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 (168/180)

<48>

“오랜만, 줄리오 파렌티.”

화려한 금발을 자랑하는 CIA의 마티 세르게이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다가왔다. 양손을 깍지 끼워 뒷머리에 댄 줄리오가 천천히 돌아섰다. 키가 비슷한 두 남자는 정 반대되는 색을 띠었다. 세르게이를 마주한 줄리오의 눈빛이 싸늘하게 벼려진다.

“CIA도 할 일이 없나 보군. 나 같은 선량한 시민을 쫓아다니는데 시간을 버리는 걸 보니.”

“으음, 너처럼 맛있는 먹잇감이 어디 있다고. 1년을 따라다녔지만, 너만큼 탐나는 먹이는 본 적이 없어.”

“미안하지만, 이번엔 잘못 짚었군. 세르게이.”

줄리오의 입꼬리가 산뜻하게 호선을 그린다.

세르게이는 홍콩의 군인들과 경찰들에게 둘러싸인 상태에서도 여유로운 줄리오 파렌티를 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실은 동요하고 있었다.

누군가 정보국의 신호를 조작했다. 또한, 군부대와 특공대의 신호를 교란시켜 이곳으로 이끌었고 건물 내의 주차 타워를 타깃으로 설정했다.

체포 대상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국제적인 테러리스트. 테러리스트는 동양인 여자 1명을 인질로 잡고 있으며, 큰 부상을 입은 상태라는 정보가 들어왔다.

문제는 정보의 출처였다. CIA 내부에서 넘어온 건 확실한데, 본능적인 촉이 위험한 정보라며 경고를 했다.

“데이비드 메이어가 죽은 지 1년이야. 그놈이 소유했던 무기들을 모두 네놈이 넘겨받았다는 소문이 있어. 그게 아마, 리터급 잠수함 40척만큼의 양이라지?”

줄리오는 뚜렷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 돌아보았을 때와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세르게이를 응시하며 계속해 보라는 듯 눈썹을 비스듬히 치켜세웠다.

“괜찮다면, 내 궁금증을 풀어야 겠….”

“잠깐, 잠깐, 잠깐! 어이어이, 세르게이! 줄리오 파렌티는 용의자가 아니라 증인이야!”

두 남자의 살벌해지는 분위기에 게빈 스미스가 끼어들었다. FBI 배지를 경찰들 앞에 내밀자 어리둥절해하던 이들이 하나둘 총구를 내린다.

“마피아가 FBI의 증인이 된다고? 미쳤군.”

“CIA는 빠져. 어차피 너희는 안 돼. 다른 때면 몰라도 이번엔 시기가 안 좋아.”

“공을 혼자 차지하겠다?”

“난 에드워드 리우만 잡으면 돼!”

“그럼 줄리오 파렌티와 저기 있는 핫 가이는 나한테 넘기지그래.”

게빈은 세르게이가 가리킨 두이를 돌아보곤 머리털이 쭈뼛 서는 걸 느꼈다.

“이 자리에 이하나가 없는 걸 다행으로 알아. 어쨌든, 남한의 요원도 피해자야. 일이 복잡하게 얽혔어. 요점은 CIA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거야. 그러니 돌아가. 이쪽 일의 마무리는 카이스 밀러 요원에게 맡겨.”

“카이스 밀러? 새파란 해커 꼬맹이?”

“으음, 그래. 새파란 해커 꼬맹이.”

세르게이는 대놓고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여전히 머리 위에 손을 올린 줄리오의 앞으로 다가와 마주 섰다. 세르게이가 흘린 담배 연기가 시야를 뿌옇게 흐린다.

“그래도 과속 주행에 신호 위반한 벌은 받아야지, 우리 난봉꾼 씨.”

빙글거리며 하는 말에 줄리오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추방이라도 하려고?”

“네가 안고 나온 여자, 누구야.”

먹잇감을 발견한 포식자처럼 목소리에 흥미가 뒤섞였다. 이하나를 향한 호기심이다. 순간, 줄리오의 표정이 바뀌더니 양손을 내렸다. 그에 몇몇이 흠칫 놀라 장전하는 소리가 사위를 울렸다.

“뭐가 있군. 아주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나.”

