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48)
  • * * *

    색이 바랜 듯 옅은 금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처연한 표정의 사람은 금세라도 사라질 듯했다.

    천천히 돌아보는 파란 눈동자. 그 속에 담긴 것은 무료함. 그리고 희망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굴욕과 치욕.

    건조한 푸른 눈에 담긴 것은 붉은 머리의 사내, 카이엔 자신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카이엔이 기대하는 어떤 감정도 없었다.

    카이엔은 어린아이가 되어 그 사람에게 매달렸다. 나를 봐 달라고, 나를 좀 봐 달라고.

    그 사람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카이엔을 밀어냈다. 밀려난 카이엔이 그 손을 놓지 않으려 하자 잡고 있던 그 사람의 손이 썩둑 잘렸다. 놀란 카이엔이 그 목을 껴안자 목마저 썩둑 잘렸다.

    그 사람의 목이 잘린 채로 바닥을 데구르르 굴렀다. 마침내 입술 끝이 곱게 휘어졌다. 죽어서 만족스럽다는 듯이.

    잘린 목에서는 저주 같은 노랫소리가 이어졌다.

    “헉! 허억…….”

    꿈에서 깨어난 카이엔은 손을 들어 붉은 금발을 쓸어 올렸다. 땀에 젖은 손끝이 축축했다.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이따위 꿈에 겁을 먹다니.

    갈 길이 멀었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런데 왜, 왜! 갑작스레 변한 아리아드네 때문에 계획했던 모든 일이 어그러지고 있었다.

    카이엔은 땀으로 젖은 몸을 닦고는 의복을 갖춰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상냥하고 현명한 1왕자, 카이엔 케이루스가 그곳에 있었다. 머지않아 페렌트의 진정한 왕이 될.

    카이엔은 마지막으로 붉은 망토를 고정하려 브로치를 손에 들었다. 브로치의 중앙에는 푸른 사파이어가 박혀 있었다. 이 브로치는 언젠가 아리아드네가 카이엔에게 선물해 주었던 것이었다.

    카이엔은 손이 으스러지도록 브로치를 꽉 쥐었다. 브로치의 모서리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찢어진 손에서는 피가 뚝뚝 흘렀다.

    카이엔은 피 묻은 브로치를 붉은 망토 위에 달았다. 이 브로치의 자리가 이곳이듯, 아리아드네의 자리 또한 이곳이었다.

    아무것도, 아무도 카이엔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한.

    * * *

    “아리아드네 님, 오늘은 날씨가 좋아요. 산책을 해 보시는 건 어때요?”

    조금 전부터 아리아드네를 힐끔대던 줄리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카우치에 기대어 책장을 팔락이던 아리아드네가 한숨을 쉬며 책을 내려놓았다.

    “줄리, 정말 왜 다들―”

    “아리아드네 님, 오늘 산딸기 파이가 잘 구워졌다고 찰스가 자랑이 대단한데 좀 드셔 보시겠어요?”

    그때, 이블린이 방금 구운 듯한 파이를 들고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들어섰다.

    “이블린.”

    “……산딸기 파이가 별로시면, 다른 걸 준비할까요?”

    이블린이 아리아드네의 눈치를 보며 산딸기 파이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아니, 산책도 파이도 지금은 생각 없어. 나 혼자 좀 쉬고 싶은데.”

    줄리와 이블린이 서로 눈치를 살피며 머뭇머뭇하다가 문을 살짝 닫고는 방을 나갔다.

    닷새 전, 메르디에스로 귀환하는 길에 레너드와 마주한 아리아드네가 펑펑 울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메르디에스는 벌떼에 쏘인 것처럼 어수선해졌다.

    식탁 위에 올라오는 것들은 아리아드네가 좋아하는 것뿐이었고, 성의 사람들이 모조리 한통속이 되어 옷감이며 보석을 사들이는 통에 정리하기도 전에 새로 도착한 물건들이 쌓였다.

