라도 여기서 도망칠 순 없어. 그러니까 이만 얌전히 죽어 줘.

    단발머리의 여자가 유진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여자의 이름은 안나, 몇십 분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유진의 동료였다.

    ―난 안 죽어. 죽어 주고 싶어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덤덤하게 대꾸한 유진이 안나의 뒤를 힐끗 바라보았다.

    안나의 뒤에서는 방주의 자랑인 분수가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분수 꼭대기에서는 나뭇잎을 물고 있는 새 부리를 통해 투명한 물줄기가 쏟아졌고, 물줄기는 조명을 받아 시시각각 색이 변했다.

    그리고 분수가 자리한 광장은 무장한 군인들이 물샐틈없이 빽빽하게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안나의 말대로 유진이 도망가긴 힘들어 보였다.

    유진은 총을 꺼내기 위해 품속을 더듬었으나 익숙한 물건 대신 낯선 물건이 손에 잡혔다.

    ―그러니까 네 물건은 네가 잘 간수했어야지.

    우뚝 멈춰 선 안나가 뒤춤에서 유진의 총을 꺼내 손가락에 걸고는 휘휘 돌렸다.

    유진은 제 손에 들린 낯선 총을 내려다보았다. 한때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권총이라 불렸다는, 이제는 유물이나 다름없는 리볼버.

    그가 뒤쪽의 해머를 당기자 리볼버 가운데 달린 실린더가 돌아갔다. 다행히도 사용하는 데 문제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다른 문제가 있었다.

    ―대체 그걸로 뭘 하겠다는 거야? 총알도 없는 빈 총 가지고.

    안나가 손바닥에 쥐고 있던 리볼버의 마지막 탄환을 뒤로 던졌다.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탄환이 분수에 잠겼다.

    ―겨우 그런 고물로 방주의 군인들을 상대하려는 건 아니지?

    안나의 뒤를 빽빽하게 감싼 방주의 군인들이 무장한 채로 유진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왜 사람들을 팔아넘겼지?

    ―팔아넘긴 적 없어. 난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온 거야.

    안나가 딛고 선 땅은 사람들이 흘린 피로 흥건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안나와 유진의 동료였던 이들이었다. 그리고 안나는 그들의 리더였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날 때부터 외곽에서 자란 사람들은 몰라. 낙원에서 추방당한 고통이 어떤 건지. 다시 방주로 돌아오기 위해서라면 난 뭐든 해.

    유진이 깨어난 그곳은 엄청난 재앙이 세계를 휩쓸고 지나간 곳이었다.

    고도로 발전한 문명으로도 막을 수 없었던 엄청난 재해 앞에 인간은 선택했다. 소수의 인간을 선별하여 그들만을 살리기로.

    그렇게 선택된 소수의 인간은 ‘방주’라 명명된 곳에서 과거와 다름없는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살았다. 하지만 방주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방주의 인간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방주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고, 방주의 인간들이 꺼리는 일을 하는 이등 시민이 사는 ‘도시’가 생겨났다.

    그리고 도시에조차 속하지 못하고 쫓겨난 사람들이 있었다. 쫓겨난 사람들은 스스로 무리를 이루었는데 이들이 사는 곳을 ‘외곽’이라고 불렀다.

    외곽의 하늘에서는 내리는 것조차 모두 회색이었다.

    방주의 공기와 물을 정화하면서 생긴 온갖 부유물들이 외곽의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외곽은 방주의 하치장이었다.

    전 세계를 뒤덮은 재해가 복구되기도 전에 방주에서 버린 오염 물질로 외곽은 썩어 들어갔다.

    외곽의 사람 중에 사지가 멀쩡하고, 보통 수준의 지능을 갖춘 이는 십분의 일이 고작이었다. 그중에서도 절반은 스무 살을 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모든 것이 부족했다. 당연한 수순으로 외곽의 사람들은 무기를 들었다. 물 한 모금, 빵 한 덩이를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 건 외곽의 사람들에겐 일상이었다.

