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 - 1화 (1/148)
  • 프롤로그

    새까만 어둠이 내렸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암흑천지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토해 냈다. 넘실거리는 분노가 어둠 속에서 굴러다녔다. 아무것도 하지 못할, 그저 감정의 덩어리일 뿐인 분노가.

    이것이 사랑에 빠진 멍청한 여자의 말로였다. 여자는 어둠 속에서 몸을 옹송그리고 갈 곳 잃은 분노로 헐떡였다.

    찬란하게 빛났던 백금발은 하얗게 세어 버린 지 오래였다. 싱그럽게 반짝이던 외모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자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나라에서 제일가는 권세를 지녔던 가문과 모두의 찬양을 받았던 아름다운 외모, 드높은 지성과 오만할 정도의 당당함, 그런 여자를 향해 쏟아지던 관심과 호의, 넘쳐흐르던 애정.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사라진 것들 대신 자리를 차지한 것은 화염에 휩싸여 잿더미가 되어 버린 성, 주검이 되어 성벽에 걸린 가족들, 멸시와 혐오, 첨탑 꼭대기 두꺼운 철문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방.

    그리고 여자의 푸른 눈 속에서 새파랗게 타오르는 분노. 하지만 여자의 분노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여자가 아무리 사랑에 빠진 지난날을 후회하고, 후회하고, 후회하고, 그 남자를 증오하고, 증오하고, 증오해도,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자를 이 진창에 처박은 남자는 그녀의 눈 속에서 넘실거리는 분노를 보고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나를 키우는 개처럼 보던 당신이 이제야 사람 보는 눈으로 나를 보는군.”

    여자는 남자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일갈했다.

    “누가 너 따위를 인간으로 본다더냐. 너는 개만도 못하다. 개도 키워 준 주인을 물지는 않는다.”

    남자는 여자의 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끔한 얼굴로 웃으며 천천히 제 얼굴을 닦아 냈다.

    “사냥이 끝나고 끓어오르는 솥에 던져진 개가 된 기분이 어떠신가.”

    남자의 손가락이 여자의 메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여자는 뱀이 기어오르는 듯한 감각에 남자의 손을 쳐 냈다. 여자의 거부에 남자의 매끈하던 낯이 찌푸려졌다. 불쾌한 낯을 한 남자가 여자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여자는 손목이 비틀린 고통보다도 남에게 강제당하는 이 상황이 더없이 불쾌했다. 평생을 남 위에 군림한 삶이었다.

    한순간 나락에 처박혔다 해도 여자의 성정은 쉬이 꺾이지 않았다. 여자의 불쾌함을 알아차린 듯 남자는 여자를 눕히고 결박하듯 몸을 옭아맸다.

    “부인.”

    남자는 다정한 목소리로 여자를 불렀다.

    “내일이면 결혼할 남편에게 할 말이 그런 것밖에 없습니까.”

    남자의 말에 여자는 그제야 그가 이곳을 찾은 이유를 깨달았다. 여자에게 주어진 마지막 자리에서 그녀를 끌어내리기 위해서.

    여자가 빙그레 웃으며 속삭였다.

    “내가 그러했듯이 네 끝도 그러하리라. 네 부인이 될 그 여자가 네 목을 잘라 성벽에 걸 터이니 밤마다 목을 감싸고 자는 게 좋겠구나.”

    여자의 저주를 들은 남자가 그녀를 강제하던 힘을 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중에 다시 오지. 그때도 나를 거부할 수 있을지 궁금하군.”

    남자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여자의 마음만은 변치 않으리라, 남자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여자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환한 미소를 얼굴에 걸고는 노래하듯 말했다.

    “두 발이 잘린 채로 기어서 오너라. 목이 잘려 남의 손에 들려 오너라. 죽고 죽어 혼백이 되어 오너라. 그러면 내 너를 기껍게 맞아 주마.”

    육중한 쇠문이 닫히고 자물쇠가 걸렸다. 여자는 남자가 나가고,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릴 때까지 침상 위에서 옹송그린 채로 자신의 말로를 곱씹었다. 사랑을 이유로 천지 분간 못 하는 망아지처럼 날뛴 대가였다.

    여자는 왕국의 남쪽을 다스리는 메르디에스 공가의 외동딸이었다. 나라에서 제일가는 권세를 지닌 가문의 금지옥엽이었던 여자는 이루지 못할 것이 없었다.

    여자는 세력이 없는 왕자를 사랑했다. 여자가 사랑한 남자는 왕의 적장자였으나 왕이 되지 못할 왕자였다. 그러니 남자에게 삶이란 동생에게 죽을 날과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여자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여자와 여자의 가문은 남자를 왕으로 만들었고,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에게는 왕좌를, 자신의 가문에는 더 큰 권세를 안겨 주었다.

    여자는 제 선택과 사랑이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이 선택과 사랑이 만족스러웠던 것은 자신뿐이었다는 것을 아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남자는 여자의 가문이 가진 권세를 두려워하였고, 힘없는 왕자로 지냈던 시절의 원한을 조금도 잊지 않고 제 안에 쌓아 두었다.

