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 (129/180)
  • <09>

    내비게이션이 멈춘 곳은 숲속 오두막이란 설명이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하나는 진흙이 잔뜩 묻어 버린 타이어를 보며 혀를 찼다. 그러곤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바이크에서 내렸다.

    주위에 늪지대가 있다 해도 믿을 만큼 울창한 우림. 퇴역 군인들이 몸을 숨기기에 딱 좋은 단층 건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헬멧을 벗은 하나는 지친 표정으로 집 안에 들어섰다. 최근까지도 생활한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발렌타인 데이의 요원들이 드나드는 곳이 확실했다.

    볕이 잘 드는 곳에 마련된 주방과 아늑한 침대, 2인용 테이블이 놓인 오두막 안은 안전 가옥답지 않게 평온이 흘렀다.

    하나는 바닥에 놓인 더플백 두 개를 발견했다. 그것은 로건에게 부탁한 자신의 무기였다.

    권총부터 저격용 라이플. 자동소총은 물론이거니와 사제 폭탄을 만들 수 있는 재료에 방탄조끼까지. 이하나 컬렉션이라 불릴법한 물건들로 가득했다.

    ‘이 두 개의 가방만 없다면, 정말로 평화로웠을 텐데.’

    하나는 잠시 몸에 힘을 풀었다. 배낭을 내려놓고 침대 위에 털썩 드러눕자 쌓였던 긴장이 한 번에 풀어졌다.

    ‘이두이…. 너 때문에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잠깐 눈을 감은 사이, 깜빡 잠들어 버렸던 그녀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혹여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꿈이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정신이 없었다. 하나는 여전히 조용한 오두막 안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그녀는 제게서 나는 땀 냄새에 짜증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이런 상황에도 쾌적함을 원하다니.

    하나는 무기가 든 백을 침대 아래 숨긴 뒤, 권총만 쥔 채 욕실에 들어갔다.

    샤워하는 중에도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확인 결과 오두막의 모든 창문이 방탄유리 였다. 그에 과거 이곳에서 교전이 있었음을 짐작했다.

    100% 안전한 곳은 아니라는 뜻.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니 살 것 같단 말이 절로 나왔다. 너무 앞만 보고 달렸나 싶다. 생각해보니 두이의 소식을 들은 날부터 지금까지 잠을 청한 적이 없었다.

    무슨 무수면 훈련을 하는 것도 아니고….

    샤워를 마친 하나는 대충 머릴 말리며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음식을 데웠다. 물론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해결되는 냉동식품들이 전부였지만, 향신료가 강한 현지식이 아닌 것만으로도 훌륭했다.

    배고픔까지 해결하자 이제는 정말 참기 힘든 잠이 쏟아졌다.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그녀는 은성이 주고 간 휴대 전화로 로건에게 연락했다.

    [잘 도착한 것 같네.]

    “아, 역시 스토커라니까?”

    [네게 관심이 많다고 표현해 주겠어?]

    “알겠어요, 관심 많은 로건 씨.”

    그러자 키득 웃은 로건이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말투로 물었다.

    [별일 없었고?]

    “리우라는 남자요, 정말 발렌타인 데이 소속 맞아요?”

    [그건 왜?]

    “배지를 안 달고 있더라고요. 배지가 없다면 표식이 될만한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아무것도 없어서요.”

    […노코멘트하지. 리우는 좀 다루기 힘든 케이스라.]

    “음, 그럴 것 같긴 해요. 실력도 좋은 것 같고요.”

    [그럼 됐지. 어쨌든 네 일에 도움이 될 거야. 어떤 방식으로든.]

    “전 언제까지 여기 있어요?”

    [메싸가 움직일 때까지. 움직인다면 반드시 거길 지날 거거든. 그러니까 기다려. 주시하고 있으니.]

    “알겠어요, 고마워요. 일단… 좀 쉴게요.”

    [잘 생각했어. 너는 좀 쉬어야 해.]

    “그리고 최태준 말인데요.”

    [한국인 정보원? 걱정 마. 그쪽에도 사람 붙였으니 함부로 떠들지 못해.]

    “뭐, 너무 완벽하니 내가 할 게 없네요.”

    [시끄러워. 일단 쉬어.]

    하나는 가벼워진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러곤 잠들기 직전까지 두이의 플립폰을 만지작거렸다.

    제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불현듯 낯설게 느껴졌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다시 한국이길 바랐다.

