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131/180)
  • <11>

    Part 02. 악마는 브리오니를 입는다.

    풍덩, 소리와 함께 머리끝까지 물에 잠겼다.

    미지근한 물이 코와 입으로 왈칵 들어와 정신을 번쩍 깨웠다.

    잠시 정신을 잃었던 하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물그림자 너머 큼직한 인영이 흐트러지는 게 보인다. 하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물 밖으로 뻗어 나간 손에 상대의 바짓가랑이가 잡힌다. 당황한 상대가 뒤로 물러나는 힘에, 그녀도 물 밖으로 몸이 반쯤 걸쳐졌다.

    가쁜 숨을 몰아쉰 하나는 뒷주머니에 넣어 둔 버터플라이 나이프를 꺼내려 했지만, 손이 닿은 주머니엔 아무것도 없었다.

    “이 개새끼…!”

    “Shit!”

    “너지, 내 뒤통수 깐 새끼. 로렌조.”

    덩치가 커다란 이탈리아인의 이름을 재차 기억해 낸 하나는 두툼한 허벅지를 움켜쥐며 이를 갈았다.

    그러자 땀을 뻘뻘 흘린 로렌조가 그녀의 손목을 잡더니 있는 힘껏 비틀었다.

    “아악!”

    하나는 그래도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결국, 씩씩대던 로렌조가 사색이 되어 이탈리아 남부 언어로 고래고래 소리친다.

    “이거 미친년 맞다니까! 줄리오!”

    몸이 무겁다. 뒷머리가 아프고 욕조는 핏물로 가득하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이대로 죽음을 맞을 거라는 짐승 같은 촉이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하나는 있는 힘껏 제 손목을 움켜쥔 로렌조의 팔을 잡아당겼다. 힘을 역이용한 공격에, 로렌조의 커다란 몸이 갸우뚱 기울어지더니 욕조 안으로 풍덩 빠졌다.

    “푸아악!”

    하나는 그대로 로렌조의 위에 올라타 두꺼운 목을 잡아 눌렀다. 물속에 처박힌 남자가 울컥대며 발버둥 친다. 그녀는 남자의 허리춤에 꽂혀 있던 총을 뽑아 천장에 쐈다.

    탕!

    진주색의 깨끗한 타일이 깨지며 바스스 떨어진다.

    발버둥 치던 로렌조는 경악한 얼굴로 양손을 들었다. 곧 총소리를 들은 줄리오 파렌티의 부하들이 뛰어왔다.

    “무슨 일이야!”

    그에 하나는 다시 로렌조의 목을 잡고 이마에 총구를 들이댔다. 뜨거운 총구가 닿자 남자가 괴로워하며 비명을 지른다.

    “아아악!”

    순간 모든 총구가 그녀에게 향했다.

    “줄리오 파렌티 데려와.”

    핏물을 뚝뚝 흘리는 여자의 음산한 말투에, 안경을 쓴 남자가 목에 핏대를 올리곤 참을성 있게 설득하려 했다.

    “로렌조를 놔줘. 그쪽을 해치려는 게 아니야.”

    다행히 남자는 영어를 할 줄 알았다. 하나는 줄리오 파렌티의 법무 대리인이라고 적혀 있던 그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로마노?”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기괴하리만치 형형한 눈빛을 번득이는 그녀를 응시하며, 먼저 총을 내려놓았다.

    “다른 놈들도 총 내려.”

    하나는 보란 듯 로렌조의 목을 더욱 힘주어 눌렀다. 그러자 캑캑거리며 거품을 문 남자가 발버둥 친다. 몸이 흔들렸지만, 그녀의 힘은 보통이 아니었다.

    여기서 5초만 더 버텨도 이 덩치는 기절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적당히 힘을 풀었다간 제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

    하나는 로렌조의 두꺼운 목을 움켜쥔 상태로 맥박을 재며 소리쳤다.

    “총!”

    그러자 뒤를 돌아본 로마노가 험악한 욕설을 쏟아 낸다. 그제야 모두가 총을 내려놓곤 이를 갈며 물러섰다.

    “다 나가, 줄리오 파렌티만 있으면 돼.”

    하나는 로렌조의 얼굴을 물 밖으로 끌어냈다. 그에 숨을 토해 낸 로렌조가 물을 뿜으며 가슴을 들썩인다. 부들부들 떠는 덩치의 눈이 빨갰다. 그녀는 설마 하는 마음에 놈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울어?”

    “으아악!”

    미친놈이… 진짜 운다.

