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48)
  • * * *

    메르디에스로 귀환할 준비를 모두 마치고 출발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가시나무에 둘러싸인 방패가 그려진 녹색 깃발이 행렬의 선두에 올라왔다. 메르디에스의 직계 혈족이 있음을 알리는 표식이었다.

    아리아드네는 행렬의 중앙에 자리 잡은 마차 앞에 섰다.

    “그분께선 조금 전에 타셨어요.”

    마차 앞에 서 있던 줄리가 문을 열어 주며 속삭이듯 말했다.

    “아, 그래? 고마워.”

    마차 안에는 줄리가 말했던 대로 선객이 있었다. 창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유진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유진은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머리카락 색과 똑같은 검은 옷과 신발을 착용하고 있었다. 온통 검은색인 남자는 여전히 낯설었다.

    남자의 회색 눈동자가 아리아드네를 확인하더니 그대로 시선을 돌려 창밖을 응시했다.

    아리아드네는 별 고민 없이 유진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마차의 폭이 좁지 않은 편인데도 길게 뻗은 유진의 다리가 아리아드네의 넓게 퍼진 치마폭에 스쳤다.

    아리아드네 뒤를 따른 이블린까지 마차에 오르자 줄리는 냉큼 마차에 올라 문을 닫았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리스터의 이블린이라고 합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위버의 줄리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이블린과 줄리가 나란히 유진에게 인사를 건넸다.

    “영광일 것까지야.”

    유진은 심드렁한 태도로 말했다. 그의 냉담한 반응에도 이블린과 줄리는 조금도 실망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들뜬 얼굴을 한 이블린과 줄리가 착석하고, 마차는 이내 천천히 움직였다.

    내내 창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남자는 마차가 출발하자마자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 귀찮게 하지 말라는 듯이.

    그렇지 않아도 날카롭고 위험한 분위기의 남자는 늘 선을 긋고 사람들을 대했다. 이 선을 넘어오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

    아리아드네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천천히 살폈다. 이질적인 외모였다. 그런데 어디가 이질적이냐고 하면 마땅히 지적할 곳이 없었다.

    날카롭고 깊은 눈매와 곧게 선 콧대, 각진 턱과 가지런히 뻗은 모양 좋은 눈썹.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페렌트인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이 이질감은 남자의 몸을 감싼 의복 때문일까. 이곳에서는 노동 계급이나 입을 법한 장식이라고는 전혀 없는 옷이었다. 실용적일 것 같긴 하다만.

    그의 의복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신발이었다. 목이 긴 검은 신발은 끈이 교차되어 조이는 형태였는데, 두꺼운 신발 밑창은 알 수 없는 재질로 되어 있었다.

    흐르는 것처럼 하늘하늘한 천을 휘감고 있는 성화(聖畫) 속 신의 모습과 그는 너무도 달랐다. 그를 감싼 것들은 무엇 하나 익숙한 것이 없었다.

    아니, 그런 것들 때문이 아니었다. 그를 둘러싼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것은 ‘유진’이라는 사람 그 자체였다.

    누구와도 구별되는 남다른 존재감. 유진을 둘러싼 공기는 그 밀도마저도 다른 듯했다.

    “아…….”

    아리아드네는 저도 모르게 낮은 탄식을 흘렸다. 북쪽 땅에서나 볼 수 있는 회색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눈동자였다. 한 번도 녹은 적이 없다는 디움 산맥의 빙벽(氷壁)처럼, 누구의 침입도 허용하지 않는 날 선 눈동자.

    남자의 눈동자가 잠을 쫓으려는 것처럼 느릿하게 깜박였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짐과 동시에 쾅! 하는 굉음이 지축을 흔들었다.

    “아리아드네 님, 마차에서 나오지 마십시오.”

    “방문자님 곁에서 떨어지시면 안 됩니다.”

    메르디에스 기사들이 다급한 소리를 내질렀다. 이어서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어지럽게 뒤섞였다.

    “뭐야, 이제 겨우 잠드나 했더니.”

    유진이 창밖을 힐끗 내다보더니 심드렁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는 주위를 훑어보았다.

    “다들 쓸데없이 돌아다닐 생각하지 마.”

    몸을 쭉 펴고는 목과 어깨를 휘휘 돌린 남자가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내 눈이 닿는 곳에 있으면 최소한 죽는 일은 없을 테니까.”

