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 (95/180)

<35>

하나는 지금 묵고 있는 호텔이 파렌티 가문의 소유라는 것을, 식당에 내려온 뒤에야 눈치챘다.

미슐랭 별 세 개를 받았다는 식당은 파렌티 패밀리의 등장에 오늘 하루 영업을 중지했다.

센트럴이 내려다보이는 전면 창 앞에 놓인 테이블로 안내 받은 그녀는 미리 와 있던 페트로프 쪽 사람들을 만났다.

멀쩡하게 나타난 그녀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인 유리가 일어나 악수를 청한다. 하나 역시 미소로 답하며 손을 잡으려 했지만, 줄리오가 반대로 당긴 탓에 곧장 의자에 앉혀져 버렸다.

그에 머쓱해진 손을 태연하게 회수한 페트로프가 테이블에 놓여 있던 휴대전화를 그녀의 방향으로 밀었다.

“복사 끝냈습니다. 덕분입니다, 이하나 씨.”

줄리오에게는 대충 설명을 해 둔 참이었다. 개인실에서 있었던 일과 정신을 놓은 사이 유리 페트로프에게 부탁한 일도 말했다.

대체 레드마피아가 왜 시칠리아 마피아를 돕는 거냐고 묻자, 그는 ‘빚이 있으니까.’라고 대답했다.

그것은 유리 페트로프가 실종되기 직전, FBI에 의해 처리된 데이비드 메이어 사건과 연관되어 있는 듯 보였다.

“뭐 찾은 거 있어요?”

“신호를 추적했고, 마지막 발신은 어제 우리가 탔던 배 안이었습니다. 그리고 개통을 한국에서 했다는 것도요. vpn을 이용해 제법 많은 사이트에 접속했는데, 다 포르노 사이트더군요. 심심했나 봅니다.”

“흠… 그럼 일단 로건부터 만나 봐야겠네요. 강무진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인물이니까요.”

“이하나 씨는요. 뭐 알아낸 거 있습니까? 어제 통화를 했던데.”

그에 줄리오의 눈빛이 짙어졌다.

하나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며 검지를 폈다.

“첫 번째, 그놈은 관음증이 있어요. 두 번째, 나를 아는 사람이고. 세 번째, 못생겼다고 자신해요. 그리고 네 번째….”

우스갯소리처럼 말을 늘어놓던 그녀의 음성이 사뭇 진지해졌다.

“강무진은 이두이를 납치하지 못했어요. 이건 내 추측인데, FBI의 게빈 스미스가 함정 수사를 시작했고, 두이가 그와 손을 잡은 것 같아요. 아, 이두이는 제 동생 이름이에요.”

두이의 이름을 말할 때 목소리가 떨렸던 걸 들킨 걸까?

유리 페트로프도, 줄리오 파렌티도. 고개만 가볍게 끄덕일 뿐, 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담담히 숨을 몰아쉰 하나는 휴대전화를 챙긴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테이블엔 페트로프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저와는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는 키릴과 장세이의 보디가드인 스테판 쿠즈민이 그 주인공이었다.

“혹시, 스테판 쿠즈민이 저격용 총을 써요?”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하나의 질문에 스테판이 불량스럽게 고개를 젖히곤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에 그녀는 쯧 혀를 차며 질문을 이어 나갔다.

“그럼, 어제 내가 찍은 타깃 둘 다 그쪽이 죽였어?”

그에 스테판이 인상을 쓰며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했다.

“그쪽이 두 명 죽인 줄 알았는데.”

“아니. 난 권총이었거든. 둘은 무리였어. 그럼, 한 명은 누가 죽였지?”

“우리 외에 누가 또 있었군.”

그녀는 서빙된 제비집 수프를 노려보며 고민에 빠졌다.

‘제삼자의 개입이라….’

오늘의 이하나는 어제와 180도 다른 모습이었다.

흰 반소매 롱 셔츠에 블랙 레깅스. 운동화를 신고 머릴 푼 모습이 꼭 여행 온 여대생 같았다.

키릴은 그 모습에 혀를 내두르며 상처 난 복부를 감쌌다. 하나는 그제야 로마노와 로렌조. 유은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다. 둘은 상처를 입었다 치지만, 유은성은 왜?

“리우는? 어디 갔어?”

줄리오에게 묻자 질척한 제비집 수프를 괴상하단 듯 휘적대던 그가 말했다.

“감시. 두 새끼가 방 밖으로 기어 나오지 못하게 막으라고 했어.”

“그걸 굳이 감시까지 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또 터질 거야.”

“그거… 우리가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그냥 그렇다고 해.”

두 사람의 대화는 평소 줄리오를 아는 이들에게 충격을 던져 주었다. 모든 것을 폭력과 피, 죽음으로 해결하던 그였다. 그런데 지금은 여자의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하면서도 귀찮은 티조차 내지 않았다.

