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 (175/180)

<55>

스피드 보트에 시동이 걸렸다.

눈과 귀를 가리고 손이 묶인 유은성이 지하에서 올라와 보트 앞에 선다. 바다는 잔잔했고, 볕이 강했다.

하나는 최대한 멀리 떨어져 유은성이 보트에 오르는 걸 지켜보았다. 담담히 보트에 오른 그가 자리를 잡자, 유리 페트로프의 부하가 좌표를 입력하곤 태블릿 화면을 드래그했다.

서서히 방향을 튼 보트가 정해진 좌표를 향해 나아간다. 모두 숨죽인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우리도 움직여야 해.”

고개를 푹 숙인 상태로 앉아 있는 유은성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하나는 두이의 속삭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가까이에 서 있던 줄리오가 그녀를 빤히 응시하며 담배를 비벼끄는 게 보였다.

하나는 두이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그에게 다가갔다.

“여권 내놔. 그리고 담배 좀 줄여. 너, 폐암으로 죽을 거 같아.”

그녀의 농담에도 줄리오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여권을 꺼내 내밀었다. 하나는 힘주어 여권 끄트머릴 잡았다. 쉽게 당겨지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여권을 돌려주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곧장 별장으로 갈 거야. 그곳에서 해결할 일이 있거든. 72시간 동안 그곳에 있을 테니, 마음 바뀌면 언제든 와.”

희망 고문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기꺼이 고개를 끄덕여 주며 그에게서 여권을 뺏었다.

그녀의 손에 여권이 쥐어짐과 동시에 허리춤에 커다란 팔이 감기더니 입술이 포개졌다. 하나는 양팔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감았다. 뜨겁고 축축한 혀가 벌어진 입술을 헤집고 들어왔다. 선선하게 불어온 바닷바람이 목덜미에 난 땀을 식힌다. 짐승처럼 강렬하고 숨 막히는 키스였다.

허리를 더듬던 손이 등을 타고 올라가 그녀의 목덜미를 움켜쥔다. 입술을 깨물고 혀를 짓씹으며 서로의 맛을 오래도록 기억했다.

“그만…. 하아.”

하나는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이런 기분, 싫다 못해 가슴이 시큰거려 아프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두이에게로 돌아섰다. 그러자 보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이가 하나를 끌어안아 주었다.

“우리 꼭 다시 봐요. 섬으로 초대할게요. 거긴 우리 같은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이거든요.”

“고마워요.”

로마노와 스테판, 유리와도 인사를 했으나 키릴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서로를 죽이려 했던 사이인 만큼, 저놈과는 죽을 때까지 친해질 수 없을 것이다.

한 배에 있는 동안 서로를 죽이려 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랄까.

그녀는 마지막으로 코가 빨간 로렌조와 악수를 했다.

“그만 좀 울어라. 덩칫값을 해야지.”

“까불지 마, 꼬맹이 주제에.”

“꼬맹이한테 죽을뻔한 놈이 입만 살아선.”

“하나, 다시 와. 대통령 경호원도 멋있지만, 나는….”

“무슨 말인지 잘 알았어. 다음에 너 한국에 레스토랑 내. 내가 단골 할게.”

입술을 달싹이던 로렌조는 솥뚜껑 같은 손으로 하나를 잡더니 와락 끌어안았다.

“그만 좀 해. 네 패밀리 아니라 내 누나야.”

결국, 이두이가 나선 후에야 떨어져 나간 로렌조는 훌쩍이며 난간에 기댄 줄리오에게 다가갔다. 유은성이 있는 먼바다를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잔잔했다.

하나는 모자를 눌러쓰며 스피드 보트에 올라탔다.

일부러 돌아보지 않았다. 이미 인사는 충분했고, 더 이상의 감정은 미련이다.

마스크를 올려 쓴 그녀가 보트의 시동을 걸자, 마지막으로 가방을 챙긴 두이가 올라탔다. 이두이는 큰 키와 체격에 비해 곱상한 외모 때문인지 호리호리한 느낌을 풍겼다.

이전보다 더 서늘해진 두이의 얼굴이 정면을 노려보는 그녀의 눈앞으로 불쑥 나타났다.

