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48)

* * *

새까만 어둠 속에서 남자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몸을 감싸 안았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곧 괴물이 나타나면 끝없이 반복되는 이 악몽도 잠시나마 끝이었다.

‘악몽? 아, 그래. 악몽…….’

이것은 악몽이었다. 그리고 남자에게 남은 유일한 과거의 흔적이었다. 최초의 기억보다도 오래된. 하지만 악몽이라는 것을 알아도 이 꿈이 끝날 때까지는 결코 깨어날 수 없다.

새까만 어둠 속으로 찬란한 금빛이 비쳤다. 마치 저주와도 같은 빛이.

‘……도, 망 가. 어서.’

희미한 목소리가 남자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온몸이 사슬에 묶인 것처럼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쿵쿵, 대지가 울리는 듯한 소리가 점차 그에게로 다가왔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눈이 멀 정도로 환한 빛이 쏟아졌다.

이윽고 남자는 천천히 그 빛에 먹혀들었다. 다리가 먹히고, 몸통이 먹히고, 머리가 먹혔다.

아, 드디어 끝이다. 악몽은 끝났다.

감은 눈을 뜨자 새하얀 대리석 천장이 보였다. 창밖으로는 그림 같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눈이 닿는 곳마다 찬란한 색으로 빛나는 세상이었다.

온통 잿빛이었던 제 세상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래, 이곳은 다른 세계였다.

남자는 새까만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침대 옆에 놓인 물잔을 들었다. 잔에 든 물을 단숨에 들이켜자 그나마 정신이 들었다.

찬물이라도 좀 맞으면 정신이 들겠지. 몸을 일으킨 남자가 욕실로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젖은 머리카락을 털며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남자는 제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기를 보며 조소를 흘렸다. 이런 쓸데없는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이상한 존재가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침대 위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그가 왼손을 뻗자 황금을 녹여 공기 중에 들이부은 것처럼 찬란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곧 빛이 서서히 잦아들자 그의 왼손 위에는 구(球) 모양의 물체가 둥실 떠올랐다. 그가 왼손을 움직일 때마다 그 물체도 손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가만히 그것을 지켜보던 그가 오른손으로 둥근 물체를 움켜쥐었다.

그대로 내던지기라도 할 것처럼 둥근 물체를 움켜쥔 팔을 크게 치켜든 순간이었다.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빼꼼 열렸다.

“방문자님, 일어나셨습니까? 오늘은 브르노 수도원의 성물을 보실…… 히이이익!”

안테로 주교가 남자의 손에 들린 물체를 보며 하얗게 질린 채로 온몸을 벌벌 떨었다.

“방, 방문자님, 왜, 왜 이러십니까! 카, 카푸트는 성 상티모니아 최고의 성물입니다. 그것을 그렇게 다루시면…….”

카푸트는 주교인 안테로조차도 직접 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성 상티모니아 최고의 성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성물을 길거리의 돌멩이처럼 다루다니…….

“이것의 참된 주인이 나라며? 성 상티모니아 유일의 성녀가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남자가 손에 들린 카푸트를 빙그르르 한 바퀴 돌렸다. 카푸트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라도 할까 봐 안테로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그건 맞지만…….”

“잠깐 꺼내 봤던 것뿐이야.”

호들갑은. 어깨를 으쓱한 남자가 주먹을 가볍게 말아 쥐자 허공에 둥실 떠올랐던 카푸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카푸트가 있던 자리에는 금빛이 실처럼 너울거리다 천천히 사라졌다. 남자는 카푸트가 남긴 금빛이 마치 제 몸을 칭칭 휘감는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답답한 기분이 들어 그는 괜스레 아무것도 남지 않은 어깨며 가슴께를 털어 댔다.

그러다 가슴께에 닿은 손에 걸리는 것이 있어 꺼내 보았더니 어제 그 여자가 놓고 간 손수건이었다. 그것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남자가 다시 손수건을 챙기며 말했다.

“브르노 수도원이라고 그랬나?”

“네. 이곳에서 반나절 거리에 있는 수도원으로 미리 연락을 해 뒀으니 보시는 데는―”

“저녁까지 이 방에 가져다 놔.”

그렇게 말한 남자가 긴 다리로 방을 성큼 가로질렀다.

“네? 어제만 해도 직접 가겠다고 하셨잖습니까? 아니, 그리고 가는 데만 반나절이 걸리는데 어떻게 저녁까지…….”

“못 하겠으면 말고.”

