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네온사인 간판이 떨어질 것처럼 흔들리는 싸구려 모텔.
찾는 손님이라곤 약에 절은 외국인들이나, 장거리 트럭운전사들. 그리고 최소한의 비용을 들고 여행길에 나선 배낭여행객 중에서도 세상 물정 모르는 이들뿐인 곳이었다.
빈번하게 강도가 들고 자잘한 사고가 일어나는. 에어컨은 장식이고, 더운물은 운이 좋아야 나올 정도로 노후화된 건물은 말끔한 외모를 가진 여자와 어울리지 않았다.
카운터를 지키던 테오는 고개를 쭉 빼며 재차 물었다.
“선불이에요. 근데 정말 일주일?”
짧은 반곱슬 머리카락에 큰 눈. 현지인이라기보다는 타국의 피가 섞인 듯한 외모를 가진 직원의 질문에, 하나는 지폐 몇 장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일주일, 방 세 개.”
“세 개?”
“잠귀가 밝아서. 내 방이랑 맞붙은 방들 다 비워 줘.”
“쪼그만 여자가 겁이 없네?”
“나 겁 많아. 겁 많아서 예민해.”
지갑을 챙기며 주머니에 든 두 개의 글록을 꺼내 카운터에 올리자 직원의 눈빛이 바뀌었다. 폼으로 들고 다니는 장식용 총이 아니다. 대충 보아도 닳고 닳은 실전용.
마른침을 삼킨 테오는 키 세 개를 슬그머니 내밀며 손가락 끝으로 총을 가리켰다.
“여기서 사고 치면, 바로 쫓아낼 거야.”
“사고 안 나게 감시 잘 해. 나도 피 보기 싫으니까.”
“너, 뭐야. 군인?”
“비슷해.”
하나는 잔돈을 팁 박스에 넣은 뒤, 외부 계단을 올라 3층 객실 앞에 섰다. 보안의 ‘보’자도 모르는 인간이 설치한 감시카메라는 전원이 빠져 있었고 방문도 합판으로 만든 싸구려였다.
하나는 키를 꽂는 대신 방문의 손잡이를 힘주어 당겨보았다. 다행히 방문은 제법 단단하게 잠겨 있었다.
꿉꿉한 냄새로 엉망인 방에 들어선 그녀는 짐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창문을 열어 환기했다.
언제 갈았는지 모를 침대 위에 가져온 블랭킷을 깔고 털썩 드러누우니, 이 세상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잠이 쏟아졌다.
‘근데… 이건 뭐야?’
그녀가 꺼낸 건 줄리오가 내어 준 휴대전화였다.
기본 앱에 추가되어 있는 지도를 켜자, GPS 신호와 함께 붉은색의 점이 콕 찍혔다.
대체 여기에 뭐가 있는데?
아무리 봐도 지형상 뭔가 있을법한 곳이 아니었다. 뭐, 보물이라도 숨겨 놓은 거 아니야?
그런데 재미있는 건, 붉은 점이 이따금 움직인다는 것. 혹시 이게 누군가의 GPS 신호라면….
그때였다. 이번엔 파란 점이 하나 더 생겼다.
그 점은 붉은 점과 5km 정도 떨어진 곳에 생겨났는데, 하필 그녀도 아주 잘 아는 곳이었다.
기억이 맞다면, 파란색 점이 있는 곳은 줄리오 파렌티의 별장과 가까운 곳이다. 하지만 별장은 아닌….
“뭐 하는 거야.”
설마, 본인의 좌표를 알려 주는 걸까?
황당함에 웃음이 났다. 하나는 하얗게 드러난 제 허벅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칩이 박힌 곳을 쓰다듬었다.
칩을 꺼내기 전까지는 줄리오 파렌티의 손바닥 안이다. 그 사실이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았다.
- 비행기 탔어. 한국 도착하면 연락할게. 아무 일 없는 거 맞지?
두이의 연락에 하나는 엄지를 치켜든 이모티콘을 보냈다.
