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48)

* * *

“성주님.”

누군가의 부름에 턱을 괴고는 생각 중이던 레너드가 고개를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레너드가 한 사내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짧게 자른 검은 머리와 건장한 몸을 지닌 중년의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커티스, 고생 많았네.”

사내의 이름은 커티스 리스벨, 그는 메르디에스의 첫 번째 손이라 불리는 리스벨 백작가의 주인으로 메르디에스 기사단의 기사단장이기도 했다.

“조금 전 공녀께서 나오시던데, 공녀께서는 이젠 좀 괜찮으십니까?”

커티스의 물음에 레너드가 놀란 눈을 하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아, 아아. 소문도 빠르지. 영외에 있었던 자네까지 알 줄이야.”

“워낙 다들 공녀를 아끼잖습니까. 1왕자와의 약혼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글쎄…….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긴 한가 봐.”

레너드가 턱을 긁적거렸다. 란데르에서 있었던 일이 퍼질 만큼 퍼지긴 했지만 제 입으로 파혼을 말하기엔 이른 감이 있었다. 파혼 생각을 하니 레너드의 가슴이 다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카이엔, 그 망할 놈의 종자 같으니. 애초에 내가 그놈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고 했잖은가.”

겉으로 아무리 얌전한 척해 봤자 언제고 뒤통수를 때릴 놈인 줄 알았건만. 그놈에게 속은 것이 분해 레너드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성주님은 공녀께서 만나는 남자는 죄다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셨잖습니까.”

레너드는 아리아드네가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커티스를 붙잡고 온갖 불평을 쏟아 냈다. 정작 아리아드네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 하고선.

커티스가 이를 지적하자 레너드가 커티스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카이엔, 그놈은 특별히, 아주 특별히 마음에 안 들었다고.”

책상에 반쯤 기댄 레너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레너드의 손가락이 책상 모서리를 툭툭 두드렸다.

“새로 나타난 그놈도 내 감이 수상하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아리아드네가 파혼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방문잔지 뭔지 하는 그놈을 데려오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머리로는 알겠는데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레너드는 끙 하는 소리를 내며 미간 사이를 벅벅 긁었다.

“공녀께서 그간 마음고생이 심하셨겠습니다.”

커티스의 말에 레너드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레너드는 촉촉한 눈가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그러니까 말이네. 저 마음 여린 애가 혼자 얼마나 속을 끓였을지.”

카이엔, 그 망할 놈과의 일이 얼마나 상처가 되었으면 눈물을 그렇게 물처럼 쏟아 내는지. 레너드는 그렇게 속이 상하고도 제 앞에서 의연한 척 미소 짓던 아리아드네가 떠올라 더 마음이 아팠다.

레너드의 말을 듣던 커티스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마음고생은 하셨겠지만, 그렇다고 공녀께서 마음이 여리시지는…….”

아리아드네는 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남부 사교계를 평정했다. 영애든, 영윤이든 아리아드네에게 찍히면 소규모 파티에조차 참석할 수 없었다. 마음이 여려서는 도무지 이룩할 수 없는 업적이었다.

커티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레너드가 책상을 두 손으로 내리치며 반박했다.

“자네는 몰라. 아리아드네 저게 겉으로만 저러지 속은 얼마나 여린데…….”

레너드는 제가 말하고도 무언가 어색해서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래, 갔던 일은 어떻게 됐나?”

“아무 성과도 없었습니다. 랭스턴 공국 쪽도 발칵 뒤집힌 모양입니다. 최근 그곳에서 실종된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세상을 둘로 가르는 대양, 레니아해(海)의 동쪽 대륙 프레모를 지배하는 것은 페렌트였다.

페렌트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동대륙과 달리 서대륙은 브리아, 리가, 티오그라드 세 나라가 비등한 국력으로 크고 잦은 전쟁을 반복했다.

그런 탓에 서대륙은 외지인을 극도로 경계했고, 중립 지역인 카타라 섬을 제외하고는 교역이 일절 금지되어 있었다.

카타라를 통해서 서대륙 물건을 들여와 동대륙에 유통하는 것은 메르디에스의 큰 수입원 중 하나였다.

올해 초, 카타라에 상행을 나갔던 상단원들은 여느 때처럼 교역을 위해 카타라 인근에 위치한 성 상티모니아의 자치령인 랭스턴 공국에 들렸다. 그리고 ‘마물’로부터 살려 달라는 구출 신호를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겼다.

상단원들을 구출하기 위해 추가로 파견한 수색대마저 랭스턴 공국에 도착한 뒤 연락이 두절되었다. 이에 메르디에스는 랭스턴 공국에 정식으로 수색을 요청했다.

