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48)
  • * * *

    빛 한 점 들지 않는 캄캄한 방이었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새어 나왔다. 푸르스름한 빛이 시작된 곳은 탁자 위에 놓인 손바닥만 한 물건이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그 물건은 가운데가 잘록하고 입구와 바닥 면이 넓었다. 위에서 떨어진 하얀 눈송이가 잘록한 가운데를 통과해 바닥 면으로 하늘하늘 떨어졌다.

    유진은 푸르스름한 빛이 새어 나오는 물건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그것이 흔들리자 그 속의 눈송이들이 바람에 날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마구잡이로 뒤섞였다.

    ‘꼭 모래시계 같군.’

    모래시계는 위쪽 모래가 모두 떨어지는 동안의 시간을 하나의 단위로 삼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브르노 수도원에서 보관 중인 모래시계 모양의 이 성물은 모래 대신 새하얀 눈송이가 떨어졌다.

    ‘아니, 이건 시계도 아니군.’

    푸르스름한 빛을 내며 떨어지는 눈은 끝이 없었다. 그 끝을 알 수 없으니 시계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인간은 상상할 수도 없는 긴 시간이 이 눈 시계의 단위일지도.

    하지만 이 물건의 가치가 어떠하든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 성물은 그가 찾는 무언가가 아니었다.

    유진은 무심한 손길로 눈 시계의 위아래를 뒤집었다. 아래가 위가 되고, 위가 아래가 되어 눈이 내리는 곳과 쌓이는 곳이 뒤바뀌었다.

    유리 속에 갇힌 하얀 세상을 보고 있으려니 처음 정신이 들었던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도, 망 가. 어서.’

    희미한 기억 속의 누군가가 그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그것이 그가 기억하는 유일한 과거였다.

    사락― 얼굴에 닿은 무언가가 이윽고 차가운 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그는 얼굴에 쏟아져 내리는 차가운 덩어리를 맞으며 눈을 떴다. 하늘에서는 자신의 눈동자와 똑 닮은 잿빛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키는데 왼쪽 가슴에서 불에 덴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가슴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대로 죽나 보다, 처음으로 든 생각이 그것이었다.

    그는 부서진 건물 잔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보이는 것은 끝도 없이 이어진 황량한 모래 언덕뿐이었다.

    잿빛 눈이 하늘에서 퍼부을 듯이 내리고 있었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모래뿐. 쏟아지는 눈은 조금도 쌓이지 못하고 모래에 닿자마자 그대로 사라졌다.

    자신이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사람이래도 이상하지 않았다. 잿빛 눈이 내리는 사막은 제 목숨과 함께 그대로 사라질 세상처럼 보였다.

    그는 제 죽음을 직감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지만, 얼굴 가득 내리쬐는 불볕 때문에 다시 정신이 들었다.

    모래사막 위로 한낮의 열기가 이글이글 아지랑이를 피우고 있었다. 조금 전 눈이 내렸다는 건 마치 거짓말처럼 모래사막 위로 뜨거운 열기가 쏟아져 내렸다.

    그는 손으로 차양을 만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슴에서 흐르던 피는 멎었고,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상의에 흥건하도록 흘린 피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미친 줄 알았겠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여기가 대관절 어디인지, 왜 상처를 입은 채 죽어 가고 있었던 건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단서라도 있을까 기대하며 자신이 몸을 기대고 있던 건물 안쪽으로 움직였다. 다 부서져 겨우 형체만 유지하고 있는 그곳에 남은 것은 깨어진 색유리와 갓난아이를 안고 있는 모자상이 전부였다. 아마도 이 건물은 종교 시설이었던 듯했다.

    그는 갓난아이를 안은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문득 여자에게 묻고 싶어졌다. 너희는 구원을 약속한 이들에게 정말 구원을 보내 주었느냐고. 이 지경이 되어서도 아직도 구원을 바라는 자신이 우스웠다.

    그는 목이 긴 검은 신발로 그곳을 빠져나오려다 희미한 흔적만 남은 그림 앞에 멈춰 섰다. 흰 꽃을 든 천사와 마주 본 여자를 그린 그림이었다.

    여자의 머리는 옅은 금발이었고, 눈동자는 색이 바래 그 빛깔을 알 수 없었다. 형체도, 빛깔도 희미한 그 그림에서 어쩐지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는 한참 동안 그림을 바라보다 자리를 떠났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회오리 모양의 모래 돌풍이 그를 덮칠 듯이 다가왔다. 모래바람이 눈에 들어가 눈을 뜰 수도 없었다.

