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6> (126/180)
  • <06>

    남자의 이름은 로건 발렌타인.

    그래서 처음 ‘발렌타인 데이’라는 회사 명함을 받았을 땐, 상대가 자신을 상대로 농담을 하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

    하지만 헌팅 디렉터와 함께 로건을 만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난 하나는 발렌타인 데이의 다른 의미를 알게 되었다.

    발렌타인 데이는 로맨틱하거나 낭만적인 이름이 아니었다.

    적들에게 발렌타인 데이가 찾아왔다는 것은 죽음이 찾아왔다는 뜻과 같았다.

    ‘발렌타인 데이’는 ‘죽음의 날’이었다.

    [전화를 걸어 놓고 왜 말이 없지? 혹시 술이라도 마시고 잘못 건 거야? 과거 연인에게 하는 그 미친 짓을, 설마 네가 하는 건가?]

    로건의 유치한 농담에 하나는 마뜩잖은 말투로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발렌타인 씨.”

    [딱딱한 인사는 그만하고. 너, 왜 캄보디아에 있지?]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로건의 말에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스토커로 전직했어요? 어떻게 압니까?”

    [내 입장에서 널 스토킹 안 하고 어떻게 견뎌. 네가 발렌타인 그 자체인 것을 탓해.]

    “퇴직할 때 비밀 엄수 서류에 사인 했습니다. 전 그 위약금 무서워서라도 입 안 털어요.”

    [고작 정보가 새어 나갈까 봐 무서운 게 아니지. 쯧.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한국인은 너무 겸손해. 그거 좋은 거 아니야.]

    “한국에선 미덕이라고 하죠. 어쨌든… 이미 다 알고 있는 거 같은데, 부탁 좀 해도 됩니까?”

    [의뢰하려고?]

    “발렌타인 데이에 의뢰할 자금은 없습니다. 의뢰가 아니라 부탁입니다. 대신, 이번 사건에 대한 정보를 드릴게요. 제법 맛이 좋은 먹이일 거 같은데.”

    두 눈을 가늘게 뜬 하나는 줄리오 파렌티의 사진을 확대했다.

    막 차에서 내리는 도중 찍힌 사진이었다. F1 경기장 앞에 도착한 모습 같았다. 큰 키의 그가 수하로 보이는 자들과 함께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까지 파파라치들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하나로 넘긴 헤어스타일. 금욕적으로 느껴질 만큼 완벽한 슈트 차림의 남자는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졌다. 눈동자 색도 꽤 진한 편이었으나, 길면서도 깊은 눈매 때문인지 영화에 나오는 빌런들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정중한 신사의 얼굴에서 퇴폐적인 악의가 느껴진다.

    천사의 얼굴을 한 악마라고 부른다지?

    하지만 그녀는 줄리오 파렌티의 얼굴에서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사람들이 아무리 저 얼굴에 열광해도 줄리오 파렌티는 범죄자다. 자신 역시 정의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으나 악당의 길을 걷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범죄자의 정보를 소비하는 일 따윈, 조금의 죄책감도 안겨 주지 못한다.

    그저 이런 거물의 정보를 발렌타인에게 공유하면, 의뢰비를 들이지 않고도 충분히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먹이의 종류는?]

    “마피아.”

    [누구?]

    “줄리오 파렌티. 시칠리아 마피아의 카포, 데이비드 메이어의….”

    [그만, 거기까지.]

    로건의 목소리가 한층 밝아졌다. 수화기 너머에서 의자 밀어내는 소리가 들린다. 일어난 로건은 자신의 비서에게 서류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로건, 시간 없습니다. 일종의 인질 구출 작전이에요. 지금부터 카운트됩니다. 나랑 일 할겁니까? 당장 대답 안 하면 다른 PMC에 연락을….”

    [제길! 기다려, 한다고, 해! 한국인들은 대체 왜 이렇게 성격이 급한 거야? 지금 당장 가. 원하는 건?]

    똥줄이 탄 건지, 결국 로건은 비서에게 다시금 지시했다. 본인이 직접 움직일 테니 관제탑에 연락을 넣으란 지시였다.

    발렌타인 데이가 움직인다.

    하나는 그제야 의자에 털썩 앉아 벽 전체를 가득 채운 남자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무기. 내가 쓰던 것, 전부. 바로 준비됩니까?”