- SNS가 난리야. 당장은 강무호 보호 명령이 떨어진 것 같은데, 24시간 안에 체포 명령으로 바뀌지 않을까 싶네.
- 그렇겠지. 조작 영상이라고 떠드는 애들도 있더라. 근데 걔들은 원래 믿고 싶은 것만 믿어.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쓰지 마.
- 여권이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 너 공항에 도착하면 볼만하겠다. 너희 부서 인간들 다 나와 있겠네.
- 똥줄 타겠지. 어쨌든… 금방 데리러 다시 올게.
- 응. 내가 너 살려 놨으니, 이제 남은 일은 네가 알아서 해. 난 좀 쉴 테니까.
하나는 양손을 옆으로 툭 뻗었다.
긴장이 풀어져서인지, 이제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 때문인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줄리오 파렌티가 제시한 72시간.
벌써 24시간이 흘렀으니, 이제 48시간이 남았다.
눈을 감은 하나는 오랜만에 머릿속 시계를 발동시켰다.
***
“오오, 더운물이 안 나와? 기다려. 다른 방 수도를 다 잠가서라도 나오게 해 줄게!”
18시간이 더 흘렀다.
그동안 가벼운 사건이 있었는데, 짧게 축약해 보자면….
1) 더운물이 안 나왔고
2) 갱단처럼 보이는 무리가 모텔 로비를 장악한 채 떠들었으며
3) 그들이 카운터를 보는 테오를 협박했다.
4) 결국, 레토르트 음식을 데우기 위해 전자레인지를 빌리러 나온 하나에게도 시비를 걸었고
5) 그녀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 결과 모텔 밖에는 픽업트럭 앞에 꿇어앉아 머리 위로 손을 든 놈들이 있었다. 얼굴은 만신창이고, 다섯 명 중 세 명은 양다리가 모두 부러졌다.
테오가 더운물을 그녀의 방으로 끌어모으는 사이, 태국식 국수 볶음을 데운 하나가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구시렁거리던 놈들이 흠칫 놀라며 시선을 피한다.
그중에서도 이빨이 다섯 개나 나가 몰골이 엉망이 된 놈을 보며 하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이제 꺼져. 손 내리고. 나랑 한 번만 더 마주치면, 그땐 머리통에 총알부터 박고 시작할 거야. 알았니?”
돌려보내 준단 말에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인 놈들이 서로를 부축해 픽업트럭에 올랐다. 그들의 퇴장에 지켜보던 몇몇이 박수를 치고 엄지를 치켜든다.
나이 지긋한 노인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마 이 근처를 돌며 어지간히 사람들을 괴롭혀 온 놈들인가 보다.
뜨거운 국수를 들고 방으로 돌아온 하나는 곧장 노트북을 켜 한국 포털사이트에 접속했다.
한국은 지금 난리가 난 상태였다. 공항에 들어서자마자 살아 돌아온 이두이에게 쏟아진 기자들의 스포트라이트. 두이는 정보부 국장과 함께 차를 타고 공항을 뜨는 것으로 기사에서 사라졌고, 더는 언급되지 않았다. 정부 차원에서 엠바고를 요청한 게 분명하다.
제일 많이 언급되는 건 라이브로 송출한 영상에 관해서였다. 강무호 의원이 실종된 지금, 예상했던 대로 체포 명령이 떨어졌다.
「국회 의원 강무호, 마약 유통 및 살인 청부.」
「강무호 의원 자택 지하 창고 압수 수색. 폐기물 처리 업체를 통한 증거 인멸 시도.」
「무운해운 대표이사 강무진의 납치 및 살인 청부.」
모든 것이 완벽하고 순조로웠지만, 곤란한 점도 있었다.
사람들은 영상을 찍었던 여자가 위험하다며, 그녀를 찾아야 한다는 청원을 국민신문고에 올린 상태였다. 반면 경찰에선 특수 부대 출신인 그녀의 신상 파악을 마친 뒤, 캄보디아 현지 경찰에 공조를 요청하겠다고 했다.
