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48)
  • * * *

    ―안녕?

    줄리 위버가 처음 아리아드네를 만난 건 12년 전, 그녀가 여덟 살이 되던 해였다.

    부서지는 햇살처럼 옅은 금발, 바다보다도 시린 파란 눈동자. 열 살에 불과한 어린 주인은 태양처럼 모두를 끌어당기는 존재였다. 자신과 고작 두 살 차이인데도 줄리는 어쩐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아, 처음 뵙겠습니다. 공녀 저하.

    ―이름으로 충분해. 그런 호칭은 아버지도 안 들으시는데.

    아리아드네가 웃을 때면 공기 방울이 공중에서 터지는 것만 같았다.

    ―아리아드네 님을 모실 수 있게 되어 영광이에요. 저 잘할게요!

    ―나야말로. 잘 부탁해.

    아리아드네의 시녀가 되었을 때는 마치 꿈이라도 꾸는 것 같았다.

    제 가문이 위버인 것도 참으로 자랑스러웠다. 아리아드네의 시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위버가 메르디에스의 가신이기 때문이었으니까.

    아리아드네는 좋은 주인이었다. 아랫사람에게 인색하지 않고, 유쾌하고, 솔직한.

    그리고 제 곁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익숙했다. 그 자리에 누가 있건, 누가 떠나건 한결같았다. 그 자리를 채우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그제야 깨달았다. 위버는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자리라는 걸.

    ―아리아드네가 평소 어떻게 지내는지, 오늘 기분은 어떤지 미리 알면 더 잘해 줄 수 있잖아. 그러니까 위버 영애, 이건 아리아드네를 위하는 일이야.

    ―착각하는 것 같아서 말해 주는데 선택은 영애 몫이 아니야. 내가 영애를 선택한 거지. 좋다, 싫다, 하겠다, 안 하겠다. 그런 고민은 필요 없어. 잘하겠다는 각오면 충분할 것 같은데.

    ―이대로만 하면 돼. 그러면 아리아드네가 왕궁에서 제일 가까이 두는 사람도 네가 될 거다.

    아리아드네가 자신보다 이블린을 더 신뢰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줄리, 네가 잘해야 한다. 알고 있지?

    어머니가 저에게 거는 기대도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게 정말 마지막 기회야. 줄리는 붉은 기가 도는 금발을 올려다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카이엔은 자신의 마지막 동아줄이었다.

    “왜 나를 보자고 했지? 먼저 연락하기 전에는 조심하라고 했을 텐데.”

    줄리의 맞은편에 선 카이엔이 사납게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리아드네는 좀처럼 카이엔을 만나 주지 않았다. 만나 주지 않으니 갑자기 이러는 이유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줄리에게 연락할까 하던 차였지만 시녀 따위가 부른다고 달려 나온 자신이 한심했다.

    “……아리아드네 님께서 눈치채셨어요.”

    “뭘?”

    “이제껏 제가 전하께 전한 말…….”

    줄리가 간절한 눈빛으로 카이엔을 올려다보았다. 카이엔이 시키는 일을 하다 그랬으니 자신을 구해 달라는 뜻이겠지.

    ‘하, 그래서였나? 겨우 이따위 계집 때문에.’

    카이엔은 분기를 참지 못하고 발밑의 풀을 짓밟았다. 그가 짓밟은 풀은 마치 바닷속의 산호와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마치 파도 물결에 너울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날더러 어쩌라는 말이냐?”

    그가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물었다. 흑요석으로 된 반질반질한 검은 외벽이 그런 그의 모습을 선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정말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호화로운 정원이었다.

    정원을 가득 채운 산호처럼 생긴 저 풀들만 해도 한 포기, 한 포기가 같은 부피의 보석만큼 값이 나가는 것들이었다. 풍요의 메르디에스가 아니라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정원이었다.

    이 모든 것이 그의 것이어야 했다. 그는 이 왕국의 주인이 될 테니까. 그 모든 것이 바로 눈앞에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틈이 벌어졌다.

    “분명 전하께서 시키는 일만 잘하면 절 아리아드네 님 제일 가까이 두겠다고 하셨잖아요. 저는, 전하께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전하께서 절 지켜 주시지 않으면 저희 가문까지도 화가 미칠 거예요.”

    줄리라는 이 시녀는 메르디에스의 가신 중 하나인 위버 자작가의 차녀였다. 그런 줄리가 가문에 미칠 화를 걱정할 정도면 아리아드네의 화가 심상치 않다는 뜻이었다.

    하긴, 자신에게 하는 것만 봐도 쉽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겨우 이따위 계집 때문에 모든 일이 어그러졌다는 것이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네가 정말 잘했으면 아리아드네가 눈치채지 못했어야지. 지금 일을 망친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같이 침몰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카이엔의 매서운 질책에 줄리의 눈동자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저는 정말 전하께서 하라는 대로 한 것뿐인데……. 아시잖아요? 제가 얼마나 전하 말을 잘 따랐는지. 그러니까, 제발…….”

    다급해진 줄리가 카이엔의 발치에 무릎을 꿇으며 매달렸다. 몸을 굽히고 벌벌 떠는 꼴을 보니 그럴듯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네 공을 무시할 수야 없지. 지금이야 제 주위 사람을 건드렸다 화를 내고 있지만.”

    카이엔이 한결 누그러진 어조로 줄리를 달랬다. 기댈 데가 자신밖에 없어지면 제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려 들겠지.

