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148)

* * *

“드디어 그 무량의 돌인지 뭔지 하는 성물을 볼 수 있는 건가?”

유진의 목소리가 돌벽에 부딪혀 울렸다.

그는 아리아드네의 안내에 따라 나선형으로 된 계단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나선형의 계단은 끝도 없이 밑으로 이어져 있었다.

지하 돌탑은 한여름에도 늦가을처럼 서늘했다. 곳곳에 걸린 등불로 어둡지는 않았지만, 기묘하고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 공간이었다.

익숙한 듯 계단을 내려가던 아리아드네가 유진의 질문에 고개를 돌렸다.

늘 무심하고 심드렁하던 사람이 오늘따라 날이 서 있었다. 유진은 초조한 낯으로 목 언저리를 드러낸 옷깃을 쥐었다가 놓았다.

“좀 더 좋아할 줄 알았는데? 기분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네.”

미간을 찌푸린 유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란데르의 여름 별장에서 그는 아리아드네의 제안을 일부 수용했다.

―날 찾아왔다는 말은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생각해도 될까?

―파혼, 우선 내가 약속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야.

―좋아. 당신이 내 파혼의 중재자가 되어 준다면 메르디에스 성물을 보여 주지.

―그리고 하나에 하나씩. 당신이 정말 다른 가문의 성물을 보여 줄 수 있다면 하나에 하나씩 주고받지.

―그건 더 좋은데. 기꺼이.

그렇게 이루어진 거래의 결과로 유진이 처음으로 보게 된 다섯 가문의 성물은 메르디에스가 가진 ‘무량의 돌’이었다.

‘이것도 ‘그때’와 달라진 건가.’

아리아드네가 기억하는 시간에서 유진이 처음으로 본 다섯 가문의 성물은 케이루스의 성물인 ‘별의 그릇’이었다.

어두컴컴한 돌계단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유진을 보고 있으면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구나 하는 실감이 들었다.

그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며 그보다 더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니까. 이곳의 성물이 다 카푸트 같은 것이라면 보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아. 그런데도 내게는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150여 년 전, 성 상티모니아의 대대적인 선전을 통해서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한 성 상티모니아 최고의 성물 ‘카푸트’. 그것이 무엇이기에 저 남자를 그토록 불쾌하게 만드는 걸까.

신의 성물을 제 몸에 품고도, 그것을 기껍게 여기지 않는 남자.

유진의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의 신발은 아리아드네가 서 있는 두 계단 위에서 멈췄다.

아리아드네도 작은 키가 아니건만 겨우 두 계단 위 유진의 가슴팍에 닿는 것이 고작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젖혀야 했다.

벽에 걸린 등불이 남자의 얼굴을 주황색으로 물들였다. 반듯한 이마와 날렵한 콧대는 불빛에 그림자가 져 더 선명하고 날카롭게 보였다. 남자의 회색빛 눈동자는 어둠에 잠겨 평소보다 진한 빛을 띠었다.

어둠에 잠긴 유진은 현실감이 없었다. 등불이 비치지 않는 반대쪽은 마치 어둠에 녹아들어 그대로 사라지기라도 할 것 같았다. 첨탑에 갇힌 자신을 찾아왔던 ‘그것’처럼.

‘정말 그건 뭐였을까.’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린 존재가 자신을 따라다니는 그림자처럼 아리아드네를 얽어매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천천히 손을 뻗어 어둠에 잠긴 새까만 머리카락 끝을 붙잡았다. 형체도 없이 사라졌던 그날의 그림자와 달리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왜 내 시간을 돌려줬던 걸까. 대체 왜…….’

그때, 유진의 손가락이 멍한 아리아드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남자의 손짓에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흠칫 놀란 아리아드네가 제 손을 거두었다.

‘뭐 한 거야, 대체…….’

아리아드네는 손바닥으로 달아오른 볼을 꾹꾹 누르며 다시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아리아드네와 유진의 발소리가 엇갈리며 지하 계단 속을 맴돌았다. 마지막 계단에서 내려와 바닥을 디딘 아리아드네가 돌문 앞에서 멈췄다.

돌문 양쪽에는 사자상이 문을 지키듯 서 있었는데, 아리아드네는 왼쪽에 있는 사자의 쩍 벌린 아가리 속으로 손을 넣었다. 능숙한 손길로 몇 가지 조작을 마치자 두꺼운 돌문이 천천히 열렸다.

“여기서부터는 좀 어두워질 거야.”

아리아드네와 유진은 드문드문 걸린 등불에 의지해 천천히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궁금한 거 물어봐도 돼?”

