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유은성은 미친 듯이 웃었다. 배가 당기도록 웃던 그가 이두이의 관자놀이를 총구로 누르며 이하나에게 말했다.
“이리 와. 인질 교환하기로 한 거 아닌가?”
[감이 멀어서 잘 안 들려! 뭐라고?]
하도 웃었더니 이젠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은성은 이하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러자 피식 웃으며 손 키스를 날린 그녀가 담담히 허공으로 발을 내디딘다.
이두이도 유은성도 순간 헛바람을 들이켰다. 건물 아래로 뚝 떨어지듯 사라진 이하나. 유은성은 두이의 멱살을 잡은 채 창가로 가 고개를 밖으로 뺐다.
곧 헬기가 붕 뜨는가 싶더니, 와이어에 매달려 벽을 딛고 솟아오르는 이하나가 보였다.
몸을 웅크린 그녀는 그대로 유리를 깨부수고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빌어먹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하나의 막나가는 전술에 기함했는데 이제는 소름이 끼쳤다.
이상하다. 마치 건물의 도면이 이하나의 머릿속에 있는 것 같았다. 은성은 이어 마이크에 대고 소리쳤다.
“14樓(층), Tango!”
그의 무전에 다국적 언어가 쏟아진다. 14층에 등장했다는 적을 찾겠다는 신호였다. 이미 16층에서 일어난 소란을 주시하고 있던 이들이었다.
은성은 키득대는 이두이의 멱살을 잡은 채 턱밑에 총구를 댔다.
“움직여. 지하로 갈 거야. 거기서 이하나랑 맞교환하지 뭐.”
“이야, 여기 16층인데…. 너 지하에 도착하기 전까지 살아 있겠냐?”
“이하나는 나 안 죽여. 필요한 게 있는 것 같아. 가령… 사랑하는 남동생의 목숨 외에, 무죄를 주장할 증거. 그런 거.”
두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때였다. 귀에 꽂은 이어폰 너머에서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안 보여!」
「아악!」
「사, 살려…!」
「저쪽!」
분명 혼자가 아니다. 혼자서 그놈들을 다 상대한다고?
은성은 이두이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치고는 침대 끝에 앉아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이어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건 죽음의 뮤직이랄까. ASMR이랄까. 총성은 정확히 13발 울렸고, 빈 탄창이 바닥으로 떨어진 지 1초도 지나지 않아 또다시 총성이 울렸다.
헛웃음이 난다.
놈들은 전 세계에서 모인 용병 집단이다. 이하나와 같은. 아니, 직업만 같은 놈들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놈들은 해적질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도덕성과 정의감이 없다는 것이었다.
오로지 돈.
그들이 원하는 건 돈뿐이었다.
그런 놈들을 모으고 모아 결국 여기까지 왔다. 이번 기회에 모든 것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유은성으로 살아가려 했던 그의 계획을 망가트린 건, 끔찍하게 매력적인 쌍둥이 남매였다.
유일하게 이하나가 죽이지 못하는 사람.
은성은 다시 일어나 이두이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러곤 얼굴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사납게 속삭였다.
“일어나. 내 총알받이 해 줘야지.”
***
“버드. 인질 확보.”
「타깃, 아래로 이동 중. 주의 바람.」
하나는 엄호하는 이들에게 고개를 까딱여 보인 뒤, 게빈 스미스의 눈과 입을 가린 천을 벗겨 냈다. 그러자 가쁜 숨을 몰아쉰 게빈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 낸다.
“강무진, 유은성, 에드워드 리우. 모두 같은 사람으로 미국 오클랜드 출생. 살인 및 마약 범죄의 브레인. 에드워드 리우도, 강무진도 사망 처리되었지만 살아 있음. 생포해야 함. 죽이지 마, 제발.”
게빈의 눈을 가렸던 천을 만지작대며 고개를 기울인 하나가 한숨을 내쉬며 뇌까렸다.
“다시 묶을까?”
“오, 노노노노! 배에서 내가 줄리오 파렌티를 구했어! 저놈 잡으려고 FBI 퇴사한 척까지 했다고. 미국, 영국, 베트남, 캄보디아. 이제 홍콩까지 왔어. 저놈을 잡아서 미국으로 데려가야 억울한 사람들이 누명을 벗어.”
“씨발, 진짜…. 되게 헷갈리게 구네. 당신 진짜 FBI야? 근데 왜 두이랑 있어.”
“저놈이 두이를 죽이려는 거 알고 도운 거야. 당신 동생 내가 살렸어, 내가. 그러니까 나 풀어주면, 저놈이 숨긴 자료 찾아낼게. 찾을 수 있어.”
