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48)
  • 1. Time Is the Herald of Truth

    한층 짙어진 녹음이 제 빛을 뽐내고 있었다. 온갖 기묘한 꽃들로 가득한 정원에는 테이블을 두고 마주한 두 여자가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화려한 디저트에는 손을 댄 흔적조차 없었다.

    “부인께서는 아직도 이 약혼이 우리에게 해가 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메르디에스 공가의 외동딸 아리아드네가 새파란 눈동자를 느릿하게 뜨며 물었다. 그녀의 선명한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오만함이 깃들어 있었다.

    한 번도 굴종을 경험해 보지 못한 당당함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곧기는 하나 어딘가 느슨한 자세와 모든 것을 가진 듯한 여유.

    그 모든 것이 갓 스물을 넘긴 영애가 내보이기엔 과한 감이 있었으나, 그녀는 왕국의 남부를 지배하는 메르디에스의 유일한 후계였다.

    프레모 대륙의 모든 돈이 들고 난다는 가문, 메르디에스의 외동딸답게 그녀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제 몸에 두르고 있었다. 드레스를 장식한 보석조차도 보통이라면 가문의 보물로 여겨도 부족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제 몸을 치장한 것 중 가장 아끼는 것은 값비싼 드레스도, 귀한 보석도 아니었다. 옅은 금빛으로 빛나는 제 머리카락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진귀한 보석을 모두 가지고도 제 머리카락이 가장 마음에 든다는 그녀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아름답기도 했거니와 그 말을 한 이가 아리아드네 메르디에스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토록 아끼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가벼이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해.’

    아리아드네가 1왕자 카이엔과 약혼한 지도 반년이나 지났건만 눈앞의 부인은 아직도 둘의 결합을 탐탁지 않아 했다.

    답답한 속을 달래려 아리아드네는 테이블 위의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절반쯤 비운 찻잔을 테이블 위에 놓으려 했지만, 찻잔은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찻잔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마치 물에 잠긴 것처럼 현실감 없이 귀를 스쳐 지나갔다. 물에 잠긴 것 같은 세상이 천천히 돌다가 그대로 쏟아져 내렸다.

    아리아드네는 빙그르르 돌아가는 시야에 심한 현기증을 느끼며 테이블을 짚었다. 속이 메스껍고 머릿속이 빙빙 돌았다. 거꾸로 달리는 마차에 탄 것처럼, 하늘로 솟았다가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처럼, 온갖 불쾌한 감각들이 몸을 짓눌렀다.

    “……가 불, ……요?”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이 하는 말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온몸이 조각나는 듯한 강렬한 고통이 느껴지더니 이윽고 숨이 막혀 왔다.

    ‘독인가? 대체 누가 날…….’

    그리고 그대로 의식이 끊겼다.

    “……녀, 공녀, 괜찮으십니까?”

    아리아드네는 자신을 흔드는 손길에 막혔던 숨을 토해 내며 겨우 정신을 차렸다. 시녀들이 달려와 땀으로 흠뻑 젖은 그녀의 얼굴과 팔을 부드러운 천으로 닦아 주었다.

    아리아드네는 물에 빠졌다가 살아난 것처럼 온몸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한여름인데도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몸이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감싸 안고는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질러 주는 시녀의 팔을 꽉 붙들었다.

    “나, 나 있잖아.”

    아리아드네는 입술을 한 번 꽉 물었다가 토해 내듯이 말을 뱉었다.

    “나, 살았어?”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시녀는 지체 없이 답했다.

    “그럼요. 무사하세요.”

    시녀의 말을 듣고도 아리아드네는 자신이 무사하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살았어? 어떻게?’

    차를 마시는 순간 강렬한 고통이 온몸을 뒤덮었다. 그러더니 숨이 가빠지고 이내 숨이 막혔다. 그리고 그대로 의식이 끊겼다.

    그때 자신은 분명 죽었다. 실신이나 기절 같은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짓눌렀던 압도적인 어둠, 그것은 분명 죽음이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죽었는가.’

    아리아드네는 바닥에 부딪혀 깨진 찻잔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생각에 다다랐다.

    ‘차를 마신 직후 의식을 잃었으니 독인가?’

    아니, 독 같은 것이 아니었다.

    ‘탑에서 떨어진 몸이 산산이 부서져서 죽었지.’

    그 생각과 동시에 오싹한 한기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내달렸다.

    “공녀, 곧 의원이 당도할 겁니다.”

    아리아드네는 익숙하고도 낯선 목소리에 굳은 고개를 들었다. 짙은 고동색 사이로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섞인 여자가 침착한 얼굴로 아리아드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희는 테이블 위의 물건은 아무도 손대지 못하도록 철저히…….”

    “대체, 대체 어떻게 부인이!”

    주위 시녀들을 단속하던 부인이 아리아드네의 비명 같은 소리에 놀라 하던 말을 멈추고는 그녀에게 다가왔다.

    겨우 진정했던 숨이 다시금 제멋대로 날뛰었다. 아리아드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앞의 사람을 다시 확인했다.

