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 (90/180)
  • <30>

    오랜 친우와의 재회 같은 건 아니었다.

    옛 여자와의 재회라니. 그것도 배신하고 떠난. 물론, 잘못은 분명 줄리오 파렌티가 했을 것이다. 그러니 저렇게 후회와 미련을 질질 흘리며 바라보는 거겠지.

    기분이 이상했다.

    경계하는 여자와 더욱더 경계하는 남자라니. 서로를 경계하는 것으로 보아 상대에게 받은 상처가 생각보다 큰 것 같았다.

    “오랜만이군.”

    두 사람의 어색한 분위기를 깬 건, 로즈의 곁에 선 유리 페트로프였다. 그것도 실종 상태로 알려진.

    아마 실종됐다는 건 오피셜 정보인 듯 보였다. 어쩌면 다른 이름으로 이 자리에 나타났을지도.

    하나는 끔찍하게 잘생긴 남자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만약 외모로 면죄부를 살 수 있다면, 두 남자의 면죄부로는 세계대전도 합리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쪽은?”

    유리 페트로프의 질문에 줄리오는 그제야 로즈에게 닿아 있던 시선을 하나에게로 옮겼다. 그러더니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내 파트너. 누군지 알 텐데.”

    말은 즉, 자신의 정보가 이미 노출되었다는 것이다. 생긋 웃어 보인 하나는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한 명을 발견하곤 살짝 긴장했다.

    상대는 두피까지 문신으로 뒤덮인 레드마피아, 키릴 쿠즈민. 유리 페트로프의 오른팔이자 몇 년 전 하필 적으로 만나 서로 대차게 싸운 상대였다.

    자신은 턱뼈가 나가는 거로 그쳤지만, 키릴 쿠즈민은…. 생략한다. 사실 조금 잔인해서 다시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반갑습니다, One.”

    하나도 안 반가우면서 반갑다고 하긴….

    유리 페트로프가 내민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오른손은 자연스럽게 줄리오 파렌티에게 잡혔다. 그는 그대로 손등에 입 맞추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설마, 배신한 애인 보라고 이러는 거 아니지?”

    그에 실소한 줄리오가 키릴을 응시하며 말했다.

    “이곳을 찾은 목적이 같으니 오늘은 조용히 넘어가. 키릴 쿠즈민, 너도 마찬가지야. 내 파트너에게 손끝 하나라도 댔다간 문신을 모두 벗겨 줄 테니 각오해.”

    키릴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코웃음 치며 돌아섰고, 로즈는 하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한국인…이세요?”

    “네. 이하나라고 합니다.”

    이어, 하나의 뒤로 유은성이 다가섰다.

    묘한 구도였다. 각자 경호원을 매단 여자는 줄리오 파렌티의 과거와 현재였고, 하필 같은 한국인이었다.

    “잠시 기다려. 여기서 꼼짝 말고.”

    “그러진 못할 거 같은데. 좀 둘러보면 안 될까?”

    “안 돼.”

    “나도 할 일이 있는 거 알지?”

    “아직 선박 스캐닝이 끝나지 않았어. 그러니 날뛰지 마.”

    하나는 처음으로 이 무리를 상대로 약간의 압박감을 느꼈다. 한정적인 정보를 갖고 움직이는 자신과는 차원이 다르다. 한 명은 세계적인 보안 전문가이고 또 한 명은 마피아의 카포.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그들 사이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 작고 마른 여자였다.

    “스테판. 잠시 세이를 지켜.”

    유리는 로즈의 보디가드에게 명령한 뒤 줄리오와 함께 가까이에 있는 난간으로 다가갔다.

    “로즈라고 부르면 될까요?”

    하나는 유은성이 가져온 샴페인을 받았다. 그러자 하나의 몸을 빤히 살피던 로즈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한 걸음 다가선다.

    유은성이 본능적으로 그녀를 막으려 했지만, 그 손은 스테판이라는 러시아인에게 막혔다.

    “로즈에게 손대지 마. 뒷감당은 그쪽이 하게 될 거야.”

    하나는 황당해하는 유은성을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피식 웃으며 다가온 로즈가 불쑥 그녀의 손을 당겼다.

    “장세이라고 불러 줘요. 남자들은 저기서 술이나 처 마시라 하고 우린 에어컨 있는 곳으로 가죠.”

