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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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서 불어온 선선한 바람이 아리아드네의 옅은 금발을 흐트러뜨렸다. 아리아드네는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이 귀찮은 듯 눈살을 찌푸리더니 손가락으로 대강 머리를 빗어 내렸다.

    그때, 아리아드네가 탄 백마 근처로 윤기가 반지르르한 검은 털을 가진 흑마가 다가왔다.

    “리아, 우리 이렇게 나온 거 너무 오랜만인 것 같아.”

    캐롤린이 꼭 제 머리색 같은 말갈기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런데 방문자님은 왜 같이 오신 거야?”

    뒤따라오는 유진을 힐끗 쳐다본 캐롤린이 그가 들을까 소리를 낮춰 물었다.

    “호위 겸 관광. 내가 너랑 피크닉 갈 예정이라니까 유진도 같이 가고 싶다고 해서.”

    아리아드네를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던 유진은 한숨을 내쉬며 검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내가 원하는 건…….

    메르디에스의 성물 ‘무량의 돌’을 본 성채로 아리아드네가 유진에게 요구한 것은.

    ―당신과의 피크닉?

    그것이 아리아드네의 대답이었다.

    ―장난치지 말고 제대로 말해. 성채는 마음으로 동의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며.

    유진은 아리아드네의 제안이 재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굴었다.

    ―장난 아닌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아리아드네가 왔던 길을 거꾸로 되짚으며 걸었다. 긴긴 계단을 올라올 때까지도 유진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계단 끝에 있는 문을 잡아당기자 어두컴컴한 지하 돌탑 안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갑작스레 밝아진 주위에 눈을 찡그린 아리아드네 앞을 검은 물체가 가리고 섰다.

    어느새 아리아드네 앞을 가로지른 유진이 지하 돌탑을 빠져나갔다. 아리아드네는 성큼 걸어 유진을 따라잡았다.

    ―내가 요구하는 성채는 그게 전부야. 피크닉은 내일 정오가 좋겠네. 그럼 내일 봐.

    그는 아무 대답도 없었지만 아리아드네는 확신했다. 유진은 반드시 올 거라고.

    “아무래도 좋아서 따라오신 것 같진 않은데.”

    캐롤린이 유진을 힐끔거리며 중얼거렸다.

    유진은 아리아드네 예상대로였다. 해가 하늘의 정중앙에 자리한 시각이 되자, 귀찮은 얼굴을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러고는 쭉 저런 상태였다.

    그런 유진이 불편한 듯 캐롤린이 힐끔거렸다. 캐롤린이 유진에게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아리아드네가 말 옆구리를 차며 달려 나갔다.

    “리아, 같이 가.”

    히이잉 하는 말 울음소리가 울리더니 캐롤린이 아리아드네 뒤를 쫓아왔다.

    “호수에 먼저 닿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아리아드네는 캐롤린과 수백 번쯤 주고받았던 의미 없는 내기를 제안하며, 호수를 향해 달려갔다.

    메르디에스 성문 남쪽에는 ‘반’이라 불리는 호수 하나가 있었다. 메르디에스의 사유지라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는 곳이었다.

    이곳은 아리아드네가 사람들을 피하고 싶을 때마다 찾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캐롤린은 그런 아리아드네를 귀신같이 찾아내곤 했다.

    [리아, 왜 여기 혼자 있어?]

    [그냥. 어차피 성에 있으나, 여기 있으나.]

    [왜 그런 말을 해. 다들 널 얼마나 찾았는데……. 성으로 돌아가자. 다들 기다리고 있어.]

    혼자 있고 싶어서 숨은 주제에 아리아드네는 기어이 자신을 찾아낸 캐롤린이 반가웠다. 그것이 쑥스러워 아리아드네는 부러 퉁명스레 말했다.

    [그럼 뭘 해. 어머닌 날 싫어하시는데.]

