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48)
  • * * *

    “귀찮게 그런 걸 왜…….”

    한참이나 멍하게 있던 레너드가 처음으로 꺼낸 말은 그것이었다. ‘왕’이 되겠노라는 아리아드네의 선언에 저렇게 반응하는 것이 우습기도 했으나, 그것이 또 레너드다웠다.

    아리아드네가 떨어진 검을 주워 레너드에게 건네며 집무실 소파에 앉았다.

    “제 결혼 이야기는 관심 없으세요?”

    “아니, 그거야 어차피 너 좋다 해서 하는 결혼이었으니 너 싫다면 그만두면 되는 거고.”

    이제야 정신이 든 레너드가 검을 받아 아리아드네 맞은편에 앉으며 점심 메뉴를 결정하는 것 같은 어조로 덧붙였다.

    “내가 너 싫다는 결혼 억지로 시킬 사람이냐?”

    레너드의 눈가가 보기 좋게 접혔다. 안심하라는 듯한 그 표정에 아리아드네는 목구멍이 뜨끈해졌다.

    아리아드네가 방 안에 틀어박힌 동안 란데르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전해 들었을 텐데도 레너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몸속에 흐르는 피조차도 황금일 거라는 소리를 듣는 레너드가 무조건 신뢰를 내보이는 유일한 상대. 자신이 그 신뢰에 합당한 사람이었던가.

    아리아드네는 어쩐지 열이 오르는 눈가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그동안 메르디에스가 들인 노력도 있고, 제 파혼 때문에 우리가 곤란해질 수도 있잖아요.”

    지난 2년 동안 카이엔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메르디에스가 들인 공이란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미래를 아는 아리아드네야 이대로 혼인을 진행하면 더 많은 것을 잃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저토록 산뜻하게 포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누가 곤란해져?”

    레너드가 멀뚱히 들고 있던 검을 조심스럽게 검집에 넣다가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아니면 네가? 그것도 아니면 우리가?”

    “그 모두가요.”

    아리아드네의 대답에 레너드가 그런 걸 걱정했냐는 듯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아리아드네, 누구나 다 예상하는 상황에서 이익을 거두면 적은 돈을 버는 법이다.”

    아리아드네는 레너드가 갑자기 무슨 말을 하나 싶었다.

    “사람들이 주저하는 상황에서 이익을 거두면 적당한 돈을 벌고, 사람들이 피하는 상황에서 이익을 거둬야 큰돈을 벌 수 있지.”

    이제야 레너드의 의중을 알아차린 아리아드네가 피식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걱정 마라. 우리가 언제 돈 떼인 적 있었니? 카이엔 그놈한테 몇 배로 받아 낼 테니.”

    자신의 마음을 달래려 하는 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카이엔과의 파혼을 얼마든지 이용하겠다는 레너드의 선언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리고 우리가 그깟 푼돈에 절절맬 그런 가문이냐? 사람들은 우리보고 세계 제일의 부호니 뭐니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레너드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태연하게 말했다.

    “우리 정도면 세계 유일의 부호라고 해야지.”

    레너드의 말이 근거 없는 자랑이 아니라는 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아리아드네였다. 그녀조차 메르디에스의 재산을 모두 알지는 못했다.

    “저 모르게 숨겨 둔 돈이 많으신가 봐요.”

    “……으, 음? 얼마 안 돼. 그게 아무래도…….”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눈이 화등잔만 해진 레너드가 눈치를 보듯 더듬거렸다.

    메르디에스의 재산을 모두 아는 것은 메르디에스 작위를 가진 레너드뿐이었다. 작위 후계자, 총관, 상단주가 관리하는 재산이 나뉘어 있었고, 셋 모두 모르는 재산도 상당했다.

    “그게 서운했니? 네가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레너드가 갑자기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리아드네가 아는 재산만 해도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죽을 때까지 돈을 쓰기만 해도 다 쓰지 못할 정도였다. 돈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서운한 건 아니지만 주시겠다면.”