    팔짱까지 끼며 생글생글 웃는데, 뭔가 묘하다. 여자에게서 저와 같은 피 냄새가 나는 기분이었다.

    두 여자에게 쏠리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았다. 하필 아시아인이 더 많은 곳이기에, 호사가들의 눈빛은 먹잇감을 찾은 것처럼 빛났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라고 했는데요.”

    “괜찮아요. 내 핑계 대요.”

    “음… 그럴까요?”

    하긴, 장세이를 핑계로 삼으면 줄리오 파렌티가 흐물흐물한 젤리처럼 마지못해 넘어가 줄 것 같기도 하다.

    하나는 여자와 함께 실내 방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외부는 싫어요.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거든요. 근처에 고층 건물도 많은 편이고.”

    “저격에 대한 대비책 하나 없이 파티를 열진 않았겠죠.”

    “강무진은 여기 없어요.”

    한껏 목소릴 낮춘 장세이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하나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따라오는 유은성을 돌아보려 했다. 하지만 어깨에 툭 머릴 기댄 장세이로 인해 그러지 못했다.

    “아무도 믿지 마요. 아, 나는 믿어 줬으면 좋겠는데…. 차고 있는 그 팔찌요. 그거 제가 프로세스 한 거거든요.”

    이 여자의 직업이 무기 전문가였던가?

    하나는 제 팔에 걸린 화려한 백금 팔찌를 들어 보였다. 그러자 생긋 미소 지은 장세이가 그 표면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수면제만 든 거 아니에요. 일부러 줄리오에게는 말 안 해 준건데, 아래쪽 블루 다이아를 90도 돌리면 각성제가 든 캡슐이 깨져요. 그건 해독용 각성제예요. 혹시라도 약에 당했을 때, 개죽음을 면하게 해 주는 거죠.”

    하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걸음을 멈춘 채 장세이를 내려다보자 환하게 웃는 여자. 그 미소가 마치 작은 악마처럼 예뻤다.

    ‘미치겠네.’

    이래서 줄리오 파렌티가 미쳐 있었던 건가?

    “근데 왜 저한테 알려 주시죠.”

    “그냥요. 그냥… 예전의 저를 보는 기분이어서요.”

    “제가요? 전 장세이 씨랑 다릅니다.”

    “맞아요. 다르겠죠. 근데 나도… 가족을 구하려 목숨 걸고 뛰어다니던 때가 있었거든요. 동생, 꼭 찾을 거예요. 근데 여기에 있을 강무진은 가짜예요. 날 믿어요. 내가 사람 보는 눈 하난 지구에서 제일 좋으니까.”

    현재는 진통제의 기운으로 버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제 상태를 알기에 꼼짝 말고 기다리라고 말한 걸지도 모른다.

    하나는 웨이터가 권한 샴페인을 거부하는 장세이를 관찰했다. 임신을 한 건지, 종종 인상을 찌푸리거나 손수건을 꺼내 코를 틀어막는다.

    “입덧이 심하신가 봐요.”

    “이번에 유독 그러네요. 둘째 거든요. 첫째는 지금 보모와 신나게 노는 중이고요.”

    “아, 근데… 진짜 강무진은 어디 있는지 아세요?”

    “글쎄요. 근데 너무 수가 뻔한 거 아닌가? 살해당할 걸 알면서 대리인을 세운 건…. 마치 누군가 죽여 주길 바란 것 같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 앉은 여자의 곁으로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 웨이터가 스쳐 지나간다. 하나는 장세이의 표정이 일순 굳는 걸 놓치지 않았다.

    “게빈…?”

    게빈 스미스.

    그 이름을 단번에 기억해 낸 그녀는 주저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유은성 씨, 반대편으로 가서 퇴로를 막아요.”

    “누굴 찾는 겁니까.”

    “빨간 나비넥타이를 맨 웨이터.”

    거짓말이었다. 웨이터는 모두 검정 보타이를 맸고, 조금 전의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유은성을 떼어 놓아야 한다는 본능적인 촉이 거짓말을 하게 했다.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딘 하나는 무수한 인파를 헤치며 절뚝거리는 웨이터를 찾아 시선을 움직였다. 하지만 눈 깜짝할 새 몸을 숨긴 건지, 다리를 절지 않으려 노력하는 건지 쉽게 찾을 수가 없다.

    마음이 급해진 그녀가 무작정 앞으로 나아갈 때였다. 누군가 엄청난 악력으로 뒷덜미를 낚아챘다.

