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 (89/180)

<29>

노란 간접 조명등 아래 서서 플립폰을 열었다. 지난번 도착한 메시지를 끝으로, 두이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하나는 고민했다. 이 신호를 추적한다면, 어쩌면 두이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혹여라도 중간에 추적 중인 것이 들통난다면, 그나마 부지하던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두이를 믿어 보기로 했다.

이두이는 저 못지않게 유능한 요원이었다. 절대로 쉽게 목숨을 잃을 리 없다. 절대….

하나는 거울 속 제 모습을 들여다보며 가져온 드레스에 몸을 넣었다. 가슴과 허리, 골반은 몸에 딱 붙지만 그 아래 슬릿이 길게 들어가 움직이기 편한 디자인이었다. 그것도 줄리오 파렌티가 직접 골라준 것으로, 무기를 숨기기에도 안성맞춤인 모양이었다.

하나는 익숙하게 머릴 풀고 준비된 드라이기로 컬을 넣었다. 모두 그간의 첩보 활동을 하며 배운 것이었다. 자신을 화려한 공작새처럼 치장하는 것. 반짝이는 보석과 외모를 무기로 휘두르며, 타깃이 가진 정보를 빼돌리는 게 그녀의 임무였다.

찰나, 지퍼를 올리지 않아 훤히 드러난 등에 남자의 입술이 닿는다. 하나는 머리를 올려 묶다 말고 고개를 틀었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를 뽐내는 호텔의 클로젯.

어느새 턱시도로 갈아입은 줄리오가 그녀의 등에 키스 마크를 남기며 피식 웃는다.

반면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대체 왜 방을 같이 써야 하는지 모르겠네. 썩 좋은 생각은 아닌 거 같은데.”

“네가 내 파트너니까 당연히 같은 방을 써야지. 보는 눈이 많아.”

“누가 봐. 그쪽이야말로 행사장에 가면 엄청난 사람들이 들러붙을 판인데. 내가 방에 있으면 방해되지 않겠어?”

“괜찮아. 난 누가 보고 있을 때 즐기는 것도 좋아해서.”

“관음증 환자 새끼 같으니.”

그는 큭큭거리며 웃음을 참았다. 가끔 독설을 날려 줄 때마다 줄리오는 이렇듯 천진하게 웃었다.

뭐 하는 놈인지. 혹시 마조히스트 아닐까? 이런 모습을 보면 사디스트라는 소문은 잘못된 걸지도 모른다.

“지퍼나 올려 줘.”

하나의 말에 줄리오는 순순히 등 쪽에 난 지퍼를 끌어 올렸다. 그러더니 이번엔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슬릿을 걷고 들어온 손이 속옷 위를 뭉개듯 어루만진다.

하나는 립스틱을 바르다 말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흥분한 상태로 들어가는 게 좋아. 놈들이 다 널 보면, 더 좋고.”

“왜?”

“원래 이런 판에선, 먹이사슬 꼭대기에 있다고 착각하는 놈이 제일 먼저 움직이는 법이거든.”

“강무진이 직접 나를 찾아올 거라는 소린가?”

“비슷해.”

이번에는 속옷을 걷고 들어온 손가락이 미끄러워지기 시작한 음핵을 덧그렸다. 하나는 고개를 젖혀 그의 어깨에 머릴 기댔다.

사실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흥분하고 나면 긴장이 풀리기도 했고, 남자의 말대로 없던 자신감이 차오르기도 했으니까.

도톰하게 부푼 음핵을 문지르는 감각에 발가락 끝이 곱아든다. 아래가 움찔거리며 조여들었다가 풀어지길 반복했다. 이어 그녀의 엉덩이 위로 팬츠 아래 짓눌린 남자의 성기가 느껴졌다. 하나는 손을 뒤로 빼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를 문질렀다. 지퍼를 내리고 드로어즈의 틈새로 파고들자 뜨겁고 미끄러운 살결이 만져진다.

“흣…. 더 빨리.”

그녀는 다리를 오므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자 배를 감싼 그가 손을 더욱 아래로 움직이더니, 젖은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쑥 넣었다.