그리고 오늘, 랭스턴 공국으로부터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연락이 도착하여 커티스가 이를 보고하기 위해 레너드를 찾은 것이었다.

“성주님, 이번 일로 상행을 나갔던 상단원들은 물론 카타라에서 실은 물품 일체가 사라졌습니다.”

“다른 것들이야 그렇다 쳐도 ‘그것’은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면 안 될 텐데…….”

커티스의 보고에 레너드의 한숨이 깊어졌다.

“다시 구해 보겠습니다.”

“아니, 지금은 실종된 사람을 찾는 것이 우선이지. 물건이야 사람들부터 찾고 차차 생각함세.”

미간을 문지르던 레너드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커티스에게 물었다.

“그중에 자네가 엘바에서 돌아오면 단승 작위를 내려달라던 기사가 있지 않았나?”

“네. 알버트라고 평민이지만 재능이 아까워 제가 키워 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레너드와 커티스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은 언제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래, 또 아까운 목숨들이 갔군. 유족에게 소식을 전하고 위로의 말을 전하게. 위로가 되진 않겠지만 보상도 넉넉히 하고.”

보고를 마친 커티스가 인사를 하고 집무실을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레너드가 문득 떠오른 것을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요새 캐롤린을 통 못 본 것 같군.”

캐롤린 리스벨은 커티스의 외동딸이었다. 그리고 아리아드네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싸웠나?”

레너드가 아무리 제 딸을 끔찍하게 아낀다지만 이미 성년이 된 딸의 교우 관계에 일일이 간섭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캐롤린’이라면 좀 다른 문제였다. 캐롤린이 리스벨 백작가의 후계라거나, 메르디에스 기사단장인 커티스의 외동딸이라거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아리아드네와 캐롤린의 사이가 워낙 각별한 탓이었다. 카이엔과의 파혼보다 캐롤린과의 소원해진 관계가 더 신경 쓰일 정도로.

“설마 캐롤린이 그랬겠습니까.”

커티스가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여느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말투였지만 묘하게 레너드의 심기에 거슬렸다.

‘아니, 그럼 내 딸이 그랬다는 거야?’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 * *

아리아드네는 레이먼드가 있다는 본관의 후원을 향해서 달렸다.

아리아드네에게 산딸기 파이를 먹이지 못한 찰스가 갓 구운 하얀 빵을 들고는 뒤뚱거리며 걷다가 아리아드네를 발견하고는 반색했다.

“아리아드네 님, 갓 구운 빵이……!”

아리아드네가 제일 위에 놓인 따끈한 빵을 덥석 집어 들었다. 질 좋은 버터를 잔뜩 넣은 빵은 그 자체로 황홀한 맛이었다.

“와, 너무 맛있어! 찰스, 그거 내가 다 먹을 거니까 아무도 주면 안 돼!”

아리아드네는 찰스에게 약속을 받아 내고는 계속해서 달렸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줄리가 아리아드네를 보고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아리아드네 님, 어디 가세요?”

“산책!”

아리아드네가 유쾌한 얼굴로 웃으며 지나갔다.

그것을 본 메르디에스 성의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멀뚱히 쳐다보다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흩어졌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게 분명했다. 작은 주인님의 기분이 좋아져서 다행이라고.

아버지인 레너드는 늘 바빴고, 어머니인 파시파에는 병으로 제 딸을 멀리했다. 그 어린아이가 외롭지 않을 리 없는데 새파란 눈동자의 아가씨는 늘 방긋방긋 웃는 얼굴이었다.

메르디에스 성의 작은 공주님은 높다란 가지 위에 앉은 새처럼 손이 닿지 않는 사람이었다. 고고하고 드높은 긍지를 지닌 아리아드네를 다들 좋아했지만 그것이 가끔 서운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란데르에서 돌아온 후로 아리아드네는 전보다 훨씬 많이 웃고, 전보다 훨씬 많이 울었다. 메르디에스 본성에는 봄이 온 것처럼 활기가 넘쳤다.

아, 정말 아리아드네 님께서 이 성에 오래오래 남아 주시면 좋겠다. 마침 그럴싸한 남자까지 데려오셨으니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 바람을 품은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아리아드네는 후원에 도착해서야 겨우 숨을 고르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금발의 남자가 후원에 심어진 흰 제라늄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가 인기척을 느끼고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아리아드네를 보는 눈길이 더없이 다정하고 따스했다.

남자는 레너드가 죽은 메르디에스에 남아 저항하다 끝내 교수대에 목이 걸렸다. 남자의 죽음을 끝으로 메르디에스의 싸움도 끝이 났다.