세르게이의 빨간 입꼬리가 히죽 올라가자, 매끄러운 미간을 느릿하게 문지른 줄리오가 한 걸음 다가섰다.

희미한 미소를 띤 줄리오의 분위기는 피부를 칼로 베는 듯 소름 끼쳤다. 오싹함을 느낀 세르게이의 귓가에 사신의 숨결이 스친다.

“마티 세르게이, 충고 하나 하겠는데…. 나는 네가 오래오래 살아남길 바라. 진심으로.”

분명 호의에 가까운 말이건만, 세르게이는 악의를 뒤집어쓴 것처럼 불쾌했다.

빌어먹을. 그 여자가 누군데? 혹시… 소문이 사실인가?

“그럼, 이제 좀 나와주겠어? 병문안을 가야 해서. 고소장은 변호사를 통해 받도록 하지.”

두 눈을 희번덕대는 세르게이의 뒤로 검정 SUV 한대가 멈춰 선다. 세르게이를 스쳐 지나가던 줄리오는 멍하니 서 있는 이두이를 돌아보았다.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이를 앙다문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줄리오와 눈을 맞춘다.

‘끔찍하게 닮았군….’

줄리오는 고개를 까딱였다.

그와 동시에 이두이의 눈에서 큼지막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이하나의 목소리가 이어폰 너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국어라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고통에 찬 비명임이 분명했다.

줄리오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러자 눈물을 훔친 이두이가 게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스스로 차의 뒷문을 열곤 망설임 없이 올라탄다.

따라붙은 게빈이 줄리오를 소매를 붙들었다.

“파렌티! 에드워드 리우, 꼭… 넘겨. 꼭 데려와. 꼭이야. 내가 이하나 동생 이두이도 살렸고, 파티장에서 너도 살렸어. 그러니까….”

“닥쳐, 게빈. 그 자리에서 리우를 죽였으면 하나가 다칠 일도 없었겠지. 말은 바로 해. 그녀가 너를 살린 거야.”

게빈이 주먹을 말아 쥐며 탄식할 때였다.

콰광-!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건물의 모든 콘크리트가 무너져 내렸다. 찾아온 아비규환. 이하나를 빼낸 지 5분이나 지났을까? 자욱하게 일어난 먼지를 뒤로한 줄리오는 그대로 차에 올랐다.

운전대를 쥔 스테판이 하나와 똑 닮은 두이를 돌아보며 신기한 듯 눈을 빛낸다.

“와우.”

“뭡니까.”

“브라보.”

“뭐냐니까.”

이두이의 미간이 험상궂게 구겨지는 걸 본 줄리오가 짜증스러운 투로 대신 대꾸했다.

“스테판 쿠즈민, 로즈의 개. 저건 사람 새끼 아니니까 상대하지 마.”

***

‘꿈인가? 10살 때쯤인 것 같은데….’

오늘도 두이는 학교 놀이터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상대는 13살. 덩치가 크고 제법 고학년 티가 나는 언니·오빠들이었다.

유난히 화가 많이 난 날이었고, 나는 참지 못했다.

왜였을까.

두이의 이빨이 깨져서? 코피가 나서? 손가락이 부러졌었나…?

어쨌든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나 그들이 울고불고 매달릴 때까지 때려 버렸다. 그렇게 작은 주먹에 나가떨어진 언니·오빠들은 부모님과 선생님을 찾아가 나를 신고했다.

학교로 찾아온 어른들은 대체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작은 여자애한테 맞아서 우는 거냐며, 되레 자신의 아이들을 혼내곤 했다. 하지만 아닌 경우도 있었다. 내 뺨을 때린 사람은 60대 할머니였는데, 감히 제 집안의 장손을 때렸다며 코피가 날 때까지 내 뺨을 쳤다.

선생님과 다른 학부모들이 아무리 말려도 막무가내였다. 그날 이후 어른이 조금 무서워졌다.

상황이 대 역전 된 건 고등학생 때였다.

이두이는 걸어 다니는 조각상이라 불렸고, 집에는 엔터테인먼트 헌팅 디렉터들의 명함이 굴러다녔다. 어딜 가나 이두이는 시선을 끌었다. 그러자 아무도 두이를 괴롭히지 않았고 더는 내가 지켜 주지 않아도 되었다.

더는 지켜 주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

‘아파.’

하나는 눈을 깜빡였다.

