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 (163/180)

<43>

“줄리오! 내려와 봐야겠는데?”

문밖에서 들려온 건 로렌조의 목소리였다. 잠든 하나를 끌어안고 있던 줄리오는 싸늘한 시선으로 문 방향을 노려보곤 몸을 일으켰다.

밤새 몰아붙여서인지, 이하나는 지난번처럼 푹 잠들었다. 그는 하나의 앞머릴 쓸어 넘겨 둥근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그러며 동그란 코끝을 이로 깨물곤 할짝대듯 핥았다.

움찔거릴 만도 하건만, 그녀는 인상 한 번을 찌푸리지 않는다.

안심한 그는 시간을 확인하며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실오라기 하나 두르지 않은 몸에 대충 가운을 걸친 채 문을 열자, 앞에 비스듬히 서 있던 로렌조가 눈살을 찌푸린다.

“그 FBI 일로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던데.”

“게빈 스미스?”

“어. 근데, 거… 시뇨리나는?”

줄리오는 고개를 빼는 로렌조의 시야를 막았다. 대리석처럼 단단해 보이는 피부가 눈앞을 가리자, 히죽히죽 웃은 로렌조가 어깨를 으쓱하며 물러선다.

“빨리 내려오라고. 다들 기다리니까.”

“가.”

“알았어, 알았어.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줄리오. 내가 시뇨리나랑 좀 친해.”

“그래서. 둘이 대화라도 나눴나?”

“나눴지. 어쨌든 둘이 화해하니 좋네.”

실소한 줄리오는 몸을 들썩이며 승강기에 오르는 로렌조를 보다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하지만 불을 붙이기 전, 하나가 잠든 침대 쪽을 바라보곤 담배를 다시 케이스에 넣었다.

‘미쳤군.’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난다.

대충 샤워를 마치고 옷걸이에 걸린 옷으로 갈아입은 그는 방을 나서며 달칵, 라이터를 켰다.

필터 끝이 타들어 가는 소릴 내며 흰 연기가 복도를 채운다.

방문이 단단히 닫힌 걸 확인한 그는 피식 웃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빌어먹을 개자식이라니.”

참아 보려 해도 큭큭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온다. 승강기 버튼을 누른 그는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간질거리는 감각에 목울대부터 가슴까지 문지르듯 쓸어내렸다.

***

나갔다.

하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옅은 샴푸 냄새만 떠도는 방 안엔 어떠한 기척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몸을 일으킨 그녀는 뻐근한 목을 좌우로 푼 뒤, 속옷과 셔츠를 차례로 입었다.

머리끈을 이로 문 채 긴 머리를 올려 묶는 그녀의 눈길은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구룡반도에 닿아 있었다.

이어, 침대 아래 손을 넣어 휴대전화를 꺼낸 그녀가 부재중 표시 여섯 건을 확인한 후 심호흡했다.

두이의 전화번호를 아는 사람은 임무 투입 전 번호를 공유했던 로건 뿐이다.

아무리 자본주의의 노예라고 해도, 그녀에게 로건은 구원자이자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다. 물론 아버지란 단어를 말할 때마다 로건은 기겁하며 부정했지만, 싫어하진 않았다.

하나는 두이의 플립폰으로 로건의 번호를 눌렀다.

두 번의 신호가 흐르고 전화를 끊은 뒤, 다시 걸어서 두 번 울린 후 또 끊었다.

그리고 세 번째. 통화 연결음이 들리기도 전에 상대가 전화를 받는다.

[One.]

“로건, 나한테 할 말 있죠?”

다짜고짜 던진 물음에 수화기 너머에서 앓는 듯한 한숨 소리가 들린다. 하나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신발을 찾아 신었다.

[진이 너를 원해. 널 데려오라더군.]

“두이는요.”

[좀 다치긴 했지만, 괜찮아. 정신도 멀쩡하고. 무슨 생각인진 모르겠는데, 움직이기도 해.]

“왜 다쳤어요?”

[어, 그게…. 첫 번째는 교통사고. 두 번째는 뭐….]

“팼구나.”

[뭐, 그렇지…? 아, 근데 말리다가 오슬로가 크게 다쳤어. 갈비뼈가 나갔는데, 문제는 폐를 건드렸나 봐. 지금은 병원에 있어.]

오슬로까지 다치다니.