“레이!”

아리아드네가 남자를 부르며 달려가 안기자 남자가 아리아드네를 안고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치마가 꽃잎처럼 펴지자 아리아드네가 청아한 웃음을 터트렸다.

“예정보다 일찍 왔네? 고모님은 잘 계시고?”

아리아드네가 레너드의 여동생 다이앤의 안부를 물었다.

“어머니께서는 여전하시지.”

레이먼드가 대답했다. 레이먼드는 레너드의 여동생 다이앤의 아들로 아리아드네의 고종사촌이었다.

아리아드네보다 한 살 많은 레이먼드는 어려서부터 메르디에스에서 지낸 터라, 아리아드네와는 친동기간이나 마찬가지였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다음 달이나 되어야 올 줄 알았더니.”

“아니, 그걸 네가 모르면 어떡해.”

“뭘?”

“우리 공주님 경계령이 내렸다길래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왔지.”

레이먼드가 아리아드네의 코끝을 슬쩍 흔들며 장난스레 대답했다. 겨우 한 살 많은 주제에 꼭 저렇게 유난이었다. 아니, 유난인 건 레이먼드만이 아니지.

아리아드네는 못 말린다는 얼굴을 하며 피식 웃고 말았다. 별것도 아닌 일이 대체 어디까지 퍼진 건지…….

레이먼드와 아리아드네가 그간의 회포를 풀며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이었다. 레이먼드가 별안간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너, 그 소문 들었어?”

“뭐?”

“왜, 그 카푸트…….”

카푸트? 유진이 가졌다는 그 성물? 아리아드네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지금 소문이 자자해. 네가 1왕자를 차 버리고, 카푸트의 주인인 이계의 방문자를 선택했다고.”

“뭐? 뭐라고?”

이야기를 들은 아리아드네의 얼굴이 슬쩍 찌푸려지더니 이내 웃음이 터졌다.

“나도 알아. 말도 안 되는 거.”

“그러니까 대체 왜 그런 소문이 났지?”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기울이며 검지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볼까?”

“당사자? 네가 당사자잖아.”

레이먼드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아리아드네가 장난꾸러기처럼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리아드네의 손짓을 따라 고개를 돌린 레이먼드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곳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빛이란 빛은 모조리 빨아들일 것 같은 새까만 머리카락, 차디찬 회색 눈동자, 신분을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괴이한 옷차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존재감.

아리아드네의 부름에 인상을 찡그린 남자가 느릿느릿 걸어왔다.

“어때? 지내기는 불편하지 않고?”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남자는 별말 없이 고개를 까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레이먼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자가 어쩐지 불편했다. 하지만 한 살 어린 제 사촌 누이는 언제나 그랬듯이 그런 제 사정을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내가 1왕자를 버리고 이계의 방문자를 선택했다는데? 당신은 들은 이야기 없어?”

남자는 대체 무슨 말이냐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이 신사분이 궁금하시대.”

심지어 비정한 제 사촌 누이는 자신을 사자 우리 속으로 밀어 넣기까지 했다. 얼이 빠진 사이, 저도 모르게 남자와 눈이 딱 마주친 레이먼드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뭐가 궁금하다고?”

등골이 쭈뼛 설 만큼 낮은 목소리였다. 레이먼드가 슬쩍 고개를 들자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아니요. 전 아무것도.”

‘아니, 그러니까 내가 대체 뭘 궁금해했더라?’

레이먼드가 슬금슬금 물러나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툭, 뒷걸음질 치던 레이먼드가 아리아드네와 부딪혔다. 자신을 사지에 밀어 넣은 사촌 누이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뭐 하는 거야?”

레이먼드가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낮은 목소리로 속닥였다.

“아니, 너야말로 왜 나를…….”

“그러니까―”

묵직한 무게감이 레이먼드의 양어깨를 눌렀다.

“여기 이 사람이 그런 말을 퍼트리고 다녔단 말이지?”

남자의 얼굴에 비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그렇지 않아도 위험해 보였던 남자는 한층 더 날카로운 인상이 되었다.

메르디에스의 대접이야 더없이 훌륭했다. 그런 것에 무심한 유진이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지극정성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보는 시선이 조금 이상했다. 보통이라면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할 여자들이 홍조로 물든 얼굴을 한 채로 자신을 힐긋대는 것부터가 정상이 아니었다.

그것이 이성적인 관심이라기엔 또 담백해서 대체 뭐 하는 건가 했더니. 이런 말을 퍼트리는 인간이 있었을 줄이야.