    하나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긴장을 풀지 않았다. 총을 든 자신의 뒤통수를 후려칠 만큼 간이 큰 놈들이었다.

    제가 줄리오 파렌티를 쏠 의향이 없었으니 망정이지, 만약 죽이기로 마음먹었다면 트레일러 문이 열리는 순간 살아 있는 놈은 없었을 것이다.

    “그놈은 원래 눈물이 많아.”

    하나는 욕실 입구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틀었다. 이제는 대놓고 서럽게 우는 로렌조를 보며, 두 눈을 가늘게 뜬 줄리오 파렌티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오지 마.”

    “언제는 오라고 하지 않았나?”

    “거기까지. 그쪽은 위험하니까, 선 지켜.”

    줄리오는 재밌다는 표정으로 하나를 가만히 응시하다, 제 뒤에 선 놈들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무언의 명령에 총을 챙긴 부하들이 욕설을 내뱉으며 하나둘 물러난다. 남은 건 로마노와 욕조에 처박힌 로렌조, 줄리오 파렌티 뿐이었다.

    줄리오가 담배를 꺼내더니 불을 붙이곤 변기 뚜껑을 내려 털썩 앉았다. 그러자 손을 든 로마노가 그녀를 경계하며 다가오더니 로렌조를 부축했다.

    하나는 총구를 그들에게 향한 채로 두 남자가 욕실을 빠져나가길 기다렸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울던 로렌조가 돌아보더니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놓고 그녀가 눈썹을 까딱하자 움찔 놀라며 시선을 피한다.

    “문 닫아.”

    하나의 명령에 로렌조는 마뜩잖은 얼굴로 문을 닫았다.

    환풍기가 돌아가며 줄리오 파렌티가 뿜어낸 연기가 천장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녀는 등을 욕조에 기댄 채 물마개를 뺐다.

    눈과 이마가 부은 건지, 욱신거리는 통증이 찾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구를 회수하지 않은 상태로 줄리오 파렌티를 직시했다.

    담배 필터를 가볍게 문 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간다. 확실히 한국인과는 다른 피지컬이 상대를 압도할만했다. 대충 190cm가 넘는 키에 직각으로 벌어진 어깨. 언뜻 부드러워 보이는 눈매 안에, 숨겨지지 않는 어둠이 들끓었다.

    그녀는 저런 부류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권력과 재력, 세상을 발아래 둔 최상위 포식자들이 드러내는 특유의 오만함.

    그는 재킷 없이 셔츠에 정장 바지만 걸친 채였다. 그래서 그 몸이 얼마나 균형 잡혀 있는지, 벗겨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제가 질 수도 있다. 힘의 차이는 아직 겪어 보지 않았으나, 조금 전 힘밖에 쓸 줄 모르는 덩치와는 확실히 다를 것이었다.

    반대로 몸을 전혀 쓰지 못하는 화이트칼라 타입일지도.

    상대를 직시한 눈길을 거두지 않은 하나는 그가 입은 셔츠를 가리켰다.

    “그거, 벗어줄래요.”

    그러자 인상을 쓴 줄리오가 소리 내 웃었다.

    “스트립쇼라도 하란 소린가?”

    “이 꼴을 하고 욕실에서 나가고 싶진 않거든.”

    그녀를 위아래로 훑은 그가 욕실 벽에 담배를 비벼 끄더니, 일어나 드레스 셔츠 단추를 풀었다. 맨살이 드러날수록 하나는 조금 전 한 자신의 추론을 정정해야 했다.

    떡 벌어진 어깨와 이어진 대흉근 아래, 셀 수 없는 상흔이 새겨져 있었다. 쩍쩍 갈라진 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아물지 않은 상처도 함께 요동쳤다.

    그것은 남자의 삶이고, 그를 대변하는 모습이었다.

    악을 행한 흔적이다. 적어도 정의를 위해 만들어진 상처가 아님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남자는 시선을 떼기 싫을 만큼 아름다웠다.

    오랜만에 자신보다 강한 피조물을 눈앞에 둔 그녀는 셔츠를 건네는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다시 앉아.”

    줄리오 파렌티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순순했다. 하나는 총구를 그대로 유지하며 욕조에서 일어나 바지 단추를 풀었다.

    몸에 들러붙은 청바지가 벗겨지며 깊게 팬 상처가 드러난다. 트레일러 사고 당시, 박스들이 떨어지며 낸 상처였다. 다행히 물에 불어 더는 피가 나지 않았지만, 통증은 느껴졌다.

    “씹….”