    눈앞에 서 있던 여자의 몸에 화르륵 불이 붙기 시작했다. 여자는 불이 붙은 채로 아리아드네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여자의 손이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는 아리아드네의 어깨에 닿았다. 새까맣게 타 버려 겨우 형체만 남은 손이 아리아드네의 어깨를 단단히 쥐었다.

    “공녀, 숨을 쉬는 것이 불편하십니까?”

    [공녀께서는 사랑할 상대를 좀 더 신중하게 고르셔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아리아드네를 염려하듯 바라보는 눈동자 너머로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낯선 기억들이 밀려들었다.

    ‘그녀의 말에 나는 뭐라 말했던가.’

    힘들이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기억들이 이어졌다.

    [내 사랑이 우리에게는 또 다른 기회가 될 겁니다.]

    제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리 없다던 오만. 그 오만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부인께는 내가 아직도 가르쳐야 할 어린아이로 보이십니까?]

    [아직도 부족하시니까요.]

    결코 나눈 적 없던 대화들이 아리아드네의 안에서 살아나기 시작했다. 과거인지, 미래인지, 실재인지, 허상인지도 알 수 없는 것들이.

    “의식을 잃지 않으셨으니 위험한 것은 아닐 겁니다.”

    안절부절못하며 호들갑인 시녀들과 달리 다소 쌀쌀맞다 느껴질 만큼 차분한 목소리였다.

    아리아드네는 차분한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목구멍에서 덩어리 같은 것이 치밀어 올랐다. 울컥 치미는 덩어리를 삼키고 나서야 자신이 그 쌀쌀맞은 목소리를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워했는지 깨달았다.

    글레나 린즈, 눈앞의 부인은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리아드네에게 늘 불편한 존재였다. 어렸을 때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아리아드네의 훈육을 맡은 사람이라 다 자라고도 글레나의 말에 꼼짝 못 하는 자신이 끔찍하게 싫었다.

    [더 노력하셔야 합니다.]

    잘한다는 칭찬 한 번 산뜻하게 해 준 일이 없었다. 흠을 잡으려 작정한 사람이라고 여겼던 적도 있었다.

    [조금 더 멀리 보십시오. 이 자리를 원한 건 비 전하이십니다.]

    글레나는 왕비가 된 아리아드네에게도 달콤한 말을 할 줄 몰랐다. 아리아드네가 그토록 불편해했던 사람은 아리아드네가 왕궁에서 가장 의지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의연하고 침착하게 대처하십시오. 전하께서 무너지시면 모두가 끝입니다.]

    차라리 죽고 싶었던 순간마다 아리아드네를 버티게 했던 건 글레나의 한마디 말이었다. 그리하여 글레나는 첫 번째 본보기가 되었다. 아리아드네를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었기에.

    [놔! 당장 그 손 놓지 못해!]

    눈앞에서 글레나가 끌려가는데도 그저 소리치는 것이 아리아드네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아리아드네의 발치에 무릎 꿇린 글레나는 늘 그렇듯 담담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무릎에 놓인 두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곧 손의 떨림이 멎었다. 아리아드네의 눈먼 사랑이 잡아먹은 제물은 그렇게 목이 잘렸다. 발버둥 치던 아리아드네는 기사들에게 몸이 제압당한 채로 그 모든 광경을 고스란히 목도해야 했다.

    목이 잘린 글레나의 시신 위로 기름이 끼얹어지고, 불이 붙었다. 바람을 타고 전해진 열기에 발버둥 치던 아리아드네의 움직임마저도 멎었다.

    아리아드네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목을 자른 것도 모자라 그 시체마저 불태우다니, 전염병으로 죽은 것도 아닌데 이럴 수는 없었다. 너울거리는 불길이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죽은 뒤에 안식을 취할 영혼마저도.

    [불을 꺼라. 저 불을 당장 끄지 못하겠느냐!]

    아리아드네의 노성에도 글레나의 몸에 붙은 불은 꺼질 줄을 몰랐다.

    [카이엔, 카이엔, 카이엔! 글레나를 살려! 날 죽이고 글레나를 살려!]

    왕을 찾는 왕비의 소리는 아무에게도 닿지 못하고 그대로 흩어졌다.

    아리아드네는 글레나의 생명을 지킬 수도, 그녀의 영혼이 온전히 떠나도록 기다려 주지도 못했다. 글레나의 시신이 새까맣게 탈 동안 아리아드네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눈을 돌리지 않고 그 모든 것을 제 속에 새기는 것뿐이었다.

    새까맣게 타 버린, 결코 눈을 돌릴 수 없었던 아리아드네의 죄. 그토록 자신만만했던 제 사랑의 결실.

    그렇게 죽었는데, 분명 그랬는데…….

    “공녀, 조금 전 저와 대화하던 것을 기억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리아드네가 뭐라 생각하기도 전에 말이 흘러나왔다.

    “내가, 전하를 이곳으로 초청하겠다고 해서…….”

    그 물음에 아리아드네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 글레나와 나누던 대화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전하를 이곳으로 초청할까 해요.