유진은 자신과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조금 전 아리아드네는 이 남자의 품에 안겨서 꽃처럼 웃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함부로 하고 다니는 것이 불쾌하지도 않은가. 아니면, 그런 것쯤이야 무던히 넘길 수 있는 상대라는 말인가?

유진이 한층 더 불쾌해진 표정으로 레이먼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니요, 그런 말을 퍼트리고 다니다니요. 제가 그런 일을 했을 리가요. 전 아닌데요!”

레이먼드가 두 손을 휘저어가며 적극적으로 부정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이미 엉망진창이라 제대로 된 변명조차 내놓지 못했다.

그런 그를 구원한 것은 자신을 이 구렁텅이에 밀어 넣은 장본인이었다.

“아니야. 레이가 왜 그런 말을 퍼트려.”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레이먼드는 비로소 유진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니야?”

유진은 여전히 조금 인상을 찌푸린 채로 되물었다.

“아니야. 레이는 날 걱정해서 그냥 그런 소문이 돈다고 알려 준 것뿐이야.”

아리아드네는 싱긋 웃으며 애정이 담뿍 담긴 손길로 레이먼드를 잡아끌었다. 익숙한 손길에도 화들짝 놀란 레이먼드가 아리아드네의 손을 털어 냈다.

“왜 그래?”

“아, 아니. 그러니까 내가 왜 그랬지?”

레이먼드는 횡설수설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왜 그랬는지는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의아하다는 얼굴로 레이먼드를 살피던 아리아드네가 작은 감탄사를 흘렸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소개도 안 해 줬잖아.”

아리아드네가 유진과 레이먼드를 서로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레이먼드 브래들리, 레이는 브래들리 백작가의 차남이고 사적으로는 고모님의 아들이기도 해. 그러니까 나와는 사촌이지. 레이, 이쪽은 이계의 방문자 유진.”

아리아드네의 담백한 소개에 레이먼드가 낮은 목소리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아니, 그것부터 말을 했어야지.”

“그래서 지금 하잖아.”

“넌 내 섬세한 마음을 좀 헤아릴 필요가 있어.”

“아까부터 뭐라는 거야?”

레이먼드가 답답하다는 듯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지만 아리아드네는 눈 하나 깜짝 않고 고개를 돌렸다.

“……사촌?”

티격태격하는 둘을 가만히 지켜보던 유진이 물었다.

“응. 사촌인데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서 나와는 친남매나 다름없어.”

아리아드네의 대답에 유진은 나란히 선 두 사람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반짝이는 금발이며 시원하게 뻗은 눈매가 좀 닮은 것도 같았다.

여전히 유진을 힐긋대며 눈치를 보던 레이먼드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로 물었다.

“아니, 그런데 왜……. 갑자기 무슨 깨달음이라도 얻은 거야?”

그가 아는 외숙이나 제 사촌 누이는 이득이 없는 일에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성미였다. 성 상티모니아의 ‘방문자’라 할지라도 객을 대접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아리아드네가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알고 온 거 아니었어? 나 사고 쳤잖아. 란데르에서 1왕자를 뻥 차버렸거든.”

“……너, 괜찮아?”

그렇게 묻는 레이먼드의 녹색 눈동자는 걱정으로 가득했다.

“응, 괜찮아.”

그의 우려와는 달리 아리아드네는 정말 괜찮았다. 복잡하던 마음도 많이 정리했고.

“나한테까지 괜찮은 척 안 해도 돼. 캐롤린 편지에도 답장 않고 있다며.”

하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한 이름 앞에선 덜컥 마음이 내려앉았다.

“……누가 그래?”

“캐롤린이.”

“언제?”

아리아드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무언가 이상한 점을 눈치챈 레이먼드가 머뭇대며 말했다.

“……오늘. 좀 전에 만났어. 캐롤린도 곧―”

바스락, 여린 풀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면 꿈에도 잊지 못할 사람이 아리아드네를 보며 웃고 있었다.

“리아.”

봄볕처럼 따스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마치 노래처럼 자신을 불렀다.

“캐롤린.”

아리아드네가 이름을 부르면 이름이 불린 여자가 보랏빛 눈을 곱게 휘며 웃었다.

여자의 눈가가 곱게 휘어지면서 눈꼬리에 매달린 점이 살랑이듯 움직였다. 바람이 불어오면 허리까지 늘어진 여자의 구불구불한 검은 머리칼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얼굴이 왜 이래. 어디 안 좋아?”

다가온 여자가 아리아드네의 이마에 손을 대고는 자신의 이마에 견주어 보더니 “열은 없는 것 같은데…….” 같은 소리를 하다가 손을 떼어 냈다.