인상을 찌푸린 하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게빈의 팔을 고정한 수갑을 총으로 쐈다. 그러자 자유로워진 게빈이 기쁨의 포효를 하며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하나는 그 손을 무시하며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걸리지?”
“어, 음…. 컴퓨터 있는 곳까지 이동한 뒤 10분?”
“너무 오래 걸려. 이동까지 포함해서 10분.”
“젠장. 그런데 두이는 어디 있어? 위에서 총소리가 들리던데.”
“살아 있어. 잔챙이들부터 다 쓸어 내고 깔끔하게 유은성을 죽이려고.”
“에이! 안 돼, 안 돼. 그냥 나한테 넘겨. 내가 그놈 잡으려고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건 그쪽 사정이고.”
벽을 짚으며 몸을 일으킨 게빈은 방 전체를 가득 채운 시신들을 발견하곤 입을 떡 벌렸다. 시신들을 밟은 채 서 있음에도 조금의 위화감조차 느껴지지 않는 여자.
이두이가 입 아프도록 말한 이하나가 그의 눈앞에 실존했다.
“몇 명 남았습니까?”
하나가 이어 마이크에 대고 묻자, 생채 신호를 분석한 로건이 대답했다.
「개미 떼처럼 많아.」
“어디에 있습니까?”
「건물 전체.」
“아니, 왜 맨날 쪽수로 밀어붙이려고 하지? 짜증 나게.”
하나는 탄창을 갈고 무기를 점검했다. 엄호하는 이들의 옷깃에 달린 발렌타인 데이의 배지를 보며 게빈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컴퓨터는 몇 층에 있어.”
“지하 1층.”
“나 지금 지하 갈 건데. 같이 가.”
“어어!”
하나는 게빈에게도 총 한 자루를 내어 주었다. 그러자 고맙다며 웃어 보인 게빈이 탄창을 확인하곤 마른 입술을 축인다.
하나는 아까 헬기에서 내리기 전 보았던 두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많이 다치긴 했지만, 표정이 살아 있는 걸 보니 마음이 놓였다.
“근데, One.”
게빈의 부름에 돌아보자 방에 있는 시신들을 가리킨 게빈이 묻는다. 대략 일곱 명 정도 되는 놈들이 시체가 되어 뒹굴고 있었다.
“이거, 네 작품이야?”
“아니? 여긴 얘네 작품.”
얘네라고 지칭된 발렌타인 데이의 요원 둘이 머쓱한 표정으로 히죽 웃는다.
저놈들, 뿌듯해하고 있다. 칭찬을 받은 거라고 여기는 건지 어깨까지 으쓱인다.
하나는 피식 웃으며 문 앞에 섰다. 그러자 긴장한 표정의 제이미가 소리 없이 카운트를 세더니 방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문 너머, 복도에 깔린 시체는 어림잡아도 스물. 아니, 그 이상.
게빈의 눈이 커다래 지자 그런 그를 스쳐 지나가며 이하나가 말했다.
“여기가 내 작품. 나는 좀… 섬세하질 못해서. 덤비면 죽이고 보는 편이거든.”
“하아, 제발 피 냄새는 그만 맡고 싶네.”
“코 막아. 지하에 가면 더할 텐데.”
“조심해. 그 새끼 보통 싸이코가 아니야.”
“알아.”
숨을 크게 들이켠 그녀가 검정 마스크를 올렸다.
보이는 건 까만 눈과 귀뿐.
“알렉, 클리어?”
「신호 전송합니다.」
“잘했어.”
하나는 제이미가 들고 있던 태블릿을 받아 화면을 살폈다. 알렉이 설치한 소형 폭탄의 개수는 여덟.
조금 전 그녀가 16층에서 난사를 하며 시선을 끄는 동안, 알렉은 모든 이동 수단과 퇴로에 폭탄을 설치했다.
폭탄 설치가 아니라면, 그런 요란한 등장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용히 뒤를 노렸겠지.
위치 파악을 끝낸 하나는 계단 문을 열기 직전, 게빈에게 말했다.
“그쪽은 엄호해. 그리고 시간 내에 자료 못 빼내면, 나는 유은성… 그냥 죽여. 그 새끼가 사느냐, 마느냐는 그쪽 손에 달렸어.”
게빈은 압도되는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Go.”
계단 문을 열자마자 하나는 난간을 잡고 그대로 뛰어내렸다. 제이미와 도넌도 마찬가지. 다리가 불편한 게빈만이 절뚝거리며 계단을 밟아 열심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14, 13, 12, 11, 10.