인터폴을 끌어들이지 않은 것에서, 이두이의 입김이 얼마나 강력하게 작용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근데….’
어제부터 휴대전화에 뜬 붉고 푸른 신호가 심상치 않다. 잠시 시엠립 북부까지 움직였던 푸른색 점이 점점 제가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것은 붉은 점도 마찬가지. 하나는 가늘어진 눈으로 화면을 노려보며, 불어 버린 국수를 호로록 빨아들였다.
“하나! 뜨거운 물 이제 잘 나올 거야!”
문밖에서 테오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 고마워.”
그녀의 대답에 앞에서 얼쩡거리던 테오가 더 필요한 게 없냐고 물었다. 하나는 커피가 마시고 싶다고 했고, 테오는 이내 엄청나게 향이 좋은 원두를 가져왔다.
“우리 집안이 저 아래에서 커피 재배를 하거든. 끝내줄 거야.”
“오, 고마워.”
“내가 고맙지. 와, 너 같은 여자 처음 봤어.”
뭐, 그런 소리 자주 듣는다만.
생긋 웃어 보인 하나는 150g 정도의 원두를 받아 든 뒤, 문을 닫았다.
이어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섰다. 그러며 수건으로 권총을 감싸 가까운 곳에 두곤 물을 틀었다.
테오의 말대로 뜨거운 물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콸콸 쏟아졌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마치고 지저분한 욕실 청소를 끝낼 때까지. 하나는 욕심껏 더운물을 썼다.
그녀가 대충 타월로 몸을 감싼 뒤 욕실 문을 열 때였다.
어둑한 방안에 피 냄새가 가득하다. 하나는 손에 든 총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상대를 겨누었다. 그러자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 있던 상대가 천천히 상체를 세운다.
“유은성?”
대체 피를 얼마나 뒤집어썼으면….
남자에게선 지독한 냄새가 났다. 코를 막은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거, 네 피야?”
“아니. 지독해?”
“어. 좀…. 씻을래? 이런 상태로 대화하고 싶지 않은데.”
“욕실 좀 빌리지.”
“무기는.”
“없어. 총알도 없고, 나이프도 날이 나가 버렸고. 너 때문이야. 강무호한테 얼마나 겁을 줬으면, 경호원이 50명이냐고.”
“정말? 그래서… 죽였어?”
일어난 유은성이 묘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죽이는 건 한국에 가서.”
저벅저벅 걸어 욕실로 들어가던 남자가 휘청인다. 아마 보이지 않는 곳에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쯧 혀를 찬 그녀는 유은성이 샤워를 하는 사이, 옷을 입고 버너와 냄비를 꺼내 포션에 든 꿀을 끓였다.
그러다가 유은성이 입을 옷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는 테오가 보인다.
하나는 제법 키가 큰 테오를 위아래로 훑고는 부탁했다.
“옷 좀 빌려줘. 속옷도. 나 아는 놈인데, 너도 봤지? 상태가 영….”
“하나, 괜찮아?”
“내가 안 괜찮을 게 뭐야.”
“무서운 사람 같던데….”
“괜찮아. 나한테는 무섭게 안 해. 어쨌든 옷, 빌려줄 수 있지?”
“어어, 지금 바로 가져다줄게.”
테오는 곧장 뛰어 내려가 유은성이 입을만한 속옷과 옷가지를 들고 올라왔다. 고마운 마음에 달러를 내밀었지만, 테오는 극구 거절하며 귀 끝을 빨갛게 붉혔다. 그러며 친구가 꼭 괜찮았으면 좋겠다고 말한 뒤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갔다.
그 사이, 샤워를 마친 건지 물소리가 멎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충 머리 위에 수건을 덮은 유은성이 나체로 걸어 나왔다.
“옷이 저 모양 저 꼴인데, 어쩌지.”
하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를 훑었다. 역시 상처가 제법 있었다. 복부는 무사했으나, 팔과 허벅지 등엔 칼에 찔린 흔적이 역력하다.