    아리아드네의 생모, 파시파에는 오랜 투병으로 예민해져 아리아드네에게 상처 주는 일이 잦았다. 달에 한 번이나 볼까 말까 한 모녀 사이였지만 아리아드네는 파시파에를 만난 날이면 늘 기분이 별로였다.

    [리아…….]

    캐롤린의 손이 아리아드네를 감싸 왔다. 따뜻한 온기에 뾰족하게 세웠던 날이 벌써 반쯤 무뎌진 것 같았다.

    [어머닌 날 낳은 걸 후회하시잖아. 날 낳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아프지는 않으셨을 텐데.]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것이 있었다. 파시파에의 차가운 눈동자에 묻어나는 후회는 늘 아리아드네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어머니의 병환은 나 때문이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려 했지만……. 하루하루 죽어 가는 파시파에를 보면 제 존재가 죄인 것만 같았다.

    [우리 어머니도 날 싫어하지만, 난 태어나서 좋아.]

    머뭇거리던 캐롤린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젖먹이 딸을 두고 이혼한 캐롤린의 생모는 재혼한 남편에게서 캐롤린과 두 살 터울인 딸을 얻었다. 캐롤린은 연회장에서 이부 여동생과 생모를 만난 날이면 말없이 아리아드네를 찾곤 했다.

    둘은 서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이자, 피를 나누지 않은 자매인 동시에 서로의 상처를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는 분신 같은 존재였다.

    [아버지도, 성주님도, 리아도 만날 수 있었으니까. 리아는 나 만난 거 안 좋아?]

    캐롤린의 보랏빛 눈동자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리아드네가 울고 싶어질 때면 마치 대신하기라도 하듯 캐롤린은 자신이 먼저 엉엉 울고는 했다.

    아리아드네는 두 살 위인 캐롤린의 눈물을 쓱 닦아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누가 태어난 걸 후회한대? 그냥 좀 울적했던 것뿐이야. 돌아가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리아드네가 말 위에 냉큼 올라타며 말했다.

    [캐롤린, 늦는 사람이 세라노 선생님이 내 주신 숙제 전부 다 하기야.]

    멍하게 서 있던 캐롤린이 허둥지둥 뒤따라오며 다급하게 외쳤다.

    [그런 게 어딨어? 리아, 같이 가.]

    결국, 둘은 나란히 숙제를 안 한 벌로 고문 해석을 하느라 사흘 밤을 끙끙거려야 했다. 하루면 끝났을 벌이 사흘이나 걸린 건 같이 붙어서 노는 시간이 더 많아서였다.

    [캐롤린, 그 사람이 자꾸 생각나. 나 그 사람이랑 함께하고 싶어.]

    아리아드네가 카이엔을 향한 제 마음을 가장 먼저 알린 사람도 당연히 캐롤린이었다.

    [리아, 뭘 걱정하는 거야? 메르디에스의 아리아드네를 거절할 사람이 어디 있어?]

    사랑에 빠진 아리아드네는 캐롤린에게 모든 걸 쏟아 내고는 했다.

    [전하도 내가 좋다 하실까?]

    [전하께서 먼저 널 좋다 하신 거 아니야?]

    캐롤린의 물음에 아리아드네는 얼굴을 붉히고는 딴청을 부렸다.

    [아직 그런 말을 하시진 않았어.]

    캐롤린은 어찌나 놀랐던지 들고 있던 부채를 바닥에 떨어트리고는 주울 생각도 하지 못했다.

    [맙소사, 리아! 너 리아 맞니? 너, 열여섯 첫 데이트 때도 이러진 않았어.]

    [모든 게 다 처음 같아. 이제까지 남자랑 있을 때 내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했는지 아무것도 모르겠어.]

    사랑으로 아리아드네의 세상이 충만하던 그때도 캐롤린은 늘 함께였다.

    [캐롤린, 나 그 사람을 그렇게 둘 수 없어. 그 사람이 죽도록 그렇게 내버려 둘 수 없어.]