    모두 꿈이기를. 택시 안에서 눈 뜨기를.

    두이가 살아 있기를.

    ‘살아 있다고… 한 번만 더 확신을 줘. 목소리만이라도 들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녀의 바람을 듣지 못한 건지, 휴대 전화는 울리지 않았다.

    ***

    6월 28일 08시 10분 29초.

    5일이나 지났다. 하나는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을 헛되이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파고든 건 강무진이라는 존재였다. 하지만 강무진은 마치 유령 같았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한국에 있는 전유철에게도 정보를 부탁했다. 하지만 강무진이라는 이름만으로는 한국 경찰이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하나는 기회를 틈타 로건을 들쑤셔 보기로 마음먹었다. 두이가 주시하던 존재다. 분명, 뭔가 있었다.

    대충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뒷마당에서 찾은 운동 기구를 이용해 땀을 흘리던 때였다.

    오두막으로 접근하는 차 소릴 들은 하나는 곧장 집 안에 숨어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저격용 라이플로 입구를 조준한 뒤 스코프 너머를 노려보았다.

    검정 레인지로버 차량이 입구를 막으며 멈춰 서더니, 운전석에서 누군가 내렸다.

    위협 사격을 하려던 그녀는 찾아온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곤 이맛살을 찌푸렸다.

    “유은성?”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든 그가 창문 쪽을 바라보며 손을 흔든다. 하나는 라이플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흰 드레스 셔츠에 정장 바지만 입은 남자는 행사장에서 빠져나온 비즈니스맨처럼 보였다.

    “설마, 날 쏘려고 했습니까?”

    은성이 그녀를 발견하곤 부드럽게 웃었다. 포치 아래 선 하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거, 먹을 거예요?”

    “네. 안전 가옥에 있는 음식 맛이 너무 구릴 것 같아서. 와인도 챙겨 왔습니다.”

    “음식 맛이 구린 건 맞는데,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어요. 일단 들어오세요.”

    은성은 주위를 조금도 경계하지 않았다. 그게 마치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 걸 아는 사람처럼 보였다.

    “좀 지저분해요. 내 집 아니면 안 치우는 주의라.”

    “오래 머물 곳 아닌데 굳이 치울 이유 없죠.”

    하나는 자연스럽게 식탁에 음식을 꺼내 놓는 그를 관찰했다. 지난번과는 또 사뭇 느낌이 다르다.

    이목구비나 얼굴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다르지 않았으나, 오늘은 조금 들떠 보였다.

    “심심하지 않았습니까? 여긴 죽일 것도 없고, 경계할 것도 없었을 텐데.”

    “여기 와봤어요?”

    “그럼요. 한 달 정도 지내보기도 했죠.”

    “여기서요?”

    “예. 저 운동 기구, 저도 써 봤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과 코. 그리고 모든 관심이 그가 가져온 음식에 고정되어 있었다. 하필, 한식이라니.

    김치찌개와 불고기, 김밥과 각종 나물 등. 이곳에서 볼 수 없는 음식들이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침을 꼴깍 삼키는 그녀를 본 유은성이 고개를 까딱인다.

    “와서 먹어요.”

    “아침 먹었는데….”

    “한식 들어갈 배는 따로 있을 텐데요.”

    “그건 그런데…. 어떻게 알았지?”

    하나는 더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식탁으로 뛰어가 젓가락부터 집어 든 그녀는 도톰하게 부친 달걀말이부터 입에 넣었다.

    오랜만에 한식이 들어가서인지 식욕이 들끓는다. 은성은 음식을 밀어 넣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와인을 따라 내민다.

    하나는 거절했다.

    “임무 중엔 술 안 마십니다.”

    “한잔도?”

    “네.”

    고개를 주억인 그는 그녀에게 건넸던 와인 잔을 본인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혼혈이어서 그런지, 유은성은 묘하게 귀티 나는 외모를 가졌다. 표정만으로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위험한 분위기를 가진 남자. 로건이 다루기 힘들다고 할 정도면, 간부에 가까운 요원일까?

    “그래도 혼자 있는 것보단 낫네요. 여기 사실, 너무 조용했거든요.”

    “무서웠습니까?”

    “심심했죠. 근데 아직 소식 없어요?”

    “곧 움직일 겁니다. 우리 쪽에서 약을 좀 쳤습니다. 슬슬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게끔.”

    “메싸는 그 코카인을 어떻게 처분할 생각이었을까요.”