엇갈리는 발걸음 소리 사이로 아리아드네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뭘?”

“뭐, 예를 들면 당신이 있던 곳이라던가.”

어둠 속에서도 희끄무레한 빛을 내는 아리아드네의 금발이 고갯짓에 따라 흔들렸다. 유진은 그것이 밤바다 위에 비친 달빛이 물결을 따라 너울거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곳에 비하면 이곳은 천국이지.”

그가 눈을 뜬 그곳은 살아 있는 자들로 가득한 지옥이었다.

잿빛 눈과 비가 내리는 죽음의 땅. 빵 한 덩이를 차지하기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 것을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 사람들.

“그래? 어디든 살기 힘든가 보구나.”

담담한 말투로 고개를 끄덕인 여자가 빙글 돌아서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래서 천국에 오신 소감은?”

천국이라. 분명 그렇게 대답한 건 자신이었는데…….

“어색해.”

“뭐가?”

“나는 다른 것이 하나도 없는데 괴물이 되었다가 신이 되었다가…….”

―괴, 괴물. 분명, 죽었, 죽었어야…….

―괴물……. 넌 괴물이야!

―카푸트의 주인이시여, 당신의 미혹한 종에게 깨우침을 주소서.

다를 것이 하나 없는 자신을 두고 누구는 신이라 떠받들고 누구는 괴물이라며 비난한다.

어둠 때문인가.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다니. 유진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못 들은 걸―”

“외로워?”

아리아드네는 불에 비친 유진의 얼굴을 제 눈에 담았다.

“…….”

등불에 일렁이는 그의 얼굴이 마치 고통을 참는 것처럼 일그러졌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함부로 해?”

위협을 하는 것처럼 잔뜩 날이 선 목소리였다. 하지만 손이 뻗어도 닿지 않을 거리에 우뚝 멈춰 선 남자는 창백한 낯을 하고 있었다.

“내가 어떤 괴물일지 알고.”

아, 여기서 저 말을 다시 들을 줄이야. 아리아드네는 언젠가 유진과 비슷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겁도 없이. 내가 무슨 괴물일 줄 알고.]

그때도 그는 사나운 어조로 말했다. 잔뜩 경계한 들고양이처럼.

그런 남자가 무섭다기보다는 안쓰럽게 느껴졌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날 선 목소리로 제 두려움을 감추려는 남자가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누구든 마음에 괴물 한 마리쯤 안 키우는 사람도 있어?”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모두가 놀랄 텐데요. 저만한 괴물을 어디 숨기고 있었나 하고. 제 속에 감춰 둔 괴물이 두려운 건 양심적인 사람들뿐이죠. 방문자님처럼요.]

그날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지만 지금은 더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괜찮아. 다들 그러니까.”

어쩌면 그에게는 조금도 필요하지 않을 위로.

천천히 손을 든 남자가 자신의 한쪽 얼굴을 가렸다. 가린 얼굴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어쩌면 ‘유진’조차 아닐지도 몰라.”

잿빛 눈을 맞으며 깨어났던 그 사막을 헤매다 만난 남자가 있었다. 한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죽을 날만을 기다리던 남자였다. 그는 자신을 보고 마치 귀신이라도 만난 것처럼 창백하게 질렸다.

―유, 진? 네가, 어떻게…… 넌…… 벌써 죽었어야, 죽어야…….

―유진? 그게 내 이름인가?

―괴, 괴물. 그때…… 분명, 심장에 총을 맞고…… 내…… 가 확인도 했…….

그것이 남자의 마지막 말이었다. 하지만 아무 기억이 없으니 그것밖에는 의지할 것이 없었다. 유진으로 살고 있지만, 그것조차 확신할 수 없는 불안한 삶.

“그래서?”

하지만 여자의 입을 거치면 그런 불안은 마치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유진이 아니면 어때. 지금 이곳에 있는 건 당신이잖아.”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내게 필요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야.”

명확한 어조는 망설임조차 없다.

“진짜 이름이 필요해? 그럼 당신 손으로 명명해. 그럼 누구도 가짜라고 하지 못할 진짜 이름이 될 테니까.”

얼굴을 가린 손을 천천히 떼어 낸 유진이 아리아드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말없이 아리아드네를 보던 그가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미끄러졌다.

“……좀 더 찾아보고.”

등불에 비친 그의 그림자는 어둠 속에서도 유난히 짙고 길었다.

“같이 가!”