“일단, 식사부터 하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기 중이던 직원들이 나머지 음식을 내어 왔다. 음식이 테이블에 놓일 때마다 셰프가 직접 나와 메뉴에 관해 설명하는 것은 제법 신선했다. 미슐랭 별 세 개라는 타이틀 때문인지 자신감이 가득했지만, 하나의 눈엔 영 아니었다.

500원짜리 동전보다 조금 큰 사이즈의 전복이나 두부의 식감으로 만들어 버린 흰살생선. 거기에 킹새우 한 마리를 올린 초대형 접시를 받아 들며 헛웃음을 흘렸다.

“나, 이거 먹고 나가서 다른 거 사 먹을래.”

“딤섬?”

“뭐든.”

하나는 본격적인 식사를 위해 손목에 감아 둔 끈으로 머리카락을 모아 올려 묶었다. 그러자 작고 갸름한 얼굴과 이어진 하얀 목의 붉은 자국이 드러났다.

밤사이 그가 만들어 놓은 흔적 중 하나였다.

줄리오는 셰프가 내어 온 음식들을 꽤 힘들게 먹어 치우는 그녀를 응시하다가 목에 손을 댔다. 빨개진 자리를 엄지로 문지르자, 간지러운지 어깨를 웅크린 하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대. 그러니까 식사 끝나고 만져.”

“그만하라고 매달리면서 울 땐 참 예뻤는데.”

“자주 예쁘면 안 돼. 질려.”

“너한테 질릴 일은 없을걸.”

“난, 이 제비집 수프 질리는데.”

그녀는 반도 먹지 않은 수프를 밀어내곤 다들 조각내는 전복을 한입에 넣었다. 그러자 웃음을 참던 그가 맞은편에 앉은 장세이와 시선을 맞춘다.

하나는 가만히 바라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우물우물 음식을 씹었다. 하지만 음식이 모두 바스라 지도록 삼키지를 못했다. 이상하게 넘어가지 않는달까?

이제 와 조금 궁금해졌다. 둘은 정말 어떤 사이였을지. 아무리 빚을 진 게 있다지만, 짙은 트라우마를 가진 남자 앞에 어떻게 저렇게 무방비하게 나타날 수 있는 건지.

이것은 위험한 호기심이다. 궁금해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은. 어쩐지… 궁금해해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 같은 느낌도 들었다.

어차피 나흘 뒤면 이 악당과도 바이바이다. 나흘 안에 두이를 찾아 주겠다고 했으니, 오로지 그 말만 믿기로 했다.

탄산수를 벌컥벌컥 마신 하나는 뜨거워진 명치를 문질렀다. 그래도 답답한 속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이거 받아요.”

새우 껍질을 까느라 고전하던 그녀의 접시를 줄리오가 가져갔을 때였다. 장세이가 사진 몇 장을 내민다.

하나는 능숙하게 새우를 까는 줄리오의 칼질에 엄지를 치켜들어 보인 뒤, 사진을 받아 살폈다.

“어젯밤에 이쪽 컴퓨터로 화질을 최대한 살렸어요. 진짜 강무진이에요. 혹시, 아는 사람인지 볼래요?”

여러 사람이 보였다. 초점이 잘 맞지 않는 사진이기에 흐릿하긴 하지만, 묘하게 낯설지 않은 느낌이다.

헤어스타일은 다르지만, 그러니까….

하나는 미간을 문지르며 어색하게 웃었다.

“모르겠어요. 일단 좀 더 볼게요. 함부로 특정하면 안 될 것 같네요.”

“어제 일로 오늘 예정되어 있던 행사가 뒤로 밀렸어요. 정말 신기하게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갔던데요? 그래서 내일 다시 열려요. 이번엔 진짜 배에서.”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장세이 씨.”

한국어로 대화하는 두 여자를 번갈아 보던 남자들이 한숨을 내쉰다. 유리 페트로프는 제발 영어로 말해 달라며 아내의 손등에 입 맞추더니 눈을 맞췄다.

‘아주 한 쌍의 잉꼬가 따로 없네.’

하나는 포크를 입에 문 채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얼핏 강무진의 이미지에 유은성이 겹쳐 보이는 건 착각일까?

유은성과 강무진의 연관성을 배제하진 않았지만, 당사자일 거란 의심은 해 본 적 없었다.

고민에 빠진 하나의 눈빛이 깊어질 때쯤, 포크를 빼앗은 줄리오가 새우를 콕 찍어 그녀의 입에 넣어 주었다.

“다 먹었으면 적당히 하고 일어나지. 엘리오에게 연락이 왔어.”

“왜?”

