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 (174/180)

<54>

위스키에 얼음과 탄산수를 듬뿍 부었다. 레몬 시럽을 조금 넣자 포말 사이사이로 아지랑이 같은 액체가 스며든다.

위스키 본연의 맛은 사라질 테지만, 타는 듯한 갈증을 해결하기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위스키 소다와 오렌지 주스.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두 잔의 음료가 테이블에 놓였다. 하얀 파라솔 아래, 밝은색의 리넨 팬츠를 입은 줄리오가 먼바다를 노려보며 음료를 집어 든다.

역시나 위스키 소다는 취향이 아닌지, 반듯했던 미간이 얼핏 구겨졌다.

“One은 동생과 프놈펜으로 간다던데.”

오렌지 주스를 집어 든 유리 페트로프가 특유의 무심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렇다더군.”

“위험할 거야.”

위험하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줄리오는 고개를 틀어 유리를 보았다. 유리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오렌지 주스의 빨대를 잇새에 물었다.

“에드워드 리우의 이복형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강무호라는 한국의 국회 의원이 동생의 시신을 찾겠답시고 프놈펜 국제공항에 도착했다더군. 그리고 타이밍 맞춰 최태준이 정신을 차렸고.”

“그쪽 정치권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영감의 생일이 코앞이거든.”

“흐음…. 제대로 차였나 보군.”

정곡을 찌른 유리의 말에 줄리오는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을 문지르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심술을 부렸다?”

“너라면 강제로 취할 줄 알았거든.”

“그러려고 했지. 정신이 번쩍 든 것뿐이야. 그 여자는 손가락 하나 내 마음대로 안 움직여.”

“그런 걸 보고 세이는 임자 만났다고 하던데.”

“그래서. 본론이 뭐야.”

줄리오가 고개를 틀자, 두 대의 스피드 보트를 응시하고 있던 유리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2년 전, 네가 나를 도와준 대가는 치렀고 이제부터는 값을 받아야 할 차례야. 에드워드 리우, 내게 넘겨. 그럼 내가 강무호와 최태준, 이두이의 미래와 네 여자의 현재까지. 한 번에 해결해 주지.”

“어째서 내가 네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지? 페트로프. 너와 나는 공조 할 뿐, 친구는 아닐 텐데.”

유리는 줄리오 파렌티의 정적인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다 암갈색의 눈동자에 무료함이 짙게 드리울 때쯤, 묽어진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삼켰다.

“네 눈, 내가 장세이에게 무릎 꿇을 때. 그러니까… 세이가 날 의심해서 버리려고 했을 때. 그때의 눈과 닮았거든. 내 사랑이 그녀에겐 스쳐 지나가는 감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불안에 떨던.”

“한마디로 버려진 개새끼 같다, 이건가?”

“비슷해.”

그러자 고개를 주억이며 소리 내 웃은 줄리오가 등받이에 기대더니, 파라솔 너머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직하게 읊조린다.

“미안하지만, 너랑 나는 달라. 그리고 로즈와 하나도 다르지. 그녀를 대체할 수 있는 건 세상에 없어, 페트로프.”

***

머리카락에서 줄리오 파렌티의 향기가 난다. 같은 샴푸를 사용해서겠지만, 향기를 공유한다는 것은 제법 가슴 뛰는 일이었다.

지하로 내려간 하나는 유은성이 감금된 창고의 문 앞에 섰다. 그러자 그 안에서 두 남자의 목소리가 언뜻 들려온다. 이두이와 유은성이었다.

“그날, 최태준이 부장에게 갈비찜을 잘 하는 곳이 있다고 했어. 그땐 웬 헛소린가 했지. 한데 윤 부장이 그날 강무호를 소개 받은 거였나…?”

“그건 모르겠지만, 강무호가 사는 아파트 지하에 내려가면 30년째 방치되어 있는 창고가 있어. 말이 창고지, 거대한 쓰레기장과 다를 바 없는 곳이라 무언가를 숨기기 아주 좋은 장소야. 그래서 가끔 폐기물을 버리기도 하고, 노숙자가 들어와 며칠 몸을 숨기기도 하고. 서울 한복판에 그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 할걸.”

