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48)

* * *

[당신의 목숨으로 그 바람을 이루리라.]

정말 그 모든 것이 실재했던 일인가. 아리아드네는 아무것도 쥐지 않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제 손에 쥐고 있었던 뼛조각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 형태와 색깔, 손에 쥔 감촉까지도.

이렇듯 그날의 기억은 지나치게 생생한데, 새까만 어둠을 두르고 나타났던 그 남자의 존재만은 마치 또 다른 꿈을 꾸는 것처럼 희미해서 구체적인 형상을 떠올리기 힘들었다.

아리아드네는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움켜쥘 듯 손을 뻗었다가 이내 거두었다.

“공녀, 정말 괜찮으십니까?”

아리아드네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 저는 못 믿으셔도 코라는 믿으셔야죠. 코라가 그러는데, 제가 꾀병 부린 거래요.”

피식 웃으며 장난스레 말하는 아리아드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글레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메르디에스의 주치의 코라는 약과 병을 다루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소르체의 혈족이었다. 소르체의 혈족인 코라의 실력을 의심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 글레나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왕국의 남쪽을 다스리는 메르디에스 공가의 외동딸 아리아드네가 차를 마시다 정신을 잃고 혼절한 것이 열흘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혼절한 아리아드네가 정신을 차린 것은 하루가 꼬박 지난 다음이었다. 정신을 차린 아리아드네는 제게 일어난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쉽사리 결정하지 못했다.

미친 거라기에는 자신의 모든 이성이 너무 멀쩡했고, 그저 망상이나 꿈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생생했다.

그렇다고 그 기억을 전적으로 믿기에는 이미 치러 버린 약혼과 앞으로 해야 할 결혼에 서로가 엮인 것들이 너무 많았다.

시작은 분명 아리아드네의 욕심이었으나 이제는 메르디에스가 속한 싸움이었다. 무엇인지도 모를 제 기억만으로 이 모든 것을 당장 뒤엎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아리아드네는 지금 메르디에스 본성이 아니라 란데르의 여름 별장에 내려와 있는 상태였다. 아리아드네의 부친인 메르디에스 공작 레너드 또한 영지 시찰을 위해 본성을 비운 상태였고.

속단을 내리기에는 아직 일렀다. 물론 그 모든 것이 정말로 있었던 일이거나, 앞으로 있을 일이라면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전에 아리아드네의 기억이 그저 망상은 아닌지, 정말 믿을 만한 것인지 확인해야 했다.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그저 한 가지만 확인할 생각이었다.

하늘에 떠 있는 해의 위치를 가늠해 보니 지금이 적당했다. 제 기억이 망상이 아니라면 이 시기 란데르의 여름 별장에서는 분명…….

“줄리가 그러는데 별관 뒤편에 풍광이 좋은 호수가 있대요. 글레나도 함께 가 보면 어때요?”

아리아드네가 손가락으로 찻잔의 테두리를 훑어 내리며 물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래요, 그럼.”

아리아드네는 식은 차를 단숨에 비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리고 별관에 성 상티모니아에서 온 손님이 머무르고 있습니다.”

별관 쪽으로 향하는 아리아드네를 보며 글레나가 서둘러 덧붙였다.

“그 말은 어제도 했어요.”

아리아드네는 태연한 얼굴을 하고는 본관을 벗어나 별관을 향해 걸었다. 별관이 가까워질수록 아리아드네의 걸음이 빨라졌다. 아리아드네를 뒤따르던 시녀들도 덩달아 걸음을 서둘렀다.

별관 후원을 지나 잡풀이 무성하게 우거진 소로(小路) 앞에서 아리아드네는 걸음을 멈췄다.

“아, 발이 좀 아픈 것 같아. 줄리, 넌 내 방으로 가서 좀 편한 신발을 가져다주렴.”

그렇게 뒤따르던 시녀 중 한 명을 떼어놓은 아리아드네는 줄리라는 시녀가 멀어지자 그대로 숲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리아드네 님!”

“이블린, 너도 같이 보내지 않은 이유를 알고 있으면 아무 말 하지 말고 뒤따라와.”

줄리도, 이블린도 믿을 만한 아이들이지만 보는 눈과 말하는 입은 적을수록 좋았다. 아리아드네의 단호한 명에 눈치 빠른 이블린은 그대로 입을 닫고는 얌전히 뒤를 따랐다.

기억 속의 그때와는 달리 무성하게 난 나뭇가지와 풀을 정리해 주는 사람이 없어 온몸이 마구잡이로 쓸렸지만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숲 전체가 울리는 듯한 진동만이 가득했다. 제 심장이 뛰는 소리였다.

‘사실이 아니라면 변할 건 아무것도 없어. 난 당신을 왕으로 만들 거야.’

