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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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우…….”

    땅이 꺼져라 내쉬는 한숨 소리와 함께 매끄러운 책상 위에 레몬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듯 늘어졌다. 메르디에스 공작, 레너드는 한숨 소리가 난 쪽으로 힐긋 시선을 주었다가 도로 서류를 뒤적였다.

    한숨 소리와 함께 책상 위에 엎어진 그의 딸은 한참을 그 상태로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창틀에 반쯤 걸터앉았다. 톡톡, 유리창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유리창을 도화지 삼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내 다시.

    “휴우…….”

    땅이 꺼져라 내쉬는 한숨.

    레너드가 미간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아리아드네, 왜 그러는지 아버지한테 털어놔 보련?”

    한껏 다정한 얼굴로 이렇게 물으면 보기만 해도 아까울 저 얼굴이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쓸쓸한 목소리로.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버지 일 보세요.”

    이런 식이었다.

    아니, 금쪽같은 제 딸이! 방긋방긋 웃기만 해도 아까울 저 얼굴에 수심이라니! 수심이라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레너드가 아리아드네를 잡아끌며 말했다.

    “그래, 가자. 가! 어서 짐 챙겨. 왕도에 가서 내가 그 자식 목을 따 버릴 테니까.”

    “네? 뭘 따요?”

    “뻔하지. 너 지금 이러는 게 다…….”

    메르디에스 공작 레너드가 1왕자 카이엔의 목을 따 버리겠다는 과업을 공표하려던 순간이었다.

    “성주님, 리스벨 백작께서 드셨습니다.”

    단정한 노크 소리와 함께 총관이 커티스의 출입을 알렸다. 레너드의 허락에 건장한 사내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가 아리아드네를 보고는 반가이 인사를 건넸다.

    “아, 공녀께서도 함께 계셨군요.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

    쉰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건장한 사내였다. 아무도 몰랐다. 커티스가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나리라곤.

    커티스는 아리아드네가 카이엔과 결혼하기 한 해 전, 레너드와 동행한 사냥터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왜, 왜, 아버지 왜! 저는, 저는 어쩌라고, 왜! 왜 돌아가셨어요! 왜! 말씀 좀 해 보세요. 일어나서, 절 보고 말씀 좀 해 보세요!]

    커티스의 죽음에 숨조차 쉬지 못하고 울부짖던 캐롤린이.

    [리아,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내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내게 남은 마지막 가족이었는데……. 내 아버지가, 죽었어.]

    커티스가 누운 관을 부둥켜안은 채 텅 빈 눈동자로 그렇게 중얼거리던 캐롤린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리아, 우리 공주님. 언제까지 너만 행복할 줄 알았니?]

    캐롤린이 변한 건 커티스의 죽음 때문이었을까.

    “아리아드네 님?”

    대답이 없는 아리아드네가 이상했는지 커티스가 재차 그녀를 불렀다.

    “잘 지냈어요. 리스벨 백작께서도 강녕하셨나요?”

    “저 같은 늙은이가 못 지낼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커티스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백작의 평안이 곧 메르디에스의 평안이지요.”

    인사를 주고받은 아리아드네가 레너드를 보며 물었다.

    “저, 나가 볼까요?”

    “음? 아니, 그럴 것까지야. 이러지 말고 다들 자리에 앉지.”

    레너드의 권유에 따라 커티스와 아리아드네가 자리에 앉았다.

    “엘바의 일인가?”

    엘바는 대양(大洋) 레니아에 위치한 섬으로, 랭스턴 공국의 영토였다. 얼마 전 상행을 나갔던 메르디에스 상단원들이 실종된 곳이기도 했다.

    “실종자의 것으로 보이는 소지품 일부가 발견되었습니다.”

    커티스가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리아드네는 ‘엘바’라는 지명을 듣고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 엘바에서 상단원들이 실종된 일이 있었지.’

    랭스턴 공국의 영토인 엘바에서 실종된 상단원들은 결국 싸늘한 주검으로 되돌아왔다. 그렇게라도 돌아온 것은 실종된 상단원 중 일부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마지막 구조 요청이…….”

    실종된 상단원이 보낸 마지막 구조 요청에는.

    “마물로부터 살려 달란 것이었습니다.”

    커티스의 대답에 집무실은 비통함에 잠겼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레너드가 깊은 한숨과 함께 얼굴을 쓸어내렸다.

    마물, 이 땅을 떠난 신들이 남겼다고 하는 미지의 생물. 그것들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왜 인간을 공격하는지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물에 관한 정보라고는 출몰하는 지역과 생김새, 사람들의 편의에 따라 붙인 이름이 전부였다. 마물이 출몰하는 이유도, 그들의 생태도 전혀 알지 못하니 예방은 불가능했다.

    그저 그것이 출몰한 뒤 더 강한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만이 유일한 대응책이었다. 인간에게 마물이란 작은 규모의 자연재해나 마찬가지였다.

    무거운 적막을 깨트린 것은 아리아드네였다.

    “조금 이상해요. 추가로 파병된 수색대에는 메르디에스 기사단의 정식 기사가 포함되어 있었잖아요. 그 전력이라면 상급 마물이라도 너끈히 제압할 수 있죠.”

    훈련받은 정식 기사는 성인 남자 열 사람의 몫을 한다. 합격을 훈련받은 기사라면 그 효과는 배가 된다.

    “엘바는 사방이 바다인 섬이에요. 기사 여럿으로도 해치우지 못할 정도의 최상급 마물이 존재하고 있었다면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을 리가 없잖아요.”

