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 (104/180)

<44>

세이는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러곤 자신을 보호하는 유리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남편이 이토록 화내는 모습은 처음이다.

하지만 유리는 한숨만 짧게 내쉬며 세이의 머릴 끌어안고 난장판이 된 뒤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 여자가 왜 널 못 믿고 독단적으로 행동했는지 모르겠어? 옛날 생각이 나는군.”

“닥쳐, 페트로프….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로즈!”

테이블이 뒤집혔고, 말리던 몇몇은 코를 잡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멀쩡한 사람은 로마노뿐. 줄리오의 패악에 익숙한 로마노가 총기류와 무기부터 회수해 숨겨 놓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

세이는 분노한 줄리오를 신기한 눈으로 응시했다. 그러자 커다란 손이 그녀의 눈을 가려 버린다.

“다른 남자를 너무 오래 보지 마요.”

“유리,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신기해서요.”

“저 미친놈이, 더 미친 걸 보는 게요?”

“네.”

피부가 벌게지도록 분노했던 줄리오는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터덜터덜 걸어가 벽에 기댔다. 그러며 하나를 도운 장세이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모두 숨죽인 채 줄리오가 더 이상 날뛰지 않길 바라며 지켜볼 뿐이었다.

그때 유리의 품에 안겨 있던 장세이가 폭풍이 지나간 자릴 훑고는 고개를 내민다.

“이하나 씨의 불신을 산 건 줄리오, 당신이잖아.”

“너희 부부가 끼어들 일은 아니지. 나와 이하나의 일이니까.”

“하지만 이하나 씨는 나랑 달라. 난 엄마가 있었지만, 이하나 씨는 아무도 없어. 동생이 잘못되면 세상에 정말 혼자 남는 거야.”

“혼자 두지 않아!”

“그건 네 생각이라고! 줄리오, 어제 그렇게 설명을 해 줬는데도 모르겠어? 이하나 씨의 약점은 평생 동생 한 명이었어. 그런데 이제는 하나 더 늘어 버렸잖아! 너도 이하나 씨를 약점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나 씨는 안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래서 도왔다? 웃기는군.”

무릎을 짚은 채 상체를 숙여 웃던 그는 카펫에 쏟아진 커피 얼룩을 응시했다.

이하나를 장세이가 도울 줄은 몰랐다. 분명 30분 전까지만 해도 제 품에 있던 여자다. 흔들어 깨워도, 키스를 해도 미동조차 없을 만큼 푹 잠든 모습 역시 처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을 안심시키려 한 연기였다?

그럼 간밤의 섹스는? 키스는? 제 갈비뼈쯤에 남긴 키스 마크는? 그저 필요에 의한 행위였다는 것인가?

이런 건 처음이었다. 제 심장을 쥐고 흔드는 모든 것이 처음이다. 이하나라는 여자의 모든 행위는 그를 혼란스럽게 했고 들뜨게 했으며, 결국 분노로 이끌었다.

멀리 구름 위에 숨어 있던 헬기가 서서히 고도를 낮춘다. 헬기와 연결된 사다리 끝, 검은 형체가 언뜻 보였다.

줄리오의 눈이 가늘어지는 사이, 헬기는 타깃을 확보한 후 다시 떠올랐다.

이어 스테판이 벌컥 문을 열더니 질린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미친 여자 맞아. 좌표까지 헤엄치는데 28분밖에 안 걸렸어. 어이, 파렌티. 네 여자 무사해. 뭐, 걱정하는 게 우습지 않나? 너보다 강한 거 같은데?”

그에 장세이는 안도하듯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고, 줄리오는 자신의 뒷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러곤 팔꿈치로 창을 누르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긴 통화 연결음이 이어진다. 아마 끈질기게 고민하고 있겠지. 의뢰인을 배신한 꼴이니, 로건.

[Ciao.]

노이즈 캔슬링된 그녀의 목소리 뒤로 요란한 프로펠러 소리가 겹쳐진다. 로건의 전화를 받은 건 하나였다.

줄리오는 순간 말문이 막혀 거친 숨만 몰아쉬며 턱을 떨었다.

“이하나….”

[미안하지만, 타임 오버야. 서비스 타임을 주기도 애매하고.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니거든.]

특유의 담담한 목소리가 사람을 미치게 했다. 자신의 뒤통수를 친 여자지만, 그녀를 향한 감정은 분노나 경멸이 아니었다.

“인사라도 하고 가지 그랬어.”

[인사는 나중에 할게. 놀러 가면 이탈리아 구경시켜 주나?]

“이하나….”

[줄리오. 나쁜 새끼가 더 나쁜 새끼 되지 말고, 네 구역으로 꺼져. 도망쳐. 네가 죽음에게 의뢰했다고 했잖아? 죽음은 발렌타인 데이고, 지금 발렌타인 데이의 죽음은 이하나야. 그러니까 넌… 나한테 의뢰를 한 거야. 고마워. 내 손으로 그 자식 죽일 기회를 줘서.]

“이하나!”

[꺼지라고! 씨발, 남은 6시간 동안 최대한 멀리멀리 가 버리라고! 미친놈아, 나는 감옥에 있는 새끼한텐 안 찾아가. 그러니까… 감옥 말고 네 구역에 있어.]

천천히 숨을 고르던 줄리오의 얼굴이 점점 사납게 일그러진다. 그러다가 미친 사람처럼 큭큭거리며 웃더니, 휴대전화를 움켜쥔 손이 하얗게 질렸다.

“살아 있어. 살아만 있어…. Ricorda. tu sei il mio unico.”

세이는 그의 미소가 마치 울음 같다고 느꼈다.

울어 보지 못한 남자. 그래서 웃어 버리고 마는 사람.