    아리아드네도 마차의 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았지만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때였다면 이중, 삼중으로 보호되었어야 할 마차 주위에는 소수의 병력만이 에워싸고 있었다. 유진의 무력을 믿고, 공격한 무리를 서둘러 제압하는 쪽이 낫다고 판단한 듯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마차 안을 가득 채웠다. 하얗게 질린 이블린과 줄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여전히 무표정한 유진은 평소보다 조금 날이 서 있었다.

    “아, 아무 일도 아니겠죠?”

    줄리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물었다.

    “아마도.”

    아리아드네의 애매한 대답을 끝으로 마차 안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현재 마차의 위치는 메르디에스 본성에서 불과 반나절 거리였다. 메르디에스의 땅에서 메르디에스의 문장을 단 마차를 노리다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리아드네가 기억하는 과거에는 없었던 일이다.

    누구의 짓일까? 카이엔?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저었다.

    카이엔이 이런 일을 벌여서 얻는 것이 없는 것은 둘째 치고, 지금의 카이엔에게는 메르디에스 정예 기사들을 급습할 만한 병력이 없었다.

    아리아드네가 골똘히 생각 중인 그 순간이었다. 무언가가 마차의 몸체에 쿵! 하고 부딪혔다. 그 충격에 덜커덕 마차의 문이 벌어졌다.

    마차 문이 열린 틈 사이로 바깥의 소리가 들어왔다. 쇠가 부딪히고, 고함과 아우성으로 뒤섞인 소리들이.

    “이래서 내가…….”

    탁. 슬쩍 열렸던 마차의 문이 바깥의 누군가에 의해 닫히고 외부의 소리는 다시 멀어졌다. 하지만 조금 전 그 목소리는 분명…….

    “아리아드네 님, 왜 그러세요?”

    이블린이 벌떡 일어나는 아리아드네의 손을 붙잡았다.

    “내가 목숨을 보장할 수 있는 건 이 안에 있을 때야.”

    유진이 아리아드네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이블린과 줄리를 부탁해.”

    아리아드네는 유진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마차 문을 박차고 그대로 뛰어내렸다.

    조금 전 충격은 마차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마차 몸체에 부딪힌 것인 듯했다. 마차 주위에 쓰러진 병사들이 널려 있었다.

    [뭐, 네가 좋다니 별수 없지.]

    아리아드네는 소리가 들린 것이 어느 쪽인지도 모르면서 내달렸다. 구두는 벗겨진 지 오래였고, 거추장스러운 치마는 말아 쥐어 다리가 반쯤 드러났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봐, 죽고 싶으면―”

    어느새 아리아드네를 뒤따라온 유진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 몸을 돌려세웠다.

    유진의 손을 뿌리치려던 아리아드네는 저 멀리 보이는 인영에 그만 숨이 멎었다. 새파란 눈동자에서는 예고도 없이 눈물이 후두둑 쏟아졌다.

    [네가 그러지 않을 애라는 걸 알아서 하는 말이다만, 난 의무니, 명예니 하는 그런 것들이 네 행복보다 무겁다 여긴 적 없다.]

    [그러니까 그놈이 싫어지거든 언제든 버리고 와. 천 년이고 만 년이고 기다려 줄 테니.]

    그것이 아리아드네가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그립고 그리워서, 일부러 떠올리지 않으려고 그토록 노력했는데……. 쏟아지는 눈물로 앞이 보이지 않아도, 조금 전 봤던 얼굴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옅은 한숨 소리와 함께 아리아드네의 위로 그늘이 드리웠다. 유진이 아리아드네를 제 등 뒤로 잡아끌었다. 아리아드네는 제 앞을 가려 준 유진의 등에 기대어 울음을 토해 냈다.

    보고 싶어서, 만나고 싶어서, 생각만으로도,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메어 오는 사람.

    “아버지…….”

    유진의 등이 아리아드네의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남자가 내어 준 등이 아리아드네를 단단하게 받쳐 주었다.

    * * *

    “아리아…….”

    깜짝 놀란 이블린이 아리아드네를 불렀지만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렇지 않아도 하얗게 질린 채로 벌벌 떨던 줄리가 아리아드네를 따라가려 했지만 유진의 제지에 막혔다.

    “아, 아리아드네 님, 아리아드네 님. 어떻게 해요.”