    돈은 많을수록 좋았다. 메르디에스가 쥔 권력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가장 잘 아는 이가 자신이 아니던가. 냉큼 받겠다 할 줄은 몰랐는지 레너드는 그렇지 않아도 왕방울 같은 눈만 끔벅끔벅했다.

    “그런데 아버지, 벌써 은퇴하면 뭐 하시게요?”

    메르디에스에서 권력은 돈이었다. 메르디에스에서 돈을 넘겨준다는 말은 모든 권력을 넘겨준다는 말이었다.

    “……너! 어떻게 아버지한테!”

    당장이라도 뒷방에 앉힐 것 같은 아리아드네의 기세에 레너드가 충격을 받은 듯 비틀거렸다.

    “그러니까 왜 마음에도 없는 말 하고 그러세요?”

    “…….”

    침묵.

    “어차피 저 말곤 줄 사람도 없으시면서.”

    “…….”

    다시 침묵.

    “아버지 오래 사실 테니까 천천히 알려 주세요. 아직은 알고 싶지 않아요.”

    계속 침묵.

    “크흠, 원 녀석도 언제 저렇게 자랐담.”

    완벽한 패배에 레너드는 부산스럽게 흩트린 책상을 대강 정리하고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런데 왕 어쩌고 하는 건 대체 무슨 얘기냐? 왜 그런 걸 하려고 해?”

    레너드는 생각만으로도 골치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버지, 언제부터 케이루스가 페렌트의 왕가였나요? 언제까지 우리 메르디에스가 케이루스를 섬겨야 하나요?”

    본디 페렌트의 다섯 가문은 누가 누구의 위에 서는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가장 역사가 깊은 가문이 바로 메르디에스잖아요. 북방에서 쫓기듯 내려온 케이루스가 이 땅에 정착할 수 있도록 자비를 베푼 건 바로 우리예요.”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프레모 대륙에 자리를 잡고 세력을 키운 것은 메르디에스였다.

    페렌트라는 나라가 생기기도 훨씬 전, 메르디에스는 이 땅의 지배자였다. 메르디에스의 성은 프레모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유서 깊은 성이었다.

    “우리가 우리 땅에서, 저들을 향해 고개 숙이고,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는 없어요.”

    아리아드네의 말에 레너드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레너드는 한 번도 메르디에스가 케이루스를 섬긴다고 여긴 적이 없었다.

    각 가문이 맡은 역할이 있듯, 케이루스의 역할은 ‘왕가’라고 그렇게만 생각했다. 왕도 릭센에서 저들끼리 왕좌를 가지고 치고받든 말든 관심도 없었다. 아리아드네가 엮이지만 않았더라면.

    “그래서, 리카서스처럼 그렇게 왕 노릇이 하고 싶은 게냐?”

    선왕을 폐위시키고 현 왕을 옹립하여 국정의 실권을 쥔 바다의 지배자, 창명(滄溟)의 리카서스.

    “아니요. 전 리카서스처럼 섭정을 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제가 하고 싶은 건 페렌트의 왕좌에 앉는 거예요.”

    아리아드네는 왕좌에 앉은 누군가를 휘두르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네가 메르디에스의 다음 주인이니 너에게도 왕위 계승권이 있다, 그리 말할 셈이냐?”

    “사실이잖아요. 이 땅이 왕의 혈통을 왕으로 받든 것은 불과 200년에 불과해요. 그보다 훨씬 긴 세월을 우리는 다음 왕으로 살았어요.”

    이제는 아무도 그 차이를 따지고 들지 않지만, 카이엔이 왕위 계승권을 가진 것은 왕의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케이루스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건 메르디에스의 딸인 아리아드네도 마찬가지였다. 메르디에스의 딸인 아리아드네는 다음 왕이 될 자격이 있었다.

    “마흔아홉 명의 왕 중 메르디에스의 성을 가진 왕은 열하나. 케이루스가 왕을 독식한 동안의 일곱을 제외하면 우리는 가장 많은 왕을 배출한 가문이 아니던가요?”