[미친 새끼.]

통화가 종료되자 휴대전화 쥔 손을 툭 내린 줄리오가 고개를 든다. 그러곤 그 어느 때보다도 차분한 표정으로 세이를 보며 말했다.

“그냥 보내진 않았을 테고…. 그녀한테 무슨 짓을 했지? 말해, 장세이.”

***

조용하다.

오늘따라 바람 한 점 없이 뜨거운 열대야가 지속되더니, 무더위가 이어졌다.

유은성은 침대에 묶인 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이두이를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신기하네요. 분명 다른데…. 왜 닮았을까요.”

그에 이두이가 코웃음 쳤다.

“쌍둥이니까.”

“일반적인 형제들과는 다른가 봅니다.”

“내가 어떻게 알아? 근데… 너, 간이 크다? 이하나가 올 거 알면서 왜 이러고 있어. 튀어야지.”

“왜 튑니까? 보고 싶어 죽겠는데.”

“아아, 맞다…. 강무진. 너 이하나 좋아하지?”

“도와줄래요? 나, 당신 누나한테 진심인데.”

얼굴을 불쑥 들이댄 은성을 빤히 보던 두이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얼굴에 바람을 훅 불었다.

“미안한데, 못 도와줘. 이하나는 평생 내가 끼고 살 거거든.”

유은성이 두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재밌다는 듯 피식 웃었다.

“시스터 콤플렉스야?”

“겨우 이 정도로.”

손과 발이 묶였다는 건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건만, 이두이는 느긋하다 못해 여유로웠다.

유은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그곳엔 동양계 남자 열 명 정도가 서 있었다. 그들은 발렌타인 데이가 아니었다. 유창한 광둥어로 지시를 내리는 유은성을 빤히 보던 이두이가 차갑게 실소한다.

“혹시, 삼합회냐?”

그 말에 막 담배를 꺼내 물던 유은성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삐딱하게 돌아본 그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이어 지시를 받은 놈들이 들어와 침대에 걸려 있던 쇠사슬을 풀더니, 이두이를 일으켜 세웠다.

땅에 발을 디딘 이두이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러자 다가온 유은성이 담배 연기를 흘리며 이두이의 전신을 천천히 훑어 내린다.

“못 걸으면, 업어 줄까?”

그에 키득거린 두이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비스듬히 웃었다.

“은근 로맨틱하다? 근데 발목에 찬 수갑만 풀어도 돼.”

“아, 그건 좀…. 차라리 업혀. 공주님처럼 안기든.”

유은성은 이두이의 한쪽 뺨에 팬 보조개와 그린 듯 말려 올라간 입꼬리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두 눈으로 시선을 옮겼다.

까만 눈이다. 이하나를 닮은 까맣고 곧은 눈. 이물질이 섞인 듯한 자신의 검푸른 눈과는 다른, 온전한 어둠이었다.

그때였다. 은성의 재킷 안쪽에서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은성은 발신자를 확인하곤 다시 여유로워진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로건, 이하나는요? 구출 성공했습니까?”

하지만 수화기에서 들려온 건 로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한국의 K-pop. 미디엄 템포의 멜로디와 세련된 남성 보컬의 노랫말이 들려왔다. 끈적하면서도 중독성 있는 노래는 해외에서도 제법 유명한 곡이었다.

은성은 발밑에서 시작된 저릿한 전류를 느끼며 소름 돋은 목덜미를 쓸었다.

[눈.]

이하나의 속삭이는 음성과 함께 유리창이 깨지더니, 이두이의 오른팔을 잡은 놈의 눈에 총알이 꽂혔다.

[코.]

두 번째로 이두이의 왼쪽에 선 놈의 코가 뚫린다.

[입.]

이번엔 소스라치게 놀라 이두이에게 총을 꺼내 겨누던 놈이었다. 날아온 총알에 입이 뚫린 놈이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한 채 서서히 뒤로 넘어간다.

순식간에 세 놈이 시체가 되어 바닥을 피 웅덩이로 만들었다.

[고개 숙여.]

빌어먹을!

유은성은 이두이의 멱살을 잡은 후 바닥을 향해 몸을 낮췄다. 순간, 육중한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가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난사가 이루어졌다.

은성의 머리 위로 수십 발의 총탄이 스쳐 지나간다. 퍼부어진 총탄은 우왕좌왕하던 놈들의 몸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은성은 지릴 것 같은 전율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저곳은 바다다. 심지어 저격할 수 없는 방향으로 창문이 나 있었다.

그렇다는 건, 헬기를 타고 그 안에서 저격했다는 뜻.

이건 말도 안 된다. 미치지 않은 이상.

네이비실에서 교육이라도 받은 건가? 이하나는 대체 뭘까?

한계가 있긴 한가?

은성은 이두이의 목을 조르며 일어났다. 이두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순순히 일어나 그와 마주 섰다.

“것 봐. 튀라니까, 병신아.”

은성은 이두이의 머리에 총을 겨눈 채 천천히 뒤돌았다.

창문 너머, 검은 헬기의 몸체가 보인다. 그리고 막 헬기 입구에 서서 가죽 장갑을 끼는 이하나도 보였다.

마스크를 쓴 그녀가 가죽 장갑 낀 손을 몇 번 쥐락펴락하더니 고개를 든다. 마스크에 가려져 있기에 잘 보이진 않지만, 이하나는 분명 미소 짓고 있었다.

“존나 갖고 싶네.”

은성의 중얼거림에 인상을 쓴 이두이가 고개를 저었다.

“미친 새끼. 너, 안 준다니까.”

이어 바닥에 떨어트린 휴대전화 너머에서 이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번 살려줬으니 이제 죽어야지? 우리 은성이, 짧고 굵게 살다 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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