    “난 분명 경고했어. 여기 있으라고.”

    줄리라는 여자가 발을 동동 구르며 울음을 토해 냈지만, 유진은 아무도 나가지 못하도록 다리를 뻗어 마차 문을 막아 버렸다.

    “아무래도 전 가 봐야겠어요.”

    “앉아, 죽기 싫으면.”

    이블린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유진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막아섰다.

    “다들 왜 그렇게 제 목숨 아까운 줄 몰라. 죽으면 다 끝이야, 끝이라고! 그 잘난 권력도, 돈도, 살아 있을 때나 의미가 있는 거지.”

    유진은 갑갑한 듯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었다.

    “불멸의 영혼 같은 헛소리를 믿으니 다들 정신이 반쯤 나간 거지.”

    그러고는 마차 문을 막고 있던 다리를 들어 그대로 마차 문을 찍어 내렸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 문이 부서졌다. 마차 문에 새겨진 메르디에스 가문의 문장인 가시나무에 둘러싸인 방패는 두 조각이 났다.

    마차에서 내린 유진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차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일행을 급습한 자가 누군가를 노렸다면 그 대상이 누구일지는 뻔했다.

    메르디에스 공녀 아리아드네.

    그런데 그 인물이 타고 있을 것이 뻔한 마차까지 와서 그곳을 지키는 병사만 공격하고, 마차 안의 사람들은 그대로 두었다니.

    급습한 자들이 심각한 머저리거나 다른 의도가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전자일 리는 없으니 후자라고 봐야 했다.

    유진은 주위에 널브러진 병사 중 그나마 정신이 멀쩡해 보이는 사람을 골라냈다. 가슴을 부여잡고 끙끙대는 병사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지켜.”

    병사를 마차 안으로 집어 던진 유진은 아리아드네를 찾아 달렸다. 갑자기 나타난 유진을 향해 잘 차려입은 기사 하나가 달려들었다. 높이 치켜든 검이 유진을 향해 내리꽂혔다.

    유진의 손에서 튀어나온 총신이 검을 막아 냈다. 부딪힌 부위에서 금속성의 깡,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기사의 두 손이 묶여 빈 가슴으로 유진의 주먹이 쇄도했다. 기사는 유진과 자신을 둘러싼 공기가 지나치게 천천히 흐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북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기사는 제 몸이 공중에 떠오른 것을 알았다.

    뻔히 눈에 보이는데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공중에 떠오른 몸이 바닥에 처박혔을 때는 이미 유진은 보이지도 않게 멀어진 다음이었다.

    이후로도 유진은 제 앞을 막는 사람들을 맨몸으로 상대했다. 특별할 것 없는 흔한 체술(體術)인데도 당하는 사람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유진을 향해 달려드는 기사들은 끝이 없었다. 일행을 급습한 기사들은 잘 훈련된 것이 분명했으나…….

    ‘어딘가 이상해. 이건 전투가 아니야. 그것보다는 마치 대련 같군.’

    상대를 목숨을 앗으려는 전투와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려는 대련. 그 둘을 구별하는 건 사선 위에서 살아온 그에게는 숨 쉬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그때, 유진의 눈에 하늘색 드레스가 보였다. 그는 귀찮게 달려드는 주위를 대강 정리하고 아리아드네 뒤를 쫓았다.

    눈에 보였으니 따라잡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유진이 따라가 아리아드네를 잡아끌었다. 뒤를 돌아본 여자는 죽은 가족이라도 만난 듯 반쯤 정신이 나간 얼굴이었다.

    “이봐, 죽고 싶으면―”

    새파란 눈에서 색 없는 물이 쏟아져 내렸다. 여자의 레몬색 머리 위로 여름의 뜨거운 햇볕이 부서졌다. 유진이 사막을 헤매던 그날처럼.

    유진의 등이 여자의 눈물로 젖어 들었다. 아리아드네가 눈물을 쏟아 내자 멀찍이서 구경하듯 바라보던 기사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제야 유진의 눈에 기사들이 두른 청록색 망토의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방패를 둘러싼 가시나무. 유진이 저런 문장을 알 리가 없는데 어딘가 익숙했다.

    그가 저 문장을 어디에서 봤는지 간신히 떠올렸을 무렵, 곰 같은 덩치의 사내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네놈이 울렸냐?”

