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 (141/180)
  • <21>

    턱에 맺힌 땀이 덤벨 위로 후드득 떨어진다. 그가 입은 것이 검정 셔츠가 아니었다면, 땀 때문에 다른 색으로 보였을 것이다.

    묵직한 덤벨을 내려놓은 유은성은 숨 한번 고를 틈 없이 곧장 치닝디핑에 올랐다. 풀업을 할 때마다 이두근과 삼각근이 터질 듯 부푼다.

    풀업의 개수가 40개가 넘어갈 때쯤, 전화가 걸려왔다. 그에 한쪽 팔로 매달린 은성이 블루투스 이어폰을 툭 건드렸다.

    “예, 전화 받았습니다.”

    [무진아, 잘 지내니?]

    “예.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형님은 잘 지내십니까?”

    [그래. 네 덕에 나야 평탄하지.]

    은성의 눈빛이 어둡게 벼려지고, 다시 시작된 풀업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강무호. 그는 자신의 핏줄이자 아버지의 친자이며, 무영그룹의 주인이 될 남자였다.

    어머니의 성을 따라 유은성으로 26년을 살았고, 강 회장의 밑으로 들어간 이후론 강무진으로 5년을 살았다.

    무운해운이 제 손에 떨어진 건 강무호가 정계로 방향을 튼 덕분이었다. 만약 강무호가 무운해운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면, 자신은 평생 사생아라는 그림자 속에서 살아야 했을 터.

    하지만 문제는 강무호가 무운해운의 대표 시절 저지른 일들이었다. 최태준과 손에 손잡고 싸지른 더러운 오물을 은성은 맨손으로 수습해야 했다.

    한국 사회, 그것도 한국 정계에 진출한 국회 의원이 마약 스캔들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무영그룹 전체를 무너트리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은성은 관련자들을 모두 처리해야 했다. 자칫 잘못했다간 모든 혐의를 뒤집어쓰는 건 제가 될 상황.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쓸모 있는 개를 자처했다는 것을.

    그러므로 자신과 강무호의 정체를 아는 메싸를 처리한 것 만으론 부족하다.

    [무진아, 언제까지 형이 네 뒤만 봐 줄 수는 없잖니. 슬슬 그쪽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은성은 싸늘하게 웃으며 몸을 뒤집었다. 그의 몸은 기계체조 선수처럼 허투로 놀리는 근육 없이 단단했다.

    “형님께서 벌여 놓으신 판이 생각보다 큽니다. 게다가 함께 움직이던 놈이 멍청한 짓을 했어요. 하필, 줄리오 파렌티의 이름을 팔았습니다.”

    강무호는 다소 놀란 듯 말이 없었다.

    매트로 내려온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뻐근한 어깨를 돌릴 때였다. 기척도 없이 접근한 누군가가 뒷머릴 잡아챘다.

    순식간에 눈앞의 벽으로 처박힌 얼굴. 벽이 흔들리고 관자놀이 방향의 눈썹뼈가 찢어져 피가 흘렀다.

    “씹….”

    잡힌 뒤통수에 눌린 차가운 금속. 그것은 총이었다. 그리고 제게 총을 겨눌 사람은 단 한 명뿐.

    “형님, 제가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손님이 찾아오셔서요.”

    [어… 그, 그래. 몸 건강해라, 무진아. 그리고 배 띄웠다던데….]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은성은 욕설을 삼키며 벽을 짚었다.

    “뭡니까.”

    그를 벽으로 처박은 사람은 줄리오였다. 은성은 상상 이상의 악력에 내심 놀라며 눈을 돌렸다.

    “내게 거짓말을 했던데.”

    “무슨 거짓말.”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면…. 억지로 기억나게 해 주는 수밖에.”

    흘러내린 피로 인해 시야가 붉다. 줄리오 파렌티가 말하는 거짓말이 무엇인지 안다. 이번에도 분명 이하나와 관련된 일이겠지.

    잔인하게 읊조린 줄리오는 은성의 머리채를 강하게 당겼다. 홱 젖혀진 고개. 뒷머리에서 총구가 떨어짐과 동시에 유은성은 줄리오의 손을 쳐냈다.

    그러자 한걸음 밀려난 줄리오가 곧장 주먹을 날린다. 피 때문에 시야가 흐려진 은성의 얼굴에 꽂힌 주먹. 뇌가 울릴 만큼 강한 힘에 휘청인 유은성의 복부에 줄리오의 발이 꽂혔다.

    하지만 은성은 밀려나는 대신, 그대로 발목을 잡아 돌렸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두 남자가 바닥에 엉켰다.

    운동 기구로 가득한 곳을 요란하게 울리는 두 남자의 욕설.

    줄리오 파렌티의 하얀 드레스 셔츠에 피가 튀고, 유은성의 얼굴은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힘의 균형은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았다.

