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 (107/180)

<47>

그녀를 올려다보는 유은성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휘어졌다. 그러더니 잡힌 머릴 벽에 기대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진솔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내가 불쌍해져서 살려 주고 싶을 텐데?”

“걱정 마. 내가 신파에 강해. 내 인생이 지긋지긋하게 구질구질했거든.”

“구질구질이라…. 나랑은 좀 다르네. 나는 끔찍하기만 했는데.”

“그럼 어디 고해성사라도 해 봐. 간결하면서도 디테일하게. 주문이 너무 어렵나?”

큭큭대며 웃은 그가 그녀의 눈을 빤히 올려다본다. 게빈은 유은성의 진짜 이름이 에드워드 리우라고 했다.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인의 신분으로 악행을 일삼았고, 국제적 범죄 조직의 브레인으로 활동 중이라고.

하지만 이 남자는 강무진이기도 하다. 왜 에드워드 리우를 사망처리 한 뒤, 강 회장 밑으로 들어간 걸까? 그리고 어째서 강무진이란 이름도 사망자로 만들어 버린 걸까.

대체 무엇을 위해서.

“유은성…. 그게 내 이름이야.”

가라앉은 음성에 하나의 눈동자 색이 짙어졌다.

“미국 오클랜드에서 마약 중독자였던 여자의 배를 빌려 태어났지. 하지만 여자는 아일 키울 수 없었어. 날 공원 벤치에 버리고 도망쳤다고 그러더군. 태어난 지 하루 만에.”

하나는 계속해 보라며 고개를 까딱였다.

왜 구질구질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모두 디폴트값이 있을까. 우스우면서 가슴 안이 뜨거워졌다.

“그래서 날 입양해 키운 분들이 유주영, 홍세진. 미국으로 이민 온 부부인데, 불임이야. 이미 그 집에는 두 명의 입양아가 있었고, 난 셋째였는데… 괜찮았어. 적어도 보육원보다는 나았으니까. 근데 지나고 보니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더라. 너도 그런 거 있지?”

“응, 왜 없겠어. 당연히 있지. 그래서?”

“근데 사실 나 같은 놈은 참, 나쁜 길로 빠지기가 쉬워. 그걸 아니까 군에 입대를 했고 돈을 벌고 싶어서 용병일 하다가 거래에 끼어들게 된 거야. 그렇게 자연스럽게 돈을 벌다 보니 어느새 범죄자가 되어 있더라?”

“친구를 잘 만나야 한다니까. 쯧.”

“맞아. 나한테 거래를 다 뺏기고 바닥에서 퇴출당한 놈이 있었는데 그놈이 내 형제들과 부모님을 모두 죽였어. 복수였지. 그냥 문 열고 들어가서, 총을 난사했어. 애초에 분풀이를 한 거더군. 개죽음이지.”

유은성의 고개가 툭 떨어진다. 하나는 칼을 쥔 손을 조금 뒤로 뺐다. 죽일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래서 반 미쳐 있던 시기에, 우연히 강무호를 만났네? 그것도 내 물건을 빼돌린 새끼의 고객으로. 그때 내 물건을 빼돌린 게 최태준이었어. 야금야금, 티 나지 않게 빼돌리다 보니 어느새 구멍이 난 거지. 죽이러 찾아갔어. 근데 강무호를 본 순간, 좆됐다 싶더라. 나랑 닮았더라고. 그쪽도 내 존재를 알고 있었어. 내 친모가 찾아갔었나 봐. 입양된 사실도 알고 있는 거 보니,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 같더군.”

“그래서 날름 그 밑으로 들어간 거야?”

“당연하지. 내 동아줄이었는데. 근데 잡고 보니, 이게 참… 더럽더라고. 나보다 별것도 아닌 놈한테 형님이라 부르면서 납작 엎드리는 거, 못 해 먹겠더라. 게다가 강무호는 내 이름으로 동남아 국가에서 계속해서 마약 거래를 했어.”

“그럼 두이는. 왜, 줄리오 파렌티를 두이랑 엮었어.”

“내가 엮은 게 아니야. 최태준이 엮은 거지.”

“왜 죽이려고 했냐고! 아니? 실행까지 했지. 근데 두이가 살아난 거야.”