    “너도 알다시피 나는 공녀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가 아니냐. 그런 관계는 쉽게 깨지는 것이 아니다. 그럴 수도 없고.”

    페렌트의 1왕자 카이엔과 왕족에 준하는 메르디에스 공녀 아리아드네의 약혼이었다. 이를 되돌리는 것은 성사보다도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카이엔이 거부한다면 파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그럼―”

    “그래, 넌 앞으로도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그러면 너도, 네 가문도 내가 책임지마.”

    “네, 맡겨만 주세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요.”

    실낱같은 희망에 줄리의 눈동자가 빛났다. 겨우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아리아드네와 만날 수 있도록 네가 좀 도와야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줄리의 쓰임새는 끝이었다. 이 모든 것은 오로지 줄리 혼자만의 잘못이 될 테니까.

    “하지만 아리아드네 님께서는 전하를 보고 싶지 않다고―”

    “아니, 그건 만나기 전의 일이지. 내가 직접 보고 이야기하면 분명…….”

    그 순간, 착착착 그런 소리가 카이엔의 말을 잘랐다. 마치 커다란 부채가 접히는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바람을 가르는 것 같기도 한 그런 소리가.

    카이엔은 불길한 예감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달라질 건 없을 텐데요.”

    그가 그토록 만나고자 노력했던 사람이 겨울바람처럼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를 비추고 있던 새까만 외벽은 아코디언처럼 접혀 좌우로 갈라져 있었다.

    “원하시는 대로 절 봤으니 줄리도, 줄리의 가문도 전하께서 책임져 주실 텐가요?”

    카이엔은 볼을 으득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씹었다. 이 모든 것이 저 계집과 짜고 부린 농간이었다니.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

    아리아드네가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런데,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줄리는 제 사람이니까요. 제가 책임질 겁니다.”

    ―줄리, 왜 그랬니?

    ―저, 저는 정말 나쁜 뜻으로 한 게 아니었어요. 그저 아리아드네 님 주변에서 일어나는 가벼운 일들만 알려 주면, 그러면 된다고 하셔서…….

    ―내가 아는 너라면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을 텐데. 전하가 네게 큰돈을 주겠다고 하셨니? 그게 아니면 탐나는 지위를 약속하셨니?

    ―아니, 아니요. 그런 걸, 그런 걸 욕심낸 게 아니었어요.

    ―그럼 왜 그랬니?

    ―카이엔 전하의 눈 밖에 나면 아리아드네 님 곁에 남을 수 없을 것 같았어요. 카이엔 전하는 아리아드네 님이 사랑하시는 분이지만……. 저 같은, 저 같은 시녀를 대신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잖아요.

    줄리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줄리가 흘린 눈물이 카펫 위를 적셨다.

    아리아드네는 마치 첨탑에 갇혔던 그때로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자신이 원망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던 나날들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제 곁을 채우는 사람들에게 무심했다. 누군가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줄로 알았다. 적당한 보상이면 그것으로 제 할 도리는 끝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이, 당신이 어떻게, 우리를 이렇게 버릴 수가 있어!]

    [왕가를 보필하는 것이 공가의 임무가 아니던가? 메르디에스가 가진 땅과 재산이 어디 간 것도 아닌데. 더 강한 왕국으로 만드는 데 유용하게 쓰일 테니 걱정 마시죠, 부인.]

    [널 줍는 게 아니었어. 숙주가 사라지면 너도 죽겠지. 넌 남에게 기대지 않으면 제힘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기생충에 불과하니까.]

    [부인께서는 저와 얼마나 다르십니까? 부인을 지키려다 죽은 목숨이 몇인데. 당신도 그 피를 양식으로 살고 계시지 않습니까?]

    카이엔의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아무 대꾸도 못 한 건 제가 진 목숨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였다.

    제 곁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자들에게도 가족이 있고, 꿈이 있고, 미래가 있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목숨은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이름과 얼굴을 잊지 않으려고 끝없이 되뇌는 것뿐.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죄였다. 자신의 무지와 오만이 카이엔을 끌어들였다.

    [아리아, 드네 님. 죄, 죄송해요. 끝, 까지, 지켜드리고 싶…….]

    줄리는 아리아드네를 첨탑에 가두려는 병사들을 막아서다 목숨을 잃었다.

    ―정말, 정말 죄송해요. 전, 정말, 그저 아리아드네 님 곁에 남고, 싶어서…….

    그런 줄리가 카이엔의 꾐에 빠졌다면 그것은 줄리만의 잘못이 아니었다.

    ―미안한 사람은 나야.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겠구나.

    ―공녀, 이 일은 이렇게 넘기실 일이 아닙니다. 줄리에게 큰 악의가 없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잘못은 잘못입니다.

    ―줄리, 난 너를 잃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내게 기회를 주겠니? 널 앞으로도 내 곁에 둘 수 있도록.

    과오를 씻고도 남을 만한 공을 세웠으니 이만하면 괜찮겠지. 아리아드네는 줄리를 보며 안심하라는 듯 웃어 주었다. 그제야 줄리도 긴장이 풀린 듯 몸을 늘어뜨렸다.

    “1왕자 전하, 오늘의 무례는 정식으로 항의하겠습니다. 그러니 이만 이 땅에서 나가 주십시오.”

    아리아드네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숙여 인사했다.

    “…….”

    카이엔은 아직도 제게 벌어진 이 일들이 믿기지 않는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리아드네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작은 감탄사를 뱉었다.

