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148)
  • * * *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공녀 저하.”

    “얼마든지.”

    아리아드네는 바삐 걸음을 옮기는 리스벨 시녀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제 손에 들린 꽃다발로 눈을 돌렸다.

    좁고 길게 뻗은 푸른 잎은 날렵한 자태를 뽐내며 꽃대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긴 꽃대에 자잘하게 달린 보랏빛 꽃은 곡식의 낱알만 한 크기였다. 꽃 색깔이 꼭 캐롤린의 눈동자 같아서 무심코 집어 든 것이었다.

    맥문동이라 했던가? 긴 꽃대에 손톱만 한 보랏빛 꽃이 빼곡하게 달린 모양새는 꼭 라벤더 같지만, 길고 빳빳한 푸른 잎이 여러 갈래로 뻗은 것이 라벤더와는 달랐다.

    “공녀 저하, 오래 기다리시게 하여 죄송합니다.”

    곧 돌아온 시녀장이 아리아드네를 캐롤린의 방으로 안내했다.

    “캐롤린 상태는 좀 어때?”

    “아가씨께서는 좀 놀란 것뿐으로 상한 데는 없으십니다.”

    “다행이야. 캐롤린은 약도 잘 듣지 않잖아.”

    캐롤린은 체질적으로 약이 잘 듣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 조금만 다쳐도 다들 마음을 졸이곤 했다.

    메르디에스의 주치의인 코라라도 보내 주고 싶었으나, 소르체의 혈족인 코라는 그 콧대가 대단해 아리아드네조차 제 뜻대로 부릴 수가 없었다.

    “마음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어느덧 캐롤린의 방문 앞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캐롤린의 방문을 조심히 밀었다.

    “왔어?”

    아리아드네의 방문 소식을 들은 캐롤린이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 반만 열어 둔 커튼 틈 사이로 해가 비춘 방 안은 꼭 저녁 어스름처럼 느껴졌다.

    “날이 덥지? 마실 걸 좀 내올까?”

    침대 옆에 달린 줄을 당기려는 캐롤린을 말린 아리아드네가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뭐 하러 그래. 번거롭기만 해.”

    아리아드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던 캐롤린이 아리아드네 손에 들린 꽃다발을 보며 물었다.

    “그건 나 주려고 가져온 거야?”

    “아, 응.”

    “예쁘다. 맥문동이지?”

    꽃다발을 품에 안은 캐롤린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나는 처음 보는 품종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리아드네의 말에 캐롤린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럴 리가. 네가 꽃에 관심이 없으니 그렇지. 레이놀즈 백작 부인이 좋아하는 꽃이라서 이맘때 레이놀즈에 가면 늘 있는 꽃이잖아.”

    레이놀즈 백작 부인 마거릿은 캐롤린의 생모였다. 마거릿은 캐롤린을 낳은 지 반년도 되지 않아 이혼하고는 해가 지나기도 전에 레이놀즈 백작과 재혼했다. 캐롤린의 보라색 눈은 생모 마거릿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미안해. 난 네 눈동자 색이라고만 생각했어.”

    마거릿은 한 번도 캐롤린을 제 자식으로 대해 준 일이 없었다. 마치 처음 보는 영애를 대하듯 자신을 대하는 마거릿의 태도에 캐롤린은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기까지 캐롤린이 겪어야 했던 시간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리아드네는 제 배려가 부족했음을 절감했다.

    “왜 예쁜데. 난 보라색 좋아해. 화병에 꽂아서 내내 곁에 둘 거야.”

    생긋 웃음을 지은 캐롤린이 흥얼거리며 꽃다발에 고개를 숙이고는 꽃향기를 맡았다.

    “캐롤린.”

    아리아드네는 꽉 막힌 목에서 간신히 캐롤린의 이름을 꺼냈다.

    “……응?”

    아리아드네의 부름에 고개를 든 캐롤린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눈물 나게 아름다운 얼굴로.

    “미안해.”

    얼마나 늦은 사과인가. 사과를 들어야 할 사람은 이미 이곳에 없는데. 아리아드네는 그 사실이 다행이라고 여기면서도 서러웠다.

    “뭐가 미안해. 네가 알고 가자고 한 것도 아닌데.”

