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 (158/180)

<38>

누군가에게 홀린다는 것은 위험하다. 위험하다 못해 무서운 것이었다.

하나는 따라 들어오려는 줄리오에게 경고한 뒤, 방문을 잠갔다. 다행히 호텔 방엔 두 개의 별실이 있었고, 그녀가 들어온 곳은 서재로 사용되는 곳이었다.

분명, 뿌리칠 수 있었다. 아예 안아 들지 못하게 막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고작해야 어깨를 깨무는 것 말고는 하지 못했다.

뿌리치지 않았다.

그녀는 마른세수하며 천천히 방 안을 맴돌았다.

줄리오 파렌티는 위험한 남자다. 그와 깊은 관계가 되면 안 되는 이유를 작성하고자 한다면, A4용지 10장을 가득 채울 수도 있었다.

지금이야 나름 마음이 잘 맞아 섹스도 하고 키스도 하지만, 깊은 관계가 될 생각은 결단코 없다.

그런데 왜, 고민하고 있는 걸까. 어째서 피가 배어 나오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한발 물러서게 되는 걸까.

첩보 교육을 받으며 가장 경계해야 할 감정으로 동정을 꼽았고, 그다음은 애정이었다. 하지만 줄리오 파렌티에겐 둘 다 해당되지 않았다.

버림받은 개새끼라서?

잘생긴 쓰레기라서?

사연 있는 악당이라서?

“아악, 씨발! 진짜….”

줄리오 파렌티가 두이를 해치려 한다면 망설임 없이 그를 쏠 수 있다. 여전히 그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문제는 그 외의 경우다. 만약 그가 제게 총을 겨누는 일이 생긴다면, 그땐 어떤 생각을 제일 먼저 하게 될까.

분노? 실망? 경악?

‘게다가 갑자기 유은성을 왜 해고해?’

장세이가 준 사진 속 강무진의 이미지가 묘하게 유은성과 겹쳐졌다. 헤어스타일이나 옷차림은 달랐지만,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분위기가 닮았다. 만약 같은 동양인이 아니었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터. 그래서 곁에 두고 감시하려 했다.

하지만 줄리오는 유은성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대체 왜일까.

“하나.”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문밖에서 들려온 줄리오의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졌다.

“왜.”

“문 열어.”

“싫어.”

“정중하게 부탁하지. 제발, 열어.”

제발이란 단어는 반칙이다. 게다가 마스터키를 가진 남자가 제게 애원하는 것 자체가 우스웠다.

처음 만났을 땐 마치 찔러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굴어놓곤….

그래, 이런 마음이 문제다. 자꾸만 과거와 비교하려는 태도야말로 가장 위험한 행위였다.

차라리 아주 태연하게 굴까? 그냥, 제게 무슨 짓을 하든 신경조차 쓰지 말고?

그때였다.

닫힌 문을 노려보던 그녀의 귓가에 작은 진동음이 들렸다. 충전기와 연결해 둔 두이의 휴대전화였다.

하나는 서재 구석에 놓인 플립폰을 찾아 다급히 열었다.

[00:01]

메시지가 아니었다. 음성 전화다.

“두이야!”

그녀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해외 서버를 이용하는지 한 박자 늦게 두이가 말을 한다.

[누나!]

“이두이. 너… 두이 맞아?”

[이하나, 너 어떻게 된 거야. 왜 누나가 여기 있어!]

“너, 이 새끼…! 야!”

하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진다. 바닥으로 주저앉아 버린 그녀는 휴대전화를 두 손으로 움켜쥔 채 덜덜 떨었다.

“살아 있는 거지? 응?”

[누나, 당장 거기서 나와. 줄리오 파렌티는 마피아야!]

“내가 그걸 몰라? 너야말로 어떻게 된 건지 빨리 말해. 빨리!”

[안 돼. 회선 도청당하고 있을 수도 있어. 최태준 새끼가 나 죽이려 했고, 그걸 도운 게 강무진이야.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 나, 지금 저쪽 애들 타깃이라 못 움직여. 누나가 움직일 수 있겠어?]

“좌표 불러.”

[22/31/9/83]

하나는 두이가 말해 준 좌표를 외웠다. 물론 이것은 암호였다. 지도를 펴고 다시 확인하기 전까진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는.

