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 (142/180)
  • <22>

    “언제 깨어납니까?”

    하나가 진지한 표정으로 의사에게 물었다.

    “뇌진탕이 심해서, 적어도 하루는 움직이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일부러 수면 마취를 해 둔 상태예요. 움직였다간 예후가 더 좋지 않을 거라.”

    “그 정도로 심합니까?”

    “예, 뭐….”

    의사는 멀찍이 앉아 있는 줄리오 파렌티의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하나는 이를 갈며 줄리오를 돌아보았다. 그에 소파에 앉아 잡지를 들여다보던 그가 인상을 찌푸린다.

    “죽는 거 아니면 됐어. 일부러 재운 거라면 더 걱정할 거 없고. 근데 정말 저놈이 진이란 남자의 얼굴을 아는 건가?”

    “그래. 분명 알고 있어.”

    “그럼 더더욱 깨워야겠네. 어이, 의사. 억지로라도 깨우지그래.”

    그 말에 의사가 사색이 되어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마피아가 총이라도 들이댄다면 여지없이 환자를 깨워야 했다. 하지만 다행히 우려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 짓 했다간 가만 안 둬. 환자 쉬게 나가. 이 폭행범아.”

    “폭행범?”

    “그래. 기분 나쁘다고 아무나 잡아 패는 게 인간이 할 짓이냐?”

    로렌조와 로마노는 이하나를 볼 때마다 오금이 저렸다. 그녀는 마치 겁이 없는 게 아니라, 겁이 뭔지 모르는 사람 같았다.

    잠시 마뜩잖은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던 줄리오가 몸을 일으키더니, 불쑥 팔을 잡았다.

    “너도 같이 나가.”

    “난 여기 있어야지. 언제 깰 줄 알고.”

    하나는 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되레 당겨졌다. 그녀를 돌려 뒤에서 끌어안듯 포박한 그가 의사와 간호사를 가리키며 목소릴 깔았다.

    “간호는 저 둘이 할 거야. 파티에 동행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그 꼴을 하고 가려고?”

    신기하게도 지난번보다 줄리오를 향한 경계가 무너진 기분이었다.

    부축해 달라며 제게 기댔던 순간이었나? 다친 모습에 연민이 든 건.

    “프리티 우먼에 나오는 리처드 기어처럼, 너도 나를 사려고?”

    “줄리아 로버츠는 매춘부 역할이었어.”

    “주인공한테 매춘을 하진 않았지.”

    “그보다 더한 짓을 했지만.”

    “신데 퍽킹 렐라를 꿈꾸는 짓?”

    “날 창피하게 만들진 못하게 할 생각이야.”

    하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팔을 잡은 그의 손을 풀었다. 그러곤 다시 의사에게 다가가 환자를 잘 돌봐 달라고 말한 뒤, 배낭을 챙겼다.

    그러자 다가온 줄리오가 그녀의 배낭을 뺏더니 로렌조에게 툭 던진다.

    “그 흉물은 네가 챙겨.”

    하나는 로렌조가 자신의 배낭을 소중하게 끌어안는 걸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총 3정 들었어. 탄환 몇 갠지 기억하니까, 하나도 흘리지 마.”

    ***

    쇼핑이랄 것까지도 없었다.

    이곳은 캄보디아 내에서도 낙후된 지역이었고, 프놈펜까지 이동하는 건 귀찮았다.

    게다가 어차피 한번 입고 버릴 옷, 프리티 우먼에 이어 마이 페어 레이디까지 찍고 싶진 않았다.

    “여기 들어가 보자.”

    하나의 고집에 결국 두 손을 든 그가 그녀를 따라 작은 옷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손으로 쓴 간판에 도저히 입을만한 옷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뿐인 곳이었다.

    외국인들의 등장에 당황한 점원이 어눌한 영어로 인사를 한다. 하나는 생긋 웃으며 한쪽에 걸린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구경했다.

    줄리오는 그러는 동안 좁은 상점 입구에 서서 험악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어쩌면 다섯 평 남짓한 곳이라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점원은 쇼윈도 밖에 서 있는 검은 정장의 남자들을 발견하곤 파랗게 질려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하나는 그런 점원에게 말했다.

