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 (173/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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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t 06. 안녕

    고개를 젖힌 채 눈을 감고 있던 하나의 이마 위에 차가운 손이 닿았다.

    눈을 뜨자 오전의 파란 하늘과 장세이의 얼굴이 보인다. 그녀는 퉁퉁 부은 하나의 눈을 보더니 의외라는 듯 웃어 보였다.

    “이제 육지 가까이 닿을 거예요. 그런데 왜 나와 있어요? 줄리오랑 같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에 하나는 기지개를 켜며 고개를 저었다.

    “원래 인사는 짧을수록 좋은 거잖아요. 인사는 충분히 했어요.”

    “흐음, 둘이 헤어져요?”

    “음, 사귄 적이 없으니 헤어진다고 하는 것도 좀 우스운데.”

    “뭐야, 아직도 줄리오가 말 안 했어요?”

    고백을 말하는 건지, 세이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휘었다.

    “좋아하는 것과 연애는 다르죠. 저도 줄리오를 좋아해요. 단지, 좋아한다는 감정 하나에 인생을 걸고 싶진 않다는 거예요.”

    “그걸 줄리오 파렌티가 인정하고 받아들이던가요?”

    하나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는. 그랬으면 이러고 있게?

    ‘나도 네가 좋아. 그러니까 이런 이상한 짓 말고 기분 좋은 것만 해. 우리가 또 언제 만날 수 있겠어? 평생, 다시는 못 만날지도 몰라.’

    줄리오에게 한 말이지만, 제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는 싱긋 웃더니 그녀의 눈가에 입술을 눌렀다. 천장을 바라보며 눕혀진 순간, 기분 좋은 행위란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란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근데 왜 기분이 별로지?’

    해가 뜨자마자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고, 침실문을 여는 순간까지도 줄리오는 자신을 잡지 않았다.

    그 당연함이, 제가 원했던 결론이 왜 이토록 싫고 짜증이 나는 건지, 갑판에 나와 맞이했던 산뜻한 바람이 어째서 조금도 달갑지 않았던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하나는 마지막으로 함께 식사하지 않겠냐는 세이의 말에, 샤워를 하고 오겠다며 자리에서 벗어났다.

    이제 곧 이 배를 떠난다. 뭍에 발이 닿는 순간부터 이곳의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갈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집으로, 우리는 우리의 집으로.

    “하나, 기가 막힌 고기를 구했어! 코리안 바비큐를 할 건데, 쌈장이 뭐지? 어떻게 만드는지 알아?”

    막 실내에 들어선 하나를 잡은 건 로렌조였다.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로렌조를 빤히 보던 그녀는 불쑥 팔짱을 끼우곤 배 뒤쪽의 테라스 구역으로 성큼성큼 이끌었다.

    “설마, 기가 막힌 고기가 삼겹살은 아니겠지?”

    “어떻게 알았지? 맞아, 그거. 그런데 레시피가 너무 복잡해. 가니쉬가 너무 많아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냥 김치에 파절이, 상추에 쌈장 곁들여 먹으면 되지. 뭐, 다른 가니쉬는 너희가 못 구할걸?”

    “그럼 빨리 레시피 알려 줘. 어디서 어떻게 구하는지도.”

    “너, 셰프해라. 마피아 하지 말고.”

    “이미 레스토랑을 4개나 갖고 있어. 무시하지 말라고.”

    로렌조가 제법 뿌듯한 얼굴로 테라스 문을 열었다. 하나는 의외란 표정을 하곤 테라스 밖으로 한걸음 내디뎠다.

    “나는 배가 싫어.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너랑 네 동생을 위해서 한국 음식을 해 줄게. 실컷 먹어. 오랜만이지? 너 잠꼬대까지 했다고 하던데, 줄리오가.”

    “잠꼬대? 설마… 추접스럽게 뭐 먹는 꿈 꿨대?”

    “몰라, 나도. 그런데 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팔을 오물오물 깨물었대. 줄리오가 그렇게 웃는 거 처음 봤어.”

    “걔는 날 너무 좋아하는 거 같지?”