“아픈 것도 아니면 우리 공주님 기분이 왜 이렇게 나빠 보이지? 누가 우리 공주님 심기를 거스른 거야?”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눈동자에는 오로지 친애와 염려만이 가득했다.

캐롤린 리스벨. 서로의 모든 것을 안다고 자신해 마지않았던, 자신의 모든 것을 내줘도 아깝지 않았던 사람.

[리아, 우리 공주님. 네가 언제까지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니?]

캐롤린은 왕비의 처소에 감금된 아리아드네를 찾아왔을 때도 꼭 저렇게 웃었다. 둘도 없는 친우 사이였던 예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얼굴로.

[어머, 이게 다 뭐야? 식사도 안 한다는 건 들었어. 뭘 좀 먹어야 하지 않겠니?]

식사를 거부해 난장판이 된 방 한가운데서 캐롤린은 걱정된다는 얼굴로 시녀에게서 음식이 든 트레이를 받아 아리아드네에게 내밀었다.

[네 역겨운 얼굴 저리 치워.]

아리아드네가 쳐 낸 트레이의 음식들이 캐롤린의 얼굴에서 뚝뚝 흘러내렸다. 캐롤린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아 냈지만 덕지덕지 붙은 음식물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더러워진 손수건을 바닥에 버린 캐롤린이 난장판이 된 침대 위로 다가왔다. 오물로 뒤범벅된 캐롤린의 얼굴이 가까워질수록 눈꼬리에 매달린 점이 유독 눈에 띄었다.

캐롤린은 자신의 점을 두고 눈물점이 있으면 울 일이 많다며 불평하고, 아리아드네는 널 울리는 사람을 내가 가만둘 것 같으냐고 대꾸했다. 그런 실없는 말에도 웃음이 터지던 그런 날들이 있었다.

[넌 내가 왜 이러는지도 모르지? 죽어서도 모를 거야, 너는.]

하지만 그 모든 기억은 아리아드네의 절망과 분노를 키우는 양분에 불과했다. 그래서 아리아드네가 돌려줄 말이란 이런 것뿐이었다.

[그걸 내가 알아야 하니? 내가 아는 건 리스벨과 캐롤린이 메르디에스와 나에게 칼을 꽂았다는 것뿐인데.]

메르디에스의 첫 번째 손 리스벨. 리스벨은 메르디에스의 가장 오래된 우방이었다. 메르디에스의 보호를 받고, 그 보호를 대가로 가장 굳건한 충성을 보여 준 메르디에스의 첫 번째 가신이었다.

그 오래된 신뢰를 한 번도 의심하지 못했다. 아버지도, 아리아드네 자신도. 그래서 캐롤린의 배신이 더 뼈아팠다.

[그래, 내가 그랬어! 네가 그리 끔찍이 여기던 그 땅이 불타고, 네 사람들이 죽고, 잘난 네가 이 꼴이 됐지. 내가 원하던 대로.]

캐롤린의 두 손이 잘게 떨렸다.

[그래서 기쁘겠구나, 리스벨. 돌아가신 백작도 이런 너를 아주 자랑스러워하시겠구나.]

언제나 상냥하고 다정했던 캐롤린. 캐롤린은 언제부터 변했던 걸까.

[우둔하고 미련했던 아버지와 나는 달라. 나는, 아버지처럼 그렇게 살지는 않을 거야.]

[그래서 넌 지금 만족하니?]

[아니, 아직 부족해. 넌 이 지경이 되어서도 그렇게 오만하지. 내 절망이, 내 분노가, 그 사람이…….]

웃음이 사라진 캐롤린이 가슴을 부여잡고는 숨을 헐떡였다.

[역겨운 변명으로 알량한 네 죄책감을 덜어 볼 생각이라면 집어치워.]

그때는 캐롤린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조금도 알고 싶지 않았다. 제가 알아야 할 건 죽어 간 사람들의 이름이지 배신한 자의 사정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리스벨은 메르디에스의 첫 번째 손이었지만, 케이루스의 마지막 개가 되었구나. 카이엔 그자가 한 번 배신한 개를 얼마나 살려 둘 것 같으냐.]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캐롤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리아드네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캐롤린의 검은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비 전하, 보중하시길 바랍니다. 전하께서 보셔야 할 게 아직도 많이 남았으니까요.]

캐롤린의 머리카락에서 뚝뚝 흘러내린 멀건 수프가 바닥에 고였다.

“리아, 정말 어디가 안 좋은 거야?”

여자의 부름에 고개를 들어 보면 햇빛 아래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칼이 밤바다의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때로는 카이엔의 배신보다 더 믿을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캐롤린.”

캐롤린, 네가 내게서 등을 돌렸다는 사실 같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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