    [메르디에스 공작의 부군을 누가 해쳐?]

    공작의 부군이 되어 목숨을 연명하겠냐는 말에 쓴웃음을 짓던 카이엔이 생각나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저었다.

    [내 부군이 되어 살아 있기만 하라는 건 그 사람에게 너무 가혹하잖아. 그 사람이 원하는 걸 주고 싶어.]

    [리아, 네가 원하는 대로 될 거야. 이 땅의 모두는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 그러니까 넌 네 마음만 생각해.]

    아리아드네의 행복을 바란다고, 그렇게 말했던 캐롤린의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아리아드네에게서 캐롤린을 지우는 것은 카이엔을 버리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캐롤린은 왜 변했던 걸까? 언제부터?

    [아버지가? 거짓말이지? 리아, 거짓말이라고 해. 나 지금 나쁜 꿈을 꾸는 거라고.]

    캐롤린의 아버지, 커티스가 사냥터에서의 사고로 생명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캐롤린에게 전한 것은 아리아드네였다.

    [캐롤린, 캐롤린!]

    아리아드네가 쓰러지는 캐롤린을 붙잡았다. 자신을 붙잡는 아리아드네를 밀친 캐롤린이 벌떡 일어나더니 한쪽 신발이 벗겨진 채로 뛰쳐나갔다.

    그토록 눈물이 많았던 캐롤린은 그날, 울지도 못하고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돌아오마, 그러고 떠나셨는걸. 언제나처럼 돌아오겠다고 그러고 가셨는데, 아버지가 왜, 우리 아버지가 왜! 아니라고, 아니라고 해 줘.]

    그대로 엎어진 캐롤린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바닥을 기어 다녔다.

    [리아, 제발 아니라고 해 줘. 아버지 곧 돌아오실 거라고. 살아 계신다고, 그러면, 그러면 나 뭐든 할게. 아버지를 살려 줘, 제발……. 우리 아버지 좀 살려 줘.]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 사흘 뒤, 커티스는 세상을 떠났다.

    [리아, 아버지가,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내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내게 남은 마지막 가족이었는데……. 내 아버지가, 죽었어.]

    검은 망사 너머 캐롤린은 그때 무슨 생각이었을까.

    [성주님을 살리고 아버지가 죽었어…….]

    사냥터에서 맞닥뜨린 마물이 문제였다. 커티스는 레너드를 공격한 마물은 막아 냈지만 제 목숨은 끝내 지키지 못했다.

    아버지를 잃은 캐롤린은 커티스의 관을 붙잡고는 울부짖었다.

    [왜, 왜, 아버지 왜, 저는, 저는 어쩌라고, 왜! 왜 돌아가셨어요! 왜! 말씀 좀 해 보세요. 일어나서, 절 보고 말씀 좀 해 보세요!]

    사람들이 아무리 떼어 내도 캐롤린은 자신의 두 주먹이 피투성이가 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커티스의 관을 두드렸다.

    [캐롤린, 캐롤린, 리스벨 백작님은, 백작님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레너드를 살렸으니 커티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고? 그러니 슬퍼하지 말라고?

    아리아드네는 그저 미친 듯이 발버둥 치는 캐롤린을 붙드는 것밖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리아, 아버지는 내 마지막이었어. 나는 이젠 아무것도 없어. 내게는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아버지만 살아 계셨어도, 그러면 나도, 나도…….]

    캐롤린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리아드네는 그때의 캐롤린이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아직도 알지 못했다. 아버지를 잃기 전에 캐롤린이 무엇을 잃었는지도.

    [캐롤린!]

    그날 혼절한 캐롤린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리아, 넌 지금, 행복하니?]

    아리아드네를 향한 저주였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리아, 오늘은 내가 먼저 도착했어.”

    아리아드네를 뒤돌아보는 캐롤린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아리아드네를 바라보는 보랏빛 눈동자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지금의 너는 믿어도 될까? 아리아드네는 기억 속의 캐롤린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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