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 (87/180)
  • <27>

    [사진 받았나? 신기하리만큼 정보가 없던데…. 어디서 튀어나온 놈이지?]

    죽기 전까지 듣고 싶지 않았던 음성의 주인공은 유리 페트로프. 레드마피아인 페트로프 가문의 차남이자 DE:A의 선주이며, 페트로프사의 CFO였다.

    개인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유리 페트로프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해커다. 지구상의 모든 정보는 페트로프의 손안에서 움직인단 말이 있을 정도로, 외계인 실존설을 제외하곤 거의 모든 정보가 그의 프로세스에 저장되어 있었다.

    줄리오는 유리가 보내온 사진을 화면에 띄운 뒤 확대했다. 하지만 사진은 최근에 찍은 게 아닌지, 지나치게 흐려 대략적인 분위기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거지 같은 사진을 보내면 어쩌자는 거야.”

    [무진이라는 남자도 나 못지않은 그림자란 뜻이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후계 서열에 들지 못했던 것 같더군. 그러다 강무호가 물러나고 그 자리로 들어왔어. 그 당시의 사진인데, 공개 석상도 아니고 무영그룹에서도 필사적으로 숨기려 하고 있어.]

    유리는 이어 여섯 장의 사진을 차례로 전송했다. 그것은 모두 무운해운과 관련된 최측근 인물들로, 줄리오의 눈에는 비슷비슷하게 생긴 아시아 남성들의 집합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하나의 눈에는 다르게 보일 것이다. 어쩌면 제게는 보이지 않는 이들의 교집합이 그녀의 눈엔 보일지도.

    줄리오는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유리 페트로프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살짝 칭얼거리는 듯, 희미한 짜증이 섞인. 그에게 너무도 익숙한 음성이었다.

    줄리오는 담배를 내려놓고 노트북을 닫았다.

    “로즈의 입덧은?”

    [거의 끝났다고는 하는데, 사실 모르겠어.]

    “널 닮지 않았으면 좋겠군. 너보다 로즈를 닮는 편이 훨씬 사랑스러울 테니까.”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이제 그만 내 아내에게 관심 좀 꺼. 이런 식으로 나오면 더는 협조 못해, 파렌티.]

    “왜. 내 말투에 미련이라도 들러붙어 있나 보지?”

    [아니라고 할 셈인가? 이제 로즈는 네 소유물이 아니야. 엄연히 페트로프의 안주인이니, 마피아답게 예의를 갖추지그래.]

    줄리오는 고개를 젖힌 채 큭큭대며 웃었다. 그러다 마른세수를 했다.

    이 짜증은 유리 페트로프에게서 기인한 것일까? 아니면 페트로프마저 강무진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아내지 못해서?

    그것도 아니면, 잠시 프놈펜에 다녀오게 해 달라던 이하나가 세 시간째 연락 두절이어서 일지도 모른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자신은 지금 로렌조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거였다.

    [그런데… 옆에 이상한 게 붙어있더군. 너 말이야.]

    “나?”

    [그래. 발렌타인 데이의 One.]

    “아아, 이하나.”

    [이봐, 너 살아 있긴 한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데.]

    “뭐, 무사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살아 있긴 해.”

    [아쉽군. 네 장례식에 참석할 기회였는데. 어쨌든 그 여자, 위험해.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One은 카미유의 목을 딸뻔했고, 키릴을 한 달간 병원에 입원하게 만들었던 여자거든.]

    카미유는 페트로프 가의 장남이자 유리의 형이며, 키릴 쿠즈민은 유리 페트로프의 오른팔이자 전설적인 칼잡이였다.

    그런 무지막지한 놈들과 이하나가 만난 적이 있었다고? 거기다 눈엣가시 같은 키릴 쿠즈민이 병원 신세를 지게 만들었다라….

    줄리오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그녀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로렌조도 지옥 구경을 했어. 걱정 마. 지금은 같은 목적을 갖고 움직이는 동료니까.”

