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 (110/180)
  • <50>

    터키색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는 DE:A의 갑판 위에 만찬이 펼쳐졌다.

    따뜻하면서도 짭조름한 바닷바람이 크림색 타프를 펄럭이며 불어온다. 고용된 셰프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준비한 음식들을 앞에 둔 줄리오 파렌티는 험악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이마를 짚기도, 인상을 쓰기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다가 옆에 있는 이하나를 보며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기도 한다.

    반면, 이하나는 수혈까지 받으며 앓았던 사람답지 않게 쌩쌩한 모습으로 펑펑 우는 장세이를 달래느라 쩔쩔매고 있었다.

    “그러니까… 살아 있잖아요. 너무 울면 태교에 안 좋다니까요?”

    “진짜, 하나 씨가 잘못되는지 알고…. 흐윽, 내가 얼마나…! 거기서 뛰어내리는 법이 어디 있어요!”

    “언니도 바이크 탄다면서요. 나, 다 들었는데요? 그리고 세이 언니, 손기술 장난 아니라면서요?”

    하나의 소곤거림에 울음을 뚝 그친 세이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고개를 젓는다.

    “난 그래 봤자 좀도둑이었다고요. 하나 씨처럼 바다로 막 뛰어들고 총 쏘고, 그런건…. 하아, 어쨌든 유리 아니었으면 나 줄리오한테 죽었을 거예요.”

    “고마워요. 언니 덕분에 살아 있는 거나 다름없어요.”

    허벅지를 톡톡 두드린 하나는 유난히 조용한 줄리오를 힐끔 돌아보며 물었다.

    “근데, 두이 어디 있는지 알아?”

    그러자 한숨 쉰 줄리오가 아래를 가리키더니 잔에 술을 따른다.

    “지하.”

    “지하는 왜?”

    “리우에게 갔어. 이유는 모르지.”

    “혼자?”

    “스테판이랑.”

    하나는 줄리오 파렌티가 저기압인 이유를 너무도 잘 알았다. 그건 어제오늘 그녀가 회복하며 벌인 만행 때문이었다.

    누구나 몸이 안 좋거나 아프면 이기적이 되곤 한다. 칼에 찔리고 파편들이 박힌 데다 총까지 맞았는데, 당연하지 않은가?

    게다가 정신을 잃은 지 3일 만에 깨어났다. 수혈까지 받은 마당이니 몸이 조금만 아파도 예민해지기 마련.

    그래서 박은 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잔인하긴 하지만, 그는 너무 컸고 그녀는 삽입만으로도 충분했다. 게다가 실수로 그가 한번 몸을 뒤로 물렸다가 치댔을 때, 상처가 벌어져 울컥 피가 샜다. 극소량의 피였으나 줄리오는 그 이후, 키스는커녕 그녀의 몸에 손끝 하나 대지 않으려 노력했다.

    결국, 세 번 모두 사정은 불발.

    하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웃음을 참았다. 워낙에 회복이 빠른 편이지만, 여전히 힘주어 웃는 건 힘들었다.

    “즐겁나 보지?”

    포도 한 알을 입에 넣은 그가 혀로 굴려 깨물며 두 눈을 가늘게 접는다.

    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안쓰러워 죽겠어.”

    “그럼 조만간, 보상을 받아야겠군.”

    그가 말할 때마다 풍미 깊은 포도 향이 난다. 턱을 괸 그녀가 입을 벌리자, 포도 한 알이 입 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보상해 줄까?”

    콱, 씹은 과육의 즙이 입 안에 달큼하게 퍼진다.

    하나의 입에 포도를 넣어 준 그는 나른하게 미소 지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울게 될 거야. 어쩌면… 애원할지도.”

    아… 나, 이거 뭔지 알 것 같아.

    등줄기가 싸해지는 불길한 예감에 미간을 찌푸릴 때였다. 장세이의 곁에 앉아 고기를 작게 잘라 놓아 준 유리 페트로프와 눈이 마주쳤다.

    장세이의 부탁 때문이었겠지만, 골칫덩어리인 자신을 도와준 그에게 하나는 어느 정도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저 정신 나간 천재 해커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계획이라며 줄리오 역시 나름의 인정을 하지 않았던가.

    “고마워요.”

    불쑥 내뱉은 인사에 유리는 와인을 따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캄보디아에 도착하면, 곧장 한국으로 갈 겁니까?”

    누구도 묻지 않은 질문이다. 이후의 여정이란,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항공권에 적힌 일정처럼 정해진 것이었다.