    강한 상대를 알아본 본능이 폭주하는 기분이다. 몸속의 아드레날린이 들끓어, 싸움의 이유가 무엇인지조차 잊을 지경이었다.

    덤벨을 쌓아 둔 거치대가 무너지고, 헛손질을 시작했다. 개싸움이나 다름없는 상황. 유은성은 줄리오를 잡아 바닥에 매쳤다. 하지만 동시에 발이 걸렸다.

    “젠장!”

    균형을 잃고 앞으로 나뒹군 유은성이 다시 줄리오에게 달려들 때였다.

    탕!

    은성의 얼굴을 스친 총알이 두툼한 매트에 박혔다.

    “빌어먹을 새끼.”

    줄리오 파렌티는 입가의 피를 닦으며 잔인하게 읊조렸다. 그에 유은성은 총구를 노려보며 미친놈처럼 웃었다.

    “왜, 마음대로 안 되니까 열 받아?”

    “쉬운 방법을 두고 돌아가려 했지 뭐야. 마음에 안 들면, 없애 버리면 될 것을.”

    “후회할걸?”

    거친 숨을 몰아쉰 은성은 줄리오 파렌티의 뒤에 서 있는 여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줄리오도 건너편 거울에 비친 하나를 발견하곤 천천히 총구를 내렸다.

    은성은 줄리오 파렌티의 변화를 관찰했다. 어울리지 않게 당황한 듯도 한 눈빛이 흔들린다. 언제 그랬냐는 듯 광기가 가라앉은 모습에 은성의 몸 어딘가에 힘이 들어갔다.

    뭐야, 이건….

    “둘이 뭐 합니까?”

    주먹을 말아 쥔 하나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총을 든 줄리오의 손목을 망설임 없이 움켜쥔다.

    “이건 반칙이지.”

    줄리오는 순순히 그녀에게 총을 넘겨주었다.

    하나는 그 총을 자신의 뒷주머니에 꽂은 뒤 은성 쪽으로 돌아섰다. 둘 다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더 심각한 건 은성이었다. 아마 무방비 상태로 당했을 터.

    기가 막혔다. 그녀가 아는 한 유은성과 줄리오 파렌티가 부딪힐 이유 따윈 없었다. 유은성은 이 남자가 허락한 자신의 경호원이었으니까.

    “어이가 없네, 정말. 뭐 잘못한 거 있어요?”

    “뒤에서 그대로 까던데요? 제가 마음에 안 들었나 봅니다.”

    “하, 어지간히 미움받았나 보네.”

    하나는 은성의 턱을 잡아 들곤 눈썹 위를 강하게 눌렀다. 그러자 심각하게 흐르던 피가 멎는다.

    “여기 누르고 있어요. 스테리 스트립이라도 가져올 테니까.”

    “같이 가죠. 저 남자, 무서운데.”

    교통사고라도 당한 것처럼 피를 펑펑 흘렸음에도 유은성은 태연했다. 급하게 지혈을 마치긴 했지만, 유은성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상처를 누를 무언가가 필요하다. 하나는 입고 있던 셔츠를 거꾸로 벗으려 했다.

    막 양손으로 셔츠 아래를 움켜쥔 순간, 줄리오 파렌티에게 팔이 잡혔다. 강한 힘으로 그녀의 손을 끌어 내린 그가 유은성을 노려보며 이를 간다.

    “의사를 부를 테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지혈해야 해. 뭐야, 내가 벗는 게 싫어?”

    “하, 너….”

    “그럼 그쪽이 벗어 줘. 큰 혈관을 다쳤어. 앞뒤 따질 때가 아니야. 대체 왜 그런 거야? 내 경호원이 무슨 실수라도 했어?”

    코웃음 친 줄리오는 유은성을 노려보며 입고 있던 셔츠를 찢듯이 양쪽으로 당겼다. 단추가 뜯어지며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진다.

    그에 하나는 쯧, 혀를 차며 줄리오가 건네준 셔츠를 받았다. 목깃에 달린 택을 확인한 그녀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둘둘 말았다. 그러곤 유은성의 상처 위에 대고 강하게 눌렀다.

    “일어나요. 진짜 위험해 보이긴 하네.”

    하나가 유은성에게 손을 내밀자, 이번에도 둘 사이에 줄리오가 끼어들었다.

    “약한 척하지 말고 일어나.”

    줄리오는 유은성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고통스러워하며 몸을 일으킨 은성은 줄리오의 손에서 빠져나와 하나의 팔을 잡았다. 그러고는 마치 주인 뒤에 숨는 개처럼 굴며 반쯤 업히듯 끌어안았다.

    “어지럽네요. 피를 너무 흘려서인지.”

    “수혈이 필요할 만큼 패 버릴 걸 그랬지.”

    “대체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는 건지. 말해 주시죠, 파렌티 씨.”