    왕이 된 남자는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만한 것들을 하나씩 없애기 시작했다.

    시작은 여자를 지키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손이 잘리고, 혀가 잘리고, 팔이 잘리고, 발이 잘리고, 끝내 목이 잘렸다.

    여자와 피를 나눈 가족들이 죽기 시작했다. 여자는 교수대에 목이 걸린 사촌 오라비의 죽음을 보고는 독살당한 아비의 죽음이 낫다고 생각했다.

    사촌 오라비의 죽음을 끝으로 여자의 가문은 이름이 지워지고, 메르디에스의 자랑이었던 유서 깊은 성은 화염에 휩싸였다.

    한때 왕국에서 가장 고귀한 이였던 여자는 왕국에서 가장 높은 첨탑에 갇힌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여자의 남편이었던 남자의 결혼식이 바로 내일이었다.

    이 모든 것이 남자가 왕이 된 지 불과 2년 만의 일이었다. 여자가 제 모든 것을 바쳐 왕의 아내로 산 것이 불과 2년이었다. 그중 행복했던 시간은 1년도 채 되지 못했다. 겨우 그깟 행복을 누리자고 그 많은 것들을 버렸던가.

    여자는 자신의 욕심 때문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얼굴을 잊지 않으려 끊임없이 기억을 되새겼다.

    모든 것은 제 잘못이었다. 죽어서도 그들 앞에 엎드려 제 잘못을 빌어야 했다. 그러니 그들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그렇게 여자는 죽은 이들의 이름을 되뇌었다. 어둠이 깊게 깔려 주위를 분간하지 못할 때까지.

    새까만 어둠 사이로 검은 물체가 어른거렸다. 어둠과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새까만 무언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에 여자는 남자가 결혼을 앞두고 저를 죽일 셈인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숱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자를 살려 둔 것은 남자의 결정이었다. 이제 와 몰래 사람을 보내 여자를 죽일 이유가 없었다. 여자를 죽일 거라면 광장에서 목을 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테니까.

    어두운 그림자 속의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살고 싶습니까.”

    살고 싶으냐고?

    여자는 그 질문이 우스웠다. 죽는 것조차 남자의 허락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다. 죽을 수 있었다면 이따위 목숨 같은 건 진작 버렸으리라.

    여자의 시녀가 흙발에 짓밟혀 끌려 나갔을 때, 여자를 길러 준 사람의 시신이 눈앞에서 불탔을 때, 가족의 시체가 성벽에 걸렸을 때, 여자가 자란 성이 잿더미가 되었을 때, 여자가 첨탑에 끌려와 갇혔을 때, 남자가 자신의 앞에서 어른거릴 때.

    자신이 숨을 쉬고 있는 그 모든 순간에.

    단 한 순간도 죽음을 원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살고 싶으냐고 질문하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메마른 웃음 끝에 여자가 물었다.

    “죽고 싶다면 죽여 줄 건가?”

    그림자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나 여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당신이 원한다면.”

    그림자가 그렇게 말했을 때도 그저 실없는 소리라 여겼다.

    “내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해 줄 건가?”

    그림자는 침묵했다. 그 기묘한 침묵이 여자의 내면을 건드렸다. 묻고, 묻고, 묻어 두었던 후회가 튀어나왔다.

    “내 가족을 돌려줘. 내 삶을 돌려줘. 내 시간을 돌려줘.”

    그리고.

    “나를, 나를 돌려줘.”

    여자는 끝내 제 영혼을 긁고 말았다. 여자의 말은 여자가 잃은 것이 무엇인지 알게 했다. 여자는 가족을 잃고, 삶을 잃고, 살아온 시간을 잃고, 자신마저 잃고 말았다.

    마침내 무너진 여자가 바닥을 긁어 댔다. 여자의 손톱이 부러지고 손가락이 찢어졌다. 육체의 고통은 무너진 영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림자는 그런 여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당신의 목숨으로 그 바람을 이루리라.”

    여자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곳에 남은 것은 어둠뿐이었다. 분노로 정신을 놓은 여자의 착각이었을까.

    이런 여자의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림자가 있던 자리에 하얀 물체가 놓여 있었다. 여자는 손을 뻗어 그것을 손에 쥐었다.

    손에 빠듯하게 잡히는 하얀 물체는 동물의 것인지, 사람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의 뼈였다. 뼈를 꿴 줄에는 황금을 녹인 듯한 금실로 만든 술이 함께 달려 있었다.

    여자는 그림자가 남겨 두고 간 뼈를 손에 쥐고도 누군가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은 여자의 망상이리라. 아무도 오지 않았고 여자가 죽어도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그렇더라도 죽으리라. 반드시 죽어서 시체로 남자의 곁에 남으리라.

    왕이 된 남자가 여자의 생존을 바라므로 여자는 죽어야 했다. 그것만이 여자에게 남은 마지막 복수였다.