아리아드네는 무엇이 있을지도 모르는 어둠을 성큼성큼 헤치고 나가는 유진의 뒤에 바짝 붙어 걸었다. 서로 다른 발소리가 같은 간격을 두고 이어졌다.

발소리는 막다른 공동(空洞: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는 굴이나 골짜기)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외길이었으니 길을 잘못 들었을 리도 없건만, 공동에는 성물로 보이는 어떤 물건도 없었다.

“도둑이라도 맞았어? 내게 성물을 찾아 달라, 이런 말을 하려는 건 아니지?”

유진이 아무것도 없는 공동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마르지 않는 부를 준다는 메르디에스의 성물이 뭔지 듣지 못했어?”

아리아드네가 공동의 돌벽을 더듬으며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유진이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생각을 더듬었다.

‘설마…….’

아리아드네가 공동의 돌벽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게 바로 메르디에스의 시조께서 요정왕의 목숨을 구해 주고 받았다는 메르디에스의 성물, 무량의 돌이야.”

사람들은 ‘무량의 돌’이라면 기묘한 빛이 나는 광물이 공중에 둥둥 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 밑에는 무량의 돌이 만들어 낸 황금이 산처럼 쌓여 있고.

하지만 실제 ‘무량의 돌’은 새까맣고 단단한 돌일 뿐이었다. 다만 무량의 돌과 유사한 성분의 돌은 이제까지 프레모 대륙 어디에서도 발견된 적이 없었다.

“메르디에스의 땅은 막대한 광물이 쏟아지지. 질 좋은 보석도 마찬가지고. 이 땅에서 나는 곡물이 페렌트 전체에 유통되는 곡물의 절반도 넘어.”

정말 이 ‘무량의 돌’이 메르디에스 부의 원천일까?

“어쩌면 메르디에스는 페렌트라는 나라가 생기기도 전에 영토를 정했으니, 가장 풍요로운 땅을 선점한 걸지도 모르지.”

진실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이 공간을 퍽 좋아했다. 서늘하고 어두운 텅 빈 공동. 메르디에스의 성물 무량의 돌.

“어때? 당신이 찾던 게 맞아?”

“아니, 예상은 했지만 아니군.”

유진은 실망하는 기색도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도 봤으니 값은 치러야겠지. 성채로 뭘 원하지?”

성채(聖債)란 성물을 본 값을 치르는 것을 의미했다. 접견한 성물이 귀한 것일수록 성채로 치러야 하는 대가 또한 비싸진다.

“성채까지 따로 챙겨 줄 줄은 몰랐는데?”

아리아드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안테로에게 성물을 보기 전 주고받은 거래와 성채는 별개의 것이 맞느냐는 확인도 이미 끝낸 것으로 아는데.”

“사제의 약속도 믿을 게 못 되네.”

믿은 적도 없었지만. 아리아드네는 비밀을 엄수하겠다며 철석같이 약속한 사제의 얼굴을 떠올렸다.

“사제의 약속 같은 걸 믿으면 곤란하지.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팔아 세력을 키우는 자들이잖아.”

“신의 현신께서 그렇게 말해도 돼?”

아리아드네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유진이 멈칫하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야. 배고프면 먹고, 시간 되면 자고, 다치면 피 흘리는……. 당신들과 다를 바 하나 없는 그런, 평범한 사람일 뿐이야.”

평범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 그 앞의 이야기들까지 모조리 신빙성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아리아드네가 빤히 유진을 바라보자 그가 어서 해치워 버리자는 듯 그녀를 재촉했다.

“그래서 성채로는 뭘 해 주면 돼?”

과거에는 성채(聖債)로 그에게 카이엔과의 결혼식에 메르디에스 측 하객으로 참석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결혼식에서 일어난 리카서스와 메르디에스의 충돌.

양측은 책임을 두고 크게 다퉜으나 메르디에스에는 페렌트의 왕위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신뢰할 만한 증인이 있었다.

그 증인은 물론 유진이었다. 유진의 증언으로 명분을 얻은 메르디에스는 병력을 일으켰고, 그렇게 시작한 싸움은 계절이 끝나기도 전에 카이엔을 페렌트의 새로운 왕으로 만들었다.

유진을 결혼식의 하객으로 요청한 것부터가 모두 카이엔을 왕으로 만들기 위한 아리아드네의 계획이었다.

“뭘 원하지?”

유진이 아리아드네를 재촉하듯 다시 물어왔다.

무량의 돌을 보여 준 첫 번째 대가로 아리아드네는 카이엔을 왕으로 만들었다. 두 번째 대가로 아리아드네가 얻고 싶은 것은 바로…….

“내가 원하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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