남자는 담백한 태도로 말했지만 안테로의 입장은 그게 아니었다. 윗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수행원이 어디 있단 말인가. 더구나 남자가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 더 부담이었다.

남자의 방문 소식에 잔뜩 기대하고 있을 브르노 수도원장도 문제였다. 남자의 방문을 빌미로 수도원장에게 이것저것 받아먹은 것은 더 문제였다. 안테로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대체 어디 가시는 겁니까?”

“주인이 오셨다는데 객의 도리로 인사 정도는 해야지.”

“주인? 아, 메르디에스…….”

안테로는 대체 언제부터 그런 예의를 차렸냐는 질문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 숨을 꾹 눌러 참았다.

“돌려줄 것도 있고.”

남자의 손에서 보라색 붓꽃이 수놓인 하얀 손수건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 * *

메르디에스의 여름 별장이 있는 란데르는 프레모 대륙 최남단에 위치한 휴양 도시였다. 란데르는 일 년 내내 기후가 온화하고 포미스해(海)의 아름다운 경치가 그림처럼 펼쳐진 곳이었다.

메르디에스의 여름 별장은 아름답기로 유명한 란데르에서도 풍광이 가장 탁월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산호의 방이라 불리는 1층 응접실에서 보는 풍경이 가장 아름다웠다.

산호의 방은 한쪽 면이 통째로 페르메 유리로 마감되어 유리문을 열어젖히면 응접실이 그대로 정원 일부가 되는 구조였다.

실내에서도 닫힌 유리 너머로 쪽빛 바다에 둘러싸인 란데르의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아리아드네는 눈이 아릴 정도로 푸른빛의 바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카이엔과 함께 이곳에 오겠다 마음먹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풍경이기도 했다.

그토록 고대했던 풍경은 기대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제 마음은 그때와 같은 것이 조금도 없는데.

“1왕자 전하와 불편한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글레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날 이후로 카이엔은 어떻게든 아리아드네를 만나려 했으나, 아리아드네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모두 거절했다.

“불편한 일이라…….”

아리아드네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끔찍한 일들을 고작 불편한 일이라고 칭할 수는 없었다.

“줄리, 뜨거운 차 한 잔 부탁해.”

아리아드네의 말에 시녀인 줄리가 뜨겁게 끓인 차를 찻잔에 따랐다. 아리아드네는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차를 천천히 비운 뒤 입을 열었다.

“그동안 사방이 거울로 된 방에 갇혀 있었던 기분이에요. 밖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가 보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았어요.”

보여 주는 것만 비추는 거울을 들여다보고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했다. 거울이 와장창 깨지고, 깨진 거울 조각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고서야 알았다. 제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글레나, 1왕자가 제게 접근한 목적이 뭘까요?”

카이엔이 정말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도.

“네? 그거야…….”

늘 단호한 글레나가 좀처럼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왕의 적장자이면서도 세력이 약해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왕이 되지 못할 왕자.”

1왕자 카이엔은 페렌트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아로스 왕족의 혈통이었다. 그에 비해 2왕자 루안은 페렌트의 근간인 다섯 가문 중 하나인 리카서스의 혈통.

더구나 선왕 크리스티안을 폐위시키고 현(現) 왕을 올리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 다섯 가문 중 하나인 바다의 지배자, 창명(滄溟)의 리카서스였다.

리카서스와 재혼한 현 왕은 리카서스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꼭두각시인 왕은 제 아들을 지킬 힘이 없었다.

“필요했겠죠. 리카서스에 대항해 자신의 방패가 되어 주고 세력을 규합해 줄 만한 누군가가.”

리카서스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많지 않다.

원래도 폐쇄적이었던 소르체는 200년 전, 왕위에서 내려온 뒤로 더욱 폐쇄적으로 변해 그 혈족들이 자신들의 영지 밖으로 나오는 일조차 드물 정도였다.

페렌트의 북방 경계를 지키는 리뮈르는 중앙 정계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뿐.

“1왕자에게 메르디에스는 선택이 아니었던 거죠. 그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왕가의 적장자인 자신이 리카서스의 위협을 피해 메르디에스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그 상황에서.

“그렇게 나와 메르디에스를 이용해 왕이 되고 나면 그다음에는 무슨 마음이 들까요?”

카이엔은 무슨 생각을 하며 그 시간을 보냈을까.

“죽을 뻔했던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준 메르디에스가 고마울까요? 아니면, 1왕자인 자신을 죽일 뻔했던 네 공가가 거추장스러울까요?”