    이두이가 본부에 생존 사실을 알린 뒤 최태준의 범죄를 밝히면, 한국으로 돌아가 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자신은 증인이자 참고인이기도 했다. 3년 정도 복잡한 시기를 보내게 되겠지만, 상대는 국가 정보부이다. 일을 크게 만드는 대신 내사로 해결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에 희망을 걸었다.

    “아마 그럴걸요?”

    하나의 대답에 시끌벅적하던 테이블에 잠시나마 정적이 내려앉았다.

    “청와대 경호원이 되려고 준비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내가 그런 소리까지 했어요?”

    “아뇨, 궁금한 게 많아서요. 말하지 않아도 압니다. 이것저것.”

    “일이 잘 풀린다면, 대통령 옆에서 무전 치고 있겠죠. 아니면 영부인이든.”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이하나 씨가 감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현재 상황으로는요.”

    기껏 한다는 소리가 그거였어?

    그녀는 피식 웃으며 빵 조각을 손으로 갈랐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이두이 씨의 무죄를 밝힐 증거, 제가 드리죠. 최태준의 불법 마약 거래 내역 및 코인 이동 내역. 강무진과의 거래 내역과 살인 모의 및 방조, 의뢰까지 모두 든 녹화 영상을 준비해드릴 수 있습니다.”

    굳어 버린 그녀는 아랑곳없이, 유리가 세이의 잔에 오렌지 주스를 따라 주며 말을 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당신도 알다시피, 한국의 법으로 강무진을 처벌하진 못해요. 해 봤자 솜방망이 처벌이 되겠죠. 만족스럽지 않을 겁니다.”

    상대에게 폭행을 행한 자는 금고형에 처한다.

    상대에게 폭행을 행한 자는 금고형에 처하나, 방어하기 위함은 정당방위에 속한다.

    상대에게 폭행을 행한 자는 금고형에 처하나, 방어하기 위함은 정당방위에 속한다. 하나 급박부당한 침해가 존재해야 하며, 권리 방위의 목적이 있어야 하고 부득이한 경우여야 한다. 또한, 필요의 정도를 넘으면 과잉방위가 되어 위법이 된다.

    한국어는 우수하기에 무섭도록 치밀하면서도 지나치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부득이한 경우를 설명할 척도가 없으며, 필요의 정도를 명확히 할 수 없다.

    그건 법이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누구에게도 공평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유리 페트로프가 한국의 법까지 알고 있다고?

    천재라더니, 헛소린 아니었나 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거 같은데, 안 돼요.”

    하나는 빵가루가 묻은 손을 털며 까만 눈에 힘을 주었다.

    “강무진은 사망 처리된 상태예요. 살아 있음을 증명하지 않으면, 당신이 주는 어떤 것도 증거가 되지 못해요. 왜냐고? 뭐든… 죽으면 끝이거든. 사건 종결이야. 내가 바보인 줄 알아?”

    험악한 하나의 반응에 이번엔 유리에게로 주위의 시선이 움직였다. 다들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듯한 눈빛이라 볼만했다. 특히나 로렌조는 입에 넣었던 파스타를 뱉어내며 포크를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반면 줄리오는 묵묵히 식사하며 대화를 듣기만 했다. 사실 제일 예민하게 반응할 줄 알았던 남자다. 제가 한국에 간다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죠. 리우를 제가 좀 쓰려고 했습니다. 잘 다듬어서 DE:A를 맡기려고요. 당신도 알다시피, 나와 세이는 세상에 나오면 안 되는 사람들이라.”

    “…그래도 벌은 받아야지.”

    “FBI에게 넘길 겁니다. 게빈도 공을 세워야 하니까. 단, 골칫거리들은 종종 감옥을 빠져나오기도 하더군요.”

    머리가 지끈거린다.

    유은성에게 딱히 정이 들었다거나, 그를 동정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유리 페트로프의 말마따나 한국의 법정에 그를 세우고 싶진 않았다.

    뭔가 속이 후련하지 않다. 두이를 죽이려 했고 납치했으며, 상처 입힌 쓰레기…. 그런 놈에게 기회를 준다고? 기회를 줄 수는 있어도, 그만한 처절함이 뒷받침되어야만 할 것이다.

    “강무호. 동남아시아에서 일으킨 강무진의 마약 범죄는 모두 강무호가 저지른 거예요. 그거 알아내 줘요. 그러고 내가 허락해도, 내 동생이 용납 안 할걸? 걔는 나랑 다르거든요. 이두이에게 유일한 무법지대는 나예요.”