    “걱정 마요. 저 남자들, 금방 갈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헐렁한 블라우스와 짧은 스커트를 찾아 점원에게 내밀었다.

    가게에 들어와 옷을 고르기까지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녀가 옷을 고르는 기준은 간단했다.

    무기를 숨기거나 꺼내기 쉬울 것. 하지만 줄리오는 기껏 고른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차라리 벗고 있는 게 낫겠군.”

    “알다시피 내 몸매가 좀 좋아야 말이지. 나, 옷발 잘 받아. 아무거나 입어도 끝내주게 소화할 테니까 걱정 마.”

    “너무 자신만만한 거 아닌가?”

    “아, 저 구두도 사야겠다.”

    하나는 진로를 방해하는 줄리오를 밀어내며 마네킹 옆에 놓인 구두를 집어 들었다.

    이탈리아의 화려하고 호화로운 명품에 익숙한 그에겐 질 떨어지는 물건일지라도, 청바지와 셔츠가 전부인 그녀에겐 익숙한 것들로 가득한 곳.

    하나는 그 외에도 셔츠와 바지를 몇 벌 더 골랐다. 그리고 계산을 하려는데, 100달러 한 장을 내려놓은 그가 신경질적으로 쇼핑백을 낚아챘다.

    “빨리 나가지.”

    점원은 거스름돈을 찾으려 돈 통을 뒤졌으나, 줄리오는 그 돈을 받을 생각이 없었다.

    하나는 팁이라고 말한 후 그에게 잡혀 밖으로 끌려 나왔다.

    이미 줄리오가 들고 나온 쇼핑백은 로렌조의 손에 들려 있었다. 제법 큰 쇼핑백을 받아든 로렌조가 내용물을 슬쩍 본다.

    “저기서 산 옷, 파티에 갈 때 입을 생각하지 마.”

    “그럼 뭐 입어? 여기에 돌체 앤 가바나 매장이라도 있어? 그냥, 내가 입으면 다 명품이 되겠거니 해.”

    “어이가 없군.”

    한낮의 볕이 뜨겁다. 줄리오의 짜증을 자연스럽게 무시한 하나는 손 그늘을 만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저 멀리, 카페의 간판이 보였다.

    커피 맛을 보장할 수는 없겠지만, 제법 울창한 그늘 아래 테이블 몇 개를 둔 노천카페였다.

    “나랑 커피 마실래?”

    태연자약한 질문에 그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에스프레소라면.”

    “있겠지.”

    이번엔 남자가 먼저 앞장섰다. 한쪽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그녀의 손을 잡아끈다. 결국, 커피가 고파서 예민해진 거다. 저 인간.

    하나는 한동안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로 했다. 유은성을 곤죽으로 만든 이유에 어쩌면 제가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게 하지 못하는 분풀이를 유은성에게 한 거라면, 줄리오 파렌티는 나름 여자라는 이유로 얼마쯤 봐 주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게다가 제게는 지금 줄리오 파렌티가 필요했다. 정확히는 그의 이름이.

    에스프레소와 아이스 커피를 주문한 뒤, 밖으로 나와 가장 서늘한 그늘 아래 자리했다. 에어컨 없이 실링팬 두어 개가 돌아가는 실내보단 차라리 외부 그늘이 나았다.

    조용한 동네다. 하나는 커피가 나오길 기다리며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응시했다.

    ‘이렇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닌데….’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을 두이를 생각하자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제발 살아 있길 바라며, 하나는 습관처럼 양손을 모아 꽉 쥐었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들었다. 하나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왜?”

    태연하게 묻자, 손을 뗀 그가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며 물었다.

    “넌… 내가 안 무서운가 보지?”

    “내가 왜 무서워해야 해? 나는 너, 하나도 안 무서워. 너보다… 오히려 보육원에 있을 때 우릴 담당했던 주임 선생님이 훨씬 무서웠지. 얼마나 무서웠는데.”

    잠시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린 그녀가 실소했다.

    “보육원?”