“미련 있어?”

하나는 뜬금없는 질문에 실소하며 되물었다.

“헛소리하지 마.”

“나는 최태준부터 족치고 곧장 한국 갈 거야. 같이 갈 거야?”

“나는 최태준부터 족치고…. 강무호 잡으러 갈 거야. 먼저 가. 너는 가서 물건 찾아. 뒤는 내가 봐줄게. 그리고 차라리 조직을 엎어 버려. 마음에도 없는 청와대 경호원 하겠다며 나서지 말고.”

두이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직접 핸들을 잡았다.

머리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진다. 이어 요란한 프로펠러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유은성을 데리러 온 미국의 군 헬기였다.

마치 기관총을 난사하는 듯한 소음에 귀가 먹먹할 지경. 자세를 낮춘 그녀는 속도를 올리기 시작한 보트 가장자릴 움켜쥔 채 고개를 돌렸다.

멀어지기 시작한 초대형 크루즈선. 저도 모르게 줄리오 파렌티의 흔적을 찾고 있다는 생각에 얼굴을 붉힐 때였다.

쾅!

유은성을 태운 보트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수직으로 솟아오른 시뻘건 불꽃.

보트와 조인하려던 헬기가 다급히 상승하며 거센 바람을 일으키고,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이두이는 마치 예정되어 있었던 일인 양 태연했다. 그렇다는 건, 모든 것이 계획된 일이라는 뜻.

하나는 땀이 배어 나온 손에 힘을 주었다.

“내 손을 더럽힐 수는 없으니까. 누나가 말한 대로, 제 손으로 치우게 해야지.”

“그래서… 진짜 놀아 줄 생각이야?”

“살아남는다면. 강무호는 그대로 둘 수 없어. 그런 놈이 국회 의원이라고? 대선 출마를 한다고? 하, 난 그런 놈 경호 못 해. 아니, 안 해.”

역시, 이두이는 저와 다르다.

뭍에 다다른 두 사람은 가까운 숲에 보트를 숨긴 뒤, 줄리오가 말해 준 좌표로 향했다. 낡은 천막을 걷자 재밌게도 두 대의 바이크와 헬멧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제법 많은 양의 달러 뭉치까지.

“얘는… 내 취향을 너무 잘 안단 말이지.”

입맛을 다신 하나는 새카만 바디의 바이크에 올라타 헬멧을 썼다. 기쁨을 숨기지 못하는 건 두이도 마찬가지.

안장 아래 고정되어 있는 글록을 꺼내 벨트에 꽂은 그녀는 시계의 좌표를 프놈펜 시내에 있는 종합병원으로 설정했다.

“가자. 진짜 끝내러.”

키를 꽂고 돌리자 지면을 울리는 묵직한 배기음이 고적한 숲을 흔들었다.

“집에 가야지, 이제….”

보트를 타고 달려온 방향을 돌아보았지만, 어디에도 크루즈선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하나는 목을 한 번 좌우로 꺾은 후 핸들을 당겼다.

두꺼운 타이어가 지면을 짓치더니 두 대의 바이크가 정면으로 튀어나갔다.

***

“부장님, 밖에 있던 마피아는요…?”

겁에 질린 최태준의 질문에 윤 부장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헛소리하지 마. 애초에 아무도 없었어.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너… 설마 실패한 거야?”

실패했냐는 말에 최태준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근데 강무진, 죽었다면서요. 기사에 그렇게 났던데…. 그럼 이제 끝난 거 아니에요? 용의자 없으니 사건 종결.”

“용의자? 웃기는 새끼네, 이거. 빨리 말해. 두이 시신, 어디로 빼돌렸어.”

최태준은 답답함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가슴을 쳤다. 제가 아는 건 몇 가지 없었다. 이두이가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줄리오 파렌티를 이하나가 정말로 찾아냈다는 것. 그녀가 마피아를 움직여 강무진과 전쟁을 치르는 중이라는 것밖에는 아는 게 없었다.

“진짜 모릅니다. 부장님이야말로 정말 모르세요? 강무호, 그 인간 똥 치워 주느라 우리가 이게 뭡니까?”