아리아드네는 제 기억 속의 미래에서 사라진 생명과 지워진 이름들을 기억했다. 그것들이 떠오를 때마다 불덩이가 가슴 속을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정말 있었던 일이라면, 정말 앞으로 일어날 일이라면, 그렇다면…….’

길이 넓어지는 곳부터는 드레스를 말아 쥐고는 뛰다시피 걸었다. 더운 날씨에 습기마저 가득한 숲속의 공기가 진득하게 들러붙었다.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구두와 닿은 발뒤축은 터지고 까져 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아리아드네 님, 대체…….”

이블린이 더는 참지 못하고 그렇게 물었을 때, 눈앞에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무성하게 우거진 잡풀과 나무들이 자리한 길 끝에 탁 트인 호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잔잔한 수면 위에서 부서지는 햇살이 물결을 따라 일렁였다. 그 위를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탄 자그마한 배 몇 척이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다.

호수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히던 이블린은 하늘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어머나, 세상에! 아리아드네 님, 좋은 일이 생기시려나 봐요. 보셨어…….”

하늘에 거꾸로 걸린 듯한 무지개가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호선을 그린 입술 같은 모양이라 하여 하늘의 미소라고도 불리는 현상이었다.

대단한 길조로 여겨지는 행운의 상징.

[그저 좋은 풍경을 함께 보고 싶었을 뿐인데, 뜻하지 않은 행운까지 얻었습니다.]

별관 뒤에 호수가 있다는 줄리의 말에 카이엔과 함께 나섰다가 보게 된 그날과 똑같은 광경이 아리아드네의 눈앞에 보란 듯이 펼쳐져 있었다. 그 대단한 길조가 마치 아리아드네의 운명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늘에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당신과 있으면 평생에 얻지 못했던 행운들이 쏟아지는 것 같습니다. 다시금 청하건대, 저와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카이엔이 자신에게 사랑을 맹세하던 그날처럼.

“어머!”

그때, 호수를 바라보고 있던 이블린이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나들이용 배에서 데이트를 즐기던 연인이 하늘에 걸린 무지개를 보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이었다. 배가 기우뚱 흔들리는가 싶더니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큰 물보라가 일었다.

“아, 다행이다.”

이블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빠진 건 사람이 아니었다. 남자가 균형을 잃으며 놓친 노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호수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다행? 다행인가?’

아리아드네는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하늘에 거꾸로 걸린 무지개, 무지개를 보려다가 노를 놓치고 만 남자.

‘내 기억 속의 일들이 그대로 재현된 것이 다행인가? 그 끔찍한 기억이 모두 사실이라서? 아니면, 아직 마지막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다행인가? 그 기억들이 사실이 아니라고 도망갈 구석이 남아서?’

아니, 아리아드네는 비로소 깨달았다. 오늘 자신이 그토록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들어 조금 전 노를 놓친 연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물보라를 뒤집어쓴 여자가 제 얼굴을 닦으려는 듯 흰 손수건을 꺼냈다. 그것을 지켜보던 아리아드네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밀레.”

“네?”

이블린이 무슨 뜻인지 몰라 되물은 그때였다. 호수 저편에서 불어온 바람이 여자의 손에서 손수건을 빼앗았다. 손수건은 팔랑대며 날아와 아리아드네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얼마 가지 못하고 나뭇가지에 걸린 손수건은 땅 위로 떨어졌다. 고개를 갸웃대며 땅 위에 떨어진 손수건을 주운 이블린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이렇게 멀리서 어떻게 아셨어요? 바밀레 영애인걸.”

여자가 놓친 손수건에는 보라색 붓꽃이 곱게 수놓아져 있었다. 바밀레 자작가의 문장이었다.

[바밀레가 무엄하게도 전하 위에 앉았군요.]

과거에는 저 손수건이 카이엔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아리아드네가 손을 내밀자 이블린이 곱게 접은 손수건을 그 손에 들려 주었다. 제 눈으로 손수건에 수놓아진 보라색 붓꽃을 직접 확인하자 제 속의 기억들이 헝클어진 채로 싹둑 잘려 나가는 듯했다.

[사냥이 끝나고 끓어오르는 솥에 던져진 개가 된 기분이 어떠신가.]

쇠에 긁힌 못처럼 날카롭고 거친 소리가 고요하던 호숫가의 적막을 산산이 깨트렸다. 아리아드네의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던 분노가 폭발하듯이 터져 나왔다.

카이엔, 카이엔, 카이엔. 저주와도 같은 그 이름은 알아듣지 못할 절규가 되어 흘러넘쳤다.

분노로 덜덜 떨리는 두 손을 얼굴에 묻었다. 언제 흘린 건지도 모를 눈물이 두 손 가득 묻어났다. 지독한 세월을 보내며 눈물마저 말랐다고 생각했다. 울어도 달라질 것은 없었으니까.