헤링본 형태의 나무 살이 덧대어진 천장이 보인다. 밝은 햇살이 일렁이고 좋은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그런데 몸이 너무 무겁고 아팠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단 말은 이럴 때 쓰는 걸까?

‘목소리도 안 나와.’

편도가 부은 건지, 이유는 모르겠으나 숨만 간신히 쉴 수 있을 뿐이었다.

하나는 마지막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기계식 주차 타워 승강기 안에서 유은성과 대치를 했었다. 상처가 심했지만, 참을만했다. 그러다 총알이 난사되는 소리와 함께 줄리오 파렌티가 나타났다.

유은성에게 두 발을 쏘더니, 승강기 안으로 들어와 다짜고짜 끌어안곤 멍하니 제 이름만 부르던 남자. 그에게 녹음기를 쥐여 준 뒤, 정신을 잃었다.

그래, 정말 딱 거기까지가 기억의 전부였다.

하나는 어째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지, 힘겹게 시선을 내리떠 보았다. 그러자 침대 양옆으로 커다란 덩치의 두 남자가 보인다. 그것도 제 양손을 꼭 잡은 채 엎드려 잠든 두 남자가.

한 명은 머리카락이 아주 까맸고, 한 명은 그보다 짙은 갈색이었다.

‘꿈인가…?’

아무래도 두이 같은데….

하나는 두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눈만 깜빡였다. 그러다가 시선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침대에 비스듬히 엎드린 줄리오 파렌티가 눈을 치켜뜬 상태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어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억지로 낼 수는 있겠지만, 분명 쇳소리가 새어 나올 터.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잡고 있는 손등에 이마를 대더니, 느릿하게 입 맞추며 상체를 세웠다.

“이하나.”

하나는 배시시 웃으며 그의 키스를 받았다. 조심스럽게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남자의 입술. 그 간지러운 감촉에 입술을 축인 그녀가 다시 눈을 감자, 이번엔 부드러운 혀가 메마른 입술을 핥으며 파고든다.

특유의 끈적하면서도 집요한. 제가 좋아하는 그의 키스였다. 이내 그녀의 얼굴을 감싼 그가 시트 위에 한쪽 무릎을 올리더니 품에 가두듯 상체를 웅크렸다.

“너는 미쳤어.”

나도 알아.

키득거리며 웃을 때마다 몸 어딘가가 아팠다. 찡그리듯 웃는 그녀의 얼굴 곳곳에 입 맞추는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울리지 않게 얼마나 걱정한 건지, 창백해진 얼굴을 보자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입술을 베어 물듯 벌렸다가 오므리며 젖은 혀를 비비고, 서로의 입 속으로 깊숙하게 넣었다. 숨은 조금 찼지만, 커다란 품에 안겨 있다는 안도감에 오히려 편안함이 밀려든다.

“하아.”

숨이 벅차 살짝 입술을 뗀 순간이었다. 다시 맞붙으려는 입술 사이로 불쑥 들어온 누군가의 손. 줄리오의 입을 강하게 틀어막은 두이가 서슬 퍼런 눈빛으로 이를 갈며 말했다.

“죽고 싶습니까? 이하나한테 어딜 비벼.”

놀란 하나의 눈이 커다랗게 뜨이고, 입이 막힌 줄리오 파렌티의 눈이 위로 치켜뜨인다.

피식 웃은 줄리오는 혀를 내밀어 두이의 손바닥을 핥아 버렸다.

“아이씨!”

기함한 두이가 줄리오의 입에서 손을 떼며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미친, 뭐 하는 짓입니까!”

“핥아 달라고 들이민 거 아니었나?”

“사이코 새끼!”

“그런데 어쩌지? 내가 입맛이 고급이라, 이하나 말고는 안 먹어.”

속삭이는 듯한 줄리오의 능청에, 하나는 웃음을 터트리다 말고 배를 잡은 채 울상을 지었다. 실제로 눈물이 찔끔 흘러 줄리오의 어깨를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아…!”

그러자 사색이 된 그가 두이를 돌아본다.

두이는 곧장 밖으로 나가 의사를 불렀다. 줄리오는 힘들어하는 하나의 손을 꼭 잡으며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너, 많이 다쳤어. 내 피까지 뽑아 썼다고.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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