    캐롤린은 아리아드네의 사과를 메로우가 나타난 그날 호수에 가자고 권한 것 때문이라 여기는 듯했다. 아리아드네는 캐롤린의 오해에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다가온 캐롤린이 아리아드네의 손을 잡았다. 조금 망설이던 캐롤린이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란데르 해변에 메로우가 나타났던 그때, 나 조금 후회했어.”

    캐롤린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남자였다면, 남자로 태어났다면, 아버지만큼 강했다면, 아무도 다치지 않았을 텐데……. 네가 그런 위험에 처했는데 내가 지켜 줄 수 없다는 게 너무 분했어. 기사들이 나타날 때까지 덜덜 떨기만 하는 게.”

    메르디에스의 가장 견고한 방패 리스벨, 캐롤린은 리스벨의 다음 주인이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아리아드네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에 시달렸다.

    “그래서 큰 결심을 하고 검을 잡았는데, 나 정말 절망적일 정도로 재능이 없어서…….”

    캐롤린은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매끈하고 부드러운 이 손이 굳은살과 물집으로 가득했던 때도 있었다.

    좀처럼 늘지 않는 실력에 힘들어하면서도 캐롤린은 검을 놓지 못했다. 고집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를 괴롭혔다.

    “아리아드네, 네가 그랬잖아. 리스벨이 메르디에스를 지킬 수 있는 건 검뿐만이 아니라고. 나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너를 지키고 싶었는데…….”

    캐롤린이 검을 놓을 수 있었던 건 아리아드네의 그 말 때문이었다.

    “네가 그렇게 힘들어하는데도 난 아무것도 몰랐어. 아무 힘이 되어 주지 못해서……. 미안, 미안해.”

    캐롤린의 얼굴에서 떨어진 눈물이 아리아드네 손등 위로 흘러내렸다.

    “아, 주책이지.”

    저도 모르게 흐른 눈물이 민망한 듯 캐롤린이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닦아 냈다. 눈물로 젖은 캐롤린의 얼굴 위로 아리아드네 기억 속의 캐롤린이 떠올랐다.

    “아니야. 내가 미안해. 요사이 내 마음이 심란해서 날이 서 있었어. 미안해, 캐롤린.”

    캐롤린의 눈에서는 겨우 멈췄던 눈물이 다시 차올랐다. 막을 새도 없이 주르르 흘린 눈물에 캐롤린의 뺨과 검은 머리카락이 젖어 들었다.

    “……사실 나, 무서웠어.”

    캐롤린이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네가 날 피하는 것 같은데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나를 보는 네 얼굴이, 내가 알던 네가 아닌 것만 같아서, 나 무서웠는데……. 물으면 내 우려가 사실이 될까 봐 묻지도 못했어.”

    캐롤린의 검은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캐롤린이 꽉 붙든 아리아드네 손등 위로도 미지근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비 전하, 보중하시길 바랍니다. 전하께서 보셔야 할 게 아직도 많이 남았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던 캐롤린의 머리카락은 아리아드네가 뒤엎은 수프로 뒤범벅이 되어 엉망이었다.

    캐롤린의 머리카락에서 흘러내린 멀건 수프가 바닥에 고였다. 그 위로 더해진 캐롤린의 눈물이 바닥에 고인 수프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때 아리아드네는 캐롤린이 붉어진 눈으로 왕비의 처소에서 벗어날 때까지 끝내 외면했다. 왜 그랬느냐고 물어라도 볼걸. 무엇이 너를 그렇게 몰아갔느냐고 물어라도 볼걸.

    아리아드네는 듣지도 못할 사과를 했다. 네가 그렇게 힘들어할 때, 나는 조금도 네 힘이 되어 주지 못했노라고.

    * * *

    성으로 돌아온 아리아드네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 선 남자와 마주했다. 빛을 모조리 빨아들일 듯한 새까만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성큼 다가온 남자가 아리아드네를 내려다보며 사납게 으르렁댔다.

    “네 장난 따위에 다시는 날 끼워 넣지 마.”

    유진의 잿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과거, 반 호수에 갑작스레 나타난 메로우 때문에 적지 않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뻔히 알면서 또다시 그런 일이 반복되도록 내버려 둘 순 없었다.

    무량의 돌을 보여 준 성채로 메로우를 잡아 달라 부탁할까 생각했지만, 나타나지도 않은 메로우를 없애 달라고 할 순 없었다.

    결국 메로우가 나타나는 날에 맞춰 유진과 동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이용당한 유진의 분노 또한 마땅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아리아드네를 보는 눈빛이 전에 없이 싸늘했다.

