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 (151/180)
  • <31>

    은성은 꺼냈던 총을 다시 넣으며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하마터면 하나의 목을 조르던 키릴 쿠즈민의 머리통을 날릴 뻔했다.

    그는 이를 갈며 줄리오의 가슴팍에 기대 있는 하나를 응시했다. 저 여자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정말 줄리오 파렌티를 사랑하기라도 해? 아니면 가벼운 섹스 파트너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것도… 목숨을 걸고?’

    은성은 지독한 짜증을 누르며 걸음을 내디뎠다.

    ‘빨간 나비넥타이라고? 이런….’

    이하나가 거짓말을 했다는 건, 상대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뜻.

    너무 뻔하다. 제 동생에게 맹목적이라는 것이 복잡한 여자를 뻔하게 만들었다.

    빨간 나비넥타이를 맸다는 것이 거짓이라면, 이하나는 과연 누구를. 어떤 모습을 보고 이두이 사건의 관련자라고 확신한 걸까.

    ‘아니면 혹시 이두이 본인을 발견한 것은 아닐까.’

    은성의 걸음에 힘이 실렸다. 선박의 내부는 눈 감고도 다닐 만큼 훤했다.

    시끄러운 음악과 각국의 언어로 떠드는 사람들. 누군가는 이미 취했고, 구석에선 벌써부터 거래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들을 뒤로하고 2층으로 향하는 내내 누구도 은성을 막지 않았다. 선박 내의 경호원은 모두 발렌타인 데이의 요원들이다. 의뢰인의 얼굴을 모를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은성이 나타나자 무료한 표정이던 이들의 낯빛이 굳는다. 그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운 채 최고 보안실의 문을 열었다.

    전면, 수백 개의 감시 카메라 화면이 시시각각 바뀐다. 내부를 지키고 있던 이들이 일어나 은성의 등장에 의아함을 표했다.

    그중 유일하게 은성을 알아본 본부장이 다급히 다가와 허릴 숙인 뒤에야, 다들 갑작스레 나타난 남자의 정체를 짐작했다.

    “타깃은?”

    은성은 곧장 휠을 움직여 사각지대를 없앤 후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아직 딱히 움직임은 없습니다.”

    “웨이터를 찾아야 합니다. 웨이터 명단과 사진이 든 자료부터 주세요.”

    “예.”

    진짜의 등장에 다들 정면을 응시하고 있지만, 돌아보고 싶어 안달하는 티가 났다.

    은성은 의자를 당겨 앉으며 테이블에 팔꿈치를 댔다. 양손을 모아 턱을 올리자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던 가짜 강무진이 오슬로에게 귓속말을 한다. 한없이 가짜 권력에 취해 있을 줄 알았건만, 놈은 제법 참을성이 좋았다.

    은성은 본부장이 가져온 노트북을 열어 웨이터들의 사진을 하나로 모았다. 대략 280명의 직원 중 웨이터의 수는 80여 명.

    이제 숨어든 쥐새끼를 찾을 시간이다. 그러다가 그는 잊었던 무언가를 상기한 듯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미처 울리기도 전,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유은성의 눈빛이 짙어지고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접니다. 최태준, 끝내요.”

    ***

    오슬로를 찾아냈다.

    하나는 오슬로의 곁에 서서 주위를 관망하는 남자를 관찰했다. 유은성은 저 남자가 강무진이라 했고 장세이는 가짜라고 했다.

    하지만 진짜 강무진이 아니라면, 오슬로 같은 특수 용병이 경호를 나설 리 없지 않은가?

    전부 함정 같고 모든 것이 거짓말 같다. 불신 지옥에 빠진 것처럼 숨 쉬는 것마저도 의심스러웠다.

    하나는 제 곁에 껌딱지처럼 붙어 있는 줄리오에게 말했다.

    “지금 그쪽, 나한테 도움 안 되는 거 알아?”

    “무진이라는 남자인가? 저 남자가?”

    “50 대 50이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족치면 되겠군. 입에 총구를 밀어 넣으면 다 말하게 되어있어.”

    말도 안 되는 무식한 방법을 쓰기 위해선, 발렌타인 데이의 요원들과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의미.

    하나는 급히 줄리오의 앞을 막았다. 그러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이 가늘게 좁혀진다.

    “그냥, 기다리면 안 돼? 내가 알아서 하게.”

    “네게 맡기면 죽일 것 같은데.”

    “안 죽여. 물론, 진짜 강무진이라면… 죽일 수도 있지만. 두이를 어떻게 했는지 듣기 전까지는 참을 거야.”