    [나는 걱정하지 않아. 단지, 네가 죽으면 잠시나마 로즈가 슬퍼할 거라서. 그 모습이 보기 싫은 것뿐이야.]

    빌어먹을, 레드마피아.

    [그리고 말인데, 그 파티. 내게도 초대장이 날아왔더군. 아마 새로운 영업을 하려는 것 같던데. 아니면 정중하게 인사를 하려는 걸지도.]

    “귀찮게 됐군.”

    [이쪽이야말로. 이왕이면 로즈에게 알은체는 하지 마. 태교에 안 좋으니까.]

    빈정대는 꼴을 보니 임신한 로즈로 인해 어지간히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았다. 줄리오는 즐거운 마음으로 페트로프의 짜증을 감상했다.

    [그리고 이건 경고도, 충고도 아니야. One은 적이 많아. 그녀가 공개 석상에 나타나는 건 처음이거든. 사람들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단 소리야. 그러니까… 잘 지켜. 죽지 않게.]

    그때였다. 창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로렌조의 외침이 들렸다.

    “의사를 데려와! 당장!”

    의사?

    줄리오는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 버린 뒤 몸을 일으켰다. 창문을 활짝 열자 차에서 내리는 이하나가 보인다. 길길이 날뛰는 로렌조의 뒤통수를 있는 힘껏 후려친 그녀가 버럭 소리쳤다.

    “시끄럽다고, 좀! 내가 알아서 한다고!”

    그러자 뒷머릴 감싼 로렌조가 억울하다는 듯 발을 구르더니, 불쑥 고개를 든다.

    줄리오와 로렌조의 시선이 정확하게 맞닿았다. 입술만 벙긋거리며 사색이 된 모습에 온몸의 털이 오싹하게 곤두선다.

    이하나가 다쳤다.

    ***

    “그냥 스친 거라고!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줄래? 지금 시간이 몇신데. 동네방네 나 다쳤다고 소문낼 거냐고!”

    “그러니까 의사를 불러야지! 네가 의사야? 오, 마이 갓. 이제 총 맞은 상처도 제 손으로 치료하겠다고 합니다, 주여.”

    “…미친놈아, 난 무교거든? 그리고 맞은 게 아니라 스친 거야. 그냥 열상이라고. 피는 금방 지혈돼.”

    “웃기지 마! 수혈 받아야 할 판인데!”

    “지금 시간이 몇신데 의사를 불러!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이러다 죽어!”

    지지 않고 바락바락 소리치는 로렌조의 행동에 하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요즘 들어 자꾸만 남자들이 제게 화를 내는 기분이다. 저 혼자만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 몰라도, 큰소리는 당분간 듣고 싶지 않았다.

    “구급상자나 보내. 항생제도.”

    방문을 벌컥 연 그녀는 따라 들어오려는 로렌조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인 후 있는 힘껏 문을 닫았다.

    쾅, 소릴 내며 닫힌 문이 작게 흔들린다. 곧 문밖에서 로렌조가 이탈리아어로 시끄럽게 욕을 했다. 이어 ‘그러다 네가 죽어도 장례 따윈 치러 주지 않겠다.’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하나는 밖이 조용해질 때까지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최태준이 도주했다.

    오늘 일은 일종의 시험이었다. 이대로 줄리오 파렌티의 손을 잡고 이곳을 떠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제게는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위한 확신이 필요했고, 그 답을 줄 사람은 최태준뿐이었다.

    하지만 완벽하게 배신당했다.

    최태준이 도망치지 않고 제게 매달린다면 한 번쯤 믿어 주려 했다. 한데 도망치란 말에, 놈은 3층 높이에서 그대로 뛰어내렸다.

    실소가 새어 나와 몸에 힘이 풀린다. 그제야 총알이 스친 자리가 화끈거리며 아파 오기 시작했다.

    셔츠와 모자를 벗고 마스크까지 내던진 그녀는 절뚝거리며 의자로 향했다. 축축하게 들러붙은 레깅스를 둘둘 말아 내리자, 한쪽 다리 전체가 피에 젖은 것이 보였다.