    여자의 눈동자는 푸르게 불타올랐다. 언제가 되면 죽을 수 있을까. 여자는 그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은 불현듯 찾아왔다.

    맑은 종소리가 첨탑까지 울려 퍼졌다. 남자의 결혼 행렬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모든 소리가 멎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일시에 멎은 듯한 고요한 적막. 그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여자뿐이었다.

    여자가 돌바닥에 발을 딛는 소리가 마치 거인의 발소리처럼 귓전을 때렸다.

    ‘네 죽음이 모두를 구원하리라.’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에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여자는 첨탑의 두꺼운 철문을 밀었다. 겹겹이 잠긴 자물쇠가 저절로 힘을 잃고 부서졌다. 무게만으로도 끔찍할 철문은 여자의 여린 힘에도 스르르 밀려났다.

    철문을 나온 여자가 첨탑 성벽에 난 창으로 고개를 내밀자 화려한 행렬이 보였다. 왕국의 주인인 왕과 새로운 왕비의 결혼 행렬이었다.

    2년 전, 여자는 왕의 옆에 서서 꽃처럼 웃었다. 2년 뒤, 왕의 새로운 결혼 행렬을 볼 줄은 꿈에도 모르고.

    거리는 왕의 결혼 행렬을 구경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모여 있음에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거리의 사람들은 마치 그림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듯한 기이한 광경의 한가운데 행렬의 주인공이 자리하고 있었다. 왕과 그 곁에 선 새 왕비가 웃으며 손을 흔들던 채로 멈춰 있었다. 마치 정교하게 만들어진 오르골의 인형처럼.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흰색이었다. 새 왕비의 옷도, 새 왕비의 달빛 같은 머리카락도, 장식도, 꽃도, 행렬이 가는 길마다 깔린 천도, 모두 흰색이었다. 여자의 결혼식 때와 마찬가지로.

    여자는 어제까지 남편이었던 남자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고 싶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준 것들은 별처럼 많았으나 남자는 아마도 이 마지막 선물을 제일 오래도록 기억하리라.

    여자가 창틀을 밟고 올라섰다. 파스스 하는 가느다란 소리와 함께 손에 쥐고 있던 금실로 만든 술이 가닥가닥 끊어지며 공중에 흩날렸다.

    그리고 하얗게 센 여자의 머리가 바람에 나부끼는 것을 시작으로 멈춰 있던 모든 것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가 여자를 발견했는지 모르겠으나 누군가 여자를 보고 외쳤다. 폐비가 된 여자의 이름을.

    여자에게 마녀라고 손가락질하며 야유를 보내거나 여자의 가문을 조롱하는 이들의 소리가 어지럽게 섞였다.

    “나는.”

    여자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사냥이 끝나고 버려진 사냥개가 아니다. 키우던 개에게 물린 주인이지. 나와 메르디에스의 잘못은 키울 개를 잘못 선택한 것뿐이다.”

    남자의 표정은 확인할 수 없었으나 필시 분노로 달아올랐으리라.

    “내 피가 네 발을 적시면 나는 다시 삶을 얻으리라. 돌아온 나는 네 목을 자르고 네 사지를 끊어 까마귀의 밥이 되게 하리라. 네 피로 목욕을 하고 네 살을 저며 씹으리라. 오늘, 내 죽음으로 네 삶을 앗으리라. 증오와 두려움 속에서 죽는 그 순간까지 너는 나를 기다리게 되리라.”

    여자가 갈라지고 쉬어 버린 기괴한 목소리로 광소(狂笑)를 터트렸다.

    “기다리는 것이 지루하지는 않으리라.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여자가 밟고 있던 창틀에서 걸음을 옮겼다. 마치 앞에 길이 있는 것처럼. 여자의 발이 허공을 딛자 여자의 몸이 첨탑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왕과 새로운 왕비의 결혼 행렬을 위해 준비된 흰 비단 위로 여자가 떨어졌다. 흰 비단이 여자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여자가 손에 쥔 무언가의 뼈에도 붉은 피가 스며들었다.

    여자의 사지는 조각조각 나 기괴하게 뒤틀리고 목은 몸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꺾였다. 하지만 여자의 눈만은 남자를 맹렬히 쏘아보고 있었다.

    왕국의 새 왕비는 남자의 발에 튄 여자의 붉은 피가 몹시도 불길하여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남자는 제 발을 붉게 물들인 여자의 피를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그것이 메르디에스 공가의 마지막 생존자 아리아드네 메르디에스의 끝이자 시작이었다. 자신의 피가 남자의 발을 적시면 새 삶을 얻으리라는 여자의 마지막 말대로 세계는 역행하였다. 그리하여 여자의 삶은 다시 시작되었다.

    사랑하는 남자를 왕으로 만들고 그 남자에게 버림받았던 여자는 다시 얻은 삶에서 더는 그 남자를 원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시작할 이야기는 아리아드네 메르디에스의 두 번째 삶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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