    안나는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 버티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우리라고 방주에서 살지 못할 이유가 있느냐고. 안나의 끈질긴 설득이 먹힌 것은 외곽의 삶이 너무 고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희망의 끝은 죽음이었다. 안나의 발밑을 구르는 시체 중에는 조금 전까지 그녀의 연인이었던 남자와 사막에서 헤매는 유진을 주운 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방주에만 돌아올 수 있다면 난 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어.

    ―그래. 그런 것 같군.

    ―그러니까 유진, 넌 여기서 죽어 줘.

    안나가 유진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유진 또한 손에 쥔 리볼버를 안나를 향해 겨눴다. 안나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이거 너무 시시한 승분데.

    ―조금 전에 말했을 텐데? 난 안 죽는다고.

    타앙! 유진의 리볼버에서 붉은 불꽃이 피어오르더니 사람들의 시체를 뒤적이던 군인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어, 어떻게? 분명 탄환이…….

    피피피픽, 공기를 가르는 작은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유진을 향해 총알이 빗발쳤으나 동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솜씨는 유진을 비켜 갔다.

    유진의 주위에만 공기가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그를 향한 총알은 속도를 잃었고, 느릿한 공기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그 혼자뿐이었다.

    그사이 안나를 향해 다가간 유진이 그녀의 관자놀이에 리볼버를 겨눴다.

    ―포르투나의 룰렛이라고 했던가?

    처음 이것을 그에게 알려 준 것도 안나라는 저 여자였다. 목숨을 가지고 하는 도박이라니, 이런 미친 짓거리를 누가 하나 궁금해했더니.

    ―눈먼 행운의 신이 누구의 손을 들어 줄지 궁금하군그래.

    유진이 천천히 뒤쪽의 해머를 당겼다. 끼릭 하는 소리와 함께 실린더가 돌아갔다. 공포에 질린 안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살, 살려 줘. 제발…….

    유진이 겨누고 있던 방아쇠를 당겼다. 픽 하고 새어 나온 바람에 안나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유진은 다시 해머를 당기며 물었다.

    ―다음에도 네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안나는 거세게 도리질을 하며 도망치듯 뒤로 물러났다.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분수에 빠진 안나가 덜덜 떨며 말했다.

    ―괴물……. 넌 괴물이야! 나만 그렇게 생각한 줄 알아? 다들 널 두려워했어. 5년 동안 머리카락조차 자라지 않는 널.

    ―내가 괴물이라면 너도 괴물이겠지.

    유진이 분수 중앙에 있는 새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자 보석으로 만든 새가 산산이 조각나며 부서졌다. 새 부리 사이로 졸졸졸 흘러내리던 분수의 물이 깨진 조각 사이로 터질 듯이 쏟아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주위를 둘러싼 군인들이 마구잡이로 총을 난사했다. 탄환에 얻어맞은 분수의 물이 위로 솟구쳤다. 조명을 받아 하얗게 빛나던 분수의 물이 붉게 물들었다.

    솟구친 물보라가 가라앉자 분수 가운데 주저앉은 안나의 모습이 드러났다. 흠뻑 젖은 안나는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꺽꺽 숨을 몰아쉬었다.

    ―그 사막에서 너를, 너를…… 살, 리는 게 아니었어.

    안나가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앞으로 꼬꾸라졌다. 힘을 잃은 안나의 몸이 물 위로 둥둥 떠올랐다.

    ‘……도, 망 가. 어서.’

    그때, 희미한 기억 속의 누군가가 유진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죽여……줘, 어서 나를.’

    ‘……괴물이, 정말 괴물이 되…….’

    ‘나 신부가…… 행……복…….’

    ‘기다리고, 기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유진의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피피픽, 사방에서 날아온 총알이 유진의 온몸에 박혔다. 유진은 제 몸에서 흐르는 피를 두 손 가득 받아 냈다.

    ―괴물도 죽을 때 흘리는 피는 붉은색이라 다행이군. 난 내가 안 죽는 줄 알았지.

    유진은 온몸을 지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그대로 분수에 빠졌다.

    그는 멀어지는 의식 사이로 자신의 몸이 깊게, 깊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밝게 빛나는 조명 때문일까. 멀어지는 수면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흐려지는 의식 사이로 유진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천사?’