    [인질이 누군지 몰라도, 비싼 몸이겠군. 어쩔 수 없지. 이하나 컬렉션을 준비하지. 2시간 뒤, 세이프 하우스.]

    “고맙습니다, 로건.”

    [너니까 속아 주는 거야. 비싼 값에 사는 거라고.]

    “알아요. 그러니까 고맙다고요.”

    하나는 전화를 끊은 후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다 째깍째깍 움직인 초침이 한 바퀴 회전함과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두 시간 뒤, 세이프 하우스.

    곱씹던 그녀는 침실로 들어가 두이가 쓰던 배낭에 노트북과 프로젝터, 출력한 자료 따위를 챙겼다. 그러곤 글록과 리볼버를 두고 고민하다, 손에 익은 글록을 벨트에 걸었다.

    이 집에 증거를 남겨선 안 된다. 두이가 만들어 놓은 증거부터 제가 찾아낸 것까지, 빠르게 정리한 그녀는 냉동실 안에 든 각 얼음통을 꺼내 뒤집었다.

    싱크대에 탕탕 내리치자, 오랫동안 방치된 딱딱한 얼음이 통째로 빠져나온다.

    하나는 깨진 얼음 사이에서 자그마한 키 하나를 집어 들며 피식 웃었다.

    “하여튼…. 이러면 안 된다니까, 이두이.”

    ***

    프놈펜에서 시엠립 방향 49km 지점, 위스키 양조장 앞에 자동소총을 든 경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산호색을 띤 외관에 프랑스와 독일 양식이 섞인 괴상한 양조장은 이름이나 간판이 없음에도 매일같이 거대한 트레일러가 드나들었다.

    이 지역의 사람들은 조직적으로 운영하는 가짜 양주 제조 공장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니라면 저토록 삼엄한 경계가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

    경비를 서던 이들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바이크를 발견했다.

    검은 바디에, 속도는 대략 329km. 위협적인 엔진음을 내며 달려오는 바이크에 다들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이들의 총구가 끔찍한 속도의 바이크에 집중된다.

    상부의 지시가 떨어짐과 동시에 난사가 이루어질 터. 하지만 상대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파악해야 했다.

    「손님일 수도 있으니 대기.」

    무전으로 전해진 지시에 답한 이들은 반쯤 회전하며 멈춰 선 바이크를 노려보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렸다.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멈춰 선 바이크에서 내린 건, 여자였다.

    배낭을 메고 헬멧을 벗은 여자가 얼굴을 가린 마스크를 내린다.

    그에 다들 탄식과 함께 인상을 찌푸렸다. 손님이 여자란 소린 듣지 못한 터였다.

    하얀 피부에 큰 키. 건드리면 부러질 듯 가는 몸을 가진 여자는 몸에 딱 붙는 청바지에 하얀 셔츠 한 장만을 걸친 채였다.

    하나로 올려묶은 까만 머리카락과 땀에 젖은 속눈썹. 그리고 스코프를 정확하게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를 본 순간, 오싹 소름이 돋는다.

    “여잡니다. 손님이 아닌 것 같….”

    보고하던 알렉의 말허리가 뚝 잘렸다.

    「씹…. One이야. 손님이 One이란 소린 못 들었는데. 젠장, 빨리 문 열어! 죽기 싫으면, 빨리!」

    무전기 너머에서 들려온 고함에 놀란 알렉은 총구를 내린 뒤, 서둘러 차단기를 올렸다. One이 누구인지 몰라도, 미친개라 불리는 오슬로가 당황할 정도라면 제가 상대할 인물이 아니란 뜻.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던 여자가 초소 앞을 지나며 손에든 키를 툭 던진다.

    알렉은 저도 모르게 키를 받아 들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인상을 찌푸린 그녀가 자신이 타고 온 바이크를 고갯짓하며 말했다.

    “보이는 곳에 잘 세워 놔. 키는 꽂아두고.”

    두카티 파니갈레 V4s.

    로망을 앞에 둔 알렉은 어울리지 않게 환히 웃으며 그녀에게 경례했다.

    “환영합니다, One.”

    하나는 바이크로 뛰어가는 남자를 흘깃 보곤 걸음을 내디뎠다.