    성의 사람들은 아리아드네 기분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고, 아리아드네가 어딘가 나타날 때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따라다니곤 했다. 그래 놓고 아리아드네가 돌아보면 다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딴청을 부렸다.

    아리아드네는 사람들이 좀 진정할 때까지 ‘칩거’를 선택했다. 생각을 정리할 것도 있고.

    방에 틀어박힌 지 이틀째, 줄리와 이블린을 앞세운 사람들이 아리아드네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괜찮다고, 아무 일도 없었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다들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카이엔의 목을 자르는 일보다 메르디에스 사람들에게 제 평온함을 알리는 것이 더 시급함을 실감했다.

    사람들이 전전긍긍하며 아리아드네의 기분을 살피는 것과는 별개로 아리아드네는 몹시 평온한 상태였다.

    시간을 거슬러 돌아온 후, 칼날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날카로웠던 마음이 레너드를 만나 폭발하듯 터졌다. 그제야 아리아드네는 심장을 조이는 것 같았던 후회와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정작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사람들은 아리아드네가 울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처럼 시침을 떼고는 아리아드네를 살피지 못해 안달이었다.

    ‘좀 운 게 그렇게 큰일인가, 평소에 좀 울어 둘 걸 그랬지.’

    아리아드네는 그렇게 실없는 생각을 하며 엎어 두었던 책을 들었다. 손에 책을 들긴 했지만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몇 시간째 같은 페이지만 팔락이고 있었다.

    “공녀, 접니다.”

    “들어오세요.”

    아리아드네는 의미도 없이 뒤적이던 책을 덮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글레나는 누가 보내서 왔어요?”

    피식 웃으며 묻자 순간 멈칫한 글레나는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누가 보내다니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쌓인 게 좀 있었나 봐요. 지금은 다 정리됐으니 괜찮다고 전해 주시겠어요? 여기저기에.”

    아리아드네가 문밖을 향해 고갯짓하자 글레나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늘 무표정하고 침착한 글레나의 저런 얼굴을 보게 되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몇 번 헛기침을 한 글레나가 이제 와 침착한 척했지만, 그런다고 달아오른 얼굴이 가려지진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할 말이 있었는데 잘 되었네요. 앉으세요.”

    모르는 척 자리를 옮긴 아리아드네가 글레나에게도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차는 뭐로 하시겠어요?”

    “네? 아니, 제가 하겠습니다.”

    당황한 글레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아리아드네가 슬쩍 글레나의 어깨를 밀어냈다.

    “내 방이니 내가 할게요. 민트 좋아하죠?”

    “……네.”

    차 두 잔을 내린 아리아드네가 글레나 앞에 찻잔을 밀어 주었다.

    “1왕자께서 또 다른 일을 벌이신 건 없나요?”

    “또 다른 일이라니요?”

    찻잔 테두리를 만지작거리던 글레나가 되물었다.

    “카이엔 전하께서 줄리를 이용하려 들었던 것 말이에요. 혹시 내가 알아야 할 일이 더 있나요?”

    글레나는 전부터 카이엔을 탐탁지 않아 했다. 그것에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아리아드네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요, 제가 알기로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글레나의 대답은 아리아드네의 예상과는 달랐다.

    “글레나, 내가 알고 싶은 건 진실이에요.”

    “정말입니다.”

    “그래요?”

    “네.”

    “그럼 글레나는 왜 1왕자를 꺼리셨나요?”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삼키려던 글레나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현재 왕실의 상황이 복잡하니 공녀께서 괜히 휘말리실까 저어되었습니다.”

    글레나는 떨리는 손끝을 다른 손으로 덮어 감추고는 침착하게 답했다.

    “그게 전부인가요?”

    아리아드네의 질문을 들은 글레나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글레나, 나한테는 중요한 문제예요. 사실대로 숨기는 것 없이 말해 주세요.”

    겨우 마음을 먹은 듯 숨을 깊게 내쉰 글레나의 입이 열렸다.