아리아드네는 자신의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동안 분노를 차갑게 쌓아 올리는 방법을 배웠다. 그렇게 쌓고, 쌓고, 쌓아 두었던 분노와 절망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아리아드네는 이 모든 것을 제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자신이 그토록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았다.

자신의 기억을 증명해 줄 실체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제 분노의 정당함. 제 복수의 마땅함.

오늘 이 자리에서 과거와 같은 풍경을 보지 못했더라도 제 분노와 복수에 마땅한 이유를 마련해 주기 전까지 자신은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아리아드네가 그것들을 기억하는 한 이미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었다. 이곳에 오기도 전에.

“아리아드네 님…….”

이블린이 깨어지는 유리 조각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아리아드네를 불렀다.

[비 전하, 아리아드네 님! 아리아드네 님, 부디 보중…….]

카이엔의 기사들에게 흙발로 짓밟히면서도 아리아드네를 걱정하던 이블린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시킨 말도 전달하지 못하는 혀가 더 필요하던가.]

자신의 뜻에 굴종하라는 서신을 메르디에스에 보내라는 카이엔의 요구가 있은 날이었다.

아리아드네의 거부에 이블린은 혀가 잘렸다. 혀가 잘려 피를 뚝뚝 흘리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끌려 나간 이블린이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도 아리아드네는 알지 못했다.

앞으로 아리아드네의 세상에 펼쳐진 길은 외길이었다. 돌아온 삶에 이유가 있다면 오직 이것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정말 있었던 일이라면, 정말 앞으로 일어날 일이라면, 그렇다면…….’

아리아드네는 피를 삼키는 기분으로 숨을 삼켰다.

‘이번엔 내가 당신의 목을 가져와야지.’

그렇게 돌아서는 아리아드네의 머리 위로 거꾸로 걸린 무지개가 마치 관(冠)처럼 빛나고 있었다.

* * *

바스락, 무성하게 잎이 돋아난 나무들 사이에서 신관복을 입은 사제 하나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나타났다. 사제의 이름은 안테로, 그는 성 상티모니아의 주교였다.

성 상티모니아는 프레모 대륙을 호령하는 종교였고, 주교는 추기경 바로 다음 직급이었으니 성 상티모니아의 주교라 하면 어디에서나 대접받는 신분이었다.

‘어휴, 내 신세야. 내가 어쩌다…….’

그는 아리아드네가 버리고 간 손수건을 주워 다시 나무 뒤로 숨었다. 그곳에는 또 다른 남자가 나무 그늘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여기 가져왔습니다.”

안테로가 손수건을 든 손을 내밀며 남자를 힐끗 살폈다. 언제 보아도 주위 풍경과 참 어울리지 않는 남자였다. 남자를 볼 때면 마치 다른 화가의 그림을 나란히 잘라 붙인 것 같은 이질감이 들었다.

목덜미에서 아무렇게나 자른 듯한 새까만 머리카락과 창백한 느낌이 드는 흰 피부, 회색빛의 특이한 눈동자와 서늘하고 날카로운 눈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남자를 둘러싼 분위기였다. 섬세한 생김새와는 다른 거칠고 사나운 분위기가 남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했다.

남자가 안테로가 내민 손수건을 받아 들며 말했다.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남자는 눈물 자국이 남은 하얀 손수건을 한참이고 들여다보더니 이윽고 그것을 제 품에 챙겼다.

“조금 전 그 여자는 누구지?”

남자의 물음에 안테로는 굳은 얼굴로 땀을 흘렸다. 성 상티모니아 밖으로 나온 것은 자신도 이번이 겨우 세 번째였다.

“그, 그것이 저도 잘…….”

“…….”

말없이 저를 바라보는 남자의 서늘한 눈빛에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처럼 조여 왔다. 갑자기 나타나서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울다 사라진 여자의 정체를 제가 무슨 수로 안단 말인가.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이 파악한 것이라곤 그 여자가 대단한 미인이라는 것과 시녀가 부르는 이름 정도였다.

‘이름? 분명 시녀가 그 여자를 부르기를…….’

“아, 아리아드네!”

간신히 여자의 이름을 떠올린 안테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아드네라면 이곳의 주인인 메르디에스의 딸일 겁니다.”

“메르디에스의 딸이라…….”

“네, 페렌트의 다섯 가문 중 하나인 그 메르디에스입니다. 세상의 모든 황금은 메르디에스를 통해 들고 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지요.”

“…….”

안테로는 아무런 대답이 없는 남자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남자는 메르디에스의 딸이 사라진 자리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그만 돌아가지.”

두 사람마저 사라지자 고요한 적막으로 둘러싸인 숲에는 붉은 석양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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