    “아, 산호 정원에서 이 문을 본 사람들은 이것이 흑요석으로 만든 것인 줄 알더군요. 이건 유리에 페르메라는 광물을 입힌 겁니다. 페르메 유리라고도 불리죠. 직접 보는 건 처음이신가요?”

    페르메는 빛 아래서 검은빛이 도는 광물로 빛을 통과시키기도, 반사하기도 했다.

    페르메를 유리에 바른 것을 ‘페르메 유리’라고 하는데, 밝은 쪽에서는 거울처럼 어두운 쪽에서는 유리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채취량 자체도 워낙 적거니와 가공하는 과정에서 조금만 잘못 다뤄도 못 쓰게 되는지라 메르디에스 외부로 반출되는 일이 매우 드물었다. 그렇다 보니 그 존재 자체를 모르는 이가 부지기수였다.

    “이것 때문에 차마 발길을 돌리기 어려우신가요? 이별의 선물이라고 치면 못 드릴 것도 없는데.”

    과거에도 왕궁에 있는 접견실의 벽 하나를 통째로 덮을 만한 페르메 유리를 선물한 적이 있었다. 그만한 것을 선물한 대가가 자신의 죽음이었는데, 카이엔과 끝내는 값이라 치면 나쁘지 않았다.

    “아리아드네, 더 이상 후회할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정원을 넘어 응접실 안으로 성큼 다가온 그가 아리아드네를 내려다보며 짓씹듯이 말했다.

    “후회라……. 전하와 미래를 약속했던 것만큼 후회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요?”

    “그래서 지금 파혼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못 할 것도 없지요. 시작이 제 의지였으니 그 끝이라고 다르겠습니까? 제가 끝내고 싶어졌으니 끝날 겁니다. 언제나 그랬듯이요.”

    카이엔의 얼굴이 고통을 참는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 지옥 같은 시간 속에서 아리아드네는 ‘진짜’ 카이엔과 함께였다. 그가 제게 가진 열등감, 그것을 자극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그래, 그랬지. 내 사랑스러운 약혼녀는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한 적도 없고, 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끌어안은 적도 없지. 그런데 아리아드네, 이번 일만은 그대 뜻대로 되지 않을 거야. 왕가와 공가의 결합이야. 그리 쉽게 끝낼 수 있을까?”

    카이엔의 손아귀가 아리아드네의 어깨를 틀어쥐었다. 어깨를 파고드는 고통에 아리아드네는 작게 인상을 찡그렸다.

    “전하 말씀대로 쉽지 않은 일이죠.”

    카이엔의 말대로였다. 결혼은 가문과 가문 간에 이루어지는 가장 큰 계약이었다. 무엇이든 성사보다 파투가 몇 배는 힘든 법이다.

    더구나 왕가와 공가의 파혼에는 그만한 역할을 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한 나라의 왕족이나 성 상티모니아의 교황, 혹은 그에 준하는 사람.

    “그런데, 이미 말씀드렸잖습니까. 제가 끝내고 싶어졌으니 끝날 거라고.”

    ―아, 그리고 별관에 성 상티모니아에서 온 손님이 머무르고 있습니다.

    아리아드네의 기억대로라면 지금 이 시기 란데르에는…….

    “아니, 이번에는 그대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을 거야. 이번에야말로 내가 바라는 대로―”

    “전하, 이 땅에서 행하는 무례를 더는 늘리지 마십시오.”

    “무례? 당신은 내 부인이 될 사람이야. 메르디에스가 억만금을 내놓겠다 해도 내가 파혼에 동의하지 않는 이상 당신은 내게서 벗어날 수 없어.”

    카이엔의 갈색 눈동자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였다.

    “비켜.”

    서늘하고 낮은 목소리가 사람들 사이를 갈랐다. 크지 않은 소리인데도 좁지 않은 공간을 꽉 틀어쥐었다. 그 소리에 카이엔이 채 뒤를 돌아보기도 전이었다.

    타앙, 탕탕!

    귀를 찢는 듯한 굉음과 함께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세상을 무너뜨릴 것 같았던 소리 뒤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허억!”

    누군가 비명 같은 숨을 들이켜고, 곧이어 와장창! 소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페르메 유리가 산산이 조각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리아드네는 소리가 시작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원 한가운데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아무렇게나 자른 듯한 남자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대륙의 북쪽 끝, 얼음 땅에 산다는 겨울 늑대의 눈이 저렇다고 했다. 남자의 서늘한 회색빛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아리아드네는 오싹한 한기가 들었다.

    그곳에 선 남자의 손에 들린 검은 물체는 온갖 기묘한 것을 다 보며 자란 아리아드네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남자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따라붙는 그림자조차도 유독 까맣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카이엔과 아리아드네의 파혼을 중재할 만한, 성 상티모니아의 교황에 준하는 지위를 가진 자. 이계(異界)의 방문자, 유진이었다.

    남자의 목이 길고 코르셋의 여밈처럼 촘촘한 끈이 교차된 검은 신발은 묵직한 소리를 내며 아리아드네와 점점 가까워졌다.

    산호의 방 경계를 사뿐히 넘은 남자가 아리아드네에게 성큼 다가왔다. 아리아드네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햇빛을 등진 남자 뒤로 빛이 쏟아졌다. 남자의 새까만 머리칼이 아리아드네의 옅은 금발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이를 갈듯 성난 목소리의 남자가 아리아드네 귓가에 속삭였다.