    “시뇨리나, 그걸 이제 알았어? 줄리오는 널 존경해. 그리고 존중해. 그래서 우리도 너를 좋아하는 거야.”

    아직 로렌조는 이 배에서의 시간이 마지막이란 걸 모르고 있었다. 두이의 말대로라면 이제 곧 FBI의 신호가 도착할 것이다. 이두이가 유리 페트로프의 도움은 더 이상 받지 않겠다고 못 박은 이상, 민간인인 제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하나는 로렌조가 들고 있는 태블릿을 빼앗아 메모장을 연 후, 제가 알고 있는 한식 레시피를 남김없이 적어 주었다. 나름 맛집들을 섭렵하며 알아낸 비법 양념장들의 배합 비율과 유명 미식가가 알려 준 보편적인 레시피 몇 개를 적어 주자, 싱글벙글한 로렌조가 이마를 맞대 왔다.

    커다란 덩치로 작은 테이블에 상체를 웅크린 로렌조가 귀여워 뒤통수를 쓰다듬을 때였다. 머리 위, 상층 테라스에서 담배 냄새가 아래로 흘러내려 왔다.

    고개를 든 하나는 담배를 문 채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줄리오를 발견했다.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자 턱을 괸 그가 손가락을 까딱이며 그녀를 부른다.

    “올라와.”

    나른하면서도 무심한 목소리와 눈빛. 막 일어난 건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손길이 성마르다.

    “왜?”

    “씻어야지. 네 몸에 내가 무슨 짓을 했는데.”

    “씻겨 줄 거야?”

    “원한다면.”

    “좋아. 나도 샤워하고 싶었어.”

    “빨리 올라와. 시간이 아까우니까.”

    꽁해 갖곤.

    하나는 벌떡 일어나 로렌조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자 불쑥 그녀의 손을 잡은 로렌조가 묘한 분위기를 읽었는지 목소릴 낮춰 물었다.

    “혹시,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지?”

    “네가 뭘 생각하든, 그 이상이야.”

    “시뇨리나.”

    “삼겹살은 같이 못 먹을지도 몰라. 그래도 다음엔 꼭 같이 먹자. 오늘만 날이냐? 세상이 얼마나 좁은데, 또 만나겠지.”

    하나는 로렌조가 벌떡 일어나는 것을 알면서도 산뜻하게 웃어 보인 뒤, 선실 안으로 들어섰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자꾸만 아는 얼굴들이 나타난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청와대 경호실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개인의 조그마한 흠결도 결격 사유가 될 터인데, 하물며 마피아와의 접점이라니.

    그렇다고 남자와의 인연을 이어 가기 위해서 미래를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직장은 안정적인 노후를 보장해 주지만, 사랑은 불확실한 감정 소모를 동반할 뿐이다.

    어쩌면 자신을 버리고 간 엄마라는 여자도 사랑이란 것에 휘둘린 피해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이와 자신은 그에 따른 희생양이었고,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사랑이란 이름 끝에 남는 건, 결국 없었다.

    “어어!”

    유독 생각이 많아 눈앞에 줄리오가 서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곧 몸이 뒤로 젖혀지는가 싶더니 허리가 잡혔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네 생각 했지. 너 말고 내가 누굴 생각하겠어.”

    능청스러운 대꾸에 인상을 찌푸린 그가 생글거리는 그녀를 안아 들었다. 신고 있던 슬리퍼가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고, 이내 탁 트인 창으로 마감된 욕실 문이 열렸다.

    “태연하군.”

    “그럼 울어?”

    “어제는 잘 울던데.”

    뭐, 그거야…. 의미가 조금 다른 거 아닌가?

    그녀가 입술만 달싹거리는 사이, 그는 욕조 가장자리에 하나를 앉히곤 한 꺼풀씩 벗겨내기 시작했다.

    상처가 제법 아물었으나 여전히 탕 목욕은 불가능했다. 하나는 산홋빛 바다를 내려다보며, 이 근사한 풍경을 건조한 욕조에 앉아 감상해야 한다는 사실에 탄식했다.