“그곳에 시체라도 묻어 놨어?”

“강무호라면 묻어 놨을걸. 겁이 많은 놈이거든. 겁이 많아서, 치밀해. 그리고 변태야. 숨기는 걸 좋아하니 재밌는 꼴을 보게 될 거야. 아, 이번에 사비 들여서 지하 창고 청소 작업을 한다던데. 30년 만에 처음으로.”

“타이밍 한 번 시기적절하니, 끝내주네. 쓰레기 청소해 악취 해결하고, 민심도 얻고.”

“그러니 빨리 움직여. 시간 끌지 말고 한국으로 가서 물건부터 회수해. 그쪽에서 제거하기 전에.”

하나는 눈 가장자리를 비비적거리며 벽에 기댔다. 이두이는 매일같이 지하에 내려와 강무진에게 정보를 얻어 내고 있었다.

다 그만두겠다더니,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나? 다 그만두겠다면서 왜 이렇게 열심히 해?

그녀는 두 사람이 있는 창고 문을 두드렸다.

“누구…. 누나.”

하나는 고개를 까딱였다.

“나 쟤랑 할 말이 좀 있어. 두이 너는 쉬고 와. 수고했어.”

“문 닫지 마.”

“그게 더 위험해.”

머릴 긁적인 두이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폭 안겨 왔다.

이건 나이를 먹어도 커다란 개다, 개.

“두이야, 너 연애해야겠다. 네 머리 자주 쓰다듬어 줄 여자 만나.”

“알아서 해, 그런 건.”

하나는 두이의 머릴 쓰다듬어 준 뒤, 밖으로 내보냈다. 안으로 들어서자 침대 헤드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던 유은성이 멀쩡해진 얼굴로 그녀를 맞았다.

“건강해 보이네요, 이하나 씨.”

“그쪽도.”

“난 아직 잘 못 걷습니다. 제대로 쑤셔 놔서.”

하나는 피식 웃으며 조금 전 두이가 앉아 있던 자리로 향했다.

“우리 두이 납치할 땐 언제고. 왜 이렇게 친해졌어?”

“마음에 들더라고. 최태준보다 똑똑하고, 말도 잘 통하고. 눈치도 빨라서 쉽지 않은 게 좋아.”

“그래 봤자 이제 곧 FBI한테 잡혀갈 텐데. 거기도 사식 넣을 수 있나?”

“글쎄.”

“유은성.”

하나는 양쪽 무릎에 팔꿈치를 대며 갸름한 턱을 괬다. 그러자 역시나 상체를 기울여온 그가 싱긋 웃는다. 살이 내려 야위었지만, 특유의 날카로움은 그대로인 남자였다.

“놀아 줄 테니, 기를 쓰고 달아나 볼래?”

유은성의 눈꼬리가 비스듬히 치켜세워진다.

“무슨 뜻이지?”

“너 FBI한테 잡히면, 죽을 때까지 못 나와. 네 뒤치다꺼리 이두이한테 시킬 생각인가 본데. 나는 그 꼴 못 보거든.”

“그러니까… 이 수갑을 풀어 주겠다?”

“나랑 거래한다면.”

그녀를 빤히 응시하던 유은성이 양손을 눈높이로 들어 올린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채워져 있던 수갑이 툭 떨어졌다.

하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을 흘렸다.

“네가 푼 거야, 두이가 풀어 준 거야?”

“이두이가 그럴 사람인가?”

“아니.”

“그럼 모른 척해 줘요. 내가 두 손, 두 다리 멀쩡해도 이하나 씨 못 이기니까. 그런데 이제 곧 배 멈추면… 마피아 새끼와는 어떻게 되는 거지?”

“뭘 어떻게 돼. 돈 많은 놈이 보러오겠지. 중간에서 만나든.”

“연애라도 해?”

삐딱한 질문에 똑같은 투로 대꾸했다.

“남의 연애사에 참견하지 말고 네 목숨이나 부지 잘해. 강무호가 캄보디아에 입국했어. 네 시신 인계받고 정부 관계자들과 악수하고. 한인들 찾아가서 위로도 한대. 근데… 그게 다는 아닌 거 같지?”