    다가온 사내가 두꺼운 손바닥을 유진의 어깨에 턱 하니 올리고는 물었다. 성가신 일에 휘말리는 건 질색이었다. 유진이 언짢은 내색을 하자 사내의 눈썹이 실룩였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기로 이름난 사람인데, 넌 못 참아 주겠다.”

    사내의 말에 구경하듯 바라보던 기사들이 쑥덕댔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기로 뭐? 그게 누군데?”

    “설마. ‘비’ 자를 빼먹은 거 아닐까? 비이성적…….”

    사내가 쑥덕대는 기사들을 향해 눈을 부라리자 기사들은 입을 다물고는 딴청을 부렸다.

    “이 땅에서 감히 메르디에스를 건드려? 넌 오늘 죽은 줄 알아.”

    사내가 장갑을 벗어 유진의 가슴팍을 향해 던졌다. 유진은 제 가슴팍을 맞고 땅에 떨어진 장갑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몸을 숙였다.

    유진이 바닥에 떨어진 장갑을 주워 들어 사내에게 건넸다. 지켜보던 기사들 사이에서 풋 하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까, 까였어. 결투 신청 까였어.”

    “솔직히 까이길 다행이지. 결과 너무 뻔해. 우리 기사단 최약…….”

    사내가 휙 하니 돌아보자 기사들은 또 딴청을 부렸다. 사내는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얼굴로 유진의 양어깨를 꽉 쥐었다.

    “나를 만난 네놈 운명을 원망해라.”

    사내가 팔을 크게 휘두르는 것에 맞춰 유진이 몸을 살짝 비튼 순간이었다.

    유진의 등에서 떨어진 아리아드네가 유진과 사내 사이를 파고들었다. 사내의 몸에 매달린 아리아드네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사내를 불렀다.

    “아버지.”

    아리아드네는 사내의 품에 매달려서는 조금 전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펑펑 울기 시작했다. 아리아드네의 통곡에 잠시 얼이 빠졌던 사내는 아리아드네의 등을 어색하게 토닥이며 물었다.

    “저놈 때문이냐? 저놈이 무슨 짓을 했길래 그래?”

    메르디에스 공작이자 아리아드네의 부친, 레너드의 채근에 아리아드네는 울음 섞인 소리로 간신히 말을 꺼냈다.

    “저, 사람 때문이 아니라…….”

    “저놈이 아니면 누구, 누구 때문에 이래?”

    레너드가 제 품에 안긴 아리아드네의 얼굴을 들어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맑은 하늘처럼 새파란 눈동자에는 아직도 그렁그렁 눈물이 가득했다.

    “아…….”

    “아?”

    레너드는 순식간에 이름이나 가문에 ‘아’ 자가 들어가는 백여 명 정도를 떠올리고, 그중 누구를 족쳐야 할 것인지 맹렬히 머리를 돌렸다.

    “아, 버지.”

    “그래, 그래. 아버지 여깄다.”

    “아버지 때문에…….”

    아리아드네는 말을 마치자마자 또다시 눈물을 펑펑 쏟아 냈다. 마침내 아리아드네에게서 족쳐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들은 레너드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저 봐, 저 봐, 내 언제고 애먼 사람 잡을 줄 알았지.”

    “그러니까 지금 공녀님 울린 게 성주님이란 말이지?”

    기사들의 쑥덕임이 들불처럼 번졌다. 여기저기서 한숨과 함께 한탄을 쏟아 냈다.

    “아니, 그러니까 왜 이런 쓸데없는 일을 해서는.”

    “얼마 전에 공녀님 쓰러지셨다며? 그것 때문에 그랬던 거 아니야?”

    “그러니까 그냥 평범하게 마중 나가면 될 걸 공녀님 호위가 일을 제대로 하네, 안 하네, 본인이 점검을 할 때가 됐네, 안 됐네 하더니.”

    “난 이번 일 반대했다. 넌 알지? 내가 반대한 거.”

    “알지, 알지. 이거 찬성한 사람은 한 사람뿐이잖아.”

    기사들이 아무리 떠들어 대도 레너드에게 그런 잡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돌처럼 굳어 있던 레너드가 간신히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 나?”

    아리아드네는 눈물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니까 내가, 나 때문에 지금…….”