    “아가씨, 눈앞의 남자를 치워 줄까? 그러기를 원하면 그렇다고 말해.”

    카이엔이 아무리 차기 왕위에서 불리한 위치라고는 하나 프레모 대륙을 지배하는 강국(强國) 페렌트의 1왕자였다. 그런 카이엔을 마치 거추장스러운 짐짝처럼 취급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지금 아리아드네 눈앞에 자리한 남자는 그럴 수 있는 몇 되지 않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몇 되지 않는 사람 중에서도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제도와 법식에서 자유로운 인외(人外)의 존재처럼 규정되는 것이 바로 이 남자였으니까.

    어떤 면에서는 신의 대리자로 추앙받는 교황보다도 더 그러했다. 남자는 다른 세계의 인물이었으니까.

    아리아드네와 카이엔이 약혼했던 891년 가을, 둘의 약혼식 날로부터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온 대륙이 술렁이는 이변이 일어났다. 성녀가 예언한 성물 카푸트의 참된 주인이 이 땅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신의 힘이 깃든 성물은 모든 힘과 권력의 시작이었다. 프레모를 지배하는 페렌트의 다섯 가문의 시작이 그러했고, 프레모에서 가장 큰 세력을 지닌 종교인 성 상티모니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 상티모니아는 신이 남기고 간 성물을 모으고 전시하여 힘을 키웠다.

    신의 힘이 깃든 성물을 가장 많이 지닌 집단인 성 상티모니아에서도 최고로 추앙받는 성물이 있었다. 살리바 대신전에 봉인된 카푸트가 그것이었다.

    성 상티모니아 최고의 성물 카푸트의 참된 주인이 이 땅에 나타나리라는 성녀 베아트리스의 예언이 있은 지 꼭 16년째 되는 날. 성 상티모니아의 성도(聖都) 살리바에 위치한 교황의 거처이자, 성 상티모니아의 성지 살리바 대신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가 나타났다.

    그 남자가 바로 성녀 베아트리스가 예언한 성물 카푸트의 참된 주인, 이계의 방문자 유진이었다.

    유진이 나타남과 동시에 사라진 성 상티모니아 최고의 성물 카푸트는 그의 의지에 따라서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성물을 제 품에 안은 사내라니, 신의 현신이라 불러도 과하지 않았다. 성 상티모니아의 교황조차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이 남자였다.

    그리고, 아마도 아리아드네와 카이엔의 파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사람.

    [이유 없이 싫은 사람도 있는 법이지.]

    남자는 과거에도 유독 카이엔을 꺼렸다. 만사에 무심하고 냉정한 남자가 카이엔에게만 날을 세우곤 했다.

    [내가 남 일에 훈수 두는 성격은 아닌데, 당신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남자인지 잘 생각해 봐.]

    원래 동지란 같은 적을 가진 자들을 이르는 말이 아니던가. 그런 면에서 본다면 남자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동지였다.

    그렇게 생각을 마친 아리아드네가 제 어깨를 틀어쥔 카이엔의 손을 천천히 떼어 냈다. 정신을 반쯤 놓고 있던 카이엔의 손은 힘없이 떨어졌다.

    아리아드네는 카이엔을 밀어내고 유진을 제게로 끌어당겼다. 코끝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가까이 마주한 남자에게서는 서늘한 비 냄새가 났다.

    남자의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흔들렸다. 아리아드네는 남자의 새까만 머리카락을 보며 메르디에스 본성 어딘가에 있을 담비 털로 된 어깨 숄이 생각났다.

    그리고 조금 전 남자처럼 아리아드네는 남자에게만 들리도록 귓가에 다가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어찌 그런 가벼운 일에 고귀한 손을 빌릴까.”

    카이엔을 치우는 고작 그런 일에 남자의 손을 빌릴 순 없었다. 남자는 이런 하찮은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남자가 해 줘야 할 일은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었다.

    유진의 회색 눈동자가 아리아드네의 푸른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일 때마다 눈동자 가득 일렁이던 노여움이 차츰 사그라졌다.

    “지금 이게 대체!”

    쾅! 발을 구르는 소리가 귓전을 시끄럽게 때림과 동시에 카이엔이 두 사람 사이를 거칠게 파고들었다. 유진과 마주 선 그가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를 벌리기 위해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불쾌했다. 카이엔은 누군가를 올려다본 경험이 많지 않았다. 높은 지위와 큰 키를 가진 카이엔은 주로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사람이었다. 자신보다 반 뼘은 더 큰 남자가 태연히 저를 내려다보는 것이 참을 수 없이 불쾌했다.

    “감히 이딴 짓을 하고도 무사하기를 바라진 않겠지?”

    카이엔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사납게 말했다. 그 앞에 선 유진은 지나치리만큼 태연했다.

    “무사, 할 것 같은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화감에 카이엔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출신을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해괴한 옷차림부터 남자가 보여 준 믿을 수 없는 힘까지.

    “너, 대체 뭐야?”

    “나?”

    유진은 싱긋 웃으며 손에 들린 검은 물체를 가볍게 한 바퀴 휙 돌렸다. 조금 전 페르메 유리를 산산조각 낸 것이 분명한 그 물건이었다.

    카이엔은 저도 모르게 흠칫 물러섰다가 스스로의 행동을 깨닫고는 이를 악물었다.

    “글쎄, 나도 모르는 걸 물으니까. 이곳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던데? 이계의―”

    “방문자님!”

    “……이라고.”