    “그건 케이루스도 마찬가지다. 케이루스도 왕가로 불린 200년의 세월을 제외하고도, 열한 명의 왕을 배출했지.”

    레너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메르디에스의 문장을 바라보았다. 저것이 왕의 문장이었던 것이 언제였던가.

    “그리고 200년이란 세월은 케이루스가 왕좌를 다지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아리아드네. 공고한 왕좌를 뒤흔들기란 쉽지 않아. 그러니 리카서스도 섭정으로 만족하고 있는 거고.”

    레너드가 미간을 문지르며 낮은 한숨을 쉬었다. 아리아드네와 똑 닮은 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직시했다.

    “아리아드네, 넌 메르디에스의 다음 주인이야. 네가 원하면 가지지 못할 것도, 네가 바라면 이루지 못할 것도 없다. 그런데 왜 굳이 왕좌에 앉아야겠다는 거냐.”

    아리아드네는 아직도 가끔 메르디에스의 성이 화염에 휩싸인 꿈을 꾸었다. 정작 자신은 그 광경을 보지도 못했는데. 아무리 귀를 막아도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것은 제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였으니까.

    “케이루스가 걸어온 싸움이니까요.”

    그 지옥 같은 시간 속에서 아리아드네는 악몽을 끝내는 방법은 하나밖에 알지 못했다.

    승리하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우리는 대단히 큰 착각을 하고 있었어요. 우리가 다음 왕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카이엔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서 케이루스 세력 중에서도 그를 지지하는 자들만을 골라 세를 불렸다.

    “아니, 그게 아니었어요. 그들이 자신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 우리를 이용한 거였어요.”

    메르디에스 돈으로 키운 케이루스 세력들은 그대로 카이엔의 힘이 되었다.

    “그리고 남은 절반의 케이루스가 정말 2왕자의 세력이라고 생각하세요?”

    카이엔이 2왕자 루안을 꺾고 페렌트의 왕이 되자, 2왕자를 지지했던 케이루스 세력들은 자연스럽게 카이엔에게 흡수되었다. 그런 줄 알았다.

    “아니요, 그들은 카이엔의 또 다른 힘일 뿐이죠. 메르디에스와 리카서스가 나란히 카이엔의 힘을 키워 주고 있었던 거예요. 그렇게 키운 힘이 누구를 향할지도 모르고.”

    그들의 칼이 메르디에스를 겨누고서야 알았다. 2왕자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였던 자들이 카이엔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였다는 것을.

    “그들은 리카서스에게 고개 숙인 치욕을 조금도 잊지 않고 있어요. 케이루스가 우뚝 서는 그날만을 기다리는 자들이에요. 그때가 되면 늦어요, 아버지.”

    그들에게 카이엔은 케이루스의 영광을 재현해 줄 유일한 희망이었다.

    “1왕자와 그를 지지하는 자들은 지금처럼 불완전한 권력을 원하지 않아요. 그들은 아무도 넘보지 못할 왕좌를 원해요. 그것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뭐라고 생각할까요? 리카서스의 꼭두각시로 사는 왕을 보고 자란 왕자가.”

    그들이 그토록 바란 핏빛 영광의 완성은.

    “네 공가의 멸문.”

    레너드의 묵직한 음성이 집무실에 내려앉았다.

    “……이라는 거냐?”

    레너드는 이 모든 이야기를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케이루스는 그 불가능을 이미 한 번 이루었다.

    “우리가 먼저 케이루스를 쳐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이 땅에서 사라지는 건 메르디에스가 될지도 몰라요.”

    한 번 이루어졌던 일이다. 또 가능하지 말란 법은 없다.