    선박의 사각지대. 좁은 틈으로 당겨진 하나의 등이 단단한 벽에 쿵 하고 부딪쳤다. 이어 목을 조르는 힘에 놀라 눈을 뜨자, 빌어먹을 문신 덩어리가 그녀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쿠즈민…. 너, 돌아이야? 오늘은 휴전인 거 몰라?”

    목이 졸려 탁해진 음성으로 한 말에 키릴 쿠즈민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키릴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두 손으로 목을 졸랐다.

    “네 덕에 저승 구경을 너무 잘해서 말이야. 이번엔 네가 할 차례야, One.”

    하나는 킥킥대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숨을 쉬기 위해 고통스러워하며 나이프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정확히는 키릴의 복부를 누른 나이프였다. 아직 상처를 내진 않았지만, 그가 몸을 붙여 온다면 내장들은 갈가리 난도질 될 터.

    “누가 빠를까…. 네가 먼저 죽을까, 내가 먼저 죽을까. 판단 똑바로 해. 난 아직… 너 공격할 생각 없으니까. 네 피는 온도부터 별로더라.”

    두 눈을 부릅뜬 키릴은 시선을 내려 배에 꽂히기 직전인 나이프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분을 이기지 못하고 러시아의 욕설을 마구잡이로 퍼부었다.

    정신이 몽롱해진다. 그래서 팔에 힘을 주자 흠칫 놀란 키릴의 손힘이 풀렸다.

    하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손잡이로 그의 손등을 내리쳤다. 손등뼈가 으스러진 건지 비명을 지른 키릴이 떨어져 나간다.

    그녀는 벽에 기대 아픈 목을 문지르며 욕지거릴 뇌까렸다.

    “이것들은 뻑하면 목을 졸라. 개새끼들….”

    “나 말고, 또 누가 네 목을 졸랐지?”

    줄리오 파렌티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키릴의 뒤에 서서 샴페인을 음미하는 그가 보였다.

    키릴은 귀찮게 됐다는 표정으로 돌아서며 줄리오의 어깨를 밀었다.

    “표정이 볼만하군, 쿠즈민. 근데 왜 내 경고를 무시했지?”

    “죽일 수 있었어. 네 파트너라 살려둔 것뿐이야.”

    “그 전에 네가 죽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키릴의 복부를 턱 끝으로 가리킨다. 키릴의 셔츠 하단은 이미 배어 나온 피로 젖어 드는 중이었다. 깊지는 않아도 제법 넓게 베인 건지, 뒤늦은 통증에 키릴의 얼굴이 구겨진다.

    “씹….”

    “쿠즈민.”

    순간, 키릴의 턱 아래 총구가 닿았다. 바닥으로 떨어트린 샴페인 잔이 산산이 부서지더니 구둣발에 밟혀 가루가 되었다. 키릴은 손을 어깨높이로 올리곤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줄리오 파렌티의 시선은 일견 담담해 보였지만, 그 안에 든 기묘한 일렁임은 칼날처럼 서늘했다.

    출렁일 때마다 피부를 베는 듯한 눈빛에 키릴 쿠즈민이 짧게 혀를 찼다.

    “이거… 재밌네.”

    “하얀 턱시도를 입은 관계로, 여기까지만 하지. 하지만 다음은 없어.”

    “그러잖아도 저 여자 때문에 손등뼈가 아작났어. 피해자는 나라고.”

    그제야 줄리오는 키릴의 턱에 댔던 총구를 회수했다.

    키릴이 복부를 감싼 채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하나는 그대로 벽에 기대어 양손으로 눈두덩을 눌렀다.

    “놓쳤어.”

    “누구를.”

    다가온 그가 손을 잡아 내린다. 하나는 힘없이 남자의 가슴팍에 이마를 탁 기댔다.

    “게빈 스미스.”

    “여기에서 봤나?”

    “응. 그리고… 이곳에 있는 강무진은 가짜래. 네 전 여자친구가 말해 줬어.”

    줄리오는 그녀의 턱을 잡아 가볍게 들었다. 고개가 젖혀지며 빨개진 목이 보인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붉어진 부위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빨개졌군.”

    기분이 묘하고 등골이 오싹하다. 키릴 쿠즈민의 공격에도 겁먹지 않았던 이유는 어쩌면….

    “네가 늦어서 그래. 나쁜 새끼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