그녀의 고함에 유은성이 선뜻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폭탄을 터트렸어. 그런데 죽은 놈이 다르더라? 그래서 쫓기 시작한 거야. 이두이가 강무호란 배후를 알아내기 전에, 죽이려고. 그리고 강무진의 이름을 버리고 유은성으로 살려 했지.”

그의 눈이 번뜩임과 동시에 하나의 왼쪽 얼굴로 주먹이 날아들었다. 방심했다. 순간 팔을 들어 막았지만, 이어 복부로도 주먹이 꽂혔다.

“씹!”

뒤로 밀려난 하나는 자신을 덮치는 유은성의 배를 걷어찼다. 하지만 이내 발목이 잡혀, 반쯤 회전해 바닥으로 짓눌렸다.

“하아, 하아…. 근데 이하나, 네가 나타난 거야. 네 동생 찾겠다고. 씨발…. 내 앞에.”

체중을 실어 누르는 남자를 뿌리칠 수 없었다. 자세가 나오지 않았다. 뒤쪽으로 꺾인 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난다. 뼈가 빠지거나 관절이 나간 것 같았다.

쾅!

분풀이하듯 주먹으로 바닥을 때린 그녀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틀었다.

“설렜구나?”

“어떻게 반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그래서. 네 계획은 뭔데.”

“계획? 그런 거 없어. 폭탄을 터트렸을 때, 그냥 여기에 다 같이 묻히려고 했을 뿐이야. 넌 살기 위해서, 난 죽기 위해서.”

“유은성으로 살고 싶었다며.”

“너 때문에 그마저도 망했거든. 네겐 유은성이 악당인데, 그 이름으로 어떻게 살아? 난 악당으로 안 살아. 마음이 약해서, 유은성으로는 나쁜 짓 못 해.”

“미친놈.”

유은성은 지금까지 힘을 비축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를 짓누른 채 상체를 숙인 그가 하나의 머리카락을 걷더니 관자놀이쯤에 이마를 댄다.

“상처 많이 입었네, 이하나.”

그러며 그녀의 상처를 찾아 꾹 눌렀다.

고통의 비명을 참은 하나가 숨을 크게 들이켜며 손목시계 화면을 본다.

“흥분하지 마라. 산소 얼마 없으니까.”

“피도 많이 나는데? 왜 이렇게 살아? 너 같은 여자가 왜… 죽음을 손에 쥐고 다니는 거지?”

“귀에다 바람 불지 마. 짜증 나니까.”

유은성이 큭큭대며 웃는 사이, 그녀는 손을 뻗어 떨어트린 칼을 쥐었다. 그러곤 있는 힘껏 몸을 틀었다.

이미 망가져 버린 팔에서 재차 우두둑 소리가 난다. 비명을 지른 하나는 유은성의 목을 가격한 뒤, 벽에 등을 기대곤 방어 자세를 취했다.

팔이 제대로 망가진 건지 통증조차도 아득하다.

그때 입가에 흐른 피를 닦은 은성이 바닥을 기어와 칼을 겨눈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곤 본인의 턱 끝에 가져다 대며 두 눈을 치켜뜬다.

“찔러야 할 거야.”

“걱정 마. 넌 내 손에 죽어.”

“언제 죽일 건데. 놈이 구하러 오면?”

“아니? 두이가 누명 벗으면….”

“하, 난 여기가 내 무덤 같은데.”

그의 얼굴이 가까워질수록 칼끝이 턱밑을 깊게 찌르고 들어간다. 피부를 가르는 느낌이 선득하게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하나는 결국 손에 힘을 풀었다. 아무리 개새끼여도, 여기서 죽으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버릴 테니까.

자조하듯 긴 눈꼬리를 늘어트린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누군가와 겹쳐진다. 유은성이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다. 유은성이란 이름으론 범죄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하나는 눈을 똑바로 뜬 채 남자의 눈을 응시했다. 그녀의 턱에 튄 피를 혀로 핥은 그가 다친 팔을 움켜쥔다.

“아이씨, 아프다고!”

“이하나, 내가 죽기 전에 네가 죽을 판이야.”

“안 죽어. 안 죽는다고! 자꾸 죽는다고 하지 마! 안 죽어!”

울컥하고 피가 흐르는 느낌이 났다.

상처를 알기 전엔 몰랐던 통증이 밀려든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쇼크 상태에 이르고도 남았을 터.

“정말 너란 여자, 모르겠다.”