    “네 말대로 1왕자와 그를 따르는 세력들이 네 공가의 멸문을 바란다고 치자. 바라는 것과 이루는 것 사이엔 아주 큰 간극이 있지. 그들이 원하는 바를 정말 이루리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모르셨잖아요. 1왕자의 야망도, 그가 이제껏 해 온 것들도, 그가 하려는 일들도,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리고 메르디에스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했다. 자신이 카이엔과 결혼하지만 않는다면, 그렇다면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쉽게 끝날 리가 없지.’

    네 공가를 단숨에 쳐부순 저력을 키워 온 이들이었다. 케이루스의 집념과 원한은 상상 이상이었다. 메르디에스와의 파혼으로 모든 걸 포기할 이들이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아무리 방심했다고 하나 메르디에스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했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카이엔에게는 분명 숨겨진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을 깨부수지 않는 한 끝은 없었다.

    “아리아드네, 평화롭게 왕좌를 주거니 받거니 하던 때와는 달라. 지금 네가 왕좌에 앉겠다면 넌 1왕자의 적이 되는 거다. 그런데도 그 길을 가고 싶으냐?”

    아버지의 얼굴을 한 레너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리아드네에게 물었다. 레너드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리아드네는 옅은 웃음만 지었다.

    “이미 지나왔어요, 아버지.”

    아리아드네의 말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미 단단히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그 사람과 저,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해요. 그래야 제가 살아요.”

    카이엔과 그를 따르는 케이루스가 그토록 원했던 가장 높은 영광, 그들을 그곳에서 끌어내 진창에 처박지 않고서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산딸기 파이가 별로시면, 다른 걸 준비할까요?

    혀가 잘린 채 끌려갔던 이블린도.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공녀께서 메르디에스에 지내는 시간이 줄어들 테니까.

    목이 잘리고 그 시신이 태워졌던 글레나도.

    ―정말, 정말 죄송해요. 전, 정말, 그저 아리아드네 님 곁에 남고, 싶어서…….

    가슴에 칼이 꽂히고도 자신을 지키려 했던 줄리도. 아리아드네는 무엇 하나 잊지 않았다.

    이 땅에서 케이루스의 이름을 지우는 것. 그것만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잃었던 자들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였다.

    “네가 그놈이 죽어야 살겠다면 몇 년이 걸리든 얼마가 들든 내가 반드시 죽여 주마.”

    아비로 그 정도도 못 해 줄 건 아니었다.

    “하지만 네 몇 마디 말만으로 메르디에스가 네 왕위를 위해 움직이진 않을 거다.”

    하지만 메르디에스의 주인인 레너드에게는 지켜야 할 생명의 무게가 있었다.

    “그러니 아리아드네, 메르디에스의 힘이 필요하다면 날 설득해라. 케이루스가 네 공가의 멸문을 바라는 것도, 그들의 힘이 우리를 정말 위협할 정도라는 것도, 그리고 네가 새로운 왕조를 세울 만한 왕의 재목이라는 것도―”

    잠시 말을 멈춘 레너드가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평소의 풀어진 모습과는 다른 메르디에스를 책임지는 자의 눈이었다.

    “나는 그중 무엇도 확신하지 못하겠으니. 나를 설득하지 못한다면 메르디에스는 네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다.”

    아리아드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힐끗 내려다본 창밖에는 새까만 머리카락이 수풀 사이로 흔들리며 지나갔다.

    이 시기, 저 남자는 왜 이곳에 나타난 걸까.

    “아버지, 케이루스가 600년을 이어 온 전통을 뒤집고 왕좌를 독식하게 된 건 200년 전, 이 땅을 멸하러 나타난 신을 막았기 때문이 아닌가요? 200년 후, 이 땅에는 다시 ‘신’이 나타났죠. 왕을 바꾸라는 신의 뜻이라고 생각지 않으세요?”

    신의 뜻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남자는 성물을, 아리아드네는 왕좌를, 서로가 원하는 것을 가지면 그만이었다.

    “이번에는 신을 가지는 자가 왕좌를 가지게 될 거예요. 나는 둘 다 놓칠 생각이 없어요. 곧 보여 드릴게요. 아버지께서 저를 선택하셔야 하는 이유를.”