“지금 당장 갈 테니까, 기다려.”

[하, 미치겠네…. 근데 나 찾겠다고 한국 뜨면 어떻게 해. 다치면 어쩌려고!]

“너 죽었다잖아! 근데 아니었잖아. 너 건드린 새끼들, 내가 다 죽일 거야. 그러려고 온 거야.”

음성이 부들부들 떨리고 두이의 목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두이의 울음 참는 소리에 가슴이 미어졌다.

[씨…. 이하나, 존나 보고 싶다. 씨발….]

“지금 가. 기다려.”

[다치지 마. 위험하다 싶으면 무조건 피해. 오지 말고 숨어. 알았지?]

“너, 내 걱정할 때 아니야.”

하나는 조금만 기다리라며 계속해 읊조렸다. 하지만 통신이 끊어진 건지, 이내 수화기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탄식했다. 그래도 두이의 생사를 확인한 것만으로 지금까지의 마음고생을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수화기를 품에 안은 채 숨죽이고 앉아 있던 하나의 등 뒤로 커다란 그림자가 진다. 고개를 틀자 자신을 내려다보는 줄리오가 보였다.

콧물을 훌쩍인 그녀가 눈가를 훔치며 벌떡 일어서자, 앞을 막아선 그가 물었다.

“동생?”

“응. 비켜, 나 지금 가야 해.”

“어딜.”

“두이한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조용히 다녀올게.”

“같이 움직이지.”

“안 돼. 넌 너무 눈에 띄잖아.”

“걱정 마. 눈에 안 띌 테니. 그리고….”

하나는 뺨에 닿는 손길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눈물로 범벅된 눈가를 문지른 그가 그녀의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벌렸다.

“뭐해?”

“혀 깨물었잖아, 아까.”

“아….”

그의 어깨를 깨물다가 실수로 혀를 씹었다. 셔츠를 물들인 피는 그녀의 것이었다. 그럼, 설마 아까부터 그걸 확인하려 했던 건가?

하나는 다른 방향으로 상념이 흐르는 걸 막으려 고개를 저으며 그를 밀어냈다. 그러곤 방에서 나가 클로젯을 열어 검은 옷들을 하나씩 꺼냈다.

검은 레깅스, 운동화, 셔츠와 모자. 그리고 마스크까지. 서슴없이 입고 있던 옷을 벗고 갈아입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가 한숨을 내쉬더니, 바로 옆에 있는 도어를 연다.

그 안에는 따로 부직포 케이스에 덮여 있는 옷걸이가 있었다. 몸에 딱 붙는 블랙 반폴라 셔츠에 블랙 진, 검정 운동화와 모자까지. 그녀와 맞춘 듯 똑같았다.

“브리오니만 입는 줄 알았는데?”

“브리오니에서 맞춘 거지. 블랙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은 그녀가 셔츠에 머릴 넣자, 그가 머리카락을 빼 주었다.

“진짜 같이 가게?”

“너 혼자는 못 보내.”

“내 동생이 너 죽일지도 몰라.”

“너랑 닮은 얼굴이 있다는 게 신기하군.”

“말 돌리기는.”

하지만 진심이었다. 이두이는 자신과 달리 정의로운 사람에 가까웠다. 그런 이유로 범죄의 뿌리나 마찬가지인 마피아를 경멸했다.

그런데 제가 마피아의 카포와 함께 나타난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럼 근처까지만 같이 가. 망봐 줘.”

마피아에게 망을 봐 달라는 부탁을 하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을 것이다.

줄리오는 대답하지 않은 채, 한 꺼풀씩 옷을 벗었다. 하나는 머리를 모아 올려 묶으며 그의 어깨에 난 잇자국을 슬쩍 보았다.

“나, 궁금한 게 있는데. 갑자기 생각난 거거든. 처음 욕실에서….”

“섹스했을 때?”

“아니! 넌 머리에 그 짓밖에 없어?”

“그럼 뭐.”

“에이씨…. 내가 동생 찾아 달라고 했을 때. 왜 진지하게 받아 줬어? 억지 부린 거나 마찬가지였잖아. 그리고 그 FBI 동생… 네가 죽인 거 아니라며. 네 부하가 그런 거라며.”