    하나는 줄리오를 계속 도발하는 유은성을 돌아보며 짜증스럽게 경고했다.

    “그만 해요, 그쪽도. 상황 악화시키지 말고 죽기 전에 치료나 받아요.”

    “안 죽습니다. 나도 누구처럼, 죽을 때가 아니라서.”

    “그건 나한테만 통하는 거예요. 유은성 씨는 해당 안 돼요.”

    한국어로 대화하는 두 사람이 못마땅했는지 줄리오가 그녀의 턱을 잡았다. 그러곤 자신을 향하게 한 뒤, 기묘하게 가라앉은 눈빛을 했다.

    그에 하나는 아까와 같은 답답함을 느끼며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 나, 그쪽 만나러 온 거거든. 리우 씨를 방에 데려다 놓고 다시 올 테니까, 꼼짝하지 마. 알았어?”

    그제야 줄리오가 그녀의 턱을 놓아주었다. 그러더니 가까이에 있는 벤치 프레스에 털썩 주저앉는다.

    마른세수하는 줄리오의 손은 만신창이였다. 무언가에 긁힌 상처부터 총을 잘못 잡아 생긴 상처까지.

    인상 쓴 하나는 은성을 부축해 그곳을 빠져나왔다.

    “어떻게 된 거야? 줄리오는?”

    그러자 밖에 대기하고 있던 로렌조가 부하들과 함께 허겁지겁 다가와 묻는다.

    “네 눈에 이 사람은 안 보여? 당장 의사 데려와.”

    “설마, 줄리오랑 붙은 거야? 너 아니고?”

    “미쳤냐? 내가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와, 내가 너희 같은 줄 알아?”

    “어이, 어이. 아니면 됐어. 기다려. 의사 보내 줄 테니까. 그럼 줄리오는 안에 있는 거지?”

    “그래, 네 보스는 아주 잘 계신다.”

    로렌조는 손가락을 모아 입에 대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줄리오의 부하들이 달려오더니 유은성을 부축했다.

    이제 보니 은성은 기절한 상태였다.

    ‘어쩐지 조용하더라니….’

    처음부터 머릴 맞은 거라면 뇌진탕이 의심되었다. 유은성의 행동이 의뭉스러워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같은 한국인이 상처 입은 모습은 왠지 보기 힘들었다.

    하나는 은성이 떨어트린 셔츠를 주워들곤 로렌조에게 부탁했다.

    “저 남자, 꼭 제대로 치료해 줘.”

    “의사가 할 일이야.”

    “그러니까 협박이라도 해달라고. 꼭 살려야 해.”

    “왜, 같은 한국인이라서?”

    하나는 피 묻은 셔츠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도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저 남자한테 아직 알아내야 할 정보가 있거든. 그러니까 살려. 너희에게도 좋을 거야, 그게.”

    그녀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한 로렌조를 뒤로하고 다시 건물 안에 들어섰다.

    입구부터 느껴지는 처참함. 벽 곳곳이 파손되었고 바닥 매트엔 총알이 박혀 있다. 운동 기구들은 이리저리 넘어져 있었으며,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흩뿌려진 채였다.

    하나는 여전히 벤치 프레스에 앉아 있는 줄리오에게 다가갔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두 손을 다리 사이로 늘어트리곤 고개를 든다.

    “죽었나?”

    담담한 질문에 하나는 실소했다.

    “아니, 살릴 거야. 살려야 해.”

    “의뭉스러운 놈이야. 그런데 어째서?”

    “필요해서. 그것보다… 파티에 초대받았다며.”

    본론부터 꺼내자 입가의 상처를 혀로 핥은 그가 턱을 어루만진다.

    “정보가 빠르군.”

    “정보원이 있으니까.”

    “그래서, 본론은?”

    “나도 데려가. 강무진, 무운해운의 대표 이사가 참석할 거라는 소식이 있어. 나, 그 사람 만나야 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선은 자꾸만 줄리오의 상처를 찾아 움직였다.

    갈비뼈 부근엔 멍이, 입가는 터졌고 손은 난도질이라도 당한 것처럼 만신창이다.

    저 바지 속은 또 얼마나 망가져 있을지…. 이상하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럼, 내 파트너로 참석해.”

    “파트너?”

    “그래야 네 행동이 자유로울 거거든. 내 여자를 건드릴 만큼 정신 나간 놈은 세상에 몇 없으니까.”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턱 근육이 당겨진다.

    하나는 상처 난 손을 잡는 대신, 남자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나 데려가는 거 맞지?”

    그녀에게 잡힌 손목을 응시하던 그가 시선을 든다.

    “그곳에 네 동생이 있다고 생각하나?”

    “적어도, 아는 사람은 있을 거라고 믿어.”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그대로 그녀의 품에 안기듯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부축해.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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