    “저도 그렇고, 성주님이나, 메르디에스에서 지내는 이들이 카이엔 전하와 공녀의 혼인을 반기지 않은 것은 카이엔 전하께 특별한 흠결이 있어서는 아닙니다.”

    카이엔과의 혼인에 부정적인 게 글레나만이 아니었다니, 아리아드네는 전혀 몰랐던 일이었다.

    “줄리에게 하신 것 같은 일이 더 있었다면, 아마 숨기지 않고 말씀드렸을 겁니다. 공녀께서 이미 말씀하셨듯이 전 카이엔 전하를 좋아하지 않았으니까요.”

    “무엇 때문에요?”

    글레나는 단정히 틀어 올려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은 머리를 공연히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공녀께서 카이엔 전하와 혼인하여 메르디에스가 카이엔 전하의 곁에 서면 카이엔 전하는 페렌트의 왕이 되실 테니까요.”

    아까는 왕실의 상황에 휘말리는 게 싫어서라 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제는 카이엔이 왕이 될까 봐 싫었다니. 글레나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공녀께서 메르디에스에서 지내는 시간이 줄어들 테니까.”

    고개를 숙인 글레나의 귓불이 달아올랐다.

    “그래서 다들 그 혼인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다들 공녀께서 메르디에스를 떠나는 것을 서운해했으니까요.”

    글레나의 설명을 들은 아리아드네는 뜨거워진 얼굴을 두 손으로 슬쩍 감쌌다.

    “……아, 그런 줄은.”

    카이엔과 결혼하더라도 왕도에 적응하는 기간이 지나면 일 년의 삼분의 일은 메르디에스에 머무르기로 약속했다. 보통 영주들이 영지에 머무르는 것이 일 년의 절반이 되지 못하는 것을 감안하면 짧다고만은 할 수 없는 기간이었다.

    “생각도, ……못 했어요.”

    아리아드네도 메르디에스를 떠나는 것이 서운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사랑에 빠진 과거에는 사람들이 그 이유로 그토록 서운해하는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지금 저렇게 수선인 것도 공녀께서 이 땅에 계속 계실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니 너무 귀찮다 생각 마세요.”

    달아오른 얼굴을 숙인 채로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름 위에 둥둥 뜬 것처럼 마음이 어지러웠다. 갑자기 산책도, 산딸기 파이도 전부 다 그리워졌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리아드네가 벌떡 일어나 방 안을 가로질렀다. 아리아드네가 벌컥 문을 열자 문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흩어졌다.

    “아버지는 어디 계셔?”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맨손으로 급하게 창문을 닦는 척하던 줄리가 “성주님은 지금 집무실에…….” 하고 답했으나, 아리아드네는 줄리가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본관의 집무실을 향해 달렸다.

    총관이 아리아드네를 보고 인사를 하기도 전에 아리아드네가 집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집무실에서 검을 들고 요리조리 살피던 레너드가 갑자기 들이닥친 아리아드네를 보고는 놀라 그녀와 똑 닮은 파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버지, 저 결혼 안 해요.”

    아리아드네의 말을 들은 레너드가 겨우 그런 일로 수선이었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하던 일을 계속했다.

    레너드의 손에는 날을 세운 검이 들려 있었다. 한쪽 눈을 찡그린 채로 검을 닦는 모습이 몹시 진지했다. 검에 대한 열정만은 언제나 진심인 분이었으니. 실력이 열정을 따라 주지 않을 뿐이지.

    문을 닫고 성큼 방 안으로 들어선 아리아드네가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왕이 될까 해요, 페렌트의.”

    아리아드네의 그 말에 레너드는 들고 있던 검을 툭, 떨어트렸다. 떨어진 검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쨍그랑 소리를 냈다.

    훗날의 역사가들이 사슴의 붉은 피 위에 세워진 푸른 가시나무라 부르는 메르디에스 왕조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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