    그러잖아도 줄리오와 대화하고 싶어 몸이 닳은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줄리오 파렌티는 위험한 마피아지만, 수완 좋은 사업가이기도 했다. 그들을 향해 느긋하게 웃어 줄 줄 아는 매력적인 남자가 대외적인 줄리오 파렌티였다.

    하나는 흘끔대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니까 넌 저 눈들이나 처리해. 아주 꿀이 뚝뚝 떨어지네. 부담스럽게.”

    “로렌조와 함께 가.”

    “쟤가 날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적어도 너 혼자인 것보다는 낫겠지.”

    그는 여전히 키릴과의 해프닝을 마음에 두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로선 각오했던 일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 적을 늘리지 않기 위해 PMC 일을 그만둔 것이기도 했으니까.

    그때 로마노가 다가와 줄리오의 귀에 무어라 속삭였다. 그에 차갑게 인상 쓴 그가 옆머릴 짜증스럽게 쓸어 넘기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뭘 해도 좋지만, 내 시야에서 사라지진 마.”

    “왜, 걱정돼?”

    일부러 농담을 하듯 던진 질문이었건만, 그는 다소 진지한 투로 대답했다.

    “네 동생을 찾아야지. 안 그래?”

    두이를 찾을 때까진 죽지 말라는 뜻이다.

    하나는 생긋 웃으며 지나가던 웨이터가 서빙하는 샴페인을 들었다. 아무리 선상 파티가 호화롭다 한들, 그녀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까치발은 든 하나는 줄리오의 뺨에 입술을 누르며 속삭였다.

    “너나 살아남아. 나보다 더 위험한 남자잖아.”

    순간, 가느다란 허리에 남자의 팔이 감겼다. 뺨에 키스한 후 물러나려던 그녀의 입술에 포개진 숨결. 샴페인 향이 그득한 키스였다. 립스틱이 번지는 걸 개의치 않는 불한당. 하나는 깊어지는 입맞춤에 그의 입술을 깨물어 버렸다.

    살짝 떨어진 거리에서 올려다보는 눈빛은 정말이지 최고였다. 강하고 매력적인, 악당. 그는 마치 프랑스의 예술가 알렉상드르 카바넬이 창조한 타락 천사의 단면처럼 보이기도 했다.

    “너, 잘생겨서 봐 주는 거야.”

    “이제 곧 이 얼굴과 바이바이 해야 하는 게 아쉽겠어.”

    “아니. 한국에도 잘생긴 남자가 많아서.”

    “너랑 붙어먹을 놈도 있나?”

    “찾으면, 아마도?”

    “리우 같은?”

    “뭐, 리우도 괜찮은 남자긴 하지.”

    “나흘이야. 나흘 안에 네 동생을 찾아. 내가 이유 없이 실종 상태라 알려진 유리 페트로프를 끌어들였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놈은… 너와 내가 몇 번이나 키스했는지도 알고 있을 놈이거든. 네 몸에 있는 장신구도 전부 그놈이 만든 거야. 이미 넌 감시망에 올랐다는 뜻이니까, 누구 함부로 죽이지 말고 진정해.”

    끝까지 사람을 살인마 취급하는 게 썩 내키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나는 이 감정을 전우애로 명명했다. 다른 감정을 덧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일반적인 전우애와는 다소 다르지만, 그가 자신을 신뢰하게 되었으므로 계획은 성공하였다.

    “로렌조는 필요 없어. 방해만 돼.”

    돌아선 하나는 자신을 경악스러운 얼굴로 응시하는 오슬로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오슬로의 곁에 있는… 일단 가짜 강무진이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튼다. 빤히 쳐다보는 눈빛이 흔들린다고 느낄 때쯤, 누군가와 부딪친 그녀는 자신의 드레스 위로 샴페인을 왈칵 쏟았다.

    “꺅!”

    화들짝 놀란 가짜가 성큼성큼 다가온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을 내밀었다.

    “괜찮습니까?”

    하나는 가짜가 내민 손수건을 받아 들고 울상이 되어 뇌까렸다.

    “괜찮아요. 근데…. 하, 이게 뭐야! 얼마나 비싼 드레스인데.”

    “혹시… 한국인?”

    가슴의 반을 내놓은 채 샴페인을 닦던 그녀가 고개를 들자, 제 가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남자가 자연스럽게 미소 짓는다.

    “네. 혹시 그쪽도 한국인이세요?”

    “예, 한국인입니다. 이 배의 주인이죠.”

    “아!”

    하나는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환해진 얼굴로 젖은 손수건을 내밀었다. 조금 전까지 제 가슴을 헤집던 손수건이었다.

    “언니를 만나러 온 건데, 이상한 외국인이 갑자기 키스를 해서 도망치던 중이었어요. 죄송한데… 저 좀 잠깐 숨겨 주시겠어요?”