    하필 이곳은 이두이가 당한 곳과 지나치게 가까웠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이동 루트를 머릿속에 그리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연락이 닿은 것인지, 경계 보던 이들이 궁금증 가득한 표정으로 길을 내어준다.

    고급 위스키와 코냑을 제조하고 와인을 유통하는 곳이다. 불법적으로 보이지만, 엄연히 합법인 로건 발렌타인의 또 다른 수입원이었다.

    ‘어쩐지 두 시간이라고 못 박더라니…. 별 장사를 다 하네.’

    전 세계 어딜 가도 발렌타인의 세이프 하우스가 존재한다. 땅이 넓은 곳이라면, 더욱 많이 존재했다.

    하나는 발렌타인의 사업 수완에 혀를 내둘렀다. 거점이자 세이프 하우스. 조선에 빗대자면 역참이나 다름없는 곳이랄까.

    눅눅한 바람과 땀에 절어 버린 옷 때문에 짜증이 치솟을 때쯤, 에어컨이 팡팡 돌아가는 실내에 들어섰다.

    “하나!”

    걸걸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오슬로 한센. 하나는 거대한 덩치로 뛰어오는 오슬로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오랜만.”

    재밌게도 오슬로는 노르웨이 사람이었다.

    설명하자면, 한국인이 김서울 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과 같은 맥락.

    뛰어온 오슬로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곤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얼굴을 비볐다.

    “오, 살아 있었어. 젠장! 이게 얼마 만이지? 맙소사, 꿈 아니지?”

    하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오슬로의 가슴팍을 밀었다.

    “꿈 아니니까 이렇게 보지. 변한 게 없네, 오슬로.”

    “내면이 변했지. 네 말대로, 철이란 게 들었다고.”

    “철들면 죽을 때가 됐단 뜻이야. 그냥 철 들지 말고 미친개로 살아.”

    “언제는 철들라고 잔소릴 해대더니. 어쨌든, 다시 일하기로 한 거야?”

    “아니, 부탁을 좀 하려고.”

    아니란 말에 실망했는지 축 처진 오슬로가 커다란 개처럼 하나의 뒤를 졸졸 따랐다.

    경계를 서던 이들은 오슬로의 변화에 두 눈을 의심했다. 지옥에서 온 교관이라 불리는 미친개 오슬로를 레트리버로 만들어 버린 저 여자는 누구란 말인가.

    자연스럽게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오른 하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부담스러워, 오슬로. 눈이 너무 많아.”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돌아본 오슬로가 소리친다.

    “다들 눈 깔아!”

    효과는 직방이었다. 말을 어찌나 잘 듣는지, 다들 고개를 숙인 채 두 사람이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에 ‘유철 선배보다 더한 놈이네.’라고 중얼거리자, 긴 속눈썹을 깜빡인 오슬로가 해석을 해 달라며 들러붙는다.

    귀찮다는 듯 오슬로를 떼어낸 그녀는 로건의 사무실 앞에 섰다.

    “로건은?”

    “곧. 헬리포트 열었으니 도착할 거야.”

    6월 22일 18시 29분 07초.

    약속 시간을 어긴 적 없는 로건답게 머리 위에서 요란한 프로펠러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하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로건의 사무실 문을 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을 흔들던 소리가 멎더니 내부에 색다른 기류가 흘렀다.

    로건을 비롯한 여럿의 발소리다. 그것도 최소 100kg 이상의 무게를 가진 자들의.

    하나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집무실을 둘러보다가 로건의 책상에 걸터앉아 그를 기다렸다.

    가까워진 발소리가 멎는가 싶더니, 집무실 문이 활짝 열렸다. 이어 짙은 차콜색 슈트를 멀끔하게 차려입은 로건이 그녀를 발견하곤 환하게 웃으며 팔을 벌린다. 매력적인 눈이 휘고 하얀 치아가 유난히 반짝였다.

    “이 정도면, 만족하겠어?”

    그에 로건의 뒤에 서 있던 이들이 양손에 든 더플백을 하나둘 내려놓는다. 땀을 뻘뻘 흘리며 지퍼를 열곤 뒷짐 쥔 채 한 걸음씩 물러났다.

    그들이 가져온 물건을 확인한 하나는 실소하며 손을 내밀었다.

    “변한 게 없네요, 로건. 오랜만입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