    온몸으로 바람에 저항하며 힘겹게 발을 내디뎠다. 모래 폭풍에서 벗어나려는지, 그 속으로 들어가기 위함인지 저조차도 제 발이 가는 방향을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헤집는 기분으로 앞으로, 앞으로 걷기만 했다. 지쳐 쓰러지면 그대로 기절해 잠들고,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쬐면 잠에서 깨어났다.

    배가 고프면 전갈이든 뱀이든 눈에 보이는 대로 잡아먹었다. 가끔 먹지 못할 것을 먹었는지 뱃속이 파먹히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기도 했으나, 죽는 일은 없었다. 죽을 듯한 고통 속에서 정신을 잃었다가도 눈을 뜨면 멀쩡한 상태로 돌아왔다.

    ‘나는 왜 죽지 않는가.’

    아무런 기억도 없는 상태로 유진이 눈을 뜬 그곳은 엄청난 재앙이 휘몰아친 뒤의 세계였다. 그곳의 하늘에서 내리는 것은 모두 잿빛이었다. 마치 그의 눈동자처럼.

    그는 그곳에서 5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재앙을 피해 생존한 사람들의 무리에 속하기는 했지만, 그곳이 제 자리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이방인이었다.

    ―괴물……. 넌 괴물이야! 나만 그렇게 생각한 줄 알아? 다들 널 두려워했어. 5년 동안 머리카락조차 자라지 않는 널.

    끝까지 그 세계에 속하지 못했던 그는 또다시 ‘어딘가’로 끌려왔다. 그렇게 ‘이곳’으로 끌려온 지도 벌써 1년이었다.

    ‘대체 나는 뭐지?’

    유진은 제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그 위에 자리한 카푸트가 공중에 둥둥 떠 있었다.

    그가 ‘이쪽 세계’에서 정신을 차린 건 성 상티모니아의 살리바 대신전에 있는 황금의 방이었다. 유진은 겹겹이 둘러싼 삼엄한 경계를 뚫고 그곳에 도착한 것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그곳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 카푸트라는 것과 마주했다.

    카푸트와 마주한 순간 본능적으로 알았다. 자신은 이것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이후로는 그것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오직 성물만을 찾아 헤맸다.

    찢어진 조각을 모두 모으면 그가 그토록 갈구하는 무언가에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이 그의 잃어버린 기억이든, 아니면 그가 버리고 싶었던 기억이든 무엇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카푸트를 마주할 때면 가슴 속을 꽉 메우는 이 지긋지긋한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것은 몹시 기대되는 한편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성물을 마주한 결과는 늘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도…….’

    수도 없이 많은 성물을 보았지만, 조금 신기하거나 어딘가 기괴한 무엇일 뿐. 브르노 수도원의 ‘눈 시계’와 같은 평범한 성물들은 그에게 아무런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이 짓을 그만둘 수도 없었다. 카푸트와 마주하고 있으면 솟구치는 불안함이 그를 잠시도 가만두지 않았다.

    ‘어서 그것을 찾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뒤가 이어지지 않는 생각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앞만 보는 경주마처럼 그의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페렌트의 다섯 가문이 가진 성물은 그도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찾는 물건은 평범한 것이 아닐 테니까, 큰 힘을 지닌 자들이 갖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 여자는 조금도 제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여자가 내지르는 날카로운 비명에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색이 바랜 듯한 옅은 금발, 푸른 눈, 마치 영혼이 갈기갈기 찢어진 것처럼 울부짖던 목소리, 그리고 그 손에 든 흰 물체.

    여자를 보는 순간, 카푸트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알 수 없는 감정이 그의 안에서 휘몰아쳤다. 카푸트에 매여서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처럼 저 여자와 엮이면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멀리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한번 확인해 볼 것인가. 그는 모래 폭풍을 피해 가는 사람은 되지 못했다.

    손수건을 핑계 삼아 여자를 찾아간 자리에서 그는 지긋지긋한 악몽과 마주했다.

    ―무례? 당신은 내 부인이 될 사람이야. 메르디에스가 억만금을 내놓겠다 해도 내가 파혼에 동의하지 않는 이상 당신은 내게서 벗어날 수 없어.

    눈앞에서 펄럭이는 붉은 망토, 붉은 망토에 그려진 외뿔의 네발짐승, 그리고 그것과 마주하고 있는 여자.

    타앙! 산산이 부서뜨리고서야 알았다. 이것은 자신의 악몽이 아니라 현실이었다는 것을.