    흰 꽃을 품에 안은 여자는 방주의 하늘처럼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가 제 손을 잡으라는 듯 유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아, 어디서 봤나 했더니…….’

    모래사막에서 처음으로 깨어났던 날, 폐허가 되어 버린 건물에서 형체도 색도 시간에 바랜 그림을 본 적이 있었다.

    흰 꽃을 든 천사와 마주한 여자.

    도무지 그 색을 알 수 없었던 그림 속 여자의 눈은 맑은 하늘빛이었다. 외곽의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던 맑은 하늘을 눈에 가득 담은 여자가 어째서인지 유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신은 인간을, 나를 버리지 않은 것인가. 죽음 뒤의 세상에는 그토록 바라던 구원이 있을 것인가. 저 손을 잡으면 나도 어딘가에, 누군가에 속할 수 있을까.’

    힘껏 손을 뻗어 보았지만 여자와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끝도 없는 바닥으로 가라앉을 뿐이었다.

    방주의 분수는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거대했다. 끝도 없이 떨어지는 몸만큼 의식이 점점 멀어졌다.

    그렇게 죽은 줄 알았는데……. 아득하게 멀어졌던 정신이 다시 가까워졌다.

    숨이 모자랐다. 막혔던 숨을 토해 내자 유진을 둘러싸고 있던 물방울이 툭 터졌다. 그 속에 담긴 물이 쏟아져 내리며 유진의 몸이 천천히 떨어졌다.

    유진은 젖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역시 안 죽는 쪽인가.

    잔뜩 젖은 옷이 몸에 질척하게 들러붙었다. 유진은 물기를 가볍게 털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방주의 사치는 상상을 초월하는군.

    처음 그곳에서 깨어났을 때는 살아남은 자신이 방주에 잡혀 온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유진이 깨어난 곳은 황금빛 광채로 가득한 방이었다. 아니, 방이라기엔 좀 과했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솟은 천장과 그 면적을 짐작하기도 힘들 정도로 넓은 바닥, 주위를 둘러싼 벽까지 모두 번쩍번쩍한 황금으로 바른 호화스러운 공간이었다.

    그중에서도 홀 중앙에 자리한 물건에서는 눈이 아플 정도로 선명한 황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유진은 자연스럽게 그 물건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건 좀 악취미 같은데…….

    그는 황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물건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저도 모르게 눈가를 찡그렸다.

    그것이 바로 성 상티모니아 최고의 성물 카푸트였고, 그가 정신을 차린 곳은 성 상티모니아의 살리바 대신전이었다.

    메르디에스 성의 별채 지붕 위에 누운 유진은 왼손을 허공을 향해 가볍게 휘둘렀다. 섬광이 터져 나오며 그의 왼손 위에 황금빛 물체가 둥둥 떠올랐다.

    목 위만 남은 사람의 머리가.

    최고의 성물이라는 카푸트(căput)가 이따위니 좋아하려 해도 좋아할 수가 없었다.

    유진은 제 손 위에 둥둥 떠오른 황금빛 두상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황금빛 광채에 휩싸인 카푸트는 눈을 감은 채로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젊은 남자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계속 보고 있자니 어쩐지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속이 뒤집힐 것 같아 손을 휘둘러 카푸트를 치웠다. 눈을 감고는 치밀어 오르는 불쾌함을 눌렀다.

    이곳의 하늘이라도 보면 이 더러운 기분이 좀 나아질까 싶어 눈을 뜨면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찾았다.”

    옅은 금발이 바람에 나부끼자 아리아드네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방주의 하늘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그를 보고 있었다.

    “당신이 보는 풍경은 이런 거구나. 좋네.”

    그의 삶은 온통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나 피해 다닌 건 아니지?”

    방주의 분수에서 보았던 제 환상 속의 여자가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

    “내려가자. 당신에게 알려 줄 것이 있어.”

    여자가 자신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그는 천천히 여자가 내민 손을 잡았다.

    살아 있는 사람의 따뜻한 온기. 손을 뻗어도 눈앞의 여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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