벌컥 문을 열고 나타난 적은 그대로 이하나의 주먹에 나가떨어졌다. 가죽 장갑을 낀 그녀의 손에 쥐어진 건 짤막한 나이프. 상체를 낮춘 하나는 뒤이어 튀어나오는 적의 허벅지를 베어 버린 후, 그대로 벽에 머리를 짓이겼다.
적들의 총을 빼앗아 멈추지 않고 뛰어 내려간다. 총성이 울릴 때마다 쓰러지는 건 적이었다. 지하에 가까워질수록 묵직해지는 공기.
점점 숨이 가빠오고, 그녀도 상처를 입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 많은 놈들은 다 어디서 온 걸까.
게빈은 죽은 놈들의 셔츠를 당겨 몸에 그려진 문신을 대강 확인했다.
“빌어먹을 킬러 새끼들.”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악명을 떨치던 범죄 집단의 문신이 놈들의 몸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그때였다. 어마어마하게 덩치 큰 놈이 하나의 목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겁에 질린 건 그녀가 아니라 숨통을 쥔 놈이었다. 몸이 허공으로 뜬 하나를 돕고 싶지만, 몰려드는 놈들이 너무 많았다.
“One!”
게빈이 그녀를 부른 순간, 벽을 발로 찬 하나가 덩치의 힘을 이용해 물구나무서듯 몸을 완전히 거꾸로 했다. 그러곤 그대로 하강하며 무릎으로 놈의 얼굴을 찍어 버렸다.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뒤로 넘어가는 덩치.
“아이씨, 목 조르지 말라니까!”
몸이 자유로워지자마자 다시 시작된 광기에 게빈은 저도 모르게 신을 찾아 기도했다.
신이시여, 저 여인은… 인간이 아닙니다.
“뛰어!”
기도를 마치기도 전, 들려온 외침. 정신을 번쩍 차린 게빈은 본능적으로 이하나를 따라 뛰었다. 이제는 다리가 아프다는 것도 잊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뛰다 보니 지하 1층 표식이 보인다.
게빈은 문득 위를 올려다보며 이를 갈았다. 개떼처럼 몰려드는 놈들이 이젠 총알을 날리기 시작한다. 아슬아슬하게 빗겨 나간 총알.
하나는 제이미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이곤 게빈의 뒷덜미를 잡아 지하 1층 문 너머로 집어 던졌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바닥을 뒹군 게빈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 콰과광! 하며 폭탄이 터졌다.
곧 지하 1층과 이어진 상층부 계단이 완전히 무너져 형체 없이 사라졌다.
자욱한 먼지에 기침을 하며 주위를 둘러본 게빈은 그 틈에도 누군가를 조준하고 있는 이하나를 발견했다.
제이미가 일어나려는 게빈의 발을 밟는다. 그러며 고개를 젓더니 뒤를 가리켰다.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곳. 메인 컴퓨터실을 찾아낸 게빈은 그곳으로 숨죽여 기었다.
“강무진.”
그녀의 지친 음성에 어둠 너머의 남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벗어, 이하나.”
“무장해제 하라는 뜻인가?”
“이두이, 살려야지.”
순간, 불이 켜졌다.
눈이 부셔 인상을 쓴 두이를 보며 하나는 이를 눌러 물었다. 이두이의 허벅지는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총에 맞은 건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든다. 그 모습을 보는 이하나의 눈빛이 마치 검은 연기처럼 일렁였다.
찰나 섬뜩함에 몸을 떤 유은성은 하나의 반응을 기대하며 이두이의 뒤통수에 총구를 댔다.
“두이야, 아파?”
하나의 질문에 이두이가 짜증스럽게 웃으며 욕설을 흘렸다.
“존나 아파.”
그 말에 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담담히 명령했다.
“만세.”
이하나가 방아쇠를 당긴 건, 두이가 양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을 때였다.
탕! 탕!
두 발의 총성과 함께 이두이의 손목과 발목에 채워져 있던 수갑이 끊어졌다. 소스라치게 놀란 유은성이 방아쇠를 당겼지만, 이하나가 더 빨랐다.
이번엔 그의 손등을 총알이 관통했다.
“으악!”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이두이는 상체를 회전시켜 팔꿈치로 유은성의 얼굴을 가격했다.
손과 다리가 자유로워진 이상 거리낄 게 없었다.
바닥으로 떨어진 총을 집어 든 이두이가 절뚝거리며 하나에게 향할 때였다.
은성이 이어 마이크에 대고 광둥어로 소리쳤다.
“開槍!”
그러며 있는 힘껏 이두이를 향해 뛰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쏘라고 지시하는 외침에, 두이는 몸을 날리기 전. 하나의 뒤를 보았다.
“이하나, 엎드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