    유진이 산호의 방으로 뛰쳐 들어온 성 상티모니아 사제의 말을 이어받아 제 소개를 마쳤다.

    “히익, 이게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안테로가 난장판이 된 응접실을 보고는 사색이 되어 외쳤다.

    “……이계의 방문자.”

    그제야 유진의 정체에 생각이 미쳤는지 카이엔이 얼굴을 숙인 채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곧 고개를 치켜든 카이엔이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성 상티모니아 내에서 그 지위와 위치가 어떠하든, 이곳은 엄연히 페렌트의 땅. 이만한 무례를 저지르고도 그냥 넘어갈 줄 알았습니까?”

    성 상티모니아가 프레모 대륙에서 가장 큰 세력을 지닌 종교이긴 하나, 프레모의 절대적 패자(霸者)인 페렌트와 세력을 겨룰 정도는 아니었다.

    ‘진짜 내가 어쩌다가…….’

    안테로는 쪼그라드는 위장을 부여잡고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성 상티모니아의 축복 속에 평안하시길. 저는 성 상티모니아의 주교, 안테로라고 합니다. 페렌트에서 이처럼 큰 물의를 일으킨 것,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페렌트의 1왕자 카이엔이오. 오늘 일은 정식으로 항의하겠소.”

    페렌트의 1왕자라는 소리에 안테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만만찮은 신분일 줄은 알았지만 1왕자일 줄이야. 안테로는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눈앞이 깜깜했다.

    그의 애타는 눈길을 느꼈는지 유진이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1왕자라고? 싫다는 여자한테 위력을 행사하고 있길래 웬 시정잡배인가 했더니.”

    맙소사! 시정잡배라니! 상대가 신분을 밝혔는데도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건 싸우자는 말이 아닌가. 안테로는 자기가 아는 모든 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 말까지 포함해서! 내 약혼녀와 내게 행한 무례는 결코 이대로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노기에 가득 찬 그 말에 대꾸한 것은 다름 아닌 메르디에스 공녀였다.

    “전하, 그 무슨 말씀입니까? 왜 제 일에 전하께서 나서십니까?”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몸을 돌려 그녀와 얼굴을 마주한 카이엔이 절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가 지금 오해로 화가 많이 난 것은 알아. 하지만 정말 위험할 뻔했어. 나는 그대가 잘못되는 줄 알고…….”

    한숨과 함께 제 얼굴을 쓸어내린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리아드네, 나는 그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전하, 절 걱정하셨습니까?”

    아리아드네는 카이엔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카이엔이 두른 붉은 망토를 고정한 사파이어가 손에 걸렸다. 이 사파이어는 언젠가 아리아드네가 카이엔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당연하지. 그대는 내 목숨보다도…….”

    아리아드네가 그의 어깨에 얹어진 손에 힘을 주자 사파이어 브로치가 카이엔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날카로운 고통에 카이엔은 조금 전 자신이 한 행동을 떠올렸다.

    “절 위협하고, 제게 무례하게 군 건―”

    아리아드네가 조금 전 카이엔이 틀어쥐었던 제 어깨를 툭툭 쓸어내리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전하이십니다.”

    “내게 서운한 것이 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건 오해야. 내가 전부 설명할 수―”

    아리아드네의 칼날 같은 목소리가 카이엔의 말을 잘랐다.

    “제 사람들을 빼돌려 전하의 눈과 귀로 삼은 것이 오해입니까? 아니면 마음이 떠났다는 제게 뜻대로 되지 않을 거라 협박하던 것이 오해입니까?”

    도무지 틈을 주지 않는 아리아드네의 태도에 카이엔의 턱 언저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대가 겪은 이 무례를 그대로 보아 넘길 수는 없어. 이 일은 내가 책임지고…….”

    아리아드네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대체 그가 뭐라고 자신이 겪은 무례를 보아 넘기니 마니 참견이란 말인가.

    “설사 제게 무례를 저지른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당사자인 제가 되겠지요. 제가 겪은 무례를 전하께서 해결하겠노라 나서시는 것은―”

    아리아드네의 부친 레너드가 죽은 직후, 메르디에스를 공격한 것은 아리아드네의 이름을 빌린 카이엔이었다. 그때도 카이엔은 아리아드네의 정당한 권리를 대신하는 것이라 말했다.

    “제게 무례한 행동이십니다.”

    대체 누가 누구를 대신한단 말인가.

    “지금 제게 무례한 건 바로 전하이십니다.”

    아리아드네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그런 권리를 이양한 적이 없었다.

    아리아드네가 서늘한 눈으로 카이엔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냉기 서린 푸른 눈동자는 카이엔을 담고도 조금도 녹을 줄을 몰랐다.

    카이엔은 그제야 아리아드네가 자신과의 모든 것을 끝낼 작정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더는 평정을 가장할 수도 없었다.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져 나왔다.

    “정말 이대로 나와 끝내기라도 할 셈인가?”

    “몇 번이나 더 같은 대답을 들어야 만족하시겠습니까?”

    차가운 눈빛이 자신을 찌를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과 염려를 가장한 무시도, 마땅한 권리에서 밀려나는 일도, 그저 자리를 채우는 허수아비 왕자 취급에도 익숙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가 자신을 밀어내는 일만큼은 도저히 익숙할 수 없었다. 그녀만큼은 자신에게 그럴 수 없었다.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요. 전하와 끝내고 싶어졌다고.”

    “아니, 난 그럴 수 없어.”