“하아….”

하나는 남자의 손가락을 꽉 조였다. 그러자 그녀의 귓바퀴를 깨문 그가 키득 웃으며 손을 뺀다.

애매하게 흥분한 상태로 하나는 실소를 흘렸다. 여전히 발기한 주제에, 단번에 손을 떼어 내곤 바지를 다시 입는다.

“힘들지 않아? 그거… 엄청 섰는데.”

“나중에 풀면 돼.”

“그게 돼?”

“돼.”

그녀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흘기며 화장을 마무리하는 사이, 어느덧 멀끔해진 그가 알약을 가져와 물과 함께 내려놓았다.

“항생제와 진통제. 그리고 절대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 약속하지 않으면, 행사장엔 못 들어가.”

“…왜?”

“그곳엔 One의 적이 많거든. 아마 너, 죽을지도.”

“아아…. 뭐, 어쩔 수 없지.”

생긋 웃어 보인 그녀가 알약을 물과 함께 삼켰다. 그는 말없이 입가에 묻은 물기를 닦아준 뒤, 벨벳 케이스를 열었다.

그 안에는 무려 30종의 무기가 들어 있었는데, 머리핀부터 반지까지. 생각지 못한 액세서리들이 무기로 개조된 상태였다.

하나는 날카로운 칼날을 숨긴 머리핀 두 개를 꽂고, 수면제가 든 팔찌를 찼다. 착용한 목걸이에 든 건 무려 소형 폭탄이었다. 캡슐을 깨 껌처럼 벽에 붙이면 30초 후 폭발한다는 설명에 그녀는 혀를 내둘렀다.

그중에서도 제일 좋았던 건 허벅지에 숨길 수 있는 나이프였다. 그녀는 총도 두 자루를 숨겼다. 하나는 입구에서 반납하고, 다른 하나는 몰래 착용한 뒤 들어갈 것이다.

하나는 그 외에도 여러 무기로 전신을 감싼 후에야 치장을 마무리했다.

홍콩, 센트럴을 품은 야경이 창밖에 펼쳐지는 고층 호텔. 그 아래 무운해운의 선박이 보인다. 그것은 실제 운항 중인 배가 아니라 뭍에 전시한 가짜였다.

“분명 운항 중인 배라고 하지 않았어?”

“그건 내일. 오늘은 전야제쯤으로 해 두지.”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던 하나는 시가 연기에 돌아섰다. 막 불을 붙인 줄리오가 다가온다. 그녀는 시가를 끼운 그의 손목을 잡아 제 입술 가까이 붙였다.

“독할 텐데.”

“정신 차리려고.”

“뭐, 해 봐.”

살면서 처음으로 담배라는 것을 쭉 빨아 보았다. 메케하고 따끔한 연기가 목구멍을 찢는 기분이다. 쿨럭거리며 기침을 쏟아 내자 웃음을 참지 못한 그가 등을 두드려 주었다.

하나는 찔끔 흐른 눈물을 매단 채 다시금 창밖을 응시했다. 오늘을 기해, 무언가 분명 바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클러치 백을 든 그녀가 돌아서자, 립스틱 자국이 남은 시가를 입에 문 줄리오가 고개를 기울인다.

지독하게 근사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팔을 내밀었다.

“가지.”

***

검은 하늘 위로 화려한 불꽃이 쏘아졌다. 쏘아진 불꽃이 여러 모양을 만들어 낼 때마다 사람들의 감탄사가 더해진다. 모두 고개를 젖힌 채 불꽃놀이 감상에 여념이 없었다.

은성은 갑판 위를 천천히 걸었다. 아주 오랜만에 밟는 갑판. 바로 이거다. 레드오크 위에 찍힌 무운해운의 로고.

레드오크는 물에 취약해 선박에 잘 쓰이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이두이는 바닥 사진을 찍어 보낸 것일 테지만, 이하나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다.

은성은 곳곳에 배치된 발렌타인 데이의 용병들과 눈을 맞추었다. 그들의 임무는 자신을 보호하고, 다른 타깃에게서 이하나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곁을 지나 선미 끝에 선 은성은 자신의 대리인이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렸다.