하나는 머리 꼭대기까지 치미는 분노를 꾹꾹 눌렀다. 구역질이 날 것 같지만, 지금 터트릴 분노가 아니다. 제 손으로 강무진의 그 잘난 낯짝을 만신창이로 만들어야만 이 화가 풀릴 거란 걸 안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숨을 고른 그녀는 팔을 돌리고 다리를 굽혔다가 펴며 몸을 풀었다.

“그럼, 오슬로 빠지고 누가 들어옵니까?”

[현재는 제이미. 그리고 EOD로 알렉이 대기 중이야.]

“음, 좋아요. 충분합니다. 그리고 이쪽에도 변수가 있어요. 줄리오 파렌티는… 이 계획에서 빠집니다.”

[뭐?]

상당히 놀랐는지 살짝 음이 어긋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반응을 예상했던 터라, 하나는 계속해서 방을 돌며 굳어 버린 몸을 푸는 데 집중했다.

“아주 빠진다는 게 아니에요. 파렌티는 최후의 보루로 씁니다. 파렌티는 이탈리아노지만 미국의 사업가예요. 그래서 FBI가 붙었는데, 두이 때문에 CIA까지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자칫했다간, 파렌티가 위험해요. 아니…. 다 뒤집어쓸지도 모릅니다. 그 꼴은 못 보겠어요.”

[하! 빌어먹을…. 그놈이 CIA였군. 세르게이… 개새끼. 그래서, 작전은?]

하나는 문밖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소리를 줄였다.

수화기의 마이크 부분을 톡톡 두드리자, 로건 역시 숨을 죽이곤 대답을 기다렸다.

“저예요, 장세이.”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안심한 하나는 문을 열었다. 그러자 밖을 지키던 놈들에게 생긋 웃어 보인 장세이가 방 안으로 들어선다.

장세이의 양손엔 명품 로고가 박힌 쇼핑백이 잔뜩 들려 있었다. 하나는 문을 닫은 뒤 잠금쇠를 돌렸다.

“작전은 별거 없습니다. 500m 전방, 스피드 보트 대기시키시고…. 운동화랑 셔츠 한장, 주 화기와 보조 화기, 탄창 세 개 준비해 줘요. 나이프는 내 쪽에서 준비할 겁니다. 그리고 몸에 칩을 심을 거예요.”

[칩?]

“강무진 개새끼가 생각보다 영악해서, GPS 달고 가는 꼴 못 볼 거 뻔하거든요.”

하나는 쇼핑백 안에 든 물건들을 꺼낸 세이를 향해 돌아섰다.

세이는 긴장한 표정으로 주사기를 들고 대기 중이었다. 한쪽엔 체온 유지용 스윔 슈트와 방수형 배낭, 비상시를 대비한 각성제까지. 다양한 것들이 놓여 있다.

[위험할 거야. 각오했어?]

“지금 그 말, 들을 상대가 잘못된 것 같은데. 나 이하나예요. 벌써 치매 왔습니까?”

[딸 같아서 그래, 딸. 딸이 죽을까 봐 사소한 걱정을 하는 거지.]

“닥쳐요, 로건. 오글거리니까. 내가 도착할 때까지 두이… 잘 부탁해요.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해요.”

숨을 고른 하나는 세이에게 허벅지를 내밀었다. 그러자 제법 두꺼운 캐뉼라를 꺼낸 장세이가 피부에 마취를 하려 했다.

하나는 고개를 저은 후 다시 까딱였다. 마취는 필요 없다는 뜻. 칩 이식용 캐뉼라는 제법 두껍기에 지혈에도 시간이 걸린다.

장세이는 마취제 대신 지혈제를 꺼냈다.

[좋아…. 오랜만에 너랑 일하는데, 이 정도 스케일은 돼야지. 그리고 말인데, 스피드 보트가 아니라 헬기가 갈 거야. 정확하게 500m 전방.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One.]

하얗다 못해 창백해 혈관의 색이 드러나는 허벅지에 두꺼운 캐뉼라가 박힌다.

울컥 새어 나온 피가 허벅지를 타고 흘러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GPS 기능이 탑재된 얇고 긴 칩이 그녀의 피부에 이식되었다.

하나는 입술을 꽉 깨문 채 급히 지혈제를 뿌리는 장세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럼, 작전 시작은?]