    “정말입니까? 누구죠?”

    “저 남자요.”

    하나는 손끝으로 줄리오를 가리켰다. 그에 오슬로가 가짜의 귀에 속삭인다. 줄리오 파렌티의 정체를 알려 주는 듯 보였다.

    일순 낯빛을 굳힌 남자가 하나의 손을 불쑥 잡더니, 계단 방향을 가리켰다.

    “2층에 개인실이 있습니다. 이 파티, 썩 즐겁지 않아서 그런데…. 저랑 같이 가실래요?”

    세상에. 어쩜 이렇게 바라고 바라던 제안을 먼저 해 주는 건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러고 싶어요.”

    그러며 은근한 미소를 흘리자 식은땀을 흘린 오슬로가 마른세수하는 게 보였다.

    하나는 가짜의 팔짱을 꼈다. 그러곤 자신을 스캔하는 오슬로를 째려봐 준 뒤, 걸음을 내디뎠다.

    “저 남자는 줄리오 파렌티라고 하는 이탈리아 마피아입니다. 검은 머리카락의 동양인 여성에게 비정상적인 판타지를 갖고 있죠. 잘 도망쳤어요. 1층으론 내려가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개인실에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카메라가 설치된 중앙엔 소파가 있었고, 창문이 있긴 하지만 밖에서 안이 보이진 않았다.

    하나는 부러 오슬로를 흘끔대며 무서운 척했다. 그러자 가짜가 오슬로에게 눈짓한다. 문 앞을 지키라는 뜻.

    그에 오슬로는 그녀를 빤히 보며 보일 듯 말듯 고개를 저었다. 가짜라는 걸 알려 주려는 듯한 태도에 하나는 씩 웃었다. 그러곤 눈을 다섯 번, 정해진 속도로 깜빡였다.

    그것은 오슬로와 함께 일하던 시기에 썼던 신호로, 모두 알아들었다는 뜻이었다.

    다소 놀란 표정의 오슬로가 부하들과 함께 개인실을 나선다. 하나는 드디어 가짜와 둘만 남았다.

    소파에 앉아 젖은 앞섶을 만지작거리자, 색이 예쁜 로제 샴페인을 새로 가져온 가짜가 묻는다.

    “가운을 빌려드리죠. 그 옷은 제가 사람을 시켜 세탁해 가져오라고 하겠습니다.”

    “아, 그래 주시겠어요? 하지만… 너무 신세를 지는 건 아닌지.”

    “괜찮습니다. 같은 한국인이 곤란에 처했는데, 그냥 넘어갈 수 없잖습니까.”

    짐짓 매너 좋은 투로 말한 남자가 그녀의 옆에 앉더니 자연스럽게 소파 등받이를 둘렀다.

    이놈, 룸살롱에 자주 드나든 티가 나는데?

    “그럼, 부탁드릴게요. 저 가운을 입고 있으면 되나요?”

    하나가 일어서자 남자가 불쑥 손을 잡았다. 손목 안쪽을 엄지로 문지르는 본새가 제법이다.

    “샤워도 할 수 있는데.”

    “샤워까진 괜찮아요.”

    “설마 내가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요? 숨겨 달라고 한 건 그쪽입니다.”

    “저… 이 배의 주인이라고 하셨죠.”

    하나는 천천히 그의 무릎 사이로 들어가 섰다. 벌써부터 흥분한 건지, 남자의 가슴팍이 천천히 들썩이고 있었다.

    “강무진입니다.”

    “이상하네. 제가 언니를 찾으러 왔다고 했잖아요. 한데 실은… 언니가 그랬거든요. 자신은 애인을 만나러 왔고, 그 남자가 바로 이 배의 주인이라고. 강무진이라고 했어요.”

    순간, 남자가 눈에 띄게 당황해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상체를 숙였다.

    “우리 언니가… 나쁜 남자를 만나고 있었나 봐요.”

    “아, 그게….”

    “괜찮아요. 친언니도 아니고. 또, 강무진 씨가 아깝기도 하고요.”

    “그, 그런가요?”

    하나는 남자의 가슴팍에 손을 넣었다. 이어 키스라도 하려는 듯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가 귓가에 입술을 대고 몸을 더듬었다.

    역시, 무기는 없었다.

    이놈은 가짜다.

    흥분한 남자의 손이 허벅지를 더듬어 올라오다, 총을 건 밴드에 닿았다. 무기가 있음을 눈치챈 남자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진 순간, 그녀는 그 손을 꺾어 버린 뒤 목을 움켜쥐었다.

    “컥!”

    “너,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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