    때마침 커피가 서빙되었다. 이 무더운 날씨에 에스프레소 더블샷을 시킨 남자는… 정상이 아니다.

    하나는 커피보다 먼저 안에 든 얼음을 입에 넣고 아작아작 깨물었다.

    “보육원이 뭔지 몰라?”

    “알아. 부모님이 안 계신가?”

    “어, 처음부터 없었어. 나랑 두이는 모텔에서 태어났거든. 우릴 낳은 여자는 차마 죽일 용기가 없었나 봐. 그냥 탯줄도 떼 주지 않고 도망쳤대. 그래서 내 인생의 보물은 두이 한 명뿐이야. 걔가 내 전부야.”

    “내 형제들과는 다르군. 우린 호시탐탐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데.”

    씁쓸하게 들린 건 착각이 아니었다.

    차가운 얼음을 몇 알 깨물었더니, 끔찍하기까지 했던 더위가 조금 가시는 기분이다.

    하나는 자신을 빤히 보는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일직선으로 뻗은 깊은 눈매와 엄격해 보이는 입술.

    사람들은 그를 사탄, 혹은 악마라고 부른다. 무성한 소문에 쌓인 남자는 이따금 악마 같을 때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길 잃은 개처럼 보였다.

    어쩌면 저 혼자만 그렇게 느끼는 걸지도 모른다.

    하나는 잠시 고민했다.

    어째서 검은색 머리카락이 네 트리거가 되었냐고 물을까 했지만, 그 대답을 듣는다면 분명 다른 질문을 하게 될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살 따가운 더위에 이마를 타고 땀이 흐른다. 턱 끝에 매달려 있던 땀이 툭 떨어져 나무 상판에 스며들었다.

    어느덧 시선이 무겁게 느껴져 그녀가 먼저 피하자, 반쯤 비운 에스프레소 잔을 내려놓은 그가 몸을 일으켰다.

    “뭐야, 왜 벌써 일어나?”

    “준비를 마쳤다는군. 이만 일어나.”

    하나는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선글라스를 꺼내 쓴 남자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린다.

    “네가 입게 될 옷. 그리고 필요한 것들. 별장에 준비되어 있을 시간이라고.”

    “뭐?”

    그럼 지금까지 한 짓은 뭐냐고 물으려던 찰나, 테이블을 둘러 온 그가 손을 내밀었다.

    “난 그 꼴을 하고 갈 거냐고 물었지, 쇼핑하러 가자고는 안 했어.”

    “하, 아니. 그럼 왜 얌전히 따라 나왔어?”

    “재밌어 보였거든. 바람을 좀 쐬야겠단 생각도 들었고. 가장 큰 이유는….”

    하나는 남자의 손을 잡지 않았다. 테이블을 짚으며 일어나 남은 커피와 얼음을 단번에 들이켰다.

    “네가 즐거워하니까.”

    또다. 다시 명치가 뜨거웠다.

    그때 멀리 세워 둔 차가 카페 앞에 도착했다.

    하나는 포장되지 않은 도로와 낮은 건물, 자신들은 안중에도 없이 제 일에 열중하는 사람들을 보며 어떤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제목이 저 남자와 너무나 어울리지 않아서 이내 머릿속에서 지웠다.

    로마노가 문을 열어 준 뒷좌석에 몸을 싣자, 반대편 문을 열고 줄리오가 올라탄다. 에어컨의 차가운 냉기에 땀이 식는다.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상 체온을 되찾았다.

    별장으로 돌아온 뒤엔 드레스가 걸린 행거를 받았다.

    다른 설명은 없었다. 가방과 구두, 드레스와 여벌 옷이 걸린 행거가 차례로 그녀의 방에 들어왔고, 하나는 그 사이사이에 오늘 산 옷들을 걸었다.

    그러다 하얀 박스에 가지런히 든 속옷 사이, 수영복을 발견하곤 황당한 웃음을 터트렸다.

    마피아식 프리티 우먼 놀이는 성공적이었다.

    조용한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한쪽 벽을 채운 물건들을 노려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빛난다. 서서히 선득하게 벼려지다, 이내 눈꺼풀 안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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