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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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아드네가 별관 뒤 숲에서 막 빠져나온 참이었다. 벌써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붉은색으로 물들어 가는 숲속의 풍경이 스산했다.

    아리아드네가 탑에 갇혀 살던 그때는 볼 것이 하늘밖에 없었다. 밝아지고, 어두워지고, 파래졌다 붉어지는 하늘을 보며 늘 카이엔을 생각했다. 노을에 물든 하늘을 보며 저 붉은색이 그의 피이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카이엔.”

    아리아드네는 노을이 내려 붉게 물든 눈앞의 남자가 마치 환상처럼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붉은 기가 도는 금발은 석양을 받아 불타는 것 같았고 차분한 갈색 눈동자마저 평소보다 붉게 보였다.

    “아리아드네.”

    자신을 발견한 그가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그를 처음 봤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 얼굴로.

    [카이엔 전하, 메르디에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메르디에스 공녀.]

    카이엔을 처음 마주하고는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처지에도 제법 단단한 얼굴을 하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 얼굴에 흥미가 동했다. 어쩌면 케이루스 왕가의 적장자이면서도, 결코 왕이 되지 못할 왕자에게 연민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1왕자 카이엔은 왕의 적장자이기는 했으나 페렌트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아로스 왕족의 혈통인 탓에 왕위 계승에서는 불리한 위치였다.

    세상을 가르는 바다 레니아해(海)가 양분하는 두 개의 대륙 중, 동쪽에 위치한 프레모 대륙. 프레모 대륙에 자리 잡은 몇 개의 나라 중 가장 큰 세력을 지닌 것은 단연 페렌트였다. 페렌트는 프레모 대륙에서 가장 비옥한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프레모의 패자(霸者) 페렌트를 지배하는 것은 신의 힘이 깃든 성물을 가진 다섯 가문이었다. 천공의 케이루스, 풍요의 메르디에스, 창명의 리카서스, 수호의 소르체, 심판의 리뮈르. 페렌트에서 이 다섯 가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200년 전만 해도 이 다섯 가문의 합의와 추대로 왕위 계승이 이루어졌고, 페렌트의 왕위는 어느 한 가문도 독식하지 못했다. 케이루스 가문의 왕이 7대째 이어진 지금에서도 다섯 가문의 합의와 추대라는 형식은 대관식 의례로나마 이어져 오고 있었다.

    케이루스가 왕가로 불리게 된 지금도 페렌트를 지배하는 것은 왕가 케이루스와 공가 메르디에스, 리카서스, 소르체, 리뮈르, 이 다섯 가문이었다. 오직 이 다섯 가문만이 가문의 이름으로 된 영지를 다스릴 수 있었다.

    메르디에스, 리카서스, 소르체, 리뮈르, 이 네 가문의 주인은 왕을 제외하고는 왕국에서 가장 고귀한 위치였으며, 각 가문의 구성원은 왕족에 버금가는 지위와 권력을 누렸다.

    그중에서도 페렌트의 비옥한 남부를 지배하는 것이 바로 메르디에스였다. 풍요의 메르디에스라는 칭호처럼 메르디에스는 비옥한 평야와 마르지 않는 광산을 가진, 왕국에서 제일가는 부를 거머쥔 가문이었다.

    아리아드네는 그런 메르디에스의 외동딸이자 다음 주인이었으니 곧 죽을지도 모를 세력 없는 왕자를 동정하기에는 충분했다. 그저 잠깐의 흥미로 끝났을 관계에 불을 붙인 것은 늘 단단한 가면을 두르고 있던 그가 내보인 갈기갈기 찢어진 속내.

    [갖지 못할 것에 욕심을 부린 적은 없었습니다. 삶조차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자꾸, 살고 싶어집니다. 차라리 당신을 알지 못했더라면 좋았을까요?]

    당신을 사랑하여 지금 내 처지가 비로소 불행해졌노라고.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떨리는 손끝에 그만 아리아드네는 마음 한구석이 무너져 내렸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것이 삶만이라면, 제 부군이 되어 살아남으시겠습니까?]

    아리아드네가 그렇게 물었을 때, 카이엔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을 알기 전이라면 그럴 수도 있었겠죠. 제 아비처럼 그렇게.]

    [전하의 왕좌를 위해서 메르디에스가 필요하십니까?]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 왕좌가 필요해진 겁니다.]

    경계하려 높이 쌓은 마음이 무너진 자리에 경계는 흔적조차 남지 않고, 자라난 애정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아버지, 당신의 딸이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아버지가, 메르디에스가 그 사람을 선택해 주세요.]

    그것이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 모든 불행을 만들어 낸 남자가 아직도 자신을 사랑하는 양 연기하고 있었다.

    “아리아드네, 어디를 다녀오는―”

    “이블린.”

