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 (100/180)
  • <40>

    와장창, 소릴 내며 집기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창고 안에 쌓여 있던 나무 파레트에 깔린 남자는 이두이였다. 입가에 흐른 피를 닦은 은성이 무릎을 짚은 채 가쁜 숨을 내쉬었다.

    “이하나 동생이란 걸 잠시 잊었습니다, 이두이 씨.”

    하지만 이두이는 정신을 잃은 듯 반응이 없었다. 그럴 법도 하다. 안전 장비라고는 안전벨트가 전부인 경차를 대형 세단으로 들이박아 10미터 펜스 아래로 추락시켰으니.

    덕분에 유은성 본인도 꽤 다치긴 했으나,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두이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피와 함께 침을 퉤, 뱉은 그가 수갑 두 개를 받아 휘청거리며 이두이에게 다가갔다. 콘크리트가 드러난 낡아빠진 창고 안. 유은성이 고용한 발렌타인 데이의 요원을 비롯해 여섯 명 정도가 뒷짐을 진 채 이 모습을 방관하고 있었다.

    은성은 두이의 손에 수갑을 두 개 채운 뒤, 눈과 입이 가려진 또 다른 남자에게 다가갔다. 다리를 저는 것으로 남자가 영상 속에 등장했던 인물임을 알아챘다.

    “넌 뭡니까.”

    불편한 다리를 구둣발로 짓밟자, 비명을 지른 남자가 미친놈처럼 웃으며 몸을 웅크렸다.

    은성은 남자의 몸을 수색했다. 드레스 셔츠 곳곳에 묻은 피와 먼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모습에 광기가 묻어난다.

    은성은 남자의 안쪽 주머니에서 신분증 여러 개가 든 가죽 포켓을 발견했다.

    “이 새끼 봐라?”

    남자의 가짜 신분증 속 이름을 하나하나 읊던 은성은 FBI 배지와 그 뒤에 붙은 게빈 스미스란 이름에서 웃음을 지웠다.

    “게빈 스미스. 이건… 진짜인가 보군요.”

    은성은 게빈의 재갈을 풀어 주었다. 그러자 침을 질질 흘리던 게빈이 버럭버럭 소리 지른다.

    “나는 널 알아, 강무진! 네가 바로 강무진이지. 진짜지. 아하하하! 멍청한 새끼. 너, 실수한 거야!”

    “시끄럽고….”

    “아, 이렇게 제 발로 기어들어 올 줄이야. 대단해, 브라보!”

    고의로 관심을 받으려는 듯한 작위적인 외침에 일어선 은성은 있는 힘껏 게빈의 머릴 걷어찼다.

    시퍼런 안광을 빛내며 입을 꾹 다문 채 게빈을 걷어차던 그가 돌아서더니, 이두이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어 기절한 두이의 머리를 잡아 올리고는 미친 듯이 주먹을 휘두른다. 맞을 때마다 피가 터지고 뼈에 금이 갔다. 기절한 상태로 저렇게 맞게 되면, 뇌에도 이상이 생길 터.

    피를 보고 흥분해 버린 사이코패스.

    멀리서 지켜보던 오슬로가 참다못해 다가가 은성의 뒤통수에 총을 겨눴다.

    “이 미친 새끼야. 우린 범죄자가 되려고 네 의뢰 받아들인 거 아니야. 이건 도가 지나쳐. 하나의 동생인 거… 알면서도 이래?”

    두이의 멱살을 잡은 채 주먹을 뒤로 뺐던 은성이 천천히 고개를 튼다. 멱살 쥔 손을 툭 풀더니 오슬로를 마주 보며 일어섰다.

    “언제부터 네놈들이 정의의 사도였다고 이러시나.”

    이마로 총구를 누르며 피식피식 웃던 그가 눈 깜짝할 사이 몸을 숙이더니 오슬로의 겨드랑이를 걷어찼다.

    “헉!”

    갈비뼈가 부러지며 폐를 찌른 건지, 오슬로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 꺽꺽댄다.

    은성은 바짓단을 털곤 바닥에 떨어진 총을 주워 들었다. 그러곤 오슬로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세 발의 총성이 울렸으나 피는 튀지 않았다. 오슬로가 쓰러진 바닥에 박힌 탄피.

    은성은 한쪽 귀를 막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입니다. 주인에겐 기어오르지 않습니다. 아셨습니까?”

    기절해 버린 오슬로는 대답하지 못했지만, 창고에 있던 다른 놈들은 눈빛을 바꾸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흥이 식었다.

    그럼, 다른 거로 흥을 돋워야겠지.

    얼굴에 튄 피를 손등으로 훔친 그가 뒷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두 눈을 잔인하게 휘며 웃는다.

    “자, 그럼 이제…. 악당의 악당의 악당이 될 시간이네요, 이두이 씨.”

    ***

    눈을 떴을 땐, 다시 호텔로 돌아온 줄 알았다.

