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 (106/180)

<46>

쾅, 소리와 함께 무언가 터졌다.

그것은 발렌타인 데이 쪽에서 설치한 폭탄이 아니었다. 두이가 몸을 낮춘 그녀의 뒤에 총알을 갈긴 순간, 하나는 그대로 두이를 덮치려는 유은성에게 달려들었다.

조금 전 유은성의 손등을 날려 버린 게 마지막 총알이었다.

“어딜!”

유은성의 복부를 끌어안듯 조인 하나는 있는 힘껏 몸을 밀며 바닥을 굴렀다.

우당탕 소릴 내며 엉겨 붙은 두 사람이 대각선 방향으로 굴러갔다. 그녀는 유은성이 맨몸으로 상대하기 벅찬 상대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껏, 단 한 번이라도 만만한 삶을 살았던 적이 있던가?

유은성의 목을 조르며 벽으로 몰아붙인 하나는 거미줄이 잔뜩 낀 거울로 후방을 살폈다. 제이미가 이두이를 부축한다. 바닥에 쓰러진 건 도넌 이었고, 현재 제이미와 두이는 총을 갖고 있지만 그녀 때문에 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터진 건?’

하나가 방심하는 사이, 유은성이 복부를 무릎으로 찍었다.

퍽!

내장이 꼬이는 듯한 타격감에 인상을 쓴 그녀는 일부러 은성의 턱을 가격했다. 이미 두이에게 맞아 어긋난 턱뼈에 재차 공격이 가해지자, 유은성도 참지 않고 주먹을 날렸다.

그러며 영리하게도 그녀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몸이 떼어졌다간, 멀리서 기회를 노리는 이두이의 총에 머리통이 날아갈 거란 걸 아는 거였다.

하지만 작고 마른, 민첩하기까지 한 그녀를 잡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는 그의 공격을 빠르게 피하며 틈을 노렸다.

유은성은 태권도와 종합 무술 유단자다.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지만, 유은성은 더욱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그럼, 역시 방법은 하나.

“제이미!”

하나의 외침에 제이미가 두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건물 전체에 있는 출입구 동선을 외웠다. 지하 1층의 유일한 통로는 부두와 맞닿은 셔터뿐.

그곳으로 뛰는 제이미를 발견한 유은성이 살벌하게 웃으며 하나의 목을 잡아챘다.

“너는 진짜 네 남동생밖에 안 보이나?”

“응. 알면서 왜 자꾸 물어.”

“이하나.”

그녀는 씩 웃으며 유은성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미 그녀의 방향으로 무게를 실은 은성은 하나의 손에서 빠져나가지 못했다.

숨이 막힐 만큼 강한 힘으로 은성을 잡은 그녀가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은성은 하나의 뒤로 보이는 주차 타워 출입구를 보며 미친놈처럼 웃었다.

“뭐하자는 거야. 나 안 죽여? 아, 총이 없나?”

“죽이긴 할 건데, 그냥 죽이긴 아까워서.”

“가까이서 보니까 더 예쁘네.”

“고마워. 뽀뽀라도 해 줘?”

“지금?”

“에이, 할 거면 다 보는 데서 해야지. 지금은 구경꾼이 없잖아.”

살벌하게 미소 지은 그녀의 뒤로 주차 타워의 승강기 문이 열린다. 하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안으로 유은성을 끌고 들어갔다.

유은성은 오른손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마지막 한 방이 그녀를 살린 셈이었다.

하나는 버티려는 그의 손목을 잡아 비틀곤 순식간에 메쳐, 주차 타워 승강기 구석으로 던져 버렸다.

“하아, 하아. 더럽게 무겁네. 이씨….”

쾅!

버튼을 누르자마자 천천히 닫히는 문. 하나는 구석에 널브러진 몸을 일으키는 유은성을 내려다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며 답답하다는 듯 마스크를 벗어 바닥에 툭 떨어트렸다.

피 칠을 한 몸과 달리 얼굴은 깨끗했다. 살인이 뭔지 조금도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순해 보이기까지 하다.

“너, 뻔뻔한 인간 같아서 마음에 들었는데…. 그게 지나쳐서 싫어졌어.”

싸한 읊조림에 유은성이 큭큭대며 웃는다.