줄리오는 딱 붙는 셔츠에 머릴 넣었다. 군살 없이 탄탄하고 넓은 어깨, 보기 좋게 자리 잡은 근육질의 몸이 검은색 셔츠 위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나는 거리낌 없이 그의 몸을 더듬었다. 자신은 근육이 잘 붙지 않는 체질이라, 이렇게 예쁜 몸을 보면 항상 만져 보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그러니까, 다른 의도가 없었다고 다시 한번 강조한다.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여자애들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것처럼 자동으로 손이 간 것뿐이다. 한데 울퉁불퉁한 등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돌아본 그가 손을 잡아 자신의 배를 확 끌어안게 했다. 얼결에 그에게 백허그하게 된 그녀가 고개를 들자, 검은색 모자를 눌러쓰는 모습이 보였다.

“대답하기 싫구나?”

“재밌는 얘기가 아닐 텐데.”

“그래도 듣고 싶어. 궁금해. 가끔 널 보면, 소문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거든.”

깊은 챙 아래 갈색 눈동자가 얼핏 부드러워진 느낌이다. 하지만 그 눈빛은 이내 차갑게 변했다.

“어머니가 있었어. 나를 낳아 준, 검은 머리카락에 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가.”

가죽 장갑까지 낀 그가 그녀를 의자에 앉히더니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하나의 운동화 끈을 다시 묶어 주며 말을 이었다.

“여자에겐 정부가 있었어. 러시아에서 온 노동자였고, 둘은 매일 같이 붙어먹었지. 아버지는 알면서도 그 여자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용서했어. 그런데 내 동생은 그러지 못했고… 결국, 여자의 정부에게 살해당했지. 고작 열일곱 살이었어. 이름은 플라비오 파렌티.”

그는 그녀의 발목부터 종아리를 손바닥으로 쓸어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충격받은 그녀의 눈동자가 분노로 흔들린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목을 그어 거꾸로 매달아 놨더군. 그것도 예배당 앞에. 그걸 발견한 게 나였어. 용서할 수 없었고, 나는 그 러시아 놈을 죽였지. 사지를 자르고 두개골을 박살 냈어. 그런 다음 러시아에 있는 그놈 집으로 보냈지. 그 가족들이 충격받아 슬퍼하길 바라며.”

“여자는….”

“제 아들을 죽인 놈과 계속 붙어먹던 여자? 흐음… 플라비오와 똑같이. 아니, 더 고통스러운 죽음을 선물했어. 몸의 피가 모두 빠질 때까지, 거꾸로 매달아 두고 칼로 조금씩 찔렀지. 살려달라고 빌더군. 하지만 용서하지 않았어. 쇼크 상태인 여자를 들개 밥으로 던져 준 뒤에야 그 삶이 불쌍해 보이더라.”

하나는 천천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하나. 나는 용서를 몰라. 난 살인자이자 범죄자야. 넌 상상도 하지 못할 범죄를 죄책감 없이 저질러 왔어. 대답을 듣고 나니 어때. 날 경멸하게 됐나?”

솔직히 말하면 조금 두려웠다. 그러나 경멸은 아니었다. 그저 남자의 본질을 확인한 것뿐.

그래서였나? 처음 만난 트레일러 안에서, 그는 말했다.

‘Ho aspettato. La mia morte.’

기다리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사람처럼 다가왔다.

몸을 일으킨 그가 손을 내민다. 하나는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며 스스로 몸을 일으키곤 테이블에 올려 둔 모자를 눌러썼다.

“경멸하는 건 아니지만, 동정하는 것도 아니야. 그럼 네가 검정 머리에 과민 반응을 보이는 게 로즈 때문만은 아니란 건가?”

“로즈는….”

말문을 잇지 못하는 모습에 동생 이야기를 들을 때보다 더 숨이 막혔다. 줄리오는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며 미간을 좁혔다.

그에 하나는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미소 지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다행이야. 네가 내게 맹목적이지 않아서. 난 네가 만난 여자 중 스쳐 지나간 1인으로 남고 싶거든. 어쨌든 가자. 이번에야말로 내 동생 찾으면, 우린 이틀 내로 바이바이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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