    “거래처야 차고 넘칠 겁니다. 줄리오 파렌티의 물건이란 걸 들키지만 않는다면.”

    “하긴…. 마약상을 걱정하고 앉았네. 쯧.”

    습관처럼 혀를 찬 그녀는 게눈 감추듯 음식을 해치웠다. 고작 10분 만에 끝나 버린 식사.

    하나는 부른 배를 문지르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러자 유은성이 빈 그릇을 치우고 능숙하게 테이블을 정리한다. 소매를 두 번 접은 모습에서 이두이 못지않은 결벽증이 읽혔다. 접힌 양쪽 소매의 폭이 똑같았다.

    테이블을 닦는 남자의 손에 시선을 고정한 그녀의 눈앞으로, 순식간에 은성의 얼굴이 다가왔다.

    가까이서 본 유은성의 눈동자에 푸른 기가 돈다. 혼혈이라는 말이 사실이었다.

    “나 보는 겁니까?”

    하나는 당황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해서요. 내 동생도 결벽증이 있거든요. 소매도 항상 폭을 맞춰 접을 정도로요.”

    “그래요? 신기하네요.”

    “근데 정말 왜 온 거예요? 밥 먹이려고 왔습니까?”

    “밥 먹이는 건 옵션이었고, 메싸가 움직일 때까지 저도 여기 있을 겁니다.”

    “왜요?”

    “개인적으로 그놈이랑 해결할 게 있거든요. 이하나 씨는 줄리오 파렌티를, 저는 메싸를 담당하면 됩니다. 걱정 마십시오. 발목 안 잡으니까.”

    대수롭지 않게 말한 그가 상체를 세우려 했다. 하지만 하나가 더 빨랐다. 유은성의 목덜미를 잡아챈 그녀는 강한 힘으로 이마를 맞대곤 두 눈을 치켜떴다.

    “리우 씨, 당신 발렌타인 데이 아니지.”

    갑작스러운 질문 때문인지, 이마를 맞대어서인지. 두 눈을 크게 떴던 그가 천천히 테이블을 짚은 손에 힘을 풀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당신한테선…. 발렌타인 데이의 냄새가 안 나요. 로건의 터치도 안 느껴지고.”

    “내가 언제, 발렌타인 데이의 요원이라고 한 적 있었나?”

    “그럼?”

    하나는 더욱 강하게 남자의 목을 잡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고통을 느낄 강도였으나 유은성은 태연했다.

    되레 그녀의 힘을 이용해 고개를 슬쩍 비틀더니, 서로의 입술이 닿을 만큼 간격을 좁혔다.

    “난 조력자입니다. 이하나 씨가 동생 이두이 씨를 찾을 수 있게 도울. 발렌타인 데이의 요원만 그쪽을 도울 수 있는 겁니까?”

    위험한 남자다.

    하나는 입술이 닿기 전, 나른하게 웃는 그의 목을 놓았다. 그러곤 의자를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소속을 밝혀요.”

    테이블을 짚은 상태로 눈을 치켜뜬 유은성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비틀릴 때였다.

    충전 중이던 그녀의 휴대 전화가 울린다. 유은성이 주었던 것으로, 추적 방지 장치가 된 것이었다.

    하나는 유은성을 노려보며 전화를 받았다.

    “전화 받았습니다.”

    [메싸가 움직였어. 3시간 뒤, 좌표 지점에 도착해. 인원은 40명, 중화기로 무장했고 트레일러 1대와 컨테이너 2대. 그리고 트럭 6대야. 어때, 할 수 있겠어?]

    “질문이 이상하네. 어쨌든… 살아서 봐요.”

    [One. 지금이라도 마음 바꿔. 파렌티 쪽에서도 냄새 맡았어. 정말… 사자 굴로 들어갈 거야?]

    그녀는 유은성에게 고개를 까딱여 보였다. 그러자 의미를 이해한 그가 테이블 위에 지도를 펴더니 몇 개의 선을 그린다. 그것은 함정을 설치할 장소였다.

    소속이 어디든, 제법 도움이 될 남자라는 게 확인됐다. 하나는 유은성이 그린 선을 내려다보며 걱정하는 로건에게 말했다.

    “로건, 나 안 죽어요. 난… 한국에 가서 죽을 거예요. 나이 먹고 꼬부랑 할머니 돼서. 그러니까 다음엔 한식당에서 만나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