    마물의 강함과는 별개로 그들은 이지(理智)를 발휘하지 못하는 생물이었다.

    “정말 상단원들을 공격한 게 마물일까요?”

    그런 마물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인간을 공격할 수 있을까. 아리아드네의 의문은 매우 합당했다.

    “하지만 랭스턴 공국은 성 상티모니아의 비호를 받는 땅입니다. 그들 스스로 문을 열어 주지 않는 이상 자세한 조사는 어렵습니다.”

    이런 대답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 몹시 괴로운 듯 커티스의 얼굴은 사정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네요.”

    자신이 돌아온 것이 좀 더 이른 시기였다면 이번 상행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아리아드네는 한숨을 삼켰다.

    잠시 후, 할 이야기를 모두 마친 커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그래. 가 보게.”

    “네. 살펴 가세요.”

    인사를 마친 아리아드네가 빙글 몸을 돌렸다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왜, 왜 그러세요?”

    고개를 쭉 빼 아리아드네 가까이 얼굴을 붙인 레너드가 왕방울 같은 눈을 끔벅이고 있었다.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었나?”

    “뭐가요?”

    알 수 없는 소리에 피식 웃으며 의자에 앉으려던 아리아드네는 레너드의 다음 질문에 멈칫 몸을 굳히고 말았다.

    “너희 싸웠니?”

    “……누구, 랑요.”

    뒤늦게 부정해 보았지만 길지 않은 머뭇거림에 레너드는 이미 해답을 얻은 다음이었다. 레너드가 어딘가 뿌듯한 얼굴로 아리아드네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레너드의 품에 안겨 엉엉 울어 버린 뒤로 이런 스킨십이 부쩍 잦아졌다. 마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것만 같아 가슴이 간질거렸다.

    “그래서 아주 땅이 꺼져라 푹푹 한숨을 내쉬었더냐? 다 큰 줄 알았더니.”

    “그런 거 아니에요.”

    차라리 싸움이라도 했다면 이렇게 마음이 심란하지는 않을 텐데. 아리아드네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아리아드네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레너드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리아드네, 네 고난을 내가 짊어질 수 있다면 난 기꺼이 그렇게 할 게다. 하지만 인생이란 놈은 부모도 대신 살아 줄 수 없지.”

    마치 잠든 아이의 머리맡에서 동화를 읽어 주는 것처럼 낮고 잔잔한 목소리였다.

    “심지어 나는 널 혼자 남겨 두고 떠나겠지.”

    아리아드네는 저도 모르게 레너드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러면 레너드는 안심하라는 듯 자신을 붙든 손을 가볍게 도닥였다.

    “그러니 넌 선택해야 한단다. 네 등을 맡길 상대를.”

    아리아드네는 어딘가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리스벨이란 말씀이신가요?”

    메르디에스의 첫 번째 손 리스벨. 첫 번째 손이란 의미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우방이자, 스스로 상대의 신하임을 자처하는 말이었다.

    다섯 가문의 첫 번째 손임을 자처하는 가문 중에 가장 오래 그 자리를 지킨 것이 바로 리스벨이었다. 리스벨의 역사는 곧 메르디에스의 역사였고, 메르디에스의 역사는 곧 리스벨의 역사였다.

    한 번도 깨어진 적 없는 굳건한 신뢰. 하지만 캐롤린은 아리아드네를 배신했고, 리스벨은 메르디에스에게서 등을 돌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혼자만의 기억일 뿐이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감정이었다.

    그렇게 겨우 마음을 다스리면 두껍고 거친 손이 쓱쓱 머리를 쓰다듬고는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 보면, 눈가의 주름조차도 다정한 레너드의 웃는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아니, 내게야 커티스가 그런 상대지만 너에게도 반드시 그러리란 법은 없지.”

    결단이 빠른 레너드는 자신에게 부족한 진중함을 커티스에게서 찾았다.

    아리아드네는 상황을 장악하는 능력은 뛰어나나 섬세한 면이 부족했다. 꼼꼼하고 차분한 캐롤린은 아리아드네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좋은 조합이지만.

    “네 인생이니 누구를 선택할지는 네 몫이지.”

    그것을 강요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늘 믿음직스러웠던 딸이었지만 언제 이렇게 자라 버린 걸까. 레너드는 부쩍 깊어진 딸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아버지, 사랑해요.”

    아리아드네가 레너드의 품에 고개를 묻은 채 작게 속삭이면.

    “나도 사랑한다, 아리아드네.”

    그런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포근하고 다정한 공기가 주위를 감싸면 번잡하던 고민도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아버지, 저 궁금한 게 있어요.”

    “뭐가 말이냐?”

    무슨 문제든 해답을 내려 줄 것 같은 든든한 목소리였다.

    “아버지는 믿어야 할 사람과 믿지 말아야 할 사람을 어떻게 구분하세요?”

    “흐음, 신뢰할 상대를 어떻게 알아보냐 그 말이니?”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했던 남자도, 가장 믿었던 친구도 아리아드네를 배신했다. 사람을 볼 줄 몰랐던 자신이 문제였던 걸까. 숱한 밤을 지새우며 고민했지만.

    [리아, 정말 잘 됐어. 내가 말했잖아. 걱정할 거 없다고. 모두 네가 원하는 대로 될 거라고.]

    [네 행복이 내 행복인걸. 나는 네 첫 번째 친구니까.]

    [리아, 이제는 내가 지켜 줄게. 파시파에 님 대신 내가 지켜 줄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사업이나 거래라면 손익을 따지면 될 텐데, 사람은,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의 마음은 무엇으로 재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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