    “흠… 그건 좀 골치 아프겠네요.”

    “정보부터 주면 설득은 이후에 해 볼게요. 아, 고기 가져와야겠네.

    끙 소릴 내며 일어난 하나는 빈 접시를 집어 들었다. 줄리오가 따라 일어나려 했지만, 그녀가 잡은 건 로렌조였다. 그러자 벌떡 일어난 로렌조가 하나를 부축했다.

    “팔자가 뭐야, 하나?”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에 서서 고기 위주로 담던 로렌조가 물었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커다란 스테이크를 접시에 올렸다.

    “누가 말해 줬어?”

    “세이가.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팔자가 세대.”

    “으음, 그러네? 팔자는 데스티니랑 비슷한데 형태가 좀 달라. 인생이 여기서 여기까지 이어진 하나의 선이라면, 데스티니는 저 끝. 종착지. 팔자는 시작부터 끝에 다다르기 직전까지의 과정.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말이야.”

    “으음, 그래?”

    “응. 동양인들은 팔자가 바뀌지 않는다고 믿거든.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 나는 싫어. 근데 뭐, 결국 이것도 팔자대로 산다. 이렇게 말하긴 하더라.”

    “복잡하네.”

    “맞아.”

    고기만 듬뿍 담은 접시를 든 채 테이블 방향으로 돌아서자, 제 자리에 앉아 있는 세이가 보인다. 진지한 표정으로 줄리오와 대화 중인 모습이 며칠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두 사람의 모습과 겹쳐졌다.

    그때 기분이 어땠더라. 넋을 놓은 줄리오의 모습에 짜증이 났고, 심장이 쿵 떨어졌고, 도망치고 싶었다. 제가 한없이 약해진 거 같아서 싫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른 의미로 좀… 이상하다. 답답하다고 해야 할까, 숨을 쉬고 있지만 산소가 부족하다고 해야 할까.

    하나는 로렌조에게 접시를 넘기곤 부축 없이 테이블로 향했다. 다가오는 그녀를 발견한 세이가 생긋 웃으며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하나는 그대로 세이의 어깨를 누르며 줄리오의 무릎에 앉았다.

    “다시 생각해도 너무 고마워서. 덕분에 살았어요, 언니.”

    어깨를 잡힌 세이가 예쁜 입술을 달싹이며 멍하니 고개를 든다.

    오른쪽 뺨에서 쪽, 소리가 났다.

    설탕을 발라 놓은 듯 달콤한 미소로 세이의 뺨에 키스한 하나는 이번엔 반대편 뺨에 입 맞추며 목덜미를 끌어안으려 했다.

    “그만!”

    “로즈!”

    두 남자의 경악 어린 외침과 함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입과 복부를 감쌌다. 하나는 유리 페트로프에게 들린 채 멀어지는 세이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그녀를 돌려 앉힌 줄리오가 입술을 손으로 문질러 닦아 주며 욕설을 내뱉는다.

    “그러면 안 돼, 하나! 키스라니! 빌어먹을, 같은 여자끼리…!”

    또다.

    가슴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줄리오.”

    강하게 문질러 닦는 남자의 손가락을 콱 깨물며 부르자, 사납게 두 눈을 내리뜬 그의 콧대에 주름이 깊게 졌다.

    하나는 양팔을 뻗어 줄리오의 목덜미에 둘렀다. 그러며 상체를 쭉 늘려 그의 가슴에 자신의 가슴을 맞댔다.

    “너, 그냥 계속 바람하면 안 돼?”

    “뭐? 그게 무슨 소리지?”

    “반짝반짝한 거 말고, 그냥….”

    두 눈을 가늘게 뜬 그가 그녀의 입술을 가만히 응시하다, 다물린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넣었다. 혀를 내민 하나가 싱긋 웃자 코웃음 친 남자가 탄식을 흘린다.

    “헛소릴 하는 거 보니 하선하기 전에 네 애원을 들을 수 있겠군.”

    “좋아.”

    농담조로 받아칠 줄 알았는지,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혔다.

    굳어 버린 그의 입술을 핥은 그녀가 한숨을 내쉬고는 힘을 빼며 가슴팍에 안겼다.

    “좋다고, 뭐든. 얼마 안 남았잖아. 시간은 금이야. 할 거 다 해 봐야지. 그래야 후회가 없는 법이라고. 그렇게 배웠어, 나는. 그러니까… 하고 싶은 거, 다 해 보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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