    욕설을 흘린 그녀는 그대로 셔츠도 벗었다. 남자 앞에서 스트립쇼를 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의 경계를 흐린 뒤, 제압해 볼 계획도 있었다. 어차피 힘에선 진다. 그렇다면 여자의 몸에 잔뜩 흥분해 있는 남자를 제압하는 쪽이 편했다.

    “내 앞에서 많은 여자가 옷을 벗었지만, 너처럼 총을 들이댄 여자는 없었는데 말이지.”

    그는 비스듬히 기대앉더니 구경꾼이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하나는 볼 테면 보라는 듯 생긋 웃어 보인 뒤, 속옷을 마저 벗었다.

    “팬티도 벗어 줄래요? 혹시 트렁크?”

    “새 걸 가져오라고 하지.”

    “아니, 그쪽 거 내놔요. 여기서 나갈 생각하지 말고.”

    “너한테 클 텐데.”

    그가 주머니에 손을 넣는 순간, 하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소름 끼치는 총성과 함께 파렌티의 얼굴 옆 타일이 박살 났다. 그녀는 얼굴에서 장난기를 지운 줄리오를 노려보며 뇌까리듯 말했다.

    “벗어. 다음엔 머리통이야.”

    “너도 죽어, 그럼.”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어. 내가, 어떤 결심으로 당신을 찾았는데.”

    “날 찾았다고?”

    “당신 작업당한 거야, 나한테. 내가 그쪽을 이 판으로 끌어들인 거라고.”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던 그의 한쪽 입술이 비스듬히 치솟는다. 그러더니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리며 다가왔다. 하나가 반대편 벽으로 물러나며 멈추라고 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사거리가 너무 가깝다. 방아쇠를 당기면 제게도 충격이 올 수 있는 거리였다.

    “너, 누구야.”

    바지를 툭 떨어트린 그가 물었다.

    “이제야 내가 궁금해? 너무 늦은 거 아닌가? 진작 물어봤어야지. 내 뒤통수 까기 전에.”

    하나는 밀착해 온 줄리오의 복부에 총구를 누르며 생긋 웃었다. 눈을 내리깐 그의 시선이 핏물로 얼룩진 그녀의 피부를 훑는다.

    그러곤 태연하게 검지와 중지로 분홍빛 유두를 쓸었다. 차가운 피부에 닿은 뜨거운 체온.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소름이 전신을 휘감았다.

    “나는 너를 죽일 생각이었거든. 날 죽이러 왔기에, 먼저 죽이려 했지. 이름 따위 안 궁금했어.”

    하나는 욕설이 튀어나오려는 걸 참으며 총구를 그의 성기 방향으로 내렸다.

    “죽일 거면 진작 죽였어. 이제 나에 대해 궁금할 텐데…. 팬티 벗어 주면 알려 줄 테니까 얌전히 벗고 물러나.”

    미친 새끼는 와중에도 발기하나?

    드로어즈 밴드를 들고 일어난 성기가 총구에 닿는다. 지랄 맞게도 컸다.

    하나는 이를 갈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짐승이냐?”

    “좋을걸?”

    “착각하지 마. 박게 해 준다고 한 적 없어.”

    “그런 것도… 허락이 필요한가?”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눈빛에 기가 찬 그녀가 숨을 들이켤 때였다. 하나의 손목을 잡아챈 그가 자신의 심장에 총구를 누르며 그녀에게 몸을 붙였다.

    엄청난 힘에 밀려난 등이 벽에 눌린다.

    하나는 순간, 시커먼 어둠에 잡아먹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조심해요. 그쪽, 보면 볼수록 그 여자랑 닮았어요.’

    유은성이 말했던 여자의 얼굴이 줄리오 파렌티의 눈동자에 비치는 기분이다. 물론 그의 눈에 비친 건 그녀였지만, 그는 다른 사람을 보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의 동양인은 줄리오 파렌티의 트리거가 될 겁니다. 조심해서 나쁠 거 없으니까…. 알고 계세요.’

    찰나 납작한 복부에 젖은 성기가 닿았다. 뜨겁다 못해 탁한 숨이 그녀의 귓가에 흩어진다. 하나는 방아쇠를 당길 타이밍을 쟀다.

    진짜 죽일까도 생각했다.

    그녀의 뒷덜미를 가볍게 움켜쥔 그가 잔인한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속삭이기 전까지는.

    “왜, 내가 검은 머리 여자에게 미쳐있단 소문을 너도 들었나 보지? 그래서…. 나한테 뭘 원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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