    아리아드네는 자신에게 말을 거는 카이엔에게는 시선도 두지 않은 채 이블린을 불렀다.

    “줄리가 아직이구나. 발이 불편하니 네가 신발을 좀 가져오겠니?”

    아리아드네의 심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이블린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마침내 아리아드네의 시선이 카이엔에게 닿았다.

    이런 기다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그가 잡으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아리아드네가 나무토막을 보는 것처럼 무감한 눈빛으로 그 손을 바라보며 물었다.

    “전하, 제게 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십니까?”

    그 말을 끝으로 카이엔의 대답을 기다리는 아리아드네는 장난을 치는 것도, 서운해하거나, 화를 내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마치 불편한 타인을 대하는 얼굴이었다.

    카이엔은 낯선 아리아드네의 태도에 당황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귀찮다는 듯 낮게 한숨을 내쉰 아리아드네가 다시 물었다.

    “란데르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카이엔은 이번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덧붙였다.

    “메르디에스의 누군가가 전하를 초청했다는 말도, 전하께서 방문을 요청하셨다는 말도 전혀 들은 바가 없는데.”

    그 말 그대로였다. 란데르로 내려가 카이엔을 부르겠다던 아리아드네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이곳으로 달려온 참이었다.

    “이곳에서 함께 여름휴가를 보내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카이엔은 알 수 없는 불안함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랬던가요?”

    “그대, 대체―”

    “아, 보름도 전의 약속에 아직도 매여 계실 줄은 몰랐던 터라.”

    카이엔은 아리아드네에게서 매우 익숙한 것들을 발견했다. 싸늘한 눈빛, 조롱하는 듯한 표정, 멸시와 혐오. 그에게는 숨 쉬는 것만큼이나 익숙했으나, 아리아드네가 그럴 줄은 꿈에서조차 상상해 보지 못한 그러한 것들을.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이 못마땅합니까?”

    “전하, 보름이면 빈 달이 차고 찬 달이 빌 시간이지요. 채운 마음을 비우기에도 아주 충분한 시간이고요.”

    “아리아드네, 혹여 내가 그대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까? 그런 일이 있다면…….”

    그는 용서를 빌라면 빌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얼마든지 주겠다는 절절한 말을 준비했지만, 그것들은 채 꺼내 놓지도 못했다.

    “메르디에스의 딸이 변덕스럽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하셨나 봐요.”

    천진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그의 연인은 보름 전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는데.

    “……지금, 이러는 것이 고작 변덕 때문이라고.”

    그 입에서 내놓는 말은 어느 것 하나 보름 전과 같은 것이 없었다.

    카이엔이 고작 보름 전의 일을 떠올리는 동안, 아리아드네는 아주 오랜 시간을 곱씹었다.

    그와 처음 만난 것이 2년 전이고, 자신이 죽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3년 후이니 5년이라는 시간을 그와 함께 한 셈이었다.

    “2년이면 충분하지 않으셨나요? 아니면 아직도 부족하신가요?”

    [사랑? 그따위 너저분한 감정에 휩쓸리기에는 그대는 가진 게 너무 많았고, 나는 가져야 할 게 너무 많았지.]

    “사랑 같은 너저분한 감정을 대가로 제게서 가져가신 것들이.”

    그 긴 시간 동안 그가 제게서 빼앗아 간 모든 것들을.

    하얗게 질린 카이엔이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처럼 비척대며 아리아드네에게 다가왔다.

    “아팠, 아팠다고 들었습니다. 늦어서, 내가 너무 늦게 와서 그래서, 서운해서 이러는 거라면…….”

    그의 손가락이 물을 찾아 헤매는 마른 뿌리처럼 절박하게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놓으십시오.”

    그 말에 카이엔은 더욱더 억세게 아리아드네의 어깨를 틀어쥐었다. 이것을 놓치면 제 숨이 끊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나는 정말―”

    “놔.”

    이젠 헛소리까지 들렸다. 아니, 어쩌면 이제껏 들은 모든 것이 다 헛소리였던 건 아닐까. 카이엔은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지금 뭐라 했―”

    “이 손 놓으라고 하잖아!”

    아리아드네는 비명 같은 소리와 함께 카이엔이 쥔 손목을 거세게 뿌리쳤다. 카이엔은 제 뺨에서 따끔하는 통증과 함께 옅은 열감을 느꼈다. 카이엔의 팔을 뿌리치는 와중에 아리아드네의 손톱이 남긴 상처였다.

    그는 자신을 뿌리친 아리아드네가 숨을 헐떡이며 제게서 멀어지는 것을 그저 멍하니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다가섰다.

    “내가, 아직도 내가!”

    하지만 아리아드네가 붉게 충혈된 눈동자로 카이엔을 쏘아보며 내지르는 통에 더는 다가서지 못했다.

    끔찍했다.