임신한 몸으로 피를 보는 건 힘들 텐데….

하나는 덜덜 떠는 세이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곤 긴장으로 굳은 얼굴을 응시하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씩 웃어 보였다.

“32분 뒤, 내 머리 위에 헬기가 있어야 할 겁니다.”

[오케이.]

“아, 그리고 하나 더. 강무진은 내가 죽여요. 아무도 건드리지 마.”

[알았다고. go.]

심드렁하게 전화를 끊은 하나는 세이의 손에 묻은 피를 닦아 주었다. 그러자 장세이가 기도하듯 양손을 모으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부정의 제스처가 아니란 듯, 이어 정신을 차리려는 것처럼 양손으로 뺨을 툭툭 때렸다.

“제가 피에 좀 예민해서요. 미안해요. 칩은 이하나 씨가 물에 들어가는 순간 가동해요. 어디서든 추적할 수 있으니 걱정 마요.”

“고마워요. 도와줘서.”

“말했잖아요. 도와주고 싶다고. 아, 줄리오가 알면 날 죽이려 할 텐데. 유리한테도 혼날 거 같고.”

“줄리오가요?”

하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세이가 가져온 슈트에 몸을 넣었다. 꽉 조이는 전투용 슈트. 적어도 헤엄치는 동안 저체온증은 오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 만큼 좋은 재질이었다.

“진짠데…? 이하나 씨, 줄리오가 제대로 화내는 거 본 적 있어요?”

“글쎄요. 항상 화내지 않나?”

“뭐, 그 말도 맞는데…. 어쨌든 눈 뒤집고 날 죽이려 할거예요. 이하나 씨를 위험하게 만들었다고. 나, 그거 각오하고 도와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절대… 죽지 말아요.”

하나는 머쓱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세이와 따로 만난 건, 풀 가장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때였다. 줄리오가 어디에 있는지 물은 장세이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숨도 쉬지 않고 읊었다. 그러며 뭔가 도울 수 있냐는 말을 할 땐 절박함까지 느껴졌다.

‘당신의 남편이 곤란해질 텐데요.’

‘그이는 나한테 못된 소리 못해요. 죄책감을 갖고 있거든요. 그리고 난 이하나 씨가 꼭 가족을 구했으면 좋겠어요. 죽지 않았으면 해요.’

그래서 위치 추적기와 스윔 슈트, 무기를 부탁했다. 이왕이면 피부에 이식할 수 있는 추적기가 필요하다고 말하긴 했지만, 이렇게 바로 준비될 줄이야.

“전 한국에서 죽을 거예요. 꼬부랑 할머니 돼서요. 걱정 마요.”

슈트의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린 하나는 배낭을 메고 끈을 틈 없이 조였다. 온몸이 새카만 탄성 가죽에 감싸인 여자는 검정 대리석을 조각해 놓은 듯 단단해 보였다.

넋을 놓고 하나를 보던 세이가 눈을 반짝인다.

“회의 끝나기 8분 전이에요. 스테판한테 부탁해서 엄호하라고 했으니까, 당신 집착남이 알아채기 전에 빨리 튀어요.”

짐짓 가벼운 말투였으나 장세이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하나는 손목과 발목을 가볍게 푼 뒤, 세이와 악수했다. 또 보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방에 난 창문을 열자 배의 속도가 현저히 줄어든 게 느껴졌다. 엄청난 높이다. 이곳에선 뛰어내릴 수 없다. 적어도 1층 갑판까진 내려가야 했다.

“후….”

오랜만에 숨 좀 차겠네.

몸을 낮춘 그녀가 한쪽 손으로 바닥을 짚은 후 머릿속으로 숫자를 셌다.

지그재그로 연결된 테라스의 개수는 38개. 그중 세 개를 제외하면 100초 안에 35개의 테라스 난간을 거쳐야 한다.

숨을 고르는 그녀의 눈빛이 싸늘하게 벼려졌다.

줄리오 파렌티는 끌어들이지 않는다.

애초부터 그렇게 해야 했다.

처음부터 악마의 손 같은 건 잡지 말았어야 했다.

그래야 이 마음이 무사할 거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너무 늦은 것 같지만….

시퍼런 바다를 노려보던 하나는 머릿속에서 신호가 떨어짐과 동시에, 아래로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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