    ―1왕자 전하 말씀이십니까?

    ―부인, 우리가 약혼한 지도 반년이나 지났어요. 약혼자와 여름휴가를 함께 보내는 건 특별한 일도 아니잖아요?

    ―겨우 반년입니다.

    ―부인께서는 아직도 이 약혼이 우리에게 해가 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리아드네가 이번 여름에 약혼자인 카이엔을 란데르에 있는 메르디에스 소유의 여름 별장으로 초청하겠다고 하자 글레나는 그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그리고 아리아드네는 그런 글레나가 피곤했다.

    오래된 것도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 저 말을 한 지 채 30분도 되지 않았다. 그래, 카이엔과 약혼한 것이 불과 반년 전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 기억들은 다 뭐란 말인가.

    [사랑? 그따위 너저분한 감정에 휩쓸리기에는 그대는 가진 게 너무 많았고, 나는 가져야 할 게 너무 많았지.]

    변하기 시작한 남자에게 제 사랑을 확인하려 물었다 들은 대답은 아리아드네의 기대와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아리아드네를 둘러싼 세계가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그러셨을 리가 없어요. 내가 이곳에 있는데……. 뭔가 잘못된 거야. 그러니까…….]

    [그대의 아버지는 늘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당신이야? 당신이, 어떻게 우리를…….]

    [당신을 만날 때면 늘 기대가 돼, 당신이 내게 무엇을 줄지. 다음에 만날 날을 기대하지.]

    그리고 한 달 뒤, 메르디에스의 성벽에 불화살이 날아들었다. 아버지가 죽고, 사촌 오라비의 목이 잘리고, 아리아드네는 탑에 갇혔다.

    [부인, 내일이면 결혼할 남편에게 할 말이 그런 것밖에 없습니까.]

    탑에 갇힌 아리아드네를 찾아온 카이엔과 마주한 순간 느꼈던 분노와 증오가 그녀의 속에서 넘실대며 차올랐다.

    [두 발이 잘린 채로 기어서 오너라. 목이 잘려 남의 손에 들려 오너라. 죽고 죽어 혼백이 되어 오너라. 그러면 내 너를 기껍게 맞아 주마.]

    조금 전의 일처럼 생생한 분노로 온몸이 떨렸다. 아리아드네는 분노로 덜덜 떨리는 제 손을 남의 것처럼 내려다보았다.

    ‘이 분노는 내 것인가, 이토록 강렬한 감정이 내 것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의 것인가.’

    그리고.

    ―메르디에스의 여름 별장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실 거예요.

    ―그대와 함께 있으면 어디든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이럴 때는 저를 보느라 풍경을 보실 틈이 없다고 하셔야죠.

    ―……지금도 그렇습니다.

    ―거짓말. 전하가 그런 말에 능숙하지 않으신 걸 알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곧 익숙해지실 테니까.

    아리아드네가 란데르로 떠나오기 전 카이엔과 나눴던 대화였다. 이것이 불과 닷새 전의 일이었다.

    글레나와 정원에서 차를 마시던 조금 전까지의 기억과, 카이엔과의 결혼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이 사라졌던 과거인지 미래인지 모를 기억들이, 뒤섞여 속을 헤집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리아드네는 자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차를 마시다 숨이 막혀 기절했는지, 탑에서 떨어져 온몸이 조각나 죽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지금이 카이엔과 약혼한 지 반년이 지난 892년의 여름인지, 카이엔과 결혼한 지 2년이 지났던 895년 봄인지도 알 수 없었다.

    차에 탄 무엇 때문에 잠깐 헛것이라도 본 걸까.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그 모든 기억이 너무도 생생했다.

    ‘정말로, 당신이, 카이엔 당신이…….’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아리아드네는 속엣것을 모두 게워 내기라도 할 것처럼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토해 내도 제 속을 꽉 메운 것들은 조금도 비워지지 않았다.

    “대체 의원은 언제 오는 것이냐? 아리아드네 님을…….”

    결국 초조함을 드러내고 만 글레나는 자신을 구명줄처럼 붙드는 아리아드네의 손길에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글레나를 붙든 아리아드네가 갑자기 그녀를 끌어안았다. 마치 글레나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공녀?”

    놀란 듯 굳어 있던 글레나가 아리아드네를 불렀다. 분명 그녀였다. 따뜻한 말 같은 것은 한 번도 해 주지 않았으면서 아리아드네 앞에서 목이 잘리던 마지막 순간에 희미한 웃음을 지었던 여자.

    [비 전하께서, 아리아드네 님께서 잘못하신 게 아닙니다. 그러니…….]

    글레나는 마지막 말도 채 마치지 못하고 목이 잘렸다. 그녀는 아리아드네의 잘못이 아니라 했지만, 목이 잘린 글레나의 앞에서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 여기에 살아 있었다.

    ‘카이엔, 당신이 정말, 글레나를, 우리 모두를, 나를…….’

    새까만 어둠이 다시 아리아드네를 덮쳤다.

    ‘죽였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