“큭, 어쩌나. 난 이하나 씨한테 또 반했는데.”

“내가 세 봤거든? 지금까지 네가 날 살려둔 이유가 뭘까. 벌써 두 번이나 내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을 수 있었는데도 죽이지 않은 이유가 뭘까. 아, 진짜 고3 수능 이후로 이렇게 답을 몰라 고민한 적은 처음이었어.”

쿵, 하고 닫힌 문. 묵직한 소릴 낸 승강기가 천천히 상승한다.

“왜 어렵게 생각해. 네가 더럽게 마음에 드니까 살려 둔 거지.”

“아아, 그냥 마음에 들어서?”

“네가 그냥 줄리오 파렌티가 마음에 들어서 붙어먹는 거랑 다를 게 뭐야. 그 새끼에 비하면 난 매너가 좋지 않나? 함부로 좆부터 들이밀진 않잖아?”

줄리오의 이름을 들은 하나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간단히 인정했다.

“맞아, 맞아. 근데 어쩌겠어. 이왕 붙어먹으려면 큰 게 더 좋지 않나? 아! 넌 모르지? 박아 보기만 해서.”

유은성은 킥킥대고 웃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하나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던 눈동자가 층수를 알리는 패널로 움직였다.

멈춰 선 채 움직이지 않는 승강기.

“그럼 나한테도 박혀 봐. 아직 안 박혀 봤잖아. 누가 더 크고 좋은지는 해 봐야 아는 거야.”

“어우, 저질 토크 짜증 나. 은성아, 넌 그냥 내 취향이 아니야. 취향이었으면 오두막에서 내가 널 그냥 뒀을 리가 없잖아. 넌 날 아직도 모르겠니?”

혀를 찬 그녀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지치지 않은 건지, 숨 고르기를 끝낸 건지. 이하나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고개를 저어가며 실소한 은성은 제 앞에 선 그녀의 종아리부터 허벅지까지를 천천히 쓸어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야에 뾰족하고 날카로운 칼끝이 담긴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어느덧 풀어져 어깨와 가슴을 가린 채 흘러내려 있었다.

하나는 그의 목을 나이프로 겨누며 천천히 몸을 낮췄다. 이어 남자의 손목을 무릎으로 짓누르며 바짝 밀착해, 목울대 아래에 손을 넣어 엄지와 검지로 꾹 눌렀다.

숨이 막히는지 은성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간다. 와중에 그녀를 올려다보는 눈빛의 살기는 조금도 시들지 않았다.

“너… 한국으로… 못 가.”

쇳소릴 내는 은성을 빤히 내려다보던 하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렇게 생각해?”

“내가 너… 안 보내.”

“미친 새끼.”

“네가 죽인 놈들이 아무리… 범죄자여도, 전시 상황이 아…닌 이상 너는 살인자야.”

“아아, 우리 은성이 날 많이 걱정했구나? 근데 어쩌지? 오늘 여기서 죽은 새끼들, 총 맞아 죽은 게 아니라… 매몰 사고로 죽은 거야.”

미친.

너 진짜 미쳤구나, 이하나.

이게 이두이의 다리에 총알을 갈긴 값인가?

여자의 전신에서 피 냄새가 난다. 그런데도 이하나의 숨이 달게 느껴졌다. 은성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였다.

지상에서부터 엄청난 폭발음이 들리기 시작한 것은.

건물이 무너지고 있었다. 은성은 돌아 버린다는 게 바로 이런 거라는 걸 깨달았다.

콰과광!

콘크리트 덩어리가 승강기 위로 떨어졌는지 천장이 우묵하게 푹 패고, 무언가 문 정면 방향으로 충돌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피식 웃었다.

“다 무너지면, 너하고 난 죽어.”

은성은 있는 힘껏 그녀의 무릎에 짓눌린 손을 빼냈다. 그러더니 가는 허릴 감싸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탓에 그녀가 겨눈 칼끝이 그의 목 언저리를 베었다.

허리춤을 끌어안은 유은성을 내려다보며, 이하나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뭐 하는 거야? 설마, 이런 상황에 흥분하고 막 서는… 그런 상변태야?”