    “모르는 척하지 마. 그날 네 태도는 그 괴물이 거기 나타날 걸 알고 있었던 사람이지. 아닌가? 호수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괴물을 지켜보고 있었잖아. 언제 튀어나올지 기다리는 사람처럼. 괴물이 호수에서 솟구쳐 올랐을 때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조금도 놀라지 않았고. 내 말이 틀렸나?”

    그날도 그랬다. 풀멘을 쥔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놀란 남자는 분노한 눈으로 아리아드네를 쳐다보다가 자리를 떠났다.

    “……고의는 아니었어. 하지만 당신으로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 제대로 된 설명도 하지 않고 무작정 내 일에 끌어들여서 미안해.”

    중요한 것은 모조리 뭉뚱그린 반쪽짜리 사과였다. 그것을 들은 유진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누가 그따위 말이 듣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다들 목숨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날 머리가 터져 나간 건 그 괴물이 아니라 너일 수도 있었어. 아직도 실감이 안 나?”

    그런데 남자의 분노는 아리아드네가 예상한 방향과는 달랐다. 오랜만에 들은 꾸지람에 아리아드네는 머쓱해졌다. 아리아드네는 공연히 제 귓불만 만지작거렸다.

    “당신이 그랬잖아. 당신 눈이 닿는 곳에만 있으면 지켜 주겠다고.”

    무슨 말이냐는 듯 유진의 한쪽 눈썹이 치켜들렸다.

    “당신 눈이 닿는 곳에 있으면 최소한 죽는 일은 없을 거라며. 그 말이 그 말 아니야?”

    차가운 외모와 압도적인 무력, 삐딱한 태도 때문에 다들 오해하지만, 아리아드네가 파악한 유진은 겉으론 거칠게 굴어도 속까지 그런 사람은 되지 못했다. 적잖이 당황한 듯 유진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연거푸 쓸어 올렸다.

    “무슨…… 아주 제 편할 대로 엉망진창이군.”

    유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되는대로 늘어놓더니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누가 쫓아올세라 서둘러 도망가는 그를 보고 있노라니 웃음이 났다.

    많이 놀랐는지 유진의 목 언저리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신의 현신으로 취급받는 남자가 저렇게 순진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리아드네가 기억하는 시간의 유진은 조금 더 예민하고,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유진의 얼굴이 제법 신선했다.

    과거, 아리아드네는 무량의 돌을 보여 준 첫 번째 대가로 카이엔을 왕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무량의 돌을 보여 준 두 번째 대가로 아리아드네가 진짜 얻고 싶었던 것은 메로우를 잡는 것 따위가 아니라 유진이었다.

    신과 가장 가까운 남자.

    200년 전, 이 땅에 현신한 신은 케이루스를 왕가로 만들었다. 그리고 200년 후, 이 땅에는 다시 신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신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말했다. 아리아드네는 그 지옥 같은 시간 속에서 사람이 사람을 얻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라는 것을 절절히 깨우쳤다.

    진심을 주고, 진심을 얻는 것.

    유진을 얻으려면 더 많은 진심이 필요하겠지. 이제까지 보여 준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차가운 가면으로 무장한 남자가 수줍어하던 얼굴을 보아서일까. 유진이 한결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가 아직 보여 주지 않은 얼굴들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것을 볼 날들이 기대되었다.

    남자가 사라진 자리에 기울어진 해가 붉은빛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또다시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시간은 분명 아리아드네가 알지 못했던 진실을 알려 주었다. 물거품보다도 허망했던 제 사랑의 결말과 목숨처럼 아꼈던 친구의 배신. 그 모든 것은 틀림없이 존재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오지도 않은 미래 때문에 현재의 진실에서 눈을 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또다시 후회할 일을 만들 마음 따윈 조금도 없었다.

    시간이 아리아드네에게 준 것은 미래의 기억만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는 수많은 선택지가 무궁무진하게 펼쳐져 있었다.

    아리아드네가 집어 든 선택지는 바로 이것이었다.

    카이엔에게 빼앗긴 모든 것을 되찾아올 것.

    진짜 싸움은 시작도 안 했어. 돌아서는 아리아드네 위로 노을의 붉은 빛이 드리웠다.

    Time Is the Herald of Truth : 시간은 진실의 전령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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