    이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는 욕조 안으로 들어가 뻔뻔한 표정으로 자세를 잡았다. 그가 걸터앉은 방향으로 고개를 젖히곤 단단한 허벅지를 어루만지자, 줄리오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기울어진다.

    샤워기를 잡아끈 그가 미지근한 물을 틀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적셨다.

    “네 계획을 말해 봐.”

    “어떤 계획?”

    “말 그대로야. 네 계획이지. 아니면… 내 계획부터 말해 볼까?”

    감았던 눈을 뜨자, 까만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던 그가 목덜미를 천천히 쓸며 아래로 내려와 말랑한 젖가슴을 손끝으로 덧그렸다.

    남자의 손톱이 스칠 때마다 오싹오싹 소름이 돋는다.

    “리우의 눈을 가리고 손을 묶은 뒤, 스피드 보트에 태울 거야. 네 동생이 게빈 스미스와 계약을 했다더군. 범죄자의 도움을 받느니, FBI의 손을 잡겠다고. 그렇게 리우를 바다에 띄우면 FBI가 회수할 예정이야. 그사이 나는 너와 이두이를 내 별장으로 데려갈 생각인데, 어때.”

    마치 시를 낭독하듯 부드러운 말투.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찰나, 하나는 그의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미안하지만 프놈펜에 두이의 집이 있어. 거기로 갈 거야.”

    애써 시선을 피하며 답하자 그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

    “정말, 여기서 끝내겠단 소린가?”

    “그럼 어디까지 갈 건데.”

    “적어도….”

    말끝을 흐린 그가 그녀의 야속한 입술을 문질렀다. 도톰한 입술이 살짝 뭉개지고 호흡이 밭아진다. 기분이 이상했다. 좋지 않았다. 답답하고… 무언가를 억지로 욱여넣은 것처럼 숨이 찼다.

    여름인 줄 알았던 남자는 어쩌면 가을볕일지도 모른다. 따갑고 뜨거우면서도 짧고 강렬한. 그 여운에 잠 못 이루게 만드는.

    “내가 널 놔줄 생각이 들 때까진 내게도 시간을 줘야지. 그래야 공평하지 않나? 우리의 거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샤워기가 바닥으로 툭 떨어지며 사방으로 물줄기가 튀었다.

    이마와 콧날, 입술이 닿는다. 이어 그녀의 목덜미를 감싼 그가 강렬하게 혀를 밀어 넣었다.

    젖어 가는 투명한 드레스 셔츠 안으로 단단하게 여문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나는 셔츠를 당겨 그를 욕조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러곤 혀를 깨물고 입술을 빨며 허리춤 안으로 손을 넣었다.

    “마음 편히 널 죽일까…?”

    하나의 중얼거림에 그가 피식 웃었다.

    “차라리 그렇게 해.”

    “죽음을 기다린 이유가 뭐야.”

    “재미없었거든. 무료하고 지겨웠어.”

    “지금은?”

    “죽음이 기꺼워.”

    잔악하게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린다. 하나는 어제보다 더 울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때 지퍼를 내린 그가 속옷 틈으로 성기를 꺼내 그대로 그녀의 입구에 맞추었다. 그러곤 천천히 삽입하며 달뜬 신음을 삼키는 그녀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흐으, 아파….”

    “마지막이야. 그러니까, 참아.”

    들이친 빛이 두 사람의 움직임 사이사이에 스며든다. 야한 신음과 찰박이는 물소리, 사방으로 뻗친 샤워기의 물줄기로 인해 욕실 전체가 무지갯빛이었다.

    하나는 젖어가는 그의 머리카락 틈새로 손을 넣으며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줄리오, 어린애처럼 굴지 마. 마지막 아니야…. 말 바꿔서 미안한데, 나도 너 좋아. 좋아해. 그래, 연인이라고 하긴 좀 그래도…. 어쨌든 너, 좋아해. 그러니까 네가 와. 아니면 날 초대해. 종종 갈게. 휴가 내지 뭐. 어떻게든 방법은 찾으면 되니까. 좋아해, 내가 널. 많이… 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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