    ―내 남은 인생에서 그 남자를 치우려면 당신이 필요해.

    ―오직 당신만이 가능해.

    ―내 손을 잡아. 다섯 가문이 가진 성물을 보려면.

    거절할 것인가, 아니면 여자와 함께할 것인가. 이번에도 답은 마찬가지였다.

    여자는 사막에 휘몰아치는 모래 폭풍이었다.

    * * *

    메르디에스 본성으로 돌아가는 날이 내일로 다가왔다. 귀환할 준비를 하느라 다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글레나와 이야기를 나누다 자신을 힐긋대는 이블린을 돌아보며 물었다.

    “할 말이 있으면 해.”

    이블린이 주저하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분도 정말 메르디에스에 동행하세요?”

    “그분?”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자 이블린이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숙인 얼굴에서는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방문자님이요.”

    “저, 저도 그거 궁금했어요!”

    아예 몸을 튼 채로 이곳을 주시하고 있던 줄리가 번쩍 손을 들며 동참했다.

    “이블린.”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글레나가 딱딱한 목소리로 이블린을 불렀다. 글레나의 부름에 이블린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굳혔다.

    “줄리야 원래 저렇다지만 너까지 이 무슨 경솔한 행동이야.”

    질책을 받은 건 이블린인데 오히려 기가 죽은 건 줄리였다.

    “글레나, 너무 그러지 말아요.”

    아리아드네가 웃으며 글레나의 팔을 슬쩍 잡아끌었다. 글레나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쩍 느슨해진 아리아드네 때문에 고용인들의 태도가 방만해지진 않을까 걱정이었다.

    “요즘 다들 어수선하다 했더니 그것 때문이었어?”

    돌아가는 길에 유진이 함께할지 모르니 준비를 하라 했더니. 이블린이 글레나의 눈치를 보며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게 그런 분이 계시다는 것 자체도 신기한데, 여정을 함께 한다니까 믿어지지 않아서요.”

    아리아드네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정말 그게 다야?”

    “저희뿐만이 아니에요. 모두가 방문자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해하는걸요.”

    이블린의 대답에 줄리가 고개를 주억이며 말을 보탰다.

    “또, 잘생기셨으니까…….”

    두 볼을 발갛게 물들인 줄리는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한 얼굴이었다.

    “그때 진짜 멋있었어요.”

    줄리가 손을 들어 허공을 향해 겨누고는 “비켜, 탕―”하는 소리를 냈다. 유진이 풀멘을 꺼냈을 때의 행동을 흉내 내는 모양이었다. 평소 차분한 이블린마저도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날 이후로 메르디에스 고용인들 사이에서 유진은 위기에 빠진 공주님을 구해 낸 용사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냥 용사가 아니라 ‘매우 잘생긴’ 용사라는 점이었다.

    ‘하긴 잘생기긴 했지.’

    서늘하고 차가운 외모와 위압적인 분위기 때문에 섣불리 다가가긴 어렵지만, 그가 잘생겼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무엇보다도 유진에게는 귀족 남성들의 정돈된 모습과는 다른 거칠고 사나운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유진을 둘러싼 거친 분위기는 섬세한 얼굴과 어우러져 눈을 뗄 수 없게 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의 취향은 아니었다. 위험한 남자에게 빠져 허우적대는 것은 아리아드네가 성년식을 치르기도 전에 이미 흥미를 잃은 일이었다.

    더구나 뼈아픈 배신을 경험한 아리아드네로서는 사랑은 멀기만 한 이야기였다.

    “글쎄……. 어떻게 되려나.”

    아리아드네의 애매한 대답에 잔뜩 기대하고 있던 이블린과 줄리가 실망한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것을 지켜보는 아리아드네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어린 시녀들이 유진을 보며 꺅꺅대는 것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떠날 준비는 대강 마무리된 것 같으니까 오후에는 별관이라도 가 볼까?”

    아리아드네가 슬쩍 꺼낸 말에 이블린과 줄리의 얼굴이 금세 화색을 띠었다.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파혼하려면 유진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유진이 거절할 것을 대비해 카이엔이 파혼에 응할 수밖에 없도록 궁지에 몰아넣는 방법도 모색하고 있었지만…….

    강렬하던 여름 햇살이 갑자기 모습을 감췄다. 구름이 해를 가리고, 한낮의 정원에는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글레나, 손님을 모시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해 줘요.”

    구름이 걷히고 따가울 정도로 햇살이 내리꽂히는 정원 한가운데.

    유진, 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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