    아리아드네가 카이엔을 생각하는 만큼은 아니라도, 카이엔이 아리아드네에게 보인 마음 모두가 거짓인 건 아니었다. 모든 일이 끝난 뒤에도 아리아드네만큼은 살려 줄 생각이었다. 그러니 아리아드네가 자신에게 이래서는 안 되었다.

    “저는 지금부터 모든 걸 되돌릴 겁니다. 전하께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겁니다.”

    아리아드네는 이젠 카이엔에게서 죽은 이들을 살리는 것만으론 만족할 수 없었다. 그가 원하고 바랐던 그 모든 것을 산산이 무너뜨리고 싶었다.

    “아니, 나는 아무것도 놓지 않을 거고 내가 원한 모든 걸 갖게 되겠지. 당신까지도.”

    아니, 카이엔은 원하는 모든 것을 잃어야 했다. 아리아드네도, 권력도, 제 생명도, 그리고 페렌트의 왕좌까지도.

    “오늘은 이만 돌아가지.”

    카이엔의 붉은 망토가 아리아드네의 망막에 선명히 맺혔다가 점점 멀어졌다.

    “아리아드네 님!”

    줄리가 아리아드네를 다급히 부르며 다가와 휘청이는 그녀를 부축했다. 카이엔이 완전히 사라지자 긴장이 풀린 아리아드네가 줄리에게 몸을 의지한 채 자리에 앉았다.

    “아, 몸이 편찮으시면 이만 물러갈까요?”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기세에 이 자리를 벗어날 기회만 엿보던 안테로가 냉큼 말했다. 하지만 안테로의 말에 아리아드네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유진이 털썩 자리에 앉았다.

    “손님께 소란스러운 모습을 보여 드려 죄송합니다. 별관에 머무르신단 말은 들었는데, 시끄러운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하셨던지라.”

    아리아드네가 산산이 조각난 응접실 유리문을 힐끗 보며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안테로는 앉지도 서지도 못한 어정쩡한 자세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 네. 그랬죠. 그런데…….”

    안테로가 도착했을 땐 이미 유리가 박살 난 다음이었다. 이전 상황을 모르니 뭐라 변명을 할 것도 없었다.

    ‘아, 용건이 끝나셨으면 브르노 수도원에 동행할 수 있을까 하여 근처에 왔던 것이 실수였나. 아니, 내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인가.’

    유진은 여전히 이 상황을 수습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안테로의 속만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페르메 유리가―”

    “네? 페르메라니요? 설마 저기 저 산산이 조각난 저것이 페르메 유리란 말씀이신가요?”

    안테로가 뻥 뚫린 응접실 한쪽 벽을 가리키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저만한 크기의 페르메 유리라면 보통 귀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부순 유진이나 지켜본 아리아드네나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메 유리의 강도가 약하지 않은데 이렇듯 간단히 부서뜨린 것이 신기하네요. 손에 든 그것이 풀멘인가요?”

    아리아드네가 그렇게 말하며 유진의 손에 들린 늘씬하게 빠진 검은 물체를 바라보았다. 풀멘은 유진이 나타날 때부터 본디 지니고 있었던 성물로,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불을 내뿜는 파괴의 성물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아리아드네의 시선에 안테로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 그러니까 많이 놀라셨죠? 그 배상은 저희 쪽에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드려야죠. 도움을 받은 건 전데요. 유리 좀 깨진 게 별일인가요.”

    물론 페르메 유리가 웬만한 보석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귀한 것이긴 했지만.

    아리아드네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받아 둬. 내 마음이 불편하니까.”

    내내 조용하던 유진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도와주신 분께 배상을 요구할 정도로 가난하진 않아서요.”

    “…….”

    “정 불편하시면 잠시 산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러든지.”

    고개를 끄덕인 유진이 풀멘을 손가락에 걸고는 한 바퀴 휙 돌리자 검은 물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까 돌려줄 것이 있다고 하신 건…….”

    안테로가 주위 눈치를 살피며 유진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안테로의 말에 유진이 가슴팍에서 흰 천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이거. 어제 떨어트리고 간 것 같아서.”

    유진이 올려놓은 물건은 보라색 붓꽃이 곱게 수놓아진 흰 손수건이었다. 바밀레 자작가의 영애가 바람결에 놓쳤던. 아리아드네는 손수건을 들어 잠시 살피고는 다시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아, 헛걸음하셨네요. 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물건의 주인을 알고 있으니 대신 전해 드릴까요?”

    아리아드네의 물음에도 유진은 아무런 대답 없이 손수건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니, 내가 돌려주려 했던 사람은 당신이었으니까. 아니라면 됐어.”

    그렇게 말한 유진은 손수건을 다시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글레나, 따라올 필요 없어요.”

    아리아드네가 주위 사람을 모두 물린 채 유진을 따라 일어섰다.

    두 사람은 산산이 조각난 유리문을 지나쳐 산호 정원으로 나왔다. 잘 가꾼 흙과 풀이 푹신하게 깔린 정원으로 들어서자 풀 향이 폐에 가득 들어찼다.

    “어제는…….”

    무언가를 말할 듯이 입을 열었던 남자는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어제는?”

    그의 말을 그대로 받은 아리아드네가 되물었지만 유진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저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 손수건이 내 것인 줄 알았다는 건 역시…….’

    어제 그 호숫가에 유진도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과거에도 유진은 그 자리에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을까. 카이엔이 자신에게 청혼하던 그 순간에.