    레너드는 다 자란 딸의 눈물에 어쩔 줄을 몰랐다. 아니, 아리아드네는 어릴 때부터 유난히 어른스러워 무릎을 깨 먹고도 오히려 놀란 사람들을 안심시키던 아이였다. 십수 년 만에 보는 딸의 눈물에 레너드는 정말 딱 죽고 싶었다.

    “아리아드네, 많이 놀랐니? 내가 분명 네가 있는 곳은 시끄럽지 않게 조심하라고 했는데. 저것들이 또 정신을 빼놓고 설치고 다니더니.”

    레너드가 메르디에스 기사단의 정예 기사들을 째려보며 이를 갈 듯 말했다.

    조금 전, 아리아드네가 탄 마차 주위에서 병사들을 신나게 집어 던지던 놈들이 저기 있는 저놈들이었다. 레너드는 얼마나 놀랐던지 소리를 꽥하고 지르고 말았다.

    레너드의 사나운 시선에 시끌시끌하던 소리들이 뚝 멈췄다. 기사들의 얼굴에는 억울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 게 아니라…….”

    “그럼, 왜?”

    아리아드네의 눈에서 다시금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왜…… 왜 이렇게,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차오른 눈물과 함께 그 말을 쏟아 낸 아리아드네는 다시 통곡하기 시작했다.

    “저 봐, 저 봐, 공녀님이 저 말 안 하셨음 또 우리만 잡았지.”

    “우리가 무슨 동네북이야? 심심하면 두드리게?”

    기사들이 레너드의 눈치를 힐끗 보고는 조금 전보다 소리를 낮춰 쑥덕댔다. 하지만 굳이 소리를 낮추지 않아도 아리아드네의 울음소리에 혼이 나간 레너드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보고 싶었는데……. 보고 싶어서, 제가, 제가…….”

    왕비의 처소에 갇혔을 때도, 탑에 끌려가 갇혔을 때도, 아리아드네는 레너드의 얼굴만큼은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자신의 사랑에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죄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레너드에게만큼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희생이니, 속죄니 하는 것들보다 그저 그립고,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픈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우겠다고 레너드는 무던히도 애를 썼다. 병석에서 오래 앓느라 예민해진 파시파에가 아리아드네에게 모진 말을 할 때도, 아픈 분이니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레너드의 넉넉한 품 때문이었다.

    레너드는 파시파에가 죽자 재혼조차 하지 않고 혼자 아리아드네를 키웠다. 파시파에와 열렬한 애정을 나눴던 것도 아니었고, 파시파에는 아리아드네를 낳고는 병석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냈으니 레너드는 평생을 독수공방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가 된 글레나를 메르디에스에 들인 것도 순전히 아리아드네 때문이었다. 글레나가 파시파에의 이종사촌이니 어머니를 잃은 아리아드네에게 위안이 될까 하여.

    “아니, 그게 그러니까, 일찍 오려고 했는데 말이다. 일이 좀 생겨서……. 아니, 그래서 좀이라도 일찍 보려고 이렇게 마중도 나왔는데.”

    레너드는 영지 시찰이나 메르디에스가 소유 중인 광산이나 상단의 일로, 혹은 그 외의 계약들로 일 년의 절반 정도는 본성을 비우곤 했다.

    그런 자신 때문에 말은 안 해도 아리아드네가 많이 외로웠구나,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에 목구멍이 뜨뜻해졌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저, 때문에. 아버지가…….”

    레너드가 평생을 걸고 지켜온 가문도, 메르디에스의 역사와 함께 한 성도, 그곳의 사람들도, 레너드가 아리아드네를 위해 묶어 주었던 정원의 그네도, 그리고 그토록 사랑받으며 자랐던 아리아드네 자신도.

    아리아드네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

    “아니, 내가, 내가, 아버지가 미안하다. 아리아드네.”

    레너드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아리아드네에게 주고도 늘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랬는데, 아리아드네 때문에 가문과 명예와 사람과 제 생명까지 잃고도 미안하다고, 아버지가 미안하다고, 그렇게 말하는 레너드 앞에서 아리아드네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레너드를 붙잡고 있던 손마저 놓고 그대로 주저앉은 아리아드네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고 말았다.

    레너드를 다시 볼 수 있어서, 레너드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어서, 레너드가 아직 죽지 않아서, 그 모든 미래가 아직 오지 않아서, 그래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구름이 여름의 뜨거운 해를 가렸다. 다시 돌아온 스물둘의 여름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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