오늘의 가짜는 허풍 떨길 좋아하고 항상 약에 취해있는…. 돈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한심한 놈이다. 그것도 SNS를 통해 손쉽게 구한 가짜. 세상엔 이해하기 힘든 별종이 많아, 이런 놈들을 구하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이윽고 크루즈의 입구가 열린다. 벌떼같이 몰려드는 초청객 사이사이,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그리고 유난히 시선을 사로잡는 무리를 발견한 유은성의 미간이 좁혀 든다.

그들은 러시아계 인물들로, 장세이를 주축으로 한 유리 페트로프의 무리였다. 은성은 뜻밖의 등장에 반색하며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유리 페트로프는 동양인 아내의 손을 잡고 있었다. 바로, 줄리오 파렌티의 빼앗긴 정부라 불리는 장세이다.

유은성도 두 사람과의 대면은 처음이었다. 자신이 있는 쪽을 훑는 눈빛에 은성의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누구라도 가짜 강무진을 죽이기만 해 준다면….’

이왕이면 줄리오 파렌티의 손에 죽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이하나가 죽이는 모습을 봐도 괜찮을 것 같다.

은성은 자연스럽고 매너 좋은 얼굴로 갑판에서 내려와 입구 쪽으로 향했다.

이제 곧 진짜 파티가 시작될 터.

로렌조와 로마노가 먼저 입장하더니, 이어 아시아계 거물들이 하나둘 들어선다. 그리고 웅성거림의 중심, 이하나와 줄리오 파렌티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천사 같다. 둘 다, 지옥에서 탈출한 천사처럼 당당하고 느긋한 걸음으로 행사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무기를 소지하실 수 없습니다.”

행사 안내원의 요청에 줄리오는 뒷주머니에서 총을 꺼냈고, 이하나는 머리핀 하나와 가슴골에 숨겨 둔 칼날. 그리고 허벅지에 꽂아 둔 총 중 하나를 내려놓았다.

안내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의 소지품에 번호를 붙였다.

“나가실 때 돌려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두 사람 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규모가 너무 큰데.”

하나는 사람들로 가득 찬 갑판을 둘러보았다.

“다들 궁금해하는군.”

“너무 쳐다보니까 표정 관리를 못 하겠어.”

“말했지. 흥분한 여자가 아름다운 건 당연한 거라고.”

“나, 멀쩡한데?”

“아니. 조금 전까지 섹스하다 나온 것 같아. 귀도, 뺨도 빨갛거든.”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시선들은 자신보단 줄리오 파렌티에게 더욱 집중된 양상을 띠었다. 하나는 그와 함께 걸음을 옮기며 바닥에 새겨진 문양을 살폈다.

정확하게 이두이가 보낸 것과 일치한다. 정말로 두이는 무운해운의 선박 안에 있다.

그럼, 이곳일까? 아니면 내일 정박한다는 다른 배일까.

하나는 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으로 바닥만 응시했다. 그러자 줄리오의 손이 그녀의 턱을 가볍게 감싸 들어 올린다. 돌연 눈앞에 나타난 그의 얼굴은 오늘따라 지독하게 근사해 보였다.

흥분요법이, 썩… 괜찮았을지도.

“정신 차려. 나를 봐야지, 어딜 보는 거야.”

“미안.”

“키스할까?”

“싫어.”

“그럼 말든지.”

하나는 입술을 잘끈 깨물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다 정면으로 시선을 돌릴 때였다. 눈부신 백금발과 숨 막히게 고혹적인 흑발. 말도 안 되는 조합의 남녀가 그녀를 바라보며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설마….’

저도 모르게 긴장한 나머지 줄리오의 팔을 힘주어 잡았다. 그 상태로 고개를 들자, 그 역시 그들을 발견한 듯 서서히 얼굴에서 미소를 지운다.

“로즈.”

순식간에 줄리오 파렌티의 벽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로즈라고 불린 여자가 줄리오를 향해 싱긋 웃더니, 옆에 있는 백금발 남자의 손을 꼭 붙든다.

“오랜만이에요, 줄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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