다시는 이런 치욕을 겪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지 않았을까.

“공녀, 지금 하시는 말씀이 대체…….”

글레나의 눈이 경악으로 휘둥그레 벌어졌다.

“1왕자의 세력을 불리는 동안 가장 크게 힘을 키운 곳이 어디일까요?”

“그거야…….”

“케이루스. 그중에서도 1왕자를 지지하는 세력만을 골라 키웠죠.”

카이엔을 지지하는 케이루스 세력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운 것은 다름 아닌 메르디에스였다.

“너무 안이했어요. 리카서스를 무너트리고 나면 그다음 사냥감이 누가 될지도 모르고.”

아리아드네의 기억에서도 카이엔은 왕좌에 오르기 위해 리카서스를 제거했고, 왕좌에 오른 뒤에는 리뮈르와 메르디에스를 공격했다. 마지막 남은 소르체는 두 번째 왕비로 삼았으나 소르체의 여자가 무사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카이엔이 가장 바란 것은 자신의 사랑도, 살아남아 왕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케이루스의 왕좌를 흔들 수 있는 근간을 쳐부수고 제가 겪은 치욕을 되돌려주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그때그때 이해관계에 따라 다섯 가문이 서로의 손을 잡거나 등을 돌린 것은 처음 있는 일도 아닙니다. 우려하시는 바는 알겠으나…….”

혼란스러운 듯 뒷말을 흐린 글레나가 덧붙였다.

“아리아드네 님, 메르디에스는 페렌트를 받치는 다섯 기둥 중 하나입니다. 설사 그런 생각을 하는 자들이 있다 한들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아니, 메르디에스는 너무 쉽게 무너졌다. 그 모든 것을 기억하는 자신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물론 그래야죠.”

하지만 자신이 과거로 돌아온 이상, 그렇게 되진 않을 터였다.

“짐작만으로 하는 말이 아니에요. 1왕자가 정말 그럴 생각이라면 적지 않은 준비가 필요하겠죠. 줄리, 나 차 좀.”

“네? 네.”

글레나 못지않게 놀란 듯 멍하게 서 있던 줄리가 서둘러 차를 끓였다. 찻주전자에서는 푹푹 김이 올라왔다.

“시작은 내 주위 사람들부터 제 편으로 끌어들이는 거겠죠.”

카이엔의 손에 제 사람들이 죽기 시작한 건 그가 왕이 되고 불과 1년도 되지 않은 때였다. 메르디에스는 카이엔이 겨눈 칼날에 반년도 버티지 못하고 스러졌다.

그렇다는 건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카이엔이 그 모든 것을 준비했다는 뜻이었다.

“아리아드네 님! 그런 일은…….”

사용인들을 관리하는 글레나가 높아진 목소리로 항변했다.

“없어야 하죠. 하지만 어쩌면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요?”

메르디에스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을 의심하는 건 가슴 아픈 일이다.

“나를 위한 일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잖아요. 약혼 관계가 원만하게 이어지는 건 내게도 좋은 일일 거라고.”

글레나도, 이블린도, 줄리도. 모두 자신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사람이니까.

“어쩌면 그래서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몰라요.”

―아팠, 아팠다고 들었습니다. 늦어서, 내가 너무 늦게 와서 그래서, 서운해서 이러는 거라면.

“란데르로 내려온 내가 몸이 안 좋다던가.”

아리아드네가 란데르에서 쓰러졌었다는 걸 카이엔이 어떻게 알았을까.

“란데르 별관 뒤에 풍광 좋은 호수가 발견됐다던가.”

아리아드네가 그 말을 들은 것은 란데르로 내려오기도 전이었다. 과거에는 카이엔과 함께 그곳을 찾았다가 그에게서 청혼을 받았다.

“지금 호수에 갔다던가.”

아리아드네가 별관 뒤 숲에서 빠져나왔을 때, 카이엔은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그곳으로 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별관 뒤편에 풍광이 좋은 호수가 있대요. 글레나도 함께 가 보면 어때요?

글레나, 그리고…….

―아, 발이 좀 아픈 것 같아. 줄리, 넌 내 방으로 가서 좀 편한 신발을 가져다주렴.

“그렇지 않니? 줄리.”

신발을 가지러 간 줄리는 그날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저, 저는…….”

파삭, 줄리가 놓친 찻주전자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김이 마치 아지랑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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