하나는 테오가 가져온 옷을 가리킨 후, 제 맞은편 의자를 발로 툭 건드렸다.
“속옷만 입고 이리 와.”
그러자 테오의 옷을 집어 든 유은성이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쉰다.
“이깟 싸구려라고 생각하지 마.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다니는 것보단 나으니까.”
“누구 건데.”
“여기서 사귄 친구. 안 입을 거야?”
유은성은 반쯤 취한 사람처럼 고개를 젓더니, 속옷을 입고 그녀의 앞에 앉았다.
하나는 수저로 꿀을 휘휘 저은 다음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깨물어. 뜨겁고 아플 거야. 근데, 지혈엔 좋아. 회복에도 좋고.”
“널 깨물 바엔 내 몸에 칼을 꽂고 말지.”
“너, 나 죽이려 했잖아.”
“미안. 섣불렀어.”
피식 웃음을 흘린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유은성의 입을 막았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과 함께 뜨겁고 끈적한 꿀이 남자의 허벅지 위에 흘러내렸다.
“으읍.”
고통에 힘들어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하나는 그대로 다른 상처에도 뜨거운 꿀을 발랐다. 그러곤 곧장 손부채질을 해 상처를 말렸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남자의 얼굴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피가 멎고 벌어졌던 상처가 닫혔다.
처치를 끝낸 하나가 그의 입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 앉으려 할 때였다. 그녀의 손목을 잡은 남자가 고개를 치켜든다. 몽롱한 눈동자 안에 깃든 건, 살인 후의 후회. 그리고 스스로를 향한 자괴감과 파괴 욕망이었다.
“복수는 원래 좀 힘들지.”
“고맙다, 이하나.”
“고마우면 목숨으로 갚아. 나는 너, 아직 용서한 거 아니거든. 그냥 네가 강무호를 잘 죽일 수 있게 도와주는 거야. 응원만 열심히 할게.”
진통제 대신 약을 한 건지 남자의 눈동자는 흐리멍덩했지만, 그 안에 든 감정만큼은 또렷했다.
하나는 천천히 그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피식 웃은 남자가 잡았던 손목을 놓아주곤 또다시 사과한다.
“미안.”
“옆방 비었으니까 거기서 쉬어. 그리고 약 깨면 가. 너 때문에 난 한동안 한국에 못 들어가게 돼서, 조용히 여행이나 할 생각이거든.”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난 유은성이 테오의 옷을 챙겨 입었다. 체격이 비슷하다고 생각했건만, 유은성에게 태오의 옷은 작았다.
하나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휴대전화를 켰다. 그러자 이미 푸른 점과 붉은 점이 거의 겹쳐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화면이 떴다.
“너… 혹시 GPS 갖고 있어?”
하지만 유은성은 맨몸이다. 조금 전 속옷만 입고 있는 걸 분명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녀의 질문에 은성이 자신의 팔을 내밀었다.
“박았지, 여기. 너처럼.”
“박았다고?”
“어. 그게 조건이었거든. 이 일 마치면, 러시아로 갈까 해. 그곳에서 다른 이름으로 살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유리 페트로프랑 거래했구나.”
“정확하게는 그쪽이 아니야. 너한테 미쳐 있는 새끼 쪽이지.”
황당해하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일어난 은성이 마지못한 듯 방문을 열 때였다.
칠흑 같은 밤. 전기가 부족해 흔한 조명 하나 없는 복도 가운데, 턱을 든 남자가 흰 연기를 느릿하게 흘리며 서 있었다.
“Ciao.”
이어 반도 피우지 않은 담배를 벽에 비벼 끄더니, 유은성을 지나 저벅저벅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하나는 의자에 앉은 상태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줄리오 파렌티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린 그가 그녀의 앞에 서더니, 상체를 숙여 작고 갸름한 뺨을 감쌌다.
“잠깐 놔줬다고 바람이나 피우고 말이지….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