    아리아드네와 유진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여름의 햇볕만이 제 존재를 드러내려는 듯 따갑게 내리쬐었다. 어딘가 복잡한 얼굴을 한 유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정말 산책이나 하자고 사람을 따로 부른 건 아닐 테고.”

    그의 낮은 한숨 소리가 마치 쓸려나갈 때를 놓친 파도처럼 느껴졌다. 그는 귀찮은 일을 어서 해치우고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유진을 그렇게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것보다 우리 초면이지 않나요?”

    뜬금없는 말에 유진이 무슨 뜻이냐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렇게 편하게 말할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이어지는 아리아드네의 말에 유진이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난 원래 이따위로 생겨 먹었어. 내가 있던 곳은 죽고, 죽이는 게 일상이라서 죽을 놈들끼리 예의 같은 거나 차릴 새가 없었거든.”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 그가 덧붙였다.

    “그러니까 당신도 당신 좋을 대로 해. 나는 나 좋을 대로 하는 거니까. 어차피 나는 규격 외 존재 같은 거잖아.”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이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원하기만 한다면 이 세계의 신으로 군림할 수도 있는 남자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그래, 그럼 그러지 뭐.”

    아리아드네는 두 번 생각 않고 냉큼 유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유진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빈말이었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가 턱 언저리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편한 대로 하라고 해도 다들 불편해하니까. 이렇게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말을 놓은 사람은 처음이라서.”

    그렇게 말하는 유진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조금 섞여 있었다. 낮게 울리는 저음이 듣기 좋았다. 내내 굳어 있던 얼굴이 슬쩍 풀어진 것도.

    “이계의 방문자이자 성물 카푸트의 참된 주인과 친분을 쌓을 기회가 생겼는데, 그걸 날려 버릴 이유가 없잖아?”

    아리아드네가 산산이 조각난 유리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마침 좋은 담보도 생겼으니까.”

    유진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내게 원하는 게 뭐야?”

    “아까 당신이 그랬잖아. 내 눈앞에서 그 남자를 치워 주겠다고.”

    “그 역겨운 붉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던 남자 말이군.”

    눈가를 살짝 찌푸린 유진이 이어서 말했다.

    “내 손은 빌리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치워 줄 필요는 없어. 그건 내 일이니까.”

    그가 해 줘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그런데 내 남은 인생에서 그 남자를 치우려면 당신이 필요해.”

    유진은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얼굴로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아까 그 남자는 페렌트의 1왕자 카이엔 케이루스, 현재 내 약혼자야. 그리고 나는 메르디에스 공가의 유일한 후계지. 왕가와 공가의 약혼이었으니, 이를 되돌리기 위해서는 그만한 이름이 있어야 해.”

    모든 일에는 책임이 따른다. 이 모든 건 거짓에 눈이 멀어 주위를 살피지 못한 제 잘못이었다.

    “그쪽에서 순순히 파혼에 응한다면 몰라도 그럴 리 없으니 카이엔을 파혼 협상 테이블에 앉히기 위해서는 그만한 지위가 필요해.”

    양자 모두가 파기를 원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을 경우, 양측의 이견을 조율할 중재자를 구해야 했다.

    케이루스 왕가와 메르디에스 공가의 파혼을 중재하려면 자국이나 타국의 항렬 높은 왕족이나, 한 나라의 수장과 동등하게 취급받는 성 상티모니아의 교황 정도는 되어야 했다.

    하지만 페렌트 내에는 마땅한 왕족이 없었고, 프레모 대륙 내의 다른 국가는 페렌트와의 국력 차이가 심해 이 일에 끼어들 수 없었다. 성 상티모니아의 교황, 그 교활한 호랑이를 설득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 그가 있었다. 성 상티모니아 최고의 성물 카푸트의 주인이자 이계의 방문자인 유진이. 그것은 마치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오직 당신만이 가능해.”

    유진이 산호의 방을 향해 고갯짓하며 물었다.

    “그게 저 유리 값인가?”

    “아니, 그러기엔 당신이 지나치게 비싸지.”

    이 땅에 존재하는 성물 중 가장 신에 가까운 힘을 지녔다는 카푸트를 제 몸에 지닌 남자였다.

    신에 가장 가까운 인간. 그런 남자를 얻는 데 돈으로 값을 치러야 한다면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황금을 갖다 바쳐도 부족하리라.

    “그렇다면 무엇으로 내 값을 치를 셈이지?”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유진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당신이 내 파혼의 중재자가 되어 준다면 메르디에스가 가진 성물을 보여 주지. 어때?”

    유진의 회색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이계의 방문자이자 성 상티모니아 최고의 성물 카푸트의 주인인 그가 성물을 찾아다닌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그는 성 상티모니아가 소유한 성물을 시작으로 성물이 있는 곳이라면 전 세계 각지를 가리지 않고 헤매고 다녔다. 그런 그가 성 상티모니아의 위세를 등에 업고도 아직 보지 못한 성물이 남아 있었다.

    페렌트의 다섯 가문이 지닌 성물이 그것이었다. 프레모 대륙의 패자(霸者) 페렌트를 지배하는 다섯 가문은 각각의 이름에 걸맞은 성물을 가지고 있었다.

    천공의 케이루스는 천문(天文)을 읽을 수 있다는 별의 그릇을, 풍요의 메르디에스는 마르지 않는 부를 준다는 무량의 돌을, 창명의 리카서스는 바다를 지배하는 무렉스의 호른을, 수호의 소르체는 죽음을 막아 준다는 백자(白者)의 피를, 심판의 리뮈르는 죄를 비추는 심연의 눈을 지니고 있었고, 각각의 성물은 다섯 가문이 페렌트를 지배하는 근간이었다.