    카이엔을 만나면 당장 죽이려 달려들지는 않을까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아리아드네는 그와 맞닥뜨리고도 차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평정은 눈앞의 카이엔이 지나치게 현실감이 없어서라는 것을 그에게 자신의 몸이 속박되고 나서야 알았다.

    그에게 어깨가 잡힌 그 순간, 카이엔은 비로소 실체를 가지고 아리아드네를 덮쳤다. 하루에 한 번 몸시중을 위해 들르는 눈이 먼 하녀를 제외하고는 간수들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는 감옥에 갇혀 지냈다.

    탑에 갇힌 동안 아리아드네가 마주한 사람이라고는 오직 카이엔뿐이었다. 카이엔은 아리아드네를 찾아와 오늘 죽인 혹은 내일 죽일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려 주고는 했다.

    아리아드네가 분노하고, 절망하고, 자신을 저주하는 것을 보며 그는 몹시 즐거워했다. 그녀의 절망과 분노는 카이엔의 가장 큰 양식이었다.

    아리아드네가 절망과 분노를 쏟아 낼 때마다 카이엔은 배부른 얼굴로 만족스럽게 웃었다.

    [부인,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아직도 부인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자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으니.]

    그가 제 사람들을 죽이고, 가문의 이름을 지우고, 메르디에스의 성을 불태우는 동안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갇혀서 울부짖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자신이 카이엔만큼이나 증오스러웠다. 그때의 끔찍했던 무력함은 아리아드네 안에 선명하게 각인된 채로 남아 있었다.

    ‘넌 내가, 아직도 내가, 사람으로 안 보이지. 그러니까 날 이따위로 대하는 거야. 네가 사랑을 베풀어 주면 속도 없이 내 모든 걸 내주고, 네가 절망을 주면 절망을 먹고, 네가 분노를 던져 주면 분노에 휩싸여 내 영혼을 태우는, 질리기 전까지 갖고 놀기 좋은 인형으로 보는 거야. 너한테 나는 사람인 적이 없었어.’

    아리아드네가 그 탑에서 가졌던 유일한 것인 분노조차도 카이엔이 던져 준 것에 불과했다.

    “아리아드네, 어디 가는…….”

    카이엔이 다시 가까워지며 아리아드네의 어깨를 쥐려 했으나, 아리아드네가 그 자리에서 주저앉는 바람에 카이엔의 손은 허공만 움켜잡았다.

    그대로 주저앉은 아리아드네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카이엔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망연히 그 모든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자리에서 겨우 몸을 일으킨 아리아드네는 카이엔으로부터 멀어지면서도 구역질이 멈추지 않는 듯 몇 번이나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멀어지는 아리아드네를 보는 카이엔의 손끝이 떨렸다.

    세력이 없는 왕자로 온갖 일을 다 겪은 카이엔으로서도 이런 멸시는 처음이었다. 혀끝에 칼을 문 치들의 숱한 조롱도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약혼녀가 자신을 보며 구역질하다니. 이런 모욕은 처음이었다.

    “하, 하하, 하하하…….”

    카이엔의 입에서는 허탈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보름 전만 해도 제 귓가에 달콤한 사랑을 속삭이던 여자였다. 그리고 자신을 보며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던 여자였다.

    이대로 놓기엔 여자는 아직도 제게 해 줘야 할 것이 많았다. 오직 저 여자만이 제게 이 세상을 줄 수 있었다.

    그의 약혼녀는 세상 모든 것을 제 발아래 둔 것처럼 늘 자신만만한 여자였다. 공가의 후계자 주제에 왕가의 적장자인 자신을 동정하고도 그것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여자는 언제 어디서나 자신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언제나 솔직했고, 어디서나 대범했다. 실수도 실패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는 대륙의 모든 부를 거머쥐었다는 메르디에스의 유일한 후계였으니까.

    사랑이 익숙한 여자는 사랑을 의심할 줄도 몰랐다.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을 당연하다 여겼다. 애정을 구걸하는 일 따윈 한 번도 해 보지 않았으니까.

    돈도, 사람도, 권력도 무엇이 필요하다 여긴 적도 없는 여자였다. 바라기도 전에 모든 것을 가졌으니까.

    한 번도 굶주려 보지 않은 여자는 결코 자신을 이길 수 없었다. 간절함이야말로 제가 가진 가장 큰 자산이 아니던가.

    카이엔은 석양빛에 붉게 물든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제 예상보다 좋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자신은 더 안 좋은 상황도 얼마든지 견뎌 왔다. 저 여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지옥 같은 시간을.

    자신이 버텨 낸 그 시간들이 존재하는 한 여자는 덫에 걸린 사냥감에 불과했다. 이제 와 발을 빼려 해 봤자 덫에 걸린 발만 잘릴 뿐이지.

    조소를 머금은 카이엔이 옷자락을 떨치며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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