“그래서. 너는 그 똥값 안 받아먹었냐? 새끼가. 뒤 봐주니까 빠져갖고.”

“저, 두 번이나 죽을 뻔했어요! 그만둘 겁니다. 한국 가서 몸 사릴 거예요. 이하나가 캄보디아에 있는 이상, 이두이 찾기 전엔 안 돌아오겠죠.”

“강무호 의원, 지금 캄보디아에 왔어. 강무진 시신 찾으러. 뭐, 그건 핑계고…. 흔적 지우기 시작한 거 같다.”

그 말에 태준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윤 부장은 강무호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두이가 살아 있어야 한다며 신신당부한 뒤 돌아갔다.

태준은 아무도 없는 병실에 앉아 기도하듯 손을 모았다.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 줄리오 파렌티에게 당해 병원에 입원한 상태로, 목이 졸렸고 칼이 몸을 쑤셨다.

줄리오 파렌티의 부하가 아니었다면 목이 썰렸으리라.

그런데 이제 와 살기 위해 이두이가 필요하다고?

태준은 TV를 틀었다. 역시나 한인 채널엔 강무호 의원의 캄보디아 방문을 환영한다는 뉴스가 한창이었다.

강무진과 닮은 듯 닮지 않은 얼굴을 보자 오싹 소름이 끼친다. 태준은 팔을 문지르며 베개 아래 숨겨 둔 노트북을 꺼냈다. 그러곤 가상 화폐 서버에 접속할 때였다. 뉴스 화면이 바뀌더니 그가 입원한 병원 건물 외관이 영상으로 송출된다.

“어…?”

그곳엔 병원에 들어서는 강무호 의원이 보였다.

TV는 마치 파파라치 영상처럼 병원 내 CCTV 화면을 차례로 송출하는 중이었다.

태준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쥔 채 노트북을 덮었다. 강무호는 평범한 등산객의 모습이었다. 경호원으로 보이는 덩치 두 명을 이끈 그가 병원 복도를 걷는다.

아무도 그가 강무호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최태준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사색이 되어 벌벌 떨었다. 하지만 침대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했다. 몸이 움직이지 않을뿐더러, 상처가 심해 걷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죽음의 기운이 지나치게 가깝다.

커다란 TV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그때였다. 더운 바람이 훅 끼치는가 싶더니, 누군가의 그림자가 그의 곁에 드리운다.

“태준이, 많이 다쳤네?”

헛바람을 들이켠 태준은 석고상처럼 굳은 얼굴로 침대 가장자리에 기댄 하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경기를 일으키듯 딸꾹질을 시작했다. 쯧, 혀를 찬 그녀가 가죽 장갑을 벗더니 옆에 놓인 물병을 기울여 물을 따라 내민다.

“마시고 정신 차려. 너 살려주러 온 거야. 죽이러 온 거 아니고.”

벌컥벌컥 물을 들이켠 태준은 입술을 벌벌 떨다가 불쑥 소릴 냈다.

“두이는!”

그러자 이번엔 반대편에서 서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왜. 이제 좀 걱정이 되나 보지? 아니면, 네가 죽을까 봐?”

“으아아악!”

“아이씨, 귀청 떨어지겠네. 닥쳐, 최태준. 죽기 싫으면.”

태준은 숨이 넘어갈 듯 꺽꺽대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자 입구로 가 밖을 살핀 하나가 문에 등을 대더니, 서늘한 얼굴로 태준을 보며 말했다.

“자, 도망치다가 걸리면 어쩐다고 했지? 죽인다고 하지 않았나?”

“하, 하나야!”

“아, 내가 안 죽여도 강무호가 죽이겠지?”

“이하나!”

“살 수 있는 방법 알려줄까?”

하나의 소름 끼치도록 다정한 음성에 최태준이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이는 그대로 태준의 병상 아래에 들어갔다. 태준에게 다가선 하나는 그의 손에 작은 쪽지 한 장을 쥐여 주었다.

“3분. 강무호에게 받아 내야 할 답변들이야. 외운 뒤에 삼켜. 그럼 적어도 너, 여기서 안 죽게 해 줄게. 잘 할 수 있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