    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울컥거리며 검붉은 피가 솟아오른다. 하나는 양손으로 눈두덩을 누르며 상체를 숙였다.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어쨌든 두이는 무사하다. 최태준이 두이를 배신했대도, 제가 하필 마피아와 더럽게 엮였대도. 아직 둘 다 살아 있다.

    의자에 고인 피가 카펫 위로 뚝뚝 떨어져 스며든다. 곧 소리 없이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묵직한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졌다.

    비스듬히 고개를 들자, 구급상자를 든 줄리오 파렌티가 무심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하나는 손을 내밀었다.

    “내놔.”

    그는 말없이 테이블을 당겨 그 위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그러곤 상자에서 주사기를 꺼내 니들캡을 이로 당겨 뽑더니 병에 든 약을 옮겼다. 그녀의 팔을 잡은 남자는 정확하게 혈관을 찾아 바늘을 꽂았다.

    하나는 제 팔에 주사하는 그를 빤히 보며 투덜거렸다.

    “수면제는 아니었음 좋겠네.”

    “항생제야.”

    항생제를 몽땅 주사한 줄리오가 새 주사기를 꺼냈다. 이번엔 아예 약이 들어 있는 것으로, 바늘이 얇고 긴 걸 보니 국소 마취용 주사기인 것 같았다.

    “너도 피 흘리는 인간이군.”

    피범벅이 된 허벅지를 강하게 움켜쥔 그가 바늘을 꽂기 전 시선을 들었다. 하나는 극심한 통증에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태연하게 웃었다.

    “왜. 그럼 내가 괴물인 줄 알았어?”

    줄리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쩐지 상당히 가라앉은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다, 상처 주변을 따라 주사를 놓았다.

    통증은 금세 사라졌지만, 허벅지가 코끼리 다리가 된 것처럼 무겁다.

    그는 능숙하게 상처 부위에 알코올을 들이붓곤 지혈제를 뿌렸다. 이어 바셀린 드레싱을 올린 뒤, 붕대를 꺼내 둘둘 만다. 간호 장교들이 보여 주었던 깔끔한 처치와도 닮아 있어 마음 놓고 남자에게 상처를 맡겼다.

    그때 고정핀으로 붕대 끝을 말끔하게 정리한 그가 욕실로 가더니, 뜨거운 물에 적신 타월을 가져왔다.

    다리에 묻은 피를 닦으려나 싶어 상체를 의자 등받이에 기대자 다리를 벌린 남자가 의자를 확 당긴다.

    그 반동에 하나의 몸이 앞으로 훅 기울었다. 반사적으로 줄리오의 어깨를 움켜쥐자, 턱을 감싼 그가 뺨에 묻은 피를 닦아 주었다.

    “다른 새끼 흔적 묻히고 다니는 거, 기분 나쁘고 짜증 나.”

    “뭐라는 거야. 상대가 죽었을지도 몰라.”

    “무슨 상관이야. 죽은 새끼 흔적 묻히고 온 거면, 더 열 받는다고 해 두지.”

    “네 것만 묻힐까, 그럼?”

    피식 웃으며 흘린 말에 입가를 문지르던 그의 손이 멎었다. 하나는 부러 줄리오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그러자 남자의 눈빛이 어두워지고, 묘하게 날 선 기류가 흐른다.

    여기서 줄리오가 키스한다면 더욱 적극적으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태준이 배신했다는 걸 확인한 이상, 줄리오 파렌티는 제게 남은 유일한 동아줄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하나의 입술을 문지르며 고개를 기울였다.

    “네 동생 찾는 걸 도와줄 테니 마음에도 없는 짓 하지 마. 그리고 이두이를 찾으면, 바로 한국으로 꺼져.”

    숨이 포개졌다. 엄지로 이를 눌러 벌리며 깊게 혀를 밀어 넣은 그가 천천히 그녀의 목덜미를 감싸 쥔다.

    키스는 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나의 금 동아줄일까, 썩은 동아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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