    내내 심각한 표정이던 레너드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리더니, 아리아드네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 너 역시 그날 운 게 그놈 때문이었던 게지? 네가 원하는 게 왕좌냐? 그놈이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누가 그 사람이랑 어떻게 해 보겠대요?”

    “방금은 갖겠다며?”

    “동맹을 맺겠다는 거죠.”

    황당해하는 아리아드네는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레너드가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 앉았다.

    “정말이냐?”

    아직도 의심이 가시지 않았는지 레너드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는 아리아드네를 살펴보았다.

    “아버지, 저 방금 파혼하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지금 제가 남자에 빠져서 이러는 것 같으세요?”

    “아니란 말이지…….”

    아리아드네는 그런 레너드의 오해가 어이가 없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아니, 말리실 거면 1왕자와 약혼할 때 진작 좀 말리시지 않고.”

    카이엔의 이야기가 다시 나오자 레너드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레너드가 입을 열었다.

    “한 번만 더 물으마. 너 1왕자의 반대편에 선 것 정말 후회하지 않겠니?”

    그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고도, 레너드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여전히 아리아드네의 마음이었다.

    “네.”

    그러니 아리아드네에게 남은 길이란 이것뿐이었다.

    아리아드네의 단호한 대답에 자리에서 일어난 레너드가 책상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 알겠다. 네 말이 사실인지 알아봐야겠구나. 생각할 시간도 좀 필요하고.”

    “그럼 고려할 시간을 드리죠, 메르디에스 성주님.”

    아리아드네가 턱을 치켜든 채로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만족스러운 거래가 될 겁니다.”

    한쪽 눈을 찡긋하며 아리아드네의 장난을 받아 준 레너드가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물론 나에게.”

    제 기억과 조금도 변함없는 레너드의 모습에 가슴이 뻐근해졌다. 정말 돌아왔구나. 매 순간 실감하면서도 다시금 깨닫곤 했다.

    “아버지, 제가 말씀드린 적 있던가요?”

    “뭘 말이냐?”

    아리아드네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제가 아버지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는 거요.”

    다 자란 딸의 직접적인 애정 공세에 당황한 레너드의 얼굴이 붉어졌다. 크흠, 목을 가다듬은 레너드가 쑥스러운 듯 시선을 슬쩍 피했다.

    “네가 ‘아주 많이’라고 해 봤자지.”

    불평처럼 꿍얼거리더니 레너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리아드네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아리아드네,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부모는 자식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갚을 수 없는 빚더미에 앉은 셈이란다. 평생 퍼 줘도 충분하다는 생각은 안 들 게다.”

    따스한 목소리가 빛처럼 퍼졌다.

    “그러니까 좀 더 빚쟁이처럼 굴려무나.”

    감동으로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빚쟁이’라는 말에 쏙 들어갔다.

    “빚쟁이처럼 구는 게 어떤 건데요.”

    아리아드네가 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하지만 레너드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그는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내게 미안해할 일은 아무것도 없단다.”

    아, 정말…….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제 속에 남은 죄책감까지 모두 들켰을 줄은 조금도 몰랐다.

    “정말, 정말, 저더러…….”

    아리아드네는 팔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차마 가리지 못한 울음이 새어 나왔다. 이를 달래던 레너드가 마치 우는 아이에게 사탕을 내미는 것처럼 주섬주섬 말을 꺼냈다.

    “네 눈물이 쏙 들어갈 만한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아리아드네가 붉어진 눈을 슬쩍 들었다. 레너드가 딸아이의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을 닦아 주며 말했다.

    “레이먼드가 돌아왔단다.”

    “……레이가요?”

    “본관 후원에 있다는구나.”

    레너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리아드네의 얼굴이 꽃처럼 피어났다.

    “아버지, 저 이만 가 볼게요.”

    그 말을 끝으로 아리아드네는 날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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