그가 상처 난 입술 가장자리에 제 입술을 누르며 몸을 붙일 때였다.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덜컹거리더니 수십 발의 총알이 박힌다. 철문을 난사하는 총성에 놀라기도 잠시, 두꺼운 문이 아래에서 위로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은성에게 짓눌린 채 반쯤 누워 있던 그녀는 남자의 까만 구두코를 보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것 봐…. 내가 온다고 했지.”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이유 모를 안도감이 전신에 퍼진다. 구겨진 탓에 반밖에 열리지 못한 승강기 문 너머, 서 있던 남자가 천천히 상체를 숙여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댄다.

짙은 색의 드레스 셔츠에 검은 팬츠를 입은 그의 머리카락이 쏟아져 흐트러진다.

하나는 사냥을 준비하듯 사납게 번들거리는 눈빛을 마주했다. 저 미쳐 버린 눈빛이 왜 이렇게 반가울까. 퍼부어지기 직전의 살기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그때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던 줄리오 파렌티가 불쑥 손을 들었다. 이어 날아든 총알이 유은성의 팔과 허벅지에 차례로 박힌다.

“아악!”

놀란 건 하나였다. 승강기 안으로 들어온 줄리오가 재차 방아쇠를 당기려고 하자 그녀가 앞을 막았다.

“그만! 이 새끼, 내가 죽일 거라고 했잖아!”

줄리오 파렌티는 그런 하나를 멍하니 내려다보기만 했다. 초점이 없는 듯도, 반대로 분노에 잠식된 듯도 한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는 그녀의 까만 눈에서 코, 입술과 목을 차례로 응시하며 천천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고작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몇 년 만에 만난 것처럼 가슴이 이상했다. 그에 힘겹게 일어난 하나가 줄리오의 손에 쥐어진 총을 빼앗으려 할 때였다.

손목을 잡아당긴 그가 커다란 품으로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으스러트릴 듯 끌어안은 채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하나….”

터질 듯 뛰어대는 심장 박동과 미미하게 일어난 경련. 머릿속이 어지러울 정도로 몸이 떨렸다. 찰나 그녀의 뒷머릴 감싼 그가 흔들리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하나….”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이름만을 첫 말을 뗀 아이처럼 읊조렸다.

하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넓은 등을 감쌌다.

“울지마. 네 말대로 살아 있으니까.”

그러며 그의 뺨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줄리오.”

***

강제로 응급 처치를 받은 두이는 절뚝거리며 건물 입구로 뛰어갔다. 그러자 홍콩 경찰이 그를 막아서며 경고한다.

“무너질 겁니다! 뒤로 물러나세요!”

“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나오고 있습니다. 무전이 왔…. 아, 저기 나오네요. 자자, 물러나세요!”

경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장 군인들이 입구를 총으로 겨눈다.

그들의 총구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걸어 나오는 남자는 줄리오 파렌티였다. 그리고 그의 품엔 한 여자가 안겨 있었다. 축 늘어진 팔, 작고 마른 몸. 이하나였다. 그 뒤를 이어 로렌조와 로마노의 부축을 받으며 나온 유은성 역시 정신을 잃은 상황.

군인이 줄리오에게 경고하며 멈추라 외쳤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저 군인이 조준한 총구를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노려보며 그대로 직진했다. 그에 당황한 군인들이 한 걸음씩 물러섰다.

줄리오는 그대로 하나를 구급차에 태웠다. 그러며 그녀의 입술과 손등에 차례로 키스한 후 이마를 대더니, 기도라도 하듯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

경건하기까지 한 그 모습에 다들 당황했다.

이하나와 유은성을 태운 구급차를 따라 유리 페트로프가 움직인다. 그제야 줄리오는 자신에게 총을 겨눈 이들을 향해 두 손을 들고 항복했다.

“말도 안 돼….”

두이는 곧장 줄리오 파렌티에게로 뛰었다. 군인들을 밀어내고 줄리오를 향해 뛰자, 자신을 발견한 그의 눈살이 가볍게 구겨졌다.

“이 개새끼…!”

다짜고짜 날린 두이의 주먹을 가볍게 잡아챈 줄리오는 주머니에서 꺼낸 발렌타인 데이의 배지를 쥐여 주었다. 그것은 배지의 형태를 한 소형 녹음기였다.

“이하나의 목숨값, 비싸게 갚아. 아무리 너라도 그녀가 잘못되면, 내가 찾아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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