엘리오라면 캄보디아에서 최태준에게 붙인 줄리오의 부하였다. 하나는 좋지 않은 소식이 도착했음을 예감했다.

줄리오는 대답 대신, 자신의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한 장 내보였다. 그 사진 속엔 피떡이 된 최태준이 산소호흡기를 낀 채 집중 치료실에 들어가 있는 모습이 있었다.

“킬러가 등장했다더군. 어젯밤, 우리가 호텔에 도착한 시간에.”

***

끼익-.

자전거 브레이크 소리가 유난히 크다. 게빈은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는 주위를 살피곤 절뚝거리는 걸음에 힘을 실었다.

그는 지금 홍콩 유명 배달 업체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고 움직이기엔 배달원이 최고였다.

무운해운의 배가 정박한 항구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창고 문을 두드리자, 작은 홈이 열리더니 까만 눈동자가 불쑥 나타났다.

게빈을 확인한 자가 문을 연다.

“배고파 죽는 줄 알았습니다.”

남자는 이목구비의 자기주장이 뚜렷한 동양인이었다. 남자를 본 동료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더럽게 잘생기고 섹시한 한국 남자.’였다.

“그놈이 어제 웨이터들을 조사했거든. 빌어먹을 감시망이 좁혀 들고 있어서 변장을 좀 했지.”

겉에서 보면 다 쓰러져 가는 폐허 같지만, 내부는 아니었다. 마치 정보부 사무실을 방불케 하는 집기들이 가득했다.

게빈은 모자를 벗으며 안으로 들어가 테이블에 음식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제법 자라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남자가 환한 얼굴로 게빈이 가져온 푸드 케이스를 연다.

“수고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당신 얼굴 들키기 전에 제가 손을 썼어요. 웨이터 명단을 아무리 뒤져도, 당신 얼굴을 찾을 수는 없을 겁니다.”

게다가 수확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게빈이 곳곳을 돌며 감시 카메라를 설치한 덕에 강무진으로 의심되는 인물들의 사진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물론, 그래서 더욱 위험했다. 이미 그들은 추가로 설치된 카메라를 발견해 신호를 추적하고 있었다.

이곳도 얼마 버티지 못한다.

게빈은 해물 볶음국수를 후루룩 빨아들이며 노트북을 여는 남자를 빤히 보다, 시원한 음료를 꺼내 내밀었다.

“근데, 두이.”

그에 포크를 입에 문 이두이가 게빈을 돌아보았다.

“내가 그곳에서 아는 얼굴을 만났거든?”

“예.”

“한두 명이 아니라, 아주 많이. 그런데… 그중에 네가 아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아서.”

그에 티슈로 입가를 훔친 두이의 눈빛이 매섭게 벼려졌다.

게빈은 마피아에게 전해져야 할 블랙머니가 무운해운으로 흘러드는 것을 발견하곤 잠입 수사에 나선 차였다. 그러다 우연히 최태준의 범죄 행각과 그가 이두이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게다가 강무진과 손잡은 최태준이 폭탄 테러를 준비 중이었던 것도.

사제 폭탄을 조작하는 건 그에게 일도 아니었다. 게빈은 폭탄 테러가 일어날 장소에서 이두이를 기다렸다. 그곳에서 대기 중이던 강무진의 부하들을 모두 사살한 뒤였다.

그리고 나타난 이두이에게 모든 것을 설명했다. 처음엔 다짜고짜 주먹부터 날리는 통에 설득하느라 애먹었지만, 결국엔 성공했다.

죽음을 조작하는 것은 예정된 계획이었다.

당연히 폭탄은 이두이가 몸을 피한 후에 터졌고, 그의 시신은 폭탄 조끼를 입힌 강무진의 끄나풀로 대체되었다.

최태준이 벌인 범죄 행각의 증거들은 모두 수집했으나, 강무진이 범죄에 연루되어 있다는 증거를 찾기 전까진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그런데 되려 강무진 이 미친놈이 위험한 범죄자들을 한곳에 모았다. 정확하게는 강무진이 사칭한 모든 범죄자였다.

만약 그 배가 살육의 현장이 되어 중요 범죄자들이 목숨을 잃었다면, 강무진은 그들에게 모든 혐의를 씌운 뒤 죽은 척 유유히 법망을 빠져나갔을 터.

게빈은 자신이 줄리오 파렌티를 살리기 위해 총을 들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하나가 줄리오 파렌티와 함께 있을 거라곤 더더욱.

“말을 해 봐요, 게빈. 내가 아는 사람이라뇨?”

“그게… 네 누나. 사진으로 보여줬던, 이하나.”

두이는 들고 있던 포크를 툭 떨어트렸다.

“그 여자가 줄리오 파렌티와 함께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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