“이두이 빼내고 여길 매몰 현장으로 만들면, 걔가 무사할 거라고 생각해? 아님, 나를 살려 주면 내가 증인이라도 되어 줄 줄 아는 거야?”

“못할 것도 없지. 서로 살려 줬으니, 이번에도 상부상조해야지?”

“상부상조하려면 우릴 누군가가 찾아내야 할 텐데…. 무섭네. 너랑 나, 어떤 꼴로 발견될지. 시체일지, 미라일지.”

하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천천히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은성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다.

“이하….”

“걱정 마. 웬 미친놈이 찾으러 올 거거든. 그러라고 빡치게 해 놨으니, 날 죽이기 위해서라도 찾으러 올 거야. 그런 놈이라.”

하나는 묵직한 통증이 느껴지는 허벅지를 눌렀다.

GPS가 박힌 부위의 감각이 무겁다.

유은성을 이곳으로 이끈 건 충동이었다. 게빈 스미스가 그를 살려 주란 부탁만 하지 않았어도, 손등이 아닌 머리에 총알을 날렸을 것이다. 그러곤 미련 없이 두이만 챙겨 밖으로 나갔겠지. 원래는 이 건물 전체를 폭파시킨 뒤, 매몰 현장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하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손목에 찬 시계의 화면에 산소 포화도가 빨갛게 뜬다.

둘 다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소모량이 더 컸다.

빌어먹을….

숨을 들이켠 그녀는 은성의 뺨을 어루만지다가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나긋하게 속삭였다.

“그럼, 미친놈을 기다리면서… 우리 대화 좀 할까? 파렌티를 사칭한 거, 누구 아이디어였지?”

***

건물이 무너지고 있었다. 상층부부터 차근차근 무너져 내리며 자욱한 먼지를 일으켰다.

“아악! 야, 이 미친! 이하나가 아직 안에 있다고!”

“One의 명령입니다! 이두이 씨를 병원으로 호송해!”

“놔! 놓으라고! 이하나 데리고 나오란 말이야!”

미친 듯이 발악하는 이두이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 출구마저 무너지면 끝이다. 마지막으로 본 건 구석으로 향하는 이하나와 유은성의 모습이었다.

게빈은 와중에도 노트북에 USB를 연결한 후 어딘가로 자료를 전송했다. 그에 눈이 돌아 버린 두이가 게빈의 멱살을 움켜쥘 때였다.

어디선가 거대한 진동이 느껴지더니, 승합차들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승합차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내달리는 차를 군용 장갑차가 뒤따른다.

얼핏 추격전처럼 보이는 상황.

발렌타인 데이의 요원들은 돌진하는 차들을 보며 사색이 되어 피하기 시작했다.

멈추지 않고 전속력으로 내달린 군용 장갑차가 무너져 내리는 건물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쾅!

뒤이어 나머지 차들도 무너져 가는 건물로 직진했다. 장갑차와 검정 SUV와 RV 차들이 마치 통로를 확보하려는 듯, 정확하게 총격이 일어난 방향으로 차량을 쑤셔 박는다.

두이는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놀란 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저, 저저…. 파렌티 미친놈!”

숨이 넘어갈 듯한 게빈의 말에 두이는 벌떡 일어나 돌아섰다.

측면에 처박힌 검정 레인지로버의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가 가죽 장갑을 당겨 끼더니 총을 꺼내 들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만. 아니, 정확하게는 암갈색 머리카락에 선명한 이목구비를 가진 줄리오 파렌티가 차량이 만든 통로 안으로 망설임 없이 뛰어들어 갔다.

뒤이어 도착한 경찰차와 군인 호송 차량이 건물을 에워싸고, 헬기 여러 대가 하늘을 까맣게 물들였다.

“어, 어떻게 된 겁니까? 이거 뭐에요. 지금…!”

어안이 벙벙한 두이의 말에, 질린 표정의 게빈이 고개를 저으며 제일 느지막이 도착한 백금발의 사내를 가리켰다.

“…카이스 밀러. 미국인 해커이자 CIA 정보부 소속…. 씨발, 그건 다 뻥이고! 저거 유리 페트로프야! 줄리오 파렌티가 끌고 온 거라고. FBI, CIA. 그리고 홍콩 경찰이랑 군인. 저놈들이랑 파렌티가 술래잡기한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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