빙글거리며 웃고 있던 유은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나는 몸을 일으켜 침대로 다가갔다. 매트리스 끝이 살짝 흔들리는가 싶더니, 유은성의 무릎을 짚은 그녀가 창백해진 그에게 속삭였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최태준부터 잡으러 갈 거야. 거기서 네 형 만나면 안부 전해 줄게. 살아 있는지, 아니면 죽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걔가 너 죽이러 온다고 경고하든지. 아, 유리 페트로프가 그러더라. 지금까지 너한테 붙었던 킬러들, 의뢰인이 누군지 알아냈다고.”

하나는 로건과의 전화 통화에서 유은성이 한 의뢰에 관해 들었다. 유은성이 메싸 일행을 잡고 이두이를 찾아내기 위해 움직이는 동안, 발렌타인 데이는 유은성의 뒤를 지키기로 계약했다.

숨은 킬러 찾기.

가족에게 살인 청부를 받는 남자의 심정은 어떨까. 죽고 싶을까, 죽이고 싶을까.

말없이 생각에 잠긴 유은성이 마치 말라 비틀어진 풀 같다.

창고에서 나온 하나는 문 앞에 서 있는 두이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곤 싸늘하게 경고했다.

“정신 차려. 저 새끼는 수사 대상이 아니라 제거 대상이야. 죄는 죄로, 악은 악으로. 악마 새끼 뒤치다꺼리하지 마. 지가 싼 똥은 지가 치우게 둬, 이두이.”

하나는 굳어 버린 두이를 지나쳐 계단을 올랐다.

곧 하선이 시작된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둘러보던 그녀가 고개를 틀자, 누군가와 통화 중인 줄리오가 보였다.

주위로 로렌조와 로마노까지 모여 지시를 기다리듯 서서 담배를 태운다.

그녀가 다가가자 통화 중이던 그가 하나를 보더니 저벅저벅 다가와 손을 잡아끈다. 삽시간에 그늘로 끌려 들어간 그녀의 이마에 뜨거운 입술이 눌렸다.

“도착하면 연락하지. 별장에서 기다려.”

[서운해요, 파렌티 씨.]

“필요한 서류는 로마노가 준비해 줄 거야.”

[알겠어요. 그럼 별장에서 뵐게요. 빨리 오세요, 얼마 만이죠, 우리?]

“글쎄.”

낭랑한 여자의 음성이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그것도 지나치게 다정하고 상냥한.

[당신이 좋아하는 술을 가져갈게요. 환영해 줄 거죠?]

“값부터 치른 뒤….”

하나는 일부러 까치발을 든 채 대화 중인 줄리오의 입술에 쪽, 소릴 내며 키스했다. 그러자 피식 웃은 그가 그녀의 뒷머릴 가볍게 감싸 쥐며 속삭인다.

“내 여자가 죽일 듯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어서 안 되겠어. 미안하지만, 술 대신 꽃으로 받지. 하얀 안개꽃. 그게 좋겠어.”

[네? 파렌티 씨, 설마… 연애해요?]

“아니, 짝사랑.”

[맙소사! 알겠어요. 하얀 꽃이라…. 순백 같은 여성분인가 봐요. 준비하죠. 아주 크고 화려한 꽃다발로.]

줄리오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더니 땀이 난 그녀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입가에 키스했다.

“이러면서 날 버리고 가겠다?”

나른한 질문에 하나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충동적이었지만, 계획적이기도 한 행동. 헤어질 시간이 다가올수록 아쉬운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간이 좀 더 오래 이어지기를. 차라리 이 바다 위에서,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은 상태로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방법이 없잖아. 넌….”

“네 미래에 방해만 될 뿐이지.”

“그렇게 말하지 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원래 다 그래. 시간이 약이야.”

“그래, 좋아.”

고개를 끄덕인 그가 로마노에게 손을 내밀었다. 건네받은 건 휴대 전화 한 대였다. 그것도 개통까지 되어 있는.

줄리오는 그녀의 허벅지를 쓸어올리다, 어느 한 지점을 지그시 움켜쥐었다. 하나는 칩이 박힌 곳을 떠올리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어디 마음대로 해 봐. 나도, 내 마음대로 할 테니. 이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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