    아리아드네가 기억하는 그는 다섯 가문이 지닌 성물을 보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하지만 페렌트의 다섯 가문은 각각의 가문이 성 상티모니아와 너끈히 그 위세를 겨루고도 남았다. 그가 가진 지위와 위치로 굴복시킬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유진은 다섯 가문의 성물을 보기 위해 제법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리고 난 당신이 다른 가문의 성물을 보는 것도 도울 수 있어.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하지만 아리아드네의 도움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녀는 유진이 다섯 가문의 성물을 보는 과정을 이미 경험한 다음이었으니까.

    유진이 성물을 보고자 하는 이유를 모르니 여우를 잡자고 범을 끌어들이는 일이 될지도 몰랐다. 그렇더라도 그를 얻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값은 치러야 하리라. 그리고 그는 결코 이 조건을 외면할 수 없으리라.

    아리아드네는 그렇게 자신했다. 여자가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잡아.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메르디에스가 구하지 못할 것이란 없어.”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유진만 제 편이 되어 준다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었다. 그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유진이 묵직한 발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유진이 지나온 자리는 신발 자국대로 흔적이 남았다.

    아리아드네와 마주 보고 선 유진이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가 맞잡은 손을 살피듯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이 손을 잡으면 케이루스의 성물은 포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

    “선택은 당신 몫이지. 하나와 넷. 나는 후자를 권하고 싶은데.”

    “내가 찾는 게 무엇인 줄 알고? 내게 필요한 쪽이 ‘하나’라면?”

    “그럼 그것도 당신 품에 안겨 주지. 당신만 내 편이 되어 준다면.”

    자신만만한 대답에 유진이 단단히 맞잡은 손을 풀어냈다. 체온이 사라진 자리에 서늘한 공기가 닿았다.

    “이곳에 관해서 아는 건 별로 없지만, 페렌트의 버려진 왕자를 사랑한 왕국 제일가는 부호의 외동딸 이야기는 나도 들었을 정돈데.”

    순간의 적막 뒤에 이어진 것은.

    “왜 파혼하려 하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조금 전 상황을 모두 목격한 남자에게 설명이 더 필요하던가.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들어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 질문을 던진 남자의 회색빛 눈동자는 고요하기만 했다. 기묘한 침묵이 둘 사이를 흘렀다.

    “사랑이 끝났으니까.”

    아리아드네조차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대답이 툭 하고 떨어졌다. 말라비틀어져 형체조차 남지 않은, 하지만 그 언젠가의 진심이었던 마음 한 조각이.

    그리고 그 대답을 끝으로 미련조차 남지 않았던 마음이 다시금 뚝 끊어졌다. 카이엔을 떠올릴 때면 오직 들끓는 증오만이 가슴 속을 굴러다녔다.

    “그래서 그 남자와 파혼하면 그다음은?”

    남자가 다시 물었다. 아리아드네의 시선에 남자가 한쪽 입꼬리를 슬쩍 끌어당겼다. 입꼬리를 끌어당긴 것만으로도 남자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내가 필요하다며. 날 손에 쥐려면 이 정도 성의는 보여야 하지 않나?”

    성의를 보이라는 그는 어떤 성의도 필요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땅의 누가 저 남자를 붙들어 둘 수 있을까.

    “파혼은 파혼일 뿐이야. 내 인생에서 그 남자가 없었던 때로 되돌리기 위한.”

    “그런가? 인생이란 게 돌이킬 수 있는 거던가.”

    “…….”

    남자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중얼거린 그 말에 아리아드네의 가슴이 콱 막혔다.

    “내 인생에서 그 남자만 사라지는 거야. 나는 예정대로 메르디에스를 이어받을 거고…….”

    콱 막힌 것이 목구멍까지 틀어막았다. 카이엔을 만나기 전 아리아드네는 자신의 미래를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메르디에스의 다음 주인. 그것이 자신의 미래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리아드네의 가장 가까운 미래는 여전히 메르디에스의 다음 주인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의 인생에서 그 남자를 지우기만 하면 그걸로 모든 것이 끝일까.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뭘 하고 싶은 거지?’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카이엔으로부터, 케이루스로부터, 그 모든 것들로부터, 내 사람들을, 메르디에스를 지키고 싶어.’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그리고 제가 겪은 고통과 절망을 카이엔에게 모조리 되돌려주고 싶었다. 그가 가장 가지고 싶어 했던 것을 제 손에 넣고 그를 조롱하고 싶었다.

    “그럼?”

    남자의 물음은 아리아드네의 영혼 깊은 곳을 가차 없이 찔렀다. 분노와 절망을 먹고 자란 복수심이 바람을 타고 나르는 불씨처럼 그녀의 속을 태웠다.

    “나는, 나는…….”

    무심결에 제 영혼 밑바닥까지 득득 긁어내 유진에게 갖다 바칠 뻔한 아리아드네가 서늘한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당신이 내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면 나와 함께 메르디에스로 가. 메르디에스가 가진 성물을 보여 줄 테니까. 하지만 고민할 시간은 길지 않아. 사흘 뒤, 내가 이곳을 떠나기 전까지 결정해 줬으면 좋겠어.”

    남자의 까만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 그림자에 먹히기라도 할까 봐 아리아드네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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