    줄리오 파렌티가 주사를 꽂았고, 30초 안에 정신을 잃은 걸 보면 제게 쓴 약물은 페놀계 화합물. 소량의 프로포폴일 가능성이 높았다.

    분명 외부의 소리도 들리고 제 몸이 움직이는 느낌도 났다. 그러나 눈앞엔 핑크색 우주가 펼쳐지는가 하면 블랙홀 같은 것이 소용돌이치기도 했다.

    하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을 열었다.

    그녀가 눈을 뜬 곳은 초대형 크루즈 선내였다. 벽에 난 문양으로 보아 페트로프사의 DE:A.

    상황 파악을 마친 그녀는 주먹을 움켜쥔 채 잠시 벽에 기댔다.

    ‘배신당한 걸까? 어째서 줄리오는 내 목에 바늘을 찌른 걸까. 왜, 두이와 만나지 못하게 만든 걸까.’

    하나는 분노하는 대신 머릿속을 차갑게 식혔다. 일정량 이상의 분노는 끓어오르던 피를 식히고 이성을 꽁꽁 얼린다.

    느슨하게 풀어진 머리카락을 단단하게 묶은 그녀는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편 뒤, 방문을 열었다.

    호텔 스위트룸을 닮은 곳이다. 내부에는 아무도 없지만, 문을 열고 나가면 다를 터.

    하나는 망설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자 복도에서 대기 중이던 줄리오의 부하들이 그녀를 발견하곤 제법 반가운 티를 냈다.

    아, 그래…. 저놈들은 모르는구나.

    “파렌티는.”

    쓸데없이 피를 보는 건 사양이다.

    하나의 질문에 머리카락을 빡빡 민 남자가 아래를 가리켰다.

    “유리 페트로프의 방에.”

    “몇 층.”

    “14층.”

    하나는 승강기 앞에 붙은 16이란 숫자를 확인한 후 비상구 문을 열었다. 계단을 이용해 내려가는데, 손님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이 크루즈가 현재 손님들을 태운 채 운항 중이란 뜻이다. 모든 항로 계산이 끝났다는 뜻. 되돌아가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음을 의미했다.

    그래도… 갈 때 가더라도, 그 개자식의 얼굴을 갈겨 주고 가고 싶었다.

    하나는 뻐근한 뒷덜미를 주무르며 14층 비상구 문을 열었다.

    복도를 지키던 러시아 마피아들이 그녀를 발견하곤 경계한다.

    “줄리오 파렌티, 어디 있어.”

    영어로 물었건만 알아듣지 못하는 건지, 모른 척하는 건지. 놈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나는 기다리지 않았다. 그대로 두 남자를 치우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단호한 손이 어깨를 민다. 그러며 가슴팍을 펴더니 이죽거리는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씨발….”

    나직하게 읊조린 하나는 남자의 좆과 고환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생각지 못한 공격에 놀란 남자가 비명을 내지른다.

    “으아아악!”

    “그러니까 왜 먼저 손대. 매너 좋게 하려고 했는데.”

    “놔, 놔! 아악!”

    “문 열어.”

    그녀는 사색이 된 남자의 동료를 돌아보았다. 무기를 빼 들지 않는 걸 보니, 분명 제가 올 거란 언질을 받고도 모른 척 한 티가 났다.

    하나는 문이 열린 후에야 남자를 놓아주었다. 그러곤 바닥에 무릎 꿇은 채 몸을 웅크리며 경련하는 남자를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깔끔한 내부는 16층 객실과 사뭇 달랐다.

    키릴 쿠즈민이 제일 먼저 그녀를 발견했고, 소파에 늘어져 있던 스테판 쿠즈민이 벌떡 일어나 어딘가로 향한다. 하나는 자연스럽게 스테판을 따라 걸음을 내디뎠다.

    반면, 문 앞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부하와 하나를 번갈아 보던 키릴은 욕설을 내뱉곤 그쪽으로 뛰어갔다.

    스테판 쿠즈민이 향한 곳엔 예상한 대로 모든 이들이 모여 있었다. 편안한 차림의 장세이와 러프한 정장을 입은 유리 페트로프. 그리고 로마노와 한쪽 소파에 앉아 있던 로렌조. 테이블에 기대어 서서 스카치를 음미하던 줄리오 파렌티가 고개를 든다.

    다들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줄리오는 아니었다. 그는 하나를 빤히 쳐다보며 그대로 스카치 잔을 기울였다.

    “작전 회의라도 하고 있었나 보지?”

    그녀는 태연히 질문하며 대리석 테이블 위를 덮은 각종 설계도와 세 대의 태블릿을 훑었다.

    “몸은.”

    담백하게 묻는 말에 하나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 미소에 중력이 바뀐 것처럼, 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내 목에 주사기 꽂은 새끼가 물을 말은 아니지 않나?”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고 해 두지.”

    “아아…. 해 두지.”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서자, 위험을 느낀 로마노와 로렌조가 반대편 벽으로 물러났다.

    하나는 손끝으로 테이블을 길게 문지르며 걸음을 옮겼다.

    “줄리오 파렌티. 내 동생은 어디 있어?”

    부러 산뜻하게 질문했다. 그에 잔을 내려놓은 줄리오가 테이블 위의 지도를 대강 가리킨다.

    “아마 저 어딘가에. 미안하지만, FBI가 판 함정이었어. 이두이는 게빈 스미스와 함께 움직이는 게 맞더군. 지금쯤 그 좌표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옮겼을 거야.”

    하나는 소리 없이 재생 중인 동영상을 발견하곤 의아한 마음에 볼륨을 키웠다.

    아는 얼굴이 화면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는 FBI에게 공조를 요청한 상태이며, 제 동생을 살해한 범죄자들을 넘겨받을 생각입니다.]

    울부짖는 남자는 강무진의 배다른 형, 강무호.

    그녀는 동영상을 정지시킨 채 굳은 표정으로 멈춰 섰다.

    “하나.”

    줄리오의 커다란 손이 어깨를 짚는다. 하나는 숨을 크게 들이켜곤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어깨를 꽉 움켜쥔 줄리오의 방향으로 돌아선 그녀가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다.

    퍽!

    꽂힌 주먹에 그의 얼굴이 왼편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하나는 멈추지 않고 또다시 주먹을 날렸다. 줄리오 파렌티는 그녀의 주먹을 고스란히 맞아 주었다.

    “개새끼야. 널 믿은 내가 병신이지. 널! 튈 거면 너 혼자 튀어야지, 왜 나를 끌어들여! 내 동생 찾아 주기로 했잖아! 그래서 너 같은 새끼랑 키스하고 섹스하고 같이 밥도 먹어주고, 뇌 없는 년처럼 헤실거리며 웃어 준 거잖아! 이 빌어먹을 새끼야!”

    한국어를 알아들은 사람은 장세이 뿐이었다.

    발악하듯 소리 지르며 주먹질을 멈추지 않던 하나는 반항 없이 꿋꿋하게 자신을 응시하는 줄리오의 멱살을 잡으며 짓씹은 입술을 떨었다.

    울고 싶지 않지만, 차오른 허망함에 눈물이 흘렀다.

    “이제 알겠네…. 씨발, 도망칠 거면 너 혼자 가. 아무 관계 없는 나 끌어들이지 마! 지금 이거 타고 여기 벗어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야. 난… 그렇게 못 해.”

    그가 한국어를 알아듣든 알아듣지 못하든 상관없었다.

    하나는 핏물이 흐르는 그의 입술을 노려보다가 그대로 밀어 버렸다.

    저 눈에 속았다. 자신을 향해 진심으로 부딪치려는 듯한 눈빛에 흔들렸다. 저 남자라면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줄 거라고 믿었던 제가 바보였다.

    두어 걸음 밀려난 그가 피 흐르는 입가를 훔친다. 하나는 숨을 고르며 그대로 방에서 나왔다.

    사람들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기억하고 싶지 않다. 모두 다 짜증 나고, 모두 다 끔찍하게 경멸스러웠으니까.

    “전투 수영은 진짜 오랜만인데.”

    중얼거리며 1층 갑판으로 내려가기 위해 승강기 앞에 섰을 때였다. 뒤따라 나온 줄리오가 그녀를 잡아 세웠다.

    “어디 가려고.”

    답지 않게 다급한 표정을 보자 실소가 나온다.

    “신경 꺼. 그리고 한 번만 더 내 몸에 손대면, 머리통을 뚫어 버릴 거야.”

    “하나, 지금 홍콩은 위험해.”

    “그건 너한테 위험한 거겠지. 난 아니야. 꺼질 거면 혼자 꺼져.”

    하나는 줄리오의 손을 쳐낸 뒤 도착한 승강기에 올랐다. 갑판 표시를 누르곤 신경질적으로 닫힘 버튼을 누르자, 욕지거릴 내뱉은 그가 닫히는 문틈으로 손을 넣었다.

    그에 다시 열리는 문. 줄리오는 지금껏 본적 없이 차가운 표정으로 승강기에 올라타며 이를 드러냈다.

    “못가, 이하나.”

    고압적인 어투에 눈썹이 꿈틀대고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느낌이 들 때였다.

    그녀의 뒷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전화가 울린다. 하나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

    “두이야! 너 어디….”

    [수영 좀 합니까?]

    두이가 아니다.

    피가 싸늘하게 식는 걸 느끼며 하나는 천천히 고개를 젖혔다.

    “어디니, 이 쓰레기야. 두이한테 손끝 하나 대지 마….”

    화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드라마 속에서 가끔 가슴을 치며 울화병을 토로하는 여자들이 이해됐다.

    [미안합니다. 손을 좀 댔어요. 그래도 살아는 있으니, 만나야죠?]

    “강무진!”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친 그녀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뛰어요